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161화 (160/174)

161화

교주는 안다.

낭만개 아저씨가 내 상태를 정확히 파악했듯.

구천마제 교주 역시 지금의 내 상태를 정확히 알고 있다.

나이 20세.

내공 천하제일.

외공 천하제일.

만독불침.

천하제일 검 장착.

환골탈태에 용의 기운까지 머금고 있음을 교주가 모를 리가 없다.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워낙 인간 자체가 광오한 인간이라 놀라지 않은 척하고 있다지만, 어찌 놀라지 않았겠는가?

어찌 탐나지 않겠는가?

불을 보듯 뻔히 미래의 천하제일인이 나인데.

심지어 "틀에서 벗어나라." 이 한마디.

아니, 정확히 그는 나에게 두 번 이 말을 전음으로 보냈다.

그리고 나는 이를 깨달았고, 한 단계 상승의 경지로 올라섰다.

모르긴 몰라도, 그때 교주는 기겁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닌가?

교주도 낭만개 아저씨처럼, 저 한마디를 듣고 바로 깨달음을 얻었을까?

뭐, 그럴 가능성이 높긴 하겠지.

하지만 평생 자기 말고, 그 말을 뱉자마자 깨달음을 얻는 사람을 본 적 있었을까?

본인을 제외하면 내가 처음일 것이다.

그래서 더!

그는 나를 욕심내는 거다.

이미 사기라고 할 정도의 엄청난 것들을 보유한 내가, 천재이기까지 하니 말이다.

하지만 틀렸다.

아니다.

교주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틀에서 벗어나라는, 교주의 말 때문에 얻은 깨달음이 아니다.

알지 않은가?

이미 한참 전 낭만개 아저씨가 나에게 나아가야 할 무도를 제시하며 알려 준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를 계속해서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깨달음을 구하고 있던 중이었고.

그게 그 다급하고 위험한 순간 기적처럼, 사실 거의 기적이다.

나에겐 오랜 노력에 기적까지 일어난 일인데, 교주는 그걸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천재라고 말이다.

당연히 미래의 천하제일인이 내가 될 것이라 더더욱 강하게 확신하게 되었을 테고.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딸을 나에게 시집보내려는 각오를 다지게 됐을 테다.

휴우.

지금의 내 상태는 내가 잘 안다.

초절정 초입.

교주의 도움이 마지막 역할을 한 덕분에 드디어 초절정의 벽을 부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마지막 역할이다.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올려놓은 정도의 수고다.

밥상은 낭만개 아저씨의 도움으로 오래전부터 내가 차린 것이고.

곤륜마선?

데몬 언데드?

다시 만나면?

응, 내가 죽는다.

당시의 곤륜마선은 이미 교주에게 얻어터질 대로 얻어터져, 정상이 아니었다.

아직 데몬 언데드는, 언감생심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데몬 언데드와 싸우려면, 정말 최소한 화경의 고수와 대등한 싸움 정도는 해야 할 텐데, 아직 멀었다.

됐다.

일단 교주의 오해부터 좀 풀자.

진짜 나를 보는 눈에서 별이 쏟아진다.

"오해가 있습니다. ‘틀에서 벗어나라.’라는 말은 낭만개 아저씨가 이미 오래전부터 제 무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며 알려 줬던 말입니다. 전 그를 수도 없이 고민하던 중이었고요."

어라?

실망할 줄 알았는데, 아니다.

조금도 실망한 얼굴이 아니고, 여전히 나를 보는 눈에서는 별이 쏟아지고 입꼬리는 귀에 걸려 있고.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럴 줄 알았다."

뭐야?

알고 있었어?

음, 그래도 내가 욕심나긴 하겠지.

미래의 천하제일인이 되는 것에는 변함이 없을 테니.

"본좌의 제안이 억지라고 생각하느냐?"

"소신녀요?"

그가 대답 대신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그건 아닌데……."

"천하를 구하는 일이다. 본좌의 천하가 아니라 너와 정파인들의 천하. 고작 열일곱 살 소녀 한 명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구경 좀 시켜 주면 천하를 구해 주겠다는데, 넌 어찌하여 그걸 고민하는 것이냐?"

사실… 교주 말이 맞다.

맞는 말이다.

이건 처음부터 고민하고 말 게 없다.

그게 교주의 계책에 당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아니, 최악의 경우 정말 소신녀를 내 아내로 맞이해… 큭큭.

아놔!

이건 천하를 구하기 위함이다.

"또 있다."

"네?"

"근데 너 방금 웃었냐?"

"아닌데요?"

"웃은 것 같은데?"

"아니에요. 뭔데요? 뭐가 또 있는데요?"

"흑조(黑雕, 검은 독수리)."

"흑조요? 그게 뭔데요?"

"본교의 영물이다. 한 시진에 천 리 길을 날 수 있는 독수리의 왕이 바로 흑조다. 그리고 흑조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본교에서도 몇 명이 없다. 그중 한 명이 본좌의 딸아이니라."

"아! 위급한 순간에 곧바로 연락을 취할 수 있겠네요. 혹시 지금 제가 흑조를 만나 볼 수 있을까요?"

"그건 안 된다."

단호한 교주의 말.

왜일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왜 안 되죠?"

"그 새끼… 어험, 흑조는 본좌의 말을 따르지 않거든."

"아! 네, 네. 뭐, 네."

"딸아이에게 말하면 흑조를 보여 줄 것이다."

"네, 교주님."

"본좌의 제안을 수락한 것이냐?"

"고민하고 말 게 없잖아요. 어쩌면 천하제일인이신 교주님께서 천하를 구해 주신다는데요."

"‘어쩌면’은 빼라. 본좌가 천하제일인 맞다."

"네, 그건 뭐 나중에 우리 낭만개 아저씨 만나면 알겠죠."

"고얀 녀석."

교주와의 면담은 그렇게 정리되었다.

난 다시 빠르게 떠날 채비를 하였다.

* * *

내가 소신녀에게 물었다.

그녀와 함께 사람이 한 명 더 있었기 때문이다.

"이분은……."

"제 호위 무사예요."

30대 초반? 중반? 아니면 후반?

모르겠다.

제법 대단한 미녀인데, 그 기세와 분위기가 사뭇 대단하다.

초절정 끝자락의 여고수다.

원래라면 공석인 장로직에 도전해야 하는데, 특별히 교주의 명으로 소신녀를 호위해 중원행에 가기로 하였단다.

심상치 않은 여고수다.

별호부터 적안지옥선자(赤眼地獄仙子)다.

그런데 눈이 까맣고 하얗고 한데, 왜 적안(赤眼, 붉은 눈)이라는 별호가 붙은 거지?

이해가 안 가네.

뭐 그건 내가 알 바 아니고.

아무튼 명색이 소신녀를 데리고 중원으로 가는 길에 호위 무사가 없을 수도 없고.

달랑 한 명 딸려 보내는 걸 감사해야 할 처지다.

"저… 나 대협."

"응, 왜?"

"원치 않으시면 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따라가는 게 불편하시면, 아버지께는 제가 따로 말씀드릴게요."

"됐어. 이미 끝난 얘기야. 그리고 너 하나 더 데리고 간다고……."

난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내가 소신녀에게 말하는 도중, 적안지옥선자… 아! 별호 수정이다.

적안지옥마녀다.

마녀에게서 무지막지한 마기와 살기가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왜 별호에 ‘적안’이란 두 글자가 붙었는지도 알겠다.

기운을 끌어 올리자마자 눈이 새빨갛게 변해 버린다.

와! 살벌하군.

"소신녀께 함부로 말하면 혀를 잘라 개에게 주겠다."

내 반말 때문에 마녀가 저토록 화가 났나 보다.

에휴.

"적안선자님, 괜찮아요. 제 아버지를 구하시고 저를 구해 주신 은인이세요. 아버지께서도 나 대협께서 제게 편히 말씀하시는 것에 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어요."

"아! 네. 죄송합니다, 소신녀님."

참나.

사과를 나한테 해야지, 왜 쟤한테 해?

"그리고 나 대협께는 예의를 갖춰 주셨으면 해요. 부탁이에요, 적안선자님."

"명에 따르겠습니다, 소신녀님."

명에 따른다고 해 놓고,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죄송해요, 나 대협."

이번 사과는 마녀가 아니라 소신녀가 한 거고.

"괜찮아. 그리고 방금 말했듯, 너 한 명 데리고 간다고 크게 달라질 건 없어. 오히려 네 덕분에 위험한 상황이 도래하면 빠르게 신교에 연락도 취할 수 있고 다행이지. 맞다. 그 흑조라는 독수리 볼 수 있어?"

"네, 지금 보여 드릴까요?"

"응."

소신녀가 하늘을 향해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이잉!"

곧 엄청난.

거대한.

야수궁의 청안 녀석의 절반 정도 크기.

이게 실로 엄청난 크기다.

그 흑조라는 녀석이 무지막지한 속도로 하강해 우리 곁에 착지하였다.

슈이이이이이이이잉.

엄청난 모래바람이 일어나는 날갯짓이었다.

난 바람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녀석에게 다가갔고.

- 흑조야, 너 사람 말 알아들어?

- 정령이냐?

- 아니다. 인간이다.

- 너처럼 제대로 대화가 통하는 인간은 처음이구나. 정령으로 착각할 뻔했다.

- 나도 너처럼 똑 부러지게 말하는 독수리는 두 번째구나.

- 두 번째? 나보다 똑똑한 독수리는 없다.

- 그래, 딱 봐도 네가 더 똑똑한 것 같긴 하다.

- 똑똑한 것 말고도 나는 최고다.

- 그래, 그래 보인다. 우리 일 얘기 좀 하자.

- 일?

- 우린 중원으로 갈 거야. 그곳에서 위급한 일이 생기면 네가 도와줘야 해. 소신녀가 부를 거고. 그 상황을 이곳 신교에 빠르게 전해 줘야 해. 가능하겠어?

- 똑똑한 것 말고도 빠르기 역시 내가 최고다.

- 중원에서 부를 거라고. 네가 계속 지켜봐야 할 테고.

- 훗! 인간, 들어라. 오늘 아침은 천산의 멧돼지를 사냥해 먹었고. 어제 점심은 산동 앞바다의 문어로 해결했다. 나는 언제나 하늘에 있고. 내 시야는 소신녀의 머릿결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 너, 그냥 독수리 아니구나? 보통의 영물도 아니고.

- 이제야 제대로 나를 알아보는군. 나는 영물의 왕 흑조님이시다. 큭큭.

이 새끼도 상태가 좀 이상하다.

그냥 맞춰 줘야 했다.

아쉬운 건 나니까 말이다.

그렇게 흑조의 기분을 맞춰 주며 이런저런 대화를 조금 더 나눈 후.

쉬이이이이이이이이잉!

흑조는 거대한 바람을 일으키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담초희라고 해요."

"담초희? 그게 이름이야?"

"네, 나 대협. 초희라고… 불러 주세요."

"그래, 그렇게 부를게. 가자, 초희야. 중원으로."

* * *

여섯 필의 말이 쉴 새 없이 달렸다.

나와 단씨 삼 형제, 소신녀 담초희 그리고 적안지옥선자, 아니 적안마녀.

며칠을 달려 곤륜의 영역에 들어섰다.

난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초희야."

"네, 오빠."

천마신교를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냥 호칭을 오빠라고 하라 했다.

여섯 달이나 함께해야 하는데, 계속 대협 어쩌고 하면 불편할 것 같아 그리 부르라 했다.

며칠이 지났고 호칭도 오빠로 바꿨지만, 그녀는 여전히 조심스럽다.

온종일 말을 달려 피곤하기도 하고 지칠 법도 한데, 그녀는 단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내게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품위가 넘치고, 우아하고, 고상하며, 예의에 밝고.

무엇보다, 얘는 진짜 확실히 정상이다.

아! 흔들리면 안 되는데.

일 생각부터 하자.

"변용하는 건 어때?"

"네?"

"교주님 말 때문이 아니라, 내가 봐도 네가 좀 많이 미인이니까. 내가 중원에서 천하 4대 미녀 중 세 명을 봐서 잘 알아. 네 미모가 절대 그녀들 아래가 아니야. 이렇게 그냥 가면 아마 곤륜파에서는 몰라도, 나중에 이런저런 귀찮은 일이 많이 생길 것 같아서 말이지."

"면사를 쓸게요."

처음이다.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순종적으로 따르던 담초희다.

그런데 이번엔 조금 다르다.

난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녀에게 조금 더 깊은 속마음을 말해야 했다.

"실은… 네 미모도 미모인데 네 신분, 천마신교 교주님의 딸이라는 게 밝혀지면 좀 곤란한 상황이 올 수도 있잖아. 그래서 변용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말하는 거야."

그녀가 또.

평소라면 즉각 ‘네.’라고 대답하며 내 말을 따랐을 테다.

그런데 이번엔 아니다.

잠시 고심하는가 싶더니.

"오빠, 변용은 하지 않을래요."

"……?"

"신분도 숨기지 않을 거예요."

"아… 그게……."

"혹시라도 제 신분 때문에 오빠가 곤란한 일이 생긴다면, 제가 어떻게든 할게요. 다시 신교로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오빠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절대로 생기지 않게 할게요. 하지만 변용은 할 수 없어요. 제 신분도 숨길 수 없고요. 저는… 천마신교의 소신녀예요."

이런!

젠장!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다.

그녀의 신분은 단지 그녀 한 명의 신분이 아니다.

이는 천마신교 10만 교도들 전체의 존엄이다.

내가 이를 숨기라고 한 것이다.

멍청하긴…….

"미안. 내 생각이 짧았어."

"아니에요, 다 저를 위해 그렇게 말씀해 주신 거 알아요. 고마워요, 오빠."

얘가 말이다.

정상을 넘어.

얼굴도 예쁜 게 말이다.

말까지 예쁘게 한다.

"가자, 초희야."

"네, 오빠."

우리는 곤륜산을 올랐다.

이제 곧 알게 될 것이다.

걸삼번이 진짜 흉수인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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