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놈을 치시오!"
숨이 막힐 것 같은 긴장감만이 흐르던 소림사의 대웅전.
갑작스레 사자후가 터졌다.
무림맹주가 내공을 모조리 끌어 올려 외친 것이다.
자리에 있던 무림 최고의 고수들.
기회만 노리고 있던 그들이.
무존이 몸을 날렸고.
동시에 불존이 주먹을 뻗었으며.
독선이 독강을 뿌렸다.
무당, 화산, 종남, 곤륜, 공동, 점창, 하북팽가, 황보세가, 제갈세가… 모두가!
검강과 도강, 창강과 권강, 수강, 장강.
자신의 절기를 일제히 놈에게 쏟아부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단 한 번의 충돌.
대웅전과 그 주변의 전각들, 땅, 나무, 바위, 아니 모든 것이 통으로 터져 숭산 밖으로까지 날아가 버렸다.
사라졌다.
자리에 있던 모든 것이.
곧바로 대웅전 밖에 있던 무력대와 수만 명에 달하는 무인들이 포위망을 더 촘촘히 집결했고.
폭발의 여운이 가신 자리.
불존, 무존, 왼쪽 어깨가 통째로 사라진 독선.
그리고 나.
이렇게 네 사람만이 살아 숨을 쉬……. 걸삼번이 그 중심에 처음의 모습 그대로 웃고 있다.
대웅전에 있던 나머지는 모두 죽었다.
시체도 찾아볼 수 없다.
"태한아."
경악의 도가니.
불존도, 무존도, 큰 상처를 입어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고통인 독선도.
이 상황을 좀처럼 현실로 받아들이기 힘들어 경악한 얼굴만 하고 있을 때.
또 대웅전을 포위한 수만 명의 고수들이 놀라워 꿈쩍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놈이.
걸삼번이 나를 보며 웃었다.
나를 부르며 그렇게 웃고 있었다.
"어때? 대단하지?"
너무 놀라서.
너무 두려워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대꾸할 말이 떠오르기는커녕,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죽을 거라는.
내가 곧, 모두가 곧 죽을 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더 대단한 거 보여 줄까? 헤헤."
놈이 오른쪽 발을 살짝 드는가 싶더니.
이내 그 발로 땅을, 쾅!
내리찍었다.
소림사의 땅이.
아니, 숭산 전체가.
쿠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숭산 전체가 들썩이며 지진이 일었고.
그 여파로 갈라진 땅을 통해서.
"쿠웨에에에에엑."
"크아아아아아아아앙."
좀비와 스켈레톤.
숫자를 셀 수 없다.
사방에서.
숭산 전체의 땅에서.
그것들이 흙을 헤집고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적은 하급 불사괴다! 두려워하지 마라! 불사괴들을 도륙하라!"
"와아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아아!"
무림인들이 함성을 지르며 불사괴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나, 거의 일방적인 싸움이다.
그런데 왜?
걸삼번이 웃는다.
웃고 있다.
여유롭다.
불존과 무존 그리고 독선.
세 사람은 품(品) 자의 형태로 걸삼번을 둘러싼 채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고 있다.
그럼에도 걸삼번은.
웃고 있다.
"멋있지? 헤헤."
놈이 계속 나만을 보며.
불존과 무존, 독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나를 보며 계속 웃는다.
그러더니 이내.
번쩍!
오른손을 하늘을 향해 치켜들었다.
곧…….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숭산 위의 하늘.
푸르디푸른 하늘에 갑자기 검은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대낮이 순식간에 칠흑과 같은 밤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이내.
쿠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쿠르르르르르르르르릉.
쾅쾅쾅!
콰콰콰콰콰콰쾅!
먹구름들 사이로 천둥 번개가 몰아치는가 싶더니.
아!
저거!
저거!
엿됐다.
여덟 개의 문.
하늘의 공간에 이승과 저승을 잇는 여덟 개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꾸에에에에에에에에엑!"
"꺄르르르르르르르르!"
"꾸아아아아아아악!"
검은 것들.
말을 탄 검은 기사가 귀계의 문을 통과해 뛰쳐나왔다.
검은 철퇴를 든 검은 괴수가 뛰쳐나왔다.
온몸이 검은 형체가 쌍검을 휘두르며 뛰쳐나왔다.
네발로 기어 나오는 검은 괴인도 있었고.
머리가 두 개나 달린 검은 형체가 석 장이 넘은 긴 검을 휘두르며 그곳을 뛰쳐나왔다.
하나하나, 최소 데몬 언데드의 힘을 지닌 귀신들이다.
"큭큭큭. 어때? 태한아! 멋지지 않아?"
걸삼번이 나를 보며 웃는다.
뒷짐을 지고, 여유롭게 또 즐겁게, 정말 기쁘게 웃는다.
녀석의 몸이 천천히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다.
열 장, 스무 장, 삼십 장, 더 높은 곳으로.
저 아득한 검은 하늘 위로 떠올라, 계속 웃으며, 또 뒷짐을 지며, 나를 보고 웃고 있다.
"더는 지체할 수 없습니다. 제가… 지옥에 가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함께 가시죠, 대사님."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무림의 절대자 3인.
불존, 무존, 독선이 하늘을 향해 몸을 날렸다.
초인의 힘.
절대적인 힘.
그것이 마치 셋이 하나고, 하나가 셋인 것처럼.
자신을 버리며.
모두를 위해 아낌없이 희생하며.
마지막 반격을 쏴 올렸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하늘 위에서 무지막지한 폭발이 일어났다.
검은 하늘이 순간 하얘지고, 붉어지고, 파래지고.
땅과 하늘 모든 것이 흔들리고 찢겼다.
하지만…….
걸삼번은 여전히 저 아득한 검은 하늘 위에 서서, 뒷짐을 지고, 미소를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고만 있다.
세 명의 절대자는 걸삼번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하늘을 향해 몸을 날린 세 사람은, 귀계의 문을 통해 뛰쳐나온 검은 것들에게 막혀 처절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고작 세 구다.
귀계의 문을 통해 뛰쳐나온 세 구의 검은 귀신이, 무림의 세 절대자를 꼼짝도 하지 못하게 막고 있다.
아니, 독선은 곧 죽을 것이다.
불존과 무존이 처음 대등한 싸움을 벌였지만, 그들 역시 시간이 지나며 밀리고 있다.
나머지 검은 귀신들은… 아!
사람들을…….
불사괴를 막기 위해 천하 곳곳에서 몰려든 무림인들을 마구잡이로 도륙하고 있다.
불사괴가 다시 무림인들을 도륙하고.
그 죽은 무림인들은 다시 불사괴가 되고.
"아버지… 아버지, 흑흑흑."
어느 젊은 무인의 울음소리가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아버지와 함께 소림사를 찾은 무인인 듯하다.
불사괴에게 죽어 불사괴가 된 아비가 자신을 죽이려 하자.
싸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려 버린 것이다.
내 눈에서도 눈물이 났다.
쏟아졌다.
하염없이 계속, 흐르고 흐르고 흘렀다.
"왜 울어? 이 멋진 광경을 보면서."
걸삼번이 내게 그 말을 하는 사이.
독선이 죽었다.
"어때? 말을 좀 해 봐, 태한아. 나야 나, 걸삼번 백둔. 네가 매일 바보라며 놀렸던 그 걸삼번이 이렇게 변했다고. 멋지지 않아? 하하하하!"
무존이 죽고.
불존이 곧 그 뒤를 따랐다.
검은 귀신들은 수만 명에 달하는 무림인들 사이로 뛰어들었고.
또 도륙.
학살.
다 죽이고 있다.
난, X신같이 울고만 있다.
죽고 싶다.
이건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그래.
죽을 때 죽더라도.
"휴우."
"뭐야? 갑자기 분위기가 변했는데?"
저 새끼는 죽이고 죽어야겠다.
문령아, 주언아, 초희야.
미안하다.
나 먼저 간다.
뚜두둑.
뚜두둑.
고개를 좌우로 꺾으니 뚜두둑 하는 소리가 났다.
신기하게도 마음을 정리하자 눈물이 뚝 하고 그쳤다.
하늘 위를 올려다봤다.
바보 새끼가 좋다고 웃고 있다.
그래, 새끼야.
웃을 수 있을 때 계속 웃어라.
난.
나는.
나는 말이다.
모든 것을 걸었다.
내 목숨까지도.
자연아, 나에게 힘을 줘.
위대한 드래곤들아, 나에게 힘을 줘.
칵뉴족의 전사들아, 나에게 용기를 줘.
소인국의 형제들아, 나에게 희망을 줘.
도토리국의 난쟁이들아!
미인국의 부인들!
나에게, 나에게!
저 악마를 죽일…….
우룡검을 뽑아 들고.
하늘을 향해.
놈을 향해.
이것이 진정 내가 낼 수 있는 힘이 맞을까 싶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엄청난 힘이.
말도 안 되는 힘이.
거짓말 같은 힘이.
내 몸 깊은 곳에서 용솟음쳤다.
순간.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나를 보며.
걸삼번도 웃음기를 지웠다.
인상을 구긴다.
놈도.
최선을 다하려는 모양이다.
됐다.
상관없다.
네가 최선을 다하건 말건.
오늘, 너나 나나 모두 죽는다.
"죽어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 * *
여긴 어디?
난 누구?
깨어났다.
죽었나?
살았나?
아!
행운석.
행운석이 발동한 건가?
눈을 뜰 힘이 없었다.
몸을 움직일 힘은 더더욱 없었다.
힘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충격이 더 컸다.
움직일 힘이 있어도, 움직이는 게 싫었다.
그냥, 그냥 누워 있었다.
"깼냐?"
목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젠장!
걸삼번 목소리다.
눈을 떴다.
상체만 일으켜 세워 앉았다.
고개를 돌리니.
핏빛 잿더미 속, 놈이 뒷짐을 지고 나를 보고 있다.
웃고 있다.
찢어발기고 싶다.
놈의 입을.
주위를 둘러봤다.
좀비들과 스켈레톤이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다.
검은 귀신들은 보이지 않는다.
산 사람은… 없다.
단문령과 연주언, 담초희… 모두 죽었나 보다.
상취개와 순화자, 속리자.
그 얄미운 노인네들도.
맹주도, 방주도, 모두 다.
죽었다.
산 사람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나만… 살았다.
신기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두렵지도 않고.
화도 나지 않고.
그냥 무덤덤했다.
멍하게 앉아 다 무너져 버린 소림사를 보고 있으니.
걸삼번이 내 옆에 다가와 앉았다.
왜 나만 살려 뒀지?
실컷 조롱한 다음에 죽이려는 걸까?
모르겠다.
그냥 빨리 죽여 줬으면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기억나?"
X새끼.
"그때 말이야. 표호산에서 내가 근본도 없는 산적들한테 잡혔을 때."
X새끼.
"네가 날 구해 줬잖아. 헤헤."
X새끼.
"그때 내가 했던 말도 기억해? 헤헤. 헤헤헤."
X새… 어?
그때 이 새끼가 분명… 아!
이 새끼가 분명 그때 그런 말을 했었다.
놈에게 비걸개를 그만두라고.
상취개 장로에게 말해서 무걸개 중에서도 안전한 자리를 알아봐 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놈은 끝까지 고집을 굽히지 않았고.
이런 대화를 나누었었다.
* * *
"너… 너 정말… 어휴. 나도 모르겠다. 대신! 너, 언제든 이 일이 적성에 안 맞는다 싶으면 곧바로 나한테 연통 넣어. 약속해! 내가 어떻게 해서든 괜찮은 무걸개 자리로 옮겨 줄 테니까."
"고마워. 헤헤. 정말 고마워, 태한아. 그리고 나도……."
"너도 뭐?"
"네가 이번에 나 살려 줬잖아."
"귀혼석이 살려 준 거라며?"
"에이. 그건 그거고. 네가 나랑 여인들 목숨 구해 준 거잖아. 그래서……."
"그래서 뭐?"
"언젠가 나도 꼭 너를 한 번 살려 줄 거라고. 진짜로. 꼭 약속."
"어이쿠, 퍽이나 그러겠다. 내 걱정은 말고, 항상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 괜히 신분 발각돼서 고문당하다가 죽지 말고. 알았어?"
"응, 알았어. 명심할게. 헤헤. 헤헤헤."
* * *
그때 이 새끼와 헤어지기 전에 분명 이런 대화를 나누었… 젠장할!
그래서 살려 주는 거야?
그냥 죽여라.
하나도 안 고맙다, X새끼야!
"고맙지? 헤헤. 고마워할 필요 없어. 네가 나를 한 번 구해 줬고, 난 약속을 했고, 그냥 그걸 지킨 거니까. 헤헤. 헤헤헤."
놈을 찢어 죽이지 못하는 나를 찢어발기고 싶다.
"그런데 그거 알아?"
"……."
"그 표호산 산적들, 불사괴로 만들려고 한창 실험 중이었는데, 네가 다 망쳐 놓은 거야. 아이고, 그것 때문에 시간을 얼마나 낭비했다고. 내가 얼마나 고생해서 성공 직전이었는데 말이야. 헤헤. 헤헤헤."
이 새끼… 미쳤다.
진짜 미쳤어.
화가 안 났는데, 또 화가 났다.
미칠 것 같은데, 또 무덤덤했다.
그냥 멍한데, 또 궁금한 게 있었다.
"왜지? 왜 이런 일을 저지르는 거지?"
내가 처음으로 입을 열어 놈에게 물었더니.
놈이 나를 보며 방끗 웃는다.
그러더니 뚝.
갑자기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정색을 한다.
정색한 얼굴로.
"너! 네가, 네가 나를 무시했잖아. 바보라고 놀리고. 윽박지르고, 소리 지르고. 언제나 아랫사람 대하듯 날 대했잖아.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비참했는지 알아? 그래서 다 죽인 거야. 너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