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167화 (166/174)

167화

"정, 정말요? 정말로 생각났어요?"

상취개가 여전히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때도 이렇게 술을 왕창 마셨어. 더 좋은 선물을 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에. 텅 빈 창고 앞에 홀로 앉아 화주를 벌컥벌컥. 그때는 정말 술을 많이 마셨다. 아! 술을 마시니 그 기억이 떠오르는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 술을 마실 걸 그랬어요. 괜히 술 안 마셔서 더 기억을 못 한 거잖아요. 그래서요? 그걸 어디에서 구한 건데요?"

"팔선문이다."

"팔선문이요? 그 말추 술사 녀석이 있는 그 팔선문이요?"

상취개가 멍한 상태지만 눈을 똥그랗게 뜨고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그렇게 나를 보며…….

"맞아, 그 팔선문. 팔선문의 술사라는 자가 나에게 귀혼석을 주었어."

"당장, 지금 당장 팔선문 사람들을 소림으로 불러야겠어요."

"아니다. 이미 모두 와 있다."

"움직이죠, 장로님. 우선 맹주님께 말씀드려서 긴급회의를 소집해야겠어요."

"그러자."

나와 상취개는 곧바로 신법을 펼쳐 소림 본산으로 향했다.

* * *

며칠 전 도착한 독선도 와 있고.

맹주, 불존, 무존, 우리 방주, 상취개, 순화자, 속리자가 자리에 모였다.

곧바로 팔선문의 문주와 장로 셋 그리고 말추 녀석까지 밀실로 들어왔다.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팔선문의 술사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내가…….

조심스럽게 귀혼석에 관해 물었다.

팔선문의 문주, 그의 입을 통해 귀혼석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팔선문은 무림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술법으로 한때 유명했던 모산파보다도 그 역사가 600년이 더 되었죠."

귀혼석에 관해서만 말하라고 하지 않았다.

우리는 잠자코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뿐이다.

"중원은 물론 새외에서까지 가장 뛰어나다는 술사 아홉 명이 모였습니다. 각 지역에서 그들은 술사가 아닌 신선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렇게 그들이 모여 만든 게 최초의 현문(玄門)이자 팔선문이었습니다."

"팔선문인데 왜 여덟 명이 아닌 아홉 명이죠?"

내가 물었다.

"아홉 명의 신선 중 귀선(鬼仙)은 나중에 빠졌기 때문이죠."

"귀선? 귀혼석과 연관된 자인가 보군요?"

문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원래의 이름은 팔선문이 아닌 구선문이었습니다. 아홉 명의 신선이 모였으니, 당연히 구선문이었죠. 생김새도 다르고 몇몇은 새외에서 왔기에 언어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술법도 제각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단 하나, 같은 것이 있다면 그들은 백성들을 위해 제사를 지내고, 귀신을 쫓는 술법을 부리며, 하늘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술사들이었습니다."

"귀선은 달랐군요."

문주가 다시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말했다.

"귀선이란 자만큼은 추구하는 방향이 달랐다고 전해집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 않고, 나쁜 귀신을 쫓는 술법이 아닌, 그는 귀신을 부리는 술법을 썼다고 하더군요."

"귀신을… 부려요?"

"귀신을 부려 인간에게 이롭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답니다. 아홉 명의 술사들이 워낙 제각각이었기에 그러려니 했고, 또 나름 귀선을 존중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귀신 소환술은 도를 넘기 시작했고, 그러다 싸움이 일어난 것이지요."

문주가 잠시 말을 멈춘 후 뒤에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는 말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문주의 눈빛을 받은 말추는 조심스레 들고 온 봇짐을 풀었다.

그곳에 정말 딱 봐도 1,000년은 되어 보이는 오래된 책자들이 몇 권 있었다.

말추가 그것을 문주 바로 앞으로 가져다 놓은 후 자리로 돌아갔다.

문주가 말을 이었다.

"고대 문자로 된 서적들입니다. 저희 팔선문의 역사가 담겼고, 귀혼석에 관한 이야기도 모두 이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알고 계셨군요?"

내 물음에 문주가 고개를 살며시 가로저으며 답했다.

"확신하지는 못했습니다. 불사괴가 출현한 후 강시술에 관한 기록부터 귀신 소환술까지 모든 기록을 뒤지다 발견했습니다. 혹시 몰라 무림맹으로 올 때 가지고 온 것인데, 대협들께서 이렇게 관심을 가지실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책자는 따로 볼 테니, 우선 문주님께서 직접 귀선과 귀혼석에 관해 계속 얘기해 주세요."

문주가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팔선과 귀선 사이에서 다툼이 일기 시작했고, 결국 귀선은 따돌림을 당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사람을 이롭게 하기 위해 귀신을 소환한다고 했던 그의 마음도 점차 증오와 분노로 바뀌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술법을 연구하는 동굴에 들어가 몇 년간 나오지 않았고, 그때 만들어 낸 것이 바로 귀혼석이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무슨 변화가 있었군요?"

"어느 날 귀계(鬼界, 귀신의 세계, 저승)의 문이 열렸고, 그 문을 통해 수백 마리의 잡귀들이 쏟아져 나왔다고 합니다."

"아!"

"어허!"

"이런, 이런!"

여기저기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소리가 잦아든 후에야 문주는 말을 이었다.

"다행히 최초에 만들어진 귀혼석의 위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나 봅니다. 기록에 반복적으로 귀신들에 관한 표현이 있는데, 모두 이를 잡귀라 기록해 놨습니다. 또 팔선들께서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잡귀들을 모두 소멸하고, 귀계로 돌려보냈다는 기록도 남겨져 있습니다."

"귀선은요?"

"팔선은 귀선을 그대로 뒀다가는 천하에 큰 재앙이 될 것이라 생각하여, 그를 잡아 가두려 했습니다. 하지만 귀선은 보란 듯 그들의 포위망을 벗어났습니다. 귀혼석을 들고서요."

"따로 남긴 말 같은 것은 없었나요?"

"귀신 소환술을 연구하던 그 동굴, 귀혼석을 만든 그곳에 그가 남긴 글귀가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귀혼석을 완성해 돌아와 천하를 발아래 두겠다.’라는 글귀가 말이죠."

평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미친놈이라고 욕지거리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귀신이 어떻고, 귀신을 소환해 어쩌고.

미친 소리 아니겠는가?

하지만 우린 불사괴를 직접 겪고 경험했다.

미친 소리로 치부해야 할 저 말들이, 우리의 심장을 떨게 만들고 있다.

밀실의 분위기가 한층 가라앉아 잠시간 아무도 입을 열 수 없었다.

"팔선문의 팔선들께서 도망간 귀선을 대비해 뭔가 준비하지 않으셨나요?"

팔선문의 문주가 씁쓸한 얼굴로 답했다.

"1,000년도 더 전에 있었던 일들입니다. 여기 몇 권의 책자가 남아 있는 것조차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지요. 배교에서 환법, 기문둔갑법, 술법 등으로 중원 무림을 침략하고, 다시 혈교와 강시문에서 강시를 만들어 천하를 혼란에 빠뜨리고, 모산파가 흥망성쇠를 수십 번 겪다가 결국 멸문하고. 다시 마교에서 몇 차례나 정마대전을 일으키고. 저희 팔선문이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귀혼석을 상대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이세요?"

"팔선들께서 남기신 일부 기록이 있고, 불사괴가 출현한 후 자체적으로 연구하여 낸 방법이 몇 있으나, 이것이 통할지는 저희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듣고 싶습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말씀해 주세요."

"결과적으로 우리가 싸워야 할 상대는 귀신입니다."

"그렇죠."

"귀신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몸에 빙의해야 물리적 힘을 발휘할 수 있지요."

"부동심(不動心)이군요?"

문주가 뭔가 벅찬 눈으로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 나태한 대협께서 전 무림인들에게 부동심을 말씀하셨을 때,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귀신을 상대로 싸우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핵심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부동심을 유지하면 제아무리 강력한 힘을 지닌 귀혼석이라고 하여도, 사람을 어쩌지는 못합니다."

문주가 다시 자리에 있는 모두와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처음 밀실로 들어오며 보였던 긴장의 빛은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식인 불사괴(좀비)나 해골 불사괴(스켈레톤)는 그 형태가 조금 바뀌었을 뿐, 큰 틀로 보아 1,000년 전부터 있었던 강시와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주술로 시체를 조종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식인 불사괴와 해골 불사괴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를 두려워하는 무인도 이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문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귀신 불사괴부터는 말이 좀 달라집니다."

"……."

"신성불사대전 당시 제가 직접 목격하였는데, 그들은 저승과 이승을 오가며 걸성 무치개 대협과 싸움을 벌였습니다."

"맞아요, 정확해요."

"귀계의 통로가 이미 열렸다는 뜻입니다."

"음……."

"인간 불사괴와 악령 불사괴. 절정이나 초절정의 고수, 이를 넘어 화경의 고수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은, 이미 귀혼석이 귀계의 힘을 얻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죄송합니다. 그 해법은 저도 모릅니다. 다만……."

모두 문주의 입에 집중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나 대협께서 말씀하신 부동심을 유지하는 게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귀신은 인간의 욕심과 나약한 정신에 씨를 뿌리고, 또 그것을 자양분으로 자랍니다. 이를 미리 대비하면, 인간 불사괴나 악령 불사괴의 출현을 막을 수 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다.

천하의 모든 사람에게 성불하라는 말과 뭐가 다르겠는가.

하지만 팔선문의 문주를 탓할 수는 없다.

방법이 없긴 모두가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귀혼석을 파괴할 방법은 있을까요?"

사실 이 질문이 핵심이다.

자리에 있는 모두가 침 넘기는 소리까지 줄여 가며 팔선문주의 입에 집중했다.

"인세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정확히 말씀해 주세요."

"저도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팔선께서 기록한 몇 줄이 남았는데, 이를 토대로 유추한 결과 초월적 힘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그 초월적 힘이 어느 정도의 힘인지는 저도 정확히 알 수 없고, 감히 측량할 수도 없습니다."

분위기가 한없이 무겁다.

나도 그렇고, 팔선문주도 그렇고.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렇다.

난 천천히 고개를 돌려 불존, 무존, 독선을 바라보았다.

각기 자신들의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저들 모두 초인이다.

인세의 힘을 넘어선 초월적인 힘을 보유한 초인.

거기에 낭만개 아저씨와 무치개 장로까지 가세한다면.

어쩌면 귀혼석을 파괴할 수 있지 않을까?

현재로서는 그것을 기댈 수밖에 없다.

"나무아미타불. 제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가겠습니까. 때가 되면 빈승은 죽음을 피하지 않겠습니다."

"훗. 나도 살 만큼 살았지. 제자 녀석들에게 무황성을 물려줄 때도 됐고. 이 한 몸도 한번 불살라 보겠소."

"저는 진즉 당가의 가주직을 내려놓았습니다. 탈혼독 때문에 천하에 큰 폐를 끼쳤는데, 제가 직접 목숨으로 그 빚을 이번 기회에 갚겠습니다."

세 명의 절대자.

모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말이다.

무림의 기둥이자 절대자인 저들이, 정말 천하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더욱 내 마음을 끓어오르게 하였다.

* * *

소림사 전체에, 또 천하 각지에서.

때아닌 명상 열풍이 불었다.

부동심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불문과 도관에서는 기도와 수양을 쌓기 위한 무림인의 행렬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긴 줄을 만들어 냈다.

또 자신의 검과 도를 다듬으며, 다시 자신의 마음까지 다듬으며.

무림은…….

귀신들과의 일전을 조용히 준비하고 있다.

이 싸움의 마지막이 걸삼번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아는 자는 열 명도 채 되지 않는다.

모두 불사괴와의 마지막 싸움을 준비 중이다.

그렇게 모두가, 소림사에 몰려든 수만 명에 달하는 무인, 스님, 도사, 술사들까지.

조용히 출정 준비를 마무리해 가고 있다.

이제 곧, 떠날 것이다.

걸삼번이 있는 곳으로 모두가 떠날 것이다.

그곳에서, 마지막 싸움이 시작될……. 어?

저… 저 녀석이 왜 이곳에?

"헤헤. 걸이번. 아! 이름 불러야지. 헤헤. 태한아. 헤헤. 혹시나 했는데, 너도 소림사에 있었구나. 헤헤."

걸삼번이.

걸삼번 녀석이.

원래의 그 멍청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며.

저 녀석이 왜?

나를 보며 인사를 하는데.

왜?

늘 그랬듯 헤헤거리며.

바보같이 그렇게 웃으며.

녀석이 왜 여기에 와 있는 거야?

"잘 지냈어, 태한아? 헤헤. 헤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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