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언제나 그렇듯, 바보같이 헤헤거리며 웃는 걸삼번.
저 녀석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너무 놀라서, 정말 너무너무 놀라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머리가 순간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변해 버렸다.
"어? 괜찮아, 태한아? 내가 비걸개 계속한다고 고집부려서 화났어?"
저 새끼, 도대체 뭐야?
뭐냐고!
연기를 하는 건가?
몸에서… 놈의 몸에서 아무런 기운도 느낄 수 없다.
실버 드래곤 히포네우스가 만들어 준 내 육체도.
레드 드래곤 오니푸네의 갈비뼈로 만든 우룡검도.
자연과 하나가 된 나의 기운마저도.
놈에게서 아무것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태한아, 정말 괜찮은 거야?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면 나한테 정말 화난 거야?"
놈이 다가온다.
아무렇지도 않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렇게 나에게 다가온다.
위험하다.
"오지 마!"
난 손까지 뻗고, 다시 두 걸음이나 물러나며 그리 외쳤다.
거의 본능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그러자 화들짝 놀라 녀석도 두 걸음이나 물러난다.
그러더니 하는 말이…….
"아! 미안. 너… 헤헤, 냄새나는 거 싫어하지? 미안. 헤헤. 헤헤헤."
다시 머리를 긁적이며 바보 같은 웃음을 짓는 녀석.
머리를 긁어 대자 비듬이 날린다.
뭐냐고?
도대체 뭐냐고!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죽여야 하나?
내가 할 수 있을까?
아니, 놈이 맞긴 맞나?
저 바보 같은 웃음은, 그냥 걸삼번인데.
아! X팔.
나태한!
정신 차려!
넌 비걸개야!
"어, 어떻게… 여긴 어떻게 왔어?"
"응? 헤헤. 그게……. 헤헤. 헤헤헤."
녀석은… 아!
녀석은 그냥 걸삼번이다.
불사괴의 원흉이고 뭐고가 아닌, 그냥 걸삼번 그 자체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느낌은 그런데.
젠장!
뭐야!
뭐냐고!
"헤헤. 그게… 이번 임무로 복건에 갔거든. 검각 알지? 엄청 유명한 데로 갔어. 헤헤."
"……?"
"왜구의 해적들이 침입했다고 해서. 잔뜩 긴장하고 갔지 뭐야. 헤헤. 헤헤헤."
"싸웠어? 해적이랑?"
조심스레, 놈의 작은 표정까지 놓치지 않으려 세심하게 관찰하며 물었다.
"아니. 내 임무는 헤헤, 해적 때문에 피난을 간 사람들을 돕는 거였어."
"……."
"그런데 갔더니 이미 왜구의 해적들은 다 물러가고. 사람들도 다 자기 집 찾아서 갔지 뭐야. 헤헤.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헤헤. 헤헤헤."
"그, 그래서?"
"검각의 검객들이 불사괴와 싸우기 위해 소림사로 간다잖아. 그래서 나도 따라왔어. 화내지 마. 다 알아. 네가 장로님께 부탁해서 나한테 쉬운 임무만 맡기도록 했다는 거. 솔직히 고맙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을 수 있었어. 그런데 나도 개방의 방도잖아. 무인이고. 이번엔 나도 꼭 한 사람 몫을 하고 싶어. 화내지 마."
아!
X팔.
모르겠다.
놈이!
놈이 도대체 뭔지 너무 헷갈린다.
걸사번!
걸일번!
뭐야!
뭐냐고!
"태한아."
"응? 어, 왜?"
"근데 어디로 가야 해?"
"어?"
"나, 여기 온 거 보고하려면 최소 사결 비걸개 선배한테 말해야 할 텐데. 헤헤."
"아! 그거… 우리 개방은 지금 반야당에 묵고 있어. 저쪽. 거기 가면 방주님이랑 장로님들 그리고 방도들 다 있어."
"방주님이랑 장로님들도 계셔? 와! 신기하다. 나 방주님이랑 장로님들 처음 보는 거야. 헤헤."
"그, 그래. 그럼 가 봐."
"화… 안 내네?"
"일단 가. 다른 임무도 중요하니까 혹시 다른 임무 받는다고 실망하지 말고."
"응, 그럴게. 헤헤. 그래도 나도 꼭 싸우고 싶은데. 헤헤."
저 새끼… 진짜 도대체 뭐야!
"태한아, 그럼 이따가 봐. 나는 가서 도착한 거 보고할게. 헤헤."
그렇게 녀석이 반야당 쪽을 향해 갔다.
아니, 놈이 막 반야당 쪽을 가려다 걸음을 멈추었다.
난 다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뭐?
뭐 하려고 다시 몸을 돌려 나를 향하지?
"고마워. 헤헤."
"뭐, 뭐가?"
"대자연단."
"어? 아! 그거… 뭐, 됐어. 고맙다는 소리 듣자고 준 거 아니니까."
"아니야, 정말 고마워. 네가 대자연단을 보내 준 덕분에, 큰 도움이 됐어. 고마워, 태한아. 헤헤. 헤헤헤."
머리를 긁적이며 또 바보같이, 다시 쑥스럽게 웃는다.
비듬이 아까보다 더 날린다.
"나 진짜 가 볼게. 이따가 봐. 헤헤."
그렇게 놈이 진짜로 반야당을 향해 갔다.
놈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
털썩.
다리에 힘이 풀려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머리는 다시 새하얗게 변해 버렸고.
하지만 안 된다.
이러고 있을 수는 없다.
난 곧바로 대웅전을 향해 몸을 날렸다.
* * *
소림사 대웅전.
맹주, 불존, 무존, 독선, 소림사 방장, 개방 방주, 상취개, 순화자, 속리자를 비롯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대표해 소림에 온 사람들과 또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무림의 거성들이 모두 모였다.
무림 최고의 고수들이다.
그 수가 무려 50명이 넘는다.
대웅전 밖으로는 무림맹의 무적청룡대, 질풍백호대, 소림사의 사대금강과 백팔나한은 물론 천하의 내로라 하는 무력대가 겹에 겹에 다시 겹겹으로 포위한 상태다.
아니, 소림에 몰려든 천하의 고수들이 모두 대웅전을 중심으로 몰려 있었다.
하지만, 이런 엄청난 전력을 집중해 놓고도.
모두가 잔뜩 긴장한 모습들이다.
그리고 그러한 긴장을 뚫고, 한 사내가 대웅전으로 들어섰다.
걸삼번이다.
잔뜩 긴장한 얼굴의 녀석.
헤헤거리는 웃음은 찾아볼 수 없다.
"가운데로 와 서라."
우리 귀행개 방주가 녀석에게 명령했다.
쭈뼛쭈뼛.
잔뜩 긴장한 얼굴로, 쭈뼛거리며 또 자세를 한껏 낮춰 대웅전의 중심으로 와 서는 걸삼번.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눈알이 사정없이 굴러다니고 있다.
하지만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그런 놈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며 웃지 않았다.
오히려 놈보다 더 긴장한 무림의 기라성들이었다.
아! 그런데 말이다.
어쩌면 정말.
놈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놈에게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귀행개 방주가 물었다.
걸삼번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대답도 못 하고 고개를 아주 미세하게 가로젓기만 했다.
"내가 귀행개 방주다."
"아! 네. 방주님, 안녕하세요. 저는 비걸… 헙, 이건 비밀인데. 저는 백둔이라고 합니다."
어설프다.
모자라다.
원래의 걸삼번 모습이다.
정말 아닌 거였어?
그럼 걸사번과 걸일번은 왜 저 녀석을 흉수로 지목한 거였지?
진짜 흉수는 또 누구고?
아니,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조금 더, 정말 완벽하게 아니라고 할 때까지, 나도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
"여긴 어떻게 왔느냐?"
귀행개 방주가 물었다.
놈은 여전히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눈알만 마구 굴려 댈 뿐.
감히 대꾸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네, 이놈! 방주가 묻는데 어찌 대답하지 않는 것이냐?"
"앗! 죄, 죄송합니다. 저는… 저는… 죄송합니다."
연신 허리를 굽실굽실.
겁을 잔뜩 먹은 걸삼번이다.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녀석의 모습에.
하나둘, 긴 한숨을 내쉬는 자가 생겼고.
다시 혀를 차는 소리고 몇 곳에서 들렸다.
한심스러운 놈의 모습에 긴장을 풀어 버린 것이다.
"여긴 어떻게 왔냐고 물었다."
재차 이어지는 방주의 물음.
걸삼번은 계속 굽실거리고 또 눈알을 마구 굴리며, 다시 한없이 위축된 모습으로 답했다.
"저도… 다들 이곳에서 싸운다고 하기에, 저도 싸우려고… 저도 한 사람의 무인으로 인정받고 싶어서, 그래서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어요."
이젠 울먹이기까지 한다.
대웅전에 자리한 기라성들의 한숨이 더 길게 새어 나왔다.
몇몇은 이제 의자에 몸을 깊이 누이기까지 하였다.
어쩌면 정말 아닐 수도 있겠다.
녀석이… 미친.
걸삼번이 천하를 집어삼킬 음모를 꾸몄다니.
애초에 시작부터 잘못된 거였어.
"나무아미타불. 빈승은 원혜라고 합니다."
"헉! 허거걱! 불… 불존. 앗!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불존이 나섰고, 법명을 대자마자 걸삼번은 그가 불존임을 알아차렸다.
실태를 보였기에 다시금 허리를 마구 숙여 대며 사과까지 했다.
이를 지켜보는 모두의 표정이 더 일그러지는 순간이었다.
귀행개 방주마저 몸을 돌려 버렸다.
상취개와 순화자, 속리자까지 참담한 얼굴을 한 상태였다.
하지만 불존의 표정에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화가 없었다.
걸삼번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 그였다.
"나무아미타불. 혹시 빈승이 시주의 몸을 잠시 살펴도 되겠습니까?"
"제… 제 몸을요? 불존 대사께서요?"
얼마나 놀랐는지 뒷걸음질까지 치는 걸삼번.
그 모습에 이젠 대웅전의 모두가 혀를 차고 한심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
- 대사님, 방심하시면 안 됩니다.
- 고맙습니다, 나 대협.
혹시 몰라 전음을 보냈다.
불존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괜찮겠습니까, 시주?"
"영, 영광입니다. 불존 대사께서 비천한 거지의 몸을 직접 봐 주신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헤헤. 헤헤헤."
걸삼번이 허락하였고.
불존은 조심스레 그런 걸삼번에게 다가갔다.
기습이라도 하면.
불존이 위험하다.
- 무존 대협, 독선 대협! 지켜봐 주세요.
무존과 독선이 동시게 고개를 미세하게 끄덕였다.
그들 역시 한시도 걸삼번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
그렇게 불존이 걸삼번에게 다가갔고.
등을 돌렸던 방주도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또 이미 긴장의 끈을 놓고 있던 대웅전의 고수들 모두에게도 다시금 은은한 긴장감이 돌기 시작하였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불존이 걸삼번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감개무량해하는 걸삼번.
불존은 그런 걸삼번을 자비로운 미소와 함께 보며.
시간이 지났다.
세심히 살피고 또 살피는 불존이다.
1각이 지났고, 다시 1각이 지났다.
하지만 불존은 걸삼번의 손을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설마… 정말 뭐가 있나?
다시 한 식경이 더 흘러서야.
불존이 걸삼번의 손을 놓아주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모두는 숨소리까지 죽여 불존의 입에 집중하였다.
무존과 독선 역시 마찬가지였고.
불존은 천천히 걸어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걸삼번의 기습이나 그런 건 전혀 없었다.
그리고…….
불존의 입이 드디어 열렸다.
나 역시 최대한 긴장한 상태로 그의 입에 집중하였다.
"나무아미타불. 우리 모두 길을 잘못 들어섰습니다. 걸삼번 소협은 아닙니다."
"아……."
"이런."
"쯧쯧."
"시간만 낭비했군."
"도대체 뭐야?"
"이런 이런."
불존이 결론을 내렸고, 여기저기서 불만 섞인 음성이 터져 나왔다.
아무도 나를 탓하지 않았다.
걸삼번을 불사괴의 흉수로 지목한 게 나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 자체가 몇 명 없기 때문이다.
아마, 시간이 지나 이 사실이 밝혀진다면, 나는 엄청난 욕을 먹게 될 테다.
더불어 나 때문에 개방의 입장도 많이 곤란해질 게 분명하다.
그래도, 그래도 말이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걸삼번 녀석이.
저 바보 멍청이 녀석이 아니라서.
난 훗날 얼마나 많은 욕을 먹든 상관없이, 솔직히 기뻤다.
순박하고 착한 걸삼번이 계속 내 친구로 남을 수 있게 됐다는 사실 하나로 나는 감사해야 했다.
그렇게 모든 게 끝났다.
새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대웅전의 분위기는 처음과 완전히 달라졌고.
긴장감이 가득했던 자리는 허탈감과 투덜대는 노인네들의 목소리가 대신하였다.
당연히 곧바로 자리는 파하게 되었고.
대웅전에 몰려들었던 수십의 고수들이 그렇게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
아니, 막 떠나고 있었다.
"X신 같은 새끼들."
모두가 한마디씩 투덜거리며 대웅전을 나가고 있을 때.
"내 얘기 아직 안 끝났는데."
여전히 대웅전 한가운데에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던 걸삼번.
"이 새끼들도 나를 무시하네."
그가 속삭이듯, 혼잣말을 했다.
대웅전에 모여 있는 사람들.
아니, 이제 막 대웅전을 나서려는 사람들.
생김새도, 나이도, 사문도, 성격도, 익힌 무공도 모두 제각각이지만.
그들 모두 무림의 최정점에 서 있는 최고의 고수들이다.
걸삼번의 혼잣말을 못 들을 리 없다.
결국, 대웅전을 떠나려던 사람 모두의 걸음이 멈추었다.
"난 아직 내가 누구와 싸우러 왔다고 말하지 않았어."
싸늘함을 넘어 북해의 얼음장보다 더 차가운 공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50명이 넘는 최고의 고수들 모두 잔뜩 긴장한 상태로, 곧바로 출수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곧.
조금 전 걸삼번의 몸상태를 직접 확인했던 불존이, 참담함을 억누르는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나무아미타불. 걸삼번 백둔 소협께서는 누구와 싸우기 위해 이곳에 오신 것입니까?"
걸삼번이 웃는다.
불존을 똑바로 쳐다보며, 고개를 빳빳이 들고 웃었다.
오만하고, 광오하며, 광기 어린 웃음이 놈에게서……. 아! 놈에게서 흘러나왔다.
"나를 무시한 놈들과 싸우려고 왔어. 나를 무시한 새끼들을 모두 죽여서, 나도 한 명의 당당한 무인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 아니, 내가 천하제일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헤헤. 헤헤헤. 하하하하하! 그래서 말이야."
"……."
"오늘 너희 다 죽어 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