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힘들 때마다 너를 생각하며 이겨 냈어. 이 일을 밝혀서 나도 멋진 비걸개가 됐다고 네게 말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돼 버렸네. 좋아했어, 너를. 진심으로."
그녀의 마지막 말은 또렷했다.
그래서 마지막 말이었다.
그녀는 더 말하지 못했고.
더 숨을 쉬지 못했고.
나를 보는 그녀의 눈은 초점을 잃었다.
‘나도 너처럼 훌륭한 거지가 돼서 방에 은혜를 갚고, 사부님께도 자랑스러운 제자가 될게.’
정식 비걸개가 되어 첫 번째 임무를 받아 떠나던 날.
그녀는 산비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내게 고백을 했다.
난 되지도 않는 멋진 거지니 뭐니 말하며 그녀의 고백을 거절했고.
그녀는 씩씩한 얼굴로 내 거절을 받아 주었다.
그녀는 정말 씩씩하게, 또 웃는 얼굴로 나와 헤어졌다.
그리고 나는!
빌어먹을 나는!
그녀를 불사괴의 원흉일 것이라 의심했다.
아니, 확신했다.
여전히 나를 좋아해 주는 그녀인데.
힘들 때마다, 위기를 겪을 때마다, 다시 이 어두운 지하 감옥에 갇혀 온갖 고문을 당할 때마다.
나를 생각했던 그녀인데.
X팔!
나는!
나는 말이다!
X새끼다.
* * *
하염없이 울었다.
축 늘어진 그녀를 안고, 나는 울고 또 울고.
너무 슬펐다.
정말, 너무나도 슬퍼 그렇게 울었다.
쿠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내가 한참을 울고 있을 때, 굉음을 내며 땅이 흔들렸다.
이미 무너져 버린 땅.
나와 홍설아가 있는 이 작은 공간만이 남은 전부다.
그리고 곧…….
흔들리던 땅 전체가 다시 커다란 굉음과 함께 움직였다.
나와 홍설아를 덮친 게 아니라, 땅이…….
주위의 모든 땅이 하늘로 송두리째 솟구치기 시작한 것이다.
기사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쿠구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대략 수백 장에 이르는 땅이, 대지에서 통째로 뜯겨 하늘로 솟구쳤다.
땅 전체가 대지에서 뜯겨 나가, 아! 이건 보고서도 뭐라 설명이 어렵다.
말이 안 된다.
거대한 땅의 덩어리는 계속하여 하늘로, 하늘로, 수십 장 위 높은 하늘로 치솟았고.
저 멀리 높은, 아득한 곳에 이르러서야 그 비상이 멈추었다.
나와 홍설아의 공간 위에 있던 땅 전체가 하늘로 날아가, 마치 하늘 위에 떠 있는 하나의 섬이 된 듯 보였다.
그리고 그 하늘 위의 섬 아래.
허공.
한 사내가 양팔을 하늘로 쭉 뻗어, 마치 그 하늘의 섬을 지탱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교주다.
구천마제.
"괜찮냐?"
허공에 뜬 상태로, 나를 내려다보며 무심한 듯 내뱉는 한 마디가 전부였다.
그런데 이것도 허공섭물(虛空攝物)이라고 말해야 하나?
모르겠다.
수백 장의 땅을 송두리째 뜯어 하늘로 보내는 걸 허공섭물이라고 표현해도 되는지.
구천마제 교주는 정말 사람이 맞을까?
어쩌면 천하제일인이, 낭만개 아저씨가 아닌 교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난 그렇게 걸일번 홍설아를 안고 땅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 * *
한 명!
한 명 더 있다!
걸사번 남궁무검 말고.
불사괴가 나타났던 모든 장소에 있었던 사람.
걸삼번이다.
젠장!
그걸 왜 이제야 깨달은 것인지.
상취개 장로와 나누었던 대화가… 하아!
빌어먹을!
그때 왜 그걸 그냥 하하 웃으며 넘긴 것인지.
그러니까 내가 상취개 장로와 무슨 대화를 나누었었냐 하면…….
‘걸일번하고 걸삼번은 잘 지내고 있어요? 바보… 그러니까 걸삼번 녀석, 아직 살아 있기는 해요?’
상취개가 피식 웃는다.
‘살아 있다. 그것도 아주 잘 살아 있어. 허허허.’
‘휴우, 다행이네요. 그 녀석 걱정 때문에 일이 손에 안 잡힌다니까요.’
‘걱정할 필요 없다. 네가 하는 걱정, 우리도 진즉 하고 있었고. 그래서 걸삼번에게는 항상 쉬운 임무만 맡기고 있다. 지난번 산적들한테 인질로 잡힌 후에는, 쉬운 임무라는 말도 창피할 정도의 임무만 시키고 있어.’
‘무슨 임무를 명령하셨는데요?’
‘지난번 감숙에서는 돼지 농장에서 탈출한 돼지 잡는 걸 도우라고 보냈고.’
‘그건 좀 심하지 않아요?’
‘아! 그 돼지 농장에서 우리 거지들에게 철마다 돼지고기 수백 근을 나눠 주거든. 누군가는 은혜를 갚아야 해서, 녀석을 보냈지.’
처음 불사괴가 출현한 장소가 바로 감숙이다.
감숙이었어, 바보 같으니라고!
‘뭐, 잘하셨네요. 그다음에는요?’
‘그다음에는 산서로 보냈고, 신창양가의 넷째 아들 혼례식의 비밀 경호를 맡겼다.’
‘무슨 습격 예고라도 있었어요?’
‘아니, 다른 곳은 몰라도, 산서 땅에서 누가 감히 신창양가의 넷째 아들을 건드리겠느냐? 하하. 가장 안전한 임무며, 잔칫집 음식도 실컷 먹으라고 보낸 거다.’
두 번째 불사괴가 출현한 곳은 산서다.
마흔세 구의 불사괴가 출현해 큰 인명 피해를 냈었다.
‘하하하. 푸하하하하! 또요, 또. 또 무슨 임무를 보냈어요?’
‘그다음은 호남. 동정십팔채의 교룡채 채주가 죽어서 조문을 보냈단다.’
‘제삿밥이 맛있죠.’
‘그렇지, 그게 의외의 별미지. 허허허.’
세 번째 불사괴가 출현한 곳이 바로 동정십팔채가 있는 호남이다.
인간 불사괴 한 구가 처음으로 출현한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아! 나태한아, 나태한아, 어리석은 나태한아!
어찌 너는 그걸 이제야 깨달은 것이냐!
걸사번과 걸일번이 모두 죽은 후에야!
X신 같은 놈아!
‘그다음은 또 어디로 보냈어요?’
‘항주 기루연합회에서 어린 배수들이(扒手, 소매치기) 조직을 이뤄 활개를 친다며 우리 개방에 도움을 요청했다. 기루에서 좀 많이 거지들에게 먹다 남은 음식을 나눠 주지 않겠느냐. 그래서 돕기로 했고, 기왕이면 생색 좀 내려고 비걸개 한 명을 보내 준다고 했지.’
‘풉. 크하하하하! 아놔! 제대로 생색내셨네요. 하하.’
‘그렇지. 비걸개를 보내 준다고 하니, 그날 기루 연합회에서 항주 개방 분타와 소분타들로 고기와 술을 수레에 실어 보내 줬다더구나. 하하.’
‘어? 잠깐! 항주면 신성교가 있는 곳이잖아요.’
‘걱정할 필요 없다. 걸삼번 그 녀석도 명줄만큼은 너 못지않게 끈질긴 놈이야. 운이 아주 좋아. 불사괴가 출몰하기 보름 전에 임무를 완수하고 다른 곳으로 떠났다.’
‘휴우, 다행이네요. 그래서 녀석이 배수 조직을 잡았나 봐요?’
‘웬걸. 큭큭. 신성교에서 싹쓸이했다더구나. 걸삼번 녀석은 수십 명이나 되는 어린 배수 중 한 명도 못 잡았고.’
‘하아! 녀석도 참. 그래도 그 녀석이 그렇게라도 잘 살고 있다니 다행이네요. 위험에 빠지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는데.’
그다음이 바로 절강 항주.
인간 불사괴 세 구와 악령 불사괴가 나타난 곳.
그리고 놈들이 나타나기 전, 신성불사대전이 발발하기 전, 걸삼번이 그곳을 다녀갔었다.
젠장!
빌어먹을!
돌겠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후회가 됐다.
멍청했던 내 자신이 미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지나간 일인 것을.
이제라도 깨달은 것에 감사해야 한다.
걸사번 남궁무검과 걸일번 홍설아의 희생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이제 확실해졌다.
흉수, 원흉은 걸삼번이다.
그 매일 헤헤거리며 바보같이 웃던.
내가 바보라고 무시하고 막 대했던 그놈.
그놈이… 아! 돌겠네.
두 가지만 확실하면 백이 아니라 천을 확신할 수 있다.
놈이, 곤륜파와 소림사를 다녀갔는지만 확인한다면.
만약 악령 불사괴였던 곤륜마선의 곤륜파를 다녀갔다면.
내가 천마신교를 오기 전에 소림사가 불사괴에게 습격당해서 불존과 무존이 서둘러 소림사로 향했다.
만약 걸삼번이 진짜 원흉이라면.
놈은 곤륜마선의 곤륜파와 소림사가 있는 하남에도 분명 다녀갔을 것이다.
이 두 가지만 확인을 끝낸다면, 놈은 백도 아니고 천도 아니고 그냥 흉수다.
아니.
사실 지금도 확신하고 있다.
걸사번과 걸일번 때와는 다르다.
놈이, 흉수 맞다.
아! 젠장.
또 생각났다.
걸삼번 백둔 이 새끼!
이 새끼 말이다!
술사 집안의 아들이다.
그것도 전문적으로 장례를 치르는 장례 술사 집안의 아들.
미친!
그게 왜 이제야 생각나는 것인지!
또!
빌어먹을!
또! 또! 생각났다.
걸삼번이 얻은 개방의 선물.
내가 행운석을 얻었던 그날!
걸사번은 제왕검(帝王劍)을.
걸일번은 석흑침(析黑針)을.
나는 행운석(幸運石)을.
그리고 걸삼번은… 귀혼석(鬼魂石)을 얻었다.
귀혼석이 그냥 돌멩이가 아니었나?
빌어먹을!
귀혼석도 행운석만큼이나 대단한 기물이었어?
아마.
아마도.
그럴 것이다.
비걸개 훈련생 시절, 걸삼번과 나는 무려 3년이나 계속하여 가족처럼 붙어 지냈다.
놈이, 그냥 그런 힘을 얻을 수는 없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행운석이 없었다면, 후공마 안두창을 마주친 날 그놈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었을 거다.
지금의 나는 없다.
그렇다면 놈도?
귀혼석이다.
귀혼석이 놈에게 힘을 준 것이다.
아! 귀혼석의 힘이… 내 추론이 모두 맞다면.
아니, 확실하다.
그리고 결론은…….
귀혼석의 힘이 결코 행운석의 아래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귀혼석은 그 이상의 힘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놈은 도대체 왜 이런 짓을 꾸미는 것이지?
아마 그건 놈을 만나 봐야 알 수 있을 테다.
귀혼석에 관해서도 자세히 알아봐야 하고.
일단…….
곤륜파로 빨리 가 봐야겠다.
곤륜마선을 악령 불사괴로 만들었다면, 분명 놈이 그곳을 다녀갔다는 뜻이다.
이것부터 확인해야겠다.
그런 후.
걸삼번을 죽여야 한다.
* * *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몸 상태가 엉망이었지만, 그걸 따질 여유 따위는 없다.
난 걸일번의 화장이 끝나자마자 이 모든 추론을 끝마쳤고, 곧바로 교주와 장로들에게 떠날 것을 고했다.
준비고 뭐고 그렇게 한창 전쟁의 수습을 하고 있는 그곳을 단씨 형제들과 떠나려 할 때였다.
아까 분명 인사를 했는데, 마뇌가 허겁지겁 나에게 달려왔다.
교주가 잠시 보자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려 교주전으로 향했고.
교주와 단둘이 대화를 하게 되었다.
"취소다."
"네? 뭐가요?"
"불사괴에 의해 중원이 위험에 처했을 때 도우러 간다는 말. 그거 취소라고."
음… 이 양반이 지금 무슨 꿍꿍이지?
표정은 좋아 보이는데.
아니, 내가 지금껏 봤던 중 제일 기분이 좋아 보이는 교주다.
그런데 왜?
"천마신교의 교주라는 지고한 자리에 앉으신 분께서, 한 입으로 두말하시는 건 좀 아니라고 보는데요?"
"애초에 전제가 틀렸다."
"그건 또 무슨 궤변입니까?"
"본좌가 중원을 도우러 간다는 전제 조건."
"그, 그게……!"
젠장!
빌어먹을!
"본좌는 분명 네 우룡검을 빌리는 조건으로 그리하겠다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본좌는 네 우룡검을 빌리지 않았다. 그러니 당시의 약속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이지. 안 그렇냐?"
아!
뭐?
왜?
어쩌라고?
한 대 칠 수도 없고.
"다른 조건……. 휴우, 그냥 교주님답게 말 돌리지 말고 그냥 말씀하세요. 뭐가 필요하신 건데요?"
그렇지 않아도 미세하게 웃고 있던 교주의 얼굴이 화색이 됐다.
"본좌의 딸."
불안하다.
엄청나게 불안한 예감이 나를 엄습해 왔다.
"소신녀가… 왜요?"
"중원으로 갈 거면, 본좌의 딸도 데리고 가라."
"혼인할 여인이 있다고 분명 말씀드렸습니다."
"누가 너더러 본좌의 딸과 혼인하라고 했느냐?"
"……?"
"그냥 몇 달, 그래 딱 반년. 여섯 달로 하자. 여섯 달만 중원을 데리고 다니며, 이곳저곳 구경도 시켜 주고 그래라. 그게 조건이다."
저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정말… 정말 그게 전부인가요?"
내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렇게 물었지만, 교주는 여전히 즐거워 보인다.
"그게 전부다."
"정말?"
"말이 짧구나. 혀를 뽑아 개에게 먹이로 주는 벌은, 본교에서는 흔하디흔한 형벌이다."
"정말요?"
"뭐가? 혀를 뽑아 개에게 먹이를 주는 벌?"
"아니요, 소신녀를 여섯 달만 중원 여행시켜 주면 되냐고요. 그게 정말 전부냐고요."
"그렇다. 본좌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음……."
뭐지?
이렇게 간단할 리가 없는데.
"단!"
그렇지.
내가 저럴 줄 알았어.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
"어험. 만에 하나!"
"……."
"만에 하나 말이다."
"말씀하세요. 이제부터 본론이잖아요."
또 씩 웃는다.
천하의 천마신교 교주가 저렇게 얄미울 수가 없다.
"만에 하나 네가 본좌의 딸과 뽀뽀… 어험, 그러니까 남녀 사이의 정을 통하게 된다면."
"통하게 된다면?"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평생."
당연한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책임지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저 양반이 노리는 게 바로 그거라는 거다.
그리고 만약.
이건 어떤 답변이 돌아올지 뻔히 예상되는 질문이었지만, 그냥 해 봤다.
"만약 책임을 지지 않으면요?"
"정! 마! 대! 전! 불사괴가 천하를 혼란에 빠뜨리기 전, 본좌가 친히 중원 무림을 지옥으로 만들어 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