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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이번 여행기-170화 (169/174)

170화

"풉! 야! 뭘 또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그래?"

"……."

"너, 설마 내가 진짜로 너 하나 때문에 이런 짓을 저지른 거라고 생각해? 야! 너 진심이야? 푸하하하하하하!"

놈이 한참이나 광소를 터뜨린 후.

다시 뚝.

"응, 너 맞아. 네가 제일 심했어."

X팔.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모두가 죽은 거야?

"그런데 다 너 때문만은 아니야."

놈이 고개를 돌려 엉망이 되어 버린, 아니 소림사의 흔적 자체가 사라진 공허한 곳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비걸개 녀석들 모두 날 무시했고. 비걸개 훈련생이 되기도 전에도 난 늘 무시를 당했어. X팔 놈들. 나만 그런 게 아니야. 아버지도, 어머니도. 시체 팔아 먹고사는 놈들이라며 욕하고, 무시하고, 멸시하고, 천대하고! X새끼들."

아! 머리가 깨질 것 같다.

"그리고 너."

"……."

"비걸개 수련 종료하던 날. 내가 분명 너보다 나이 많다고 했는데, 왜 나한테 끝까지 형이라고 안 불렀어?"

이 새끼.

매일 바보같이 웃기만 하던 놈이.

모든 걸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 날 죽여라.

내가 잘못했으니, 그냥 날 죽여.

더는… 더는 상관없는 사람들 죽이지 말고.

제발.

부탁이다.

"됐다. 솔직히 기대도 안 했다. 흥."

제발, 죽이라고.

"아! 맞다. 태한아, 너 그거 알아?"

죽이고 싶은데.

이 새끼를 갈기갈기 찢어서 죽이고 싶은데.

그럴 힘이 없다.

빌어먹을.

그냥, 그냥 날 좀 죽여 줬으면 좋겠다.

"걸일번하고 걸사번 말이야."

놈이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싱글벙글.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피가 바다와 같이 흐르는 이곳에서도 놈은 해맑게 웃을 수 있는 X새끼다.

"그때 말이야. 우리 비걸개 최종 시험 칠 때. 넌 행운석을 얻고, 나는 귀혼석을 얻었잖아."

차라리 그때 내가 귀혼석을 선택했더라면.

지난 일을 후회해야 아무 소용없다.

"그리고 최종 시험을 치렀잖아. 후공마 안두창, 그 새끼."

마음이… 아프다.

쓰리다.

그냥 빨리 죽고 싶다.

"그때 후공마 안두창이 걸삼십육번 죽이고, 걸일번하고 걸사번이 냅다 놈을 공격했는데, 큭큭큭. X신 같은 것들이 주제 파악도 못 하고. 큭큭. 그때 걸일번하고 걸사번 죽기 일보 직전이었잖아. 내가 그때 무슨 생각한 줄 알아?"

이 새끼는… 진짜 미친놈이다.

죽은 동료를 생각하며, 어찌 저렇게 웃을 수 있단 말인가?

"나 말이야. 큭큭. 후공마 안두창이 걸일번하고 걸사번 죽이면, 내 첫 번째 수하 불사괴로 만들 생각이었어. 너까지 포함해서 말이야. 큭큭. 아! 그런데 네가 갑자기 후공마 녀석을 물리치는데, 와! 나도 진짜 엄청나게 놀랐다."

X새끼.

"그날 밤 혼자 곰곰이 생각했지. 그리고 알았어. 아! 걸이번 이 새끼도 나랑 같은 걸 얻었구나. 행운석이 그냥 돌멩이가 아니라는 걸 난 그때 이미 알고 있었어. 너도 다녀왔지? 다른 차원."

이 새끼… 그때 이미 알고 있었구나.

"나도 다녀왔거든. 귀계, 저승 말이야. 그런데 넌 어디를 다녀온 거야? 볼 때마다 신기하게 변해 있더라. 말해 줘. 어딜 다녀왔는지. 계속 궁금했어."

난!

나는 왜!

아! 생각났다.

내가… 내가 말이다.

정말 바보 X신 천치다.

녀석은 분명, 분명하게 나에게 말해 줬었다.

그러니까 그때.

표호산에서.

놈이 근본도 없는 산적들에게 잡혔던 그때.

산적들을 물리치고 표호채를 불에 태우며 대화를 나눌 때 말이다.

그때 이런 대화도 나누었었다.

* * *

"옮겨, 무걸개로. 네가 원한다면 내가 직접 육 장로님을 만나서 부탁해 볼게."

"헤헤. 헤헤헤."

"웃지만 말고! 너 이러다 진짜 죽어! 죽는다고!"

다시 소리를 질렀다.

간절함에 지른 소리였다.

하지만 걸삼번 녀석은 여전히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적인다.

그러더니 하는 말이…….

"나 안 죽어."

"야!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야.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너도 알잖… 어?"

녀석이 뭔가 주섬주섬하더니 목에 걸린 목걸이를 꺼내 나를 향해 내밀었다.

"그… 그건?"

"귀혼석. 알지? 넌 행운석. 나는 귀혼석. 헤헤."

"그게 뭐?"

"비걸개 후보생 때 너도 들었잖아. 이 귀혼석은 지하의 혼령들이 보우하사, 귀혼석의 주인을 지켜 준다고."

"너, 너 설마 그걸 진짜로 믿는 거야?"

"봤잖아. 산적들이 나 안 죽이는 거."

"미친! 그건 네가 홀딱 벗고 춤추고 노래해서 그놈들이 살려 준 거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분명 귀혼석이 나를 돕는 것 같아. 죽지도 않고 다치지도 않았어. 물론 매일 몇 대씩은 맞았지만, 헤헤. 헤헤헤."

"애! 너… 휴우. 언제부터 이렇게 고집이 세진 거냐?"

* * *

난, 난 말이다.

사람들이 내 행운석을 안 믿었을 때 속으로 그들을 비웃었다.

그런데 정작!

나는 또 걸삼번 이 새끼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는 흘려 버렸다.

무시했었다.

귀혼석에 관해 놈이 하는 말을.

그냥 무시했었다.

내가… 미친놈이다.

"말해 줘. 넌 어느 차원을 다녀온 거야? 진짜로 궁금하다니까."

그냥, 이젠 정말 좀 죽여 줘라.

"말해 주면 내가 상 줄게. 특별상."

그냥 좀 죽이라고!

"너… 단문령하고 연주언, 담초희 보고 싶지 않아? 분명 그 여자들하고 혼인할 거라고 들었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 너 이 새끼 설마……?"

"어라? 욕하네? 또 무시하고, 욕하고, 윽박지르고 그러는 거야? 그럼 뭐, 나도 어쩔 수 없지. 네 한마디 욕이, 어떤 대가로 돌아오는 보여 주는 수밖에. 그 첫 번째 제물은, 네 예비 아내들이 될 테고."

"살아… 있어?"

놈이, 씩 웃는다.

하지만 대꾸하지 않는다.

"그녀들… 살아 있어, 백 형?"

놈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심지어 내 어깨에 손까지 척 하고 올리고는…….

"살짝 아쉽지만, 그래도 서열 정리가 조금은 되는 것 같군. 하하하. 하하하하!"

"답해 줘. 살아 있어?"

놈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이 형님이 말이다. 그래도 자비로운 분이시거든. 하하. 당연히 살려 놨지. 반야당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은 하나도 죽이지 않았어. 숭산 내려가면 아마 잠들어 있을… 멈춰!"

난 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있는 힘 없는 힘을 모두 끌어 산 아래로 내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놈이 곧장 나를 향해 고함을 질렀고.

아니, 내 어깨를 꽉 눌렀다.

난 다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형님 말씀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떠나는 건 예의가 아니지. 다시 말하지만, 그건 네가 날 무시하는 행동이고. 그 대가는 네가 무얼 상상하건 그 이상으로 돌아올 거야."

"미, 미안. 미안해, 백 형."

놈이… 또 웃는다.

더 만족스럽다는 웃음이다.

"아직 끝난 거 아니야. 궁금하다고 세 번째 묻는 거야. 말해. 넌 어느 차원을 다녀왔는지."

할 수 없다.

말하는 수밖에.

모두가 죽었지만, 그녀들만이라도 살리고 싶다.

살아 있는 그녀들만 확인하면, 난 죽을 테다.

"한 곳이 아니야."

"뭐? 너는 여러 곳을 차원 이동했어? 와! X팔. 행운석이 더 좋은 거야?"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놈이 또 웃는다.

놈은 알고 있다.

지금 나와 놈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그리고 그 차이는, 당연히 행운석과 귀혼석의 차이라는 것까지.

"말해. 어디 어디를 다녀왔는지. 솔직하게, 모두."

난 놈에게 긴 이야기를 해야 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서쪽으로 그 모습을 숨기고 있을 때야 내 이야기는 끝을 맺을 수 있었다.

"오우! 걸이번, 너 제법이다. 그런 곳도 있구나. 나중에 네가 다녀갔던 그 차원의 세계까지 다 내가 차지해야겠다."

무슨 소리지?

"그, 그게… 그게 무슨 말이야? 차지하다니?"

놈이 또 웃는다.

그런데 이번의 웃음은 조금 다르다.

소름이 돋는다.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 무서운 미소를 놈이 지었다.

"너, 바보 아니야?"

이제는 놈이 나에게 바보라고 한다.

어쩌면 난 정말 바보일지도 모르겠다.

"도토리국, 그러니까 그 난쟁이 세상에서 말해 줬다며? 건힐드라는 난쟁이가."

"무슨 말을……?"

"바보."

"……."

"아! 건힐드가 아니라, 그 인간으로 변신한 골드 드래곤 녀석이 말해 줬다고 했지?"

설마……?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군. 맞아. 내가 바로 갓 오브 언데드(God of undead)야. 죽지 않는 불사의 신."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큭큭큭. 아! 나도 생각났다. 멍청하긴. 난 왜 그게 너라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

"마왕 말이야. 그 절대 팔찌를 통해 도토리국 세상을 집어삼키려던 그 마왕 새끼."

뭐지?

이 새끼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갑자기 온몸이 떨려 온다.

"어느 날 누가 막 우리 귀계의 문을 두드리더라고. 봤더니, 마계에서 어떤 새끼가 우리 귀계로 넘어오려고 문을 두드리는 거였어."

차원 이동이.

나와 걸삼번 말고도 가능하다?

"딱 한 새끼밖에 없거든. 우리 귀계로 넘어올 놈이 말이야. 이건 사실 비밀인데. 나는 아직 귀계로밖에 넘어가지 못해. 다른 차원은 가 보지 못했어. 큭큭."

"……."

"그래도 문 정도는 열어 줄 수 있거든. 마왕이 문을 두드려서 열어 줬더니. 아! 참고로 마왕 그 새끼도 차원 이동은 마음대로 못 해. 아무튼 아니 글쎄 이 미친 새끼가 만신창이가 된 꼴로 씩씩거리며 오는 거야. 그래서 뭔 일이냐고 물었더니. 크하하하하! 1,000년 동안 준비했던 일이 물거품이 됐다며. 드래곤들한테 당했다고, 욕을 엄청나게 하는 거 있지. 하하! 불쌍한 새끼."

걸삼번 이 새끼… 뭐지?

마왕하고 친구라도 되는 거야?

"그때 그 새끼가 그러더라고. 이방인이 있었다고. 드래곤들을 도운 조력자. 멸종한 줄 알았던 인간이 한 명 있었다고. 없어야 할 존재인데, 왜 그놈이 거기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풉. 그게… 하하하! 그게 너였어! 푸하하하하! 와! 진심 개웃기다. 안 그래, 태한아? 하하하하!"

머리가 또 새하얘지는 순간이었다.

걸삼번 이 새끼가 지금 어느 경지에 있는지, 좀처럼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러더니 놈이 뚝 하고, 웃음을 끊었다.

"비밀 얘기 하나 해 줄까?"

"……?"

"마왕 그 새끼 말이야. 그 새끼는 내가 자기랑 같은 편인 줄 아는데. 큭큭큭. 언젠간 그 새끼도 불사괴로 만들어 버릴 거야. 내 쫄따구. 멋지지 않아, 태한아? 마계의 마왕을 내 수족으로 부릴 거라고. 푸하하하하하!"

다시 광소를 터뜨리는 걸삼번.

이 새끼, 지금 진심이다.

"아까 귀계의 문 열었던 거 봤지? 아직은 미약해. 아까 네가 본 귀계의 힘은, 100분의 1도 안 되는 거였어. 하지만 곧 완성할 거야. 차원 이동의 문을 완벽히 열면 귀계의 모든 힘을 이곳으로 끌어 올 수 있고. 뭐, 이곳 따위야 귀계의 문을 다 열 필요도 없고. 아무튼 여기 다 먹고. 네가 다녀왔다던 차원의 세계도 다 내가 먹어 버릴 거야. 큭큭. 마계도 먹고, 그래서 말이야."

"……?"

"나, 이미 귀계의 왕. 귀계의 신이 됐지만. 다시! 꼭! 모든 차원, 우주를 발아래에 두는 우주의 절대 신이 될 거야."

욕을 해야 했다.

속으로라도.

미친놈이라고.

정신이 나갔다고, 그렇게 속으로라도 욕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대신…….

소름이 돋았다.

두려웠고.

무서웠다.

"풉. 또 생각났다. 아! 하여간 너란 녀석은. 풉풉. 그거 알아?"

얘기하지 마.

듣고 싶지 않아.

더, 네 얘기를 더 들었다가는.

나 말이야.

정말로 미칠 것 같아.

"사실 나라고 순탄하지만은 않았어. 죽을 위기도 여러 번 겪고, 힘이 부족해서 포기하려고 했던 순간도 엄청나게 많았어. 그런데… 풉. 푸하하하하하!"

"……."

"그때 네가 대자연단을 보내 줬지 뭐야? 풉. 하하하! 크하하하하하! 얼마나 눈물 나게 고마웠는지. 모든 게 꽉 막혀서 포기하려던 순간. 이게 나의 한계다 싶어서 다 내려놓으려고 할 때, 네가 나에게 엄청난 힘을 줬어. 네가 보내 준 대자연단 덕분에 내가 귀계의 왕이 되고, 귀계의 신이 되고, 다시 오늘 보여 줬던 차원의 문을 열 수 있게 됐던 거야. 고마워, 태한아! 하하하하하!"

난.

나는!

죽어야 한다.

죽어서.

지옥에 가야 한다.

내가 놈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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