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교주와 곤륜마선의 싸움을 보고 싶었다.
정말, 정말로 보고 싶었다.
내 무인으로서의 본능이 이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 본능보다 지금은 불사괴의 진실을 파헤치는 일이 더 중요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끄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아악!"
사방에서 병장기가 부딪히고, 검기와 검강이 빗발쳤다.
하늘에서는 교주와 곤륜마선이… 와! 곤륜마선도 허공에 떠 있다.
교주와 곤륜마선의 대치.
싸움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그 분위기만으로 모든 걸 압도한다.
보고 싶다.
하지만 난 몸을 숨겼다.
은형술을 극대로 펼쳐 싸움이 벌어지지 않은 곳을 찾아 빠르게 이동했다.
천마전으로 가야 한다.
그곳 지하 뇌옥에 걸일번이 있다.
왜?
만약 그녀가 정말 그곳에 있다면, 어쩌면 그녀가 흉수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가 그곳에 없다면?
두 가지다.
그녀가 정말 이번 불사괴 사건의 원흉이거나.
아니면 이미 죽었거나.
어쨌거나 살아 있길 바랐다.
그녀가 보고 싶다.
살아 있어라, 걸일번.
난 속으로 그렇게 같은 말을 되뇌며 계속해서 움직였다.
"쥐새끼 같은 놈. 한참을 찾았네. 클클클."
음, 내 앞길을 막았다.
인간 불사괴다.
"불마를 소멸한 놈이 젊다고 하더니, 과연 어린놈이구나. 클클클."
쉬이이이익!
놈이 나를 보며 기이한 웃음을 지을 때, 우룡검을 뽑아 휘둘렀다.
시간이 없었다.
기습이지만 최선을 다한 공격이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죽었… 젠장! 살았다.
심지어 멀쩡하다.
"불마에게 써먹은 방법이 내게도 통할 줄 알았더냐? 클클클."
강하다.
그냥 인간 불사괴 따위가 아니다.
역시 더 강한 인간 불사괴다.
마교의 고수를 인간 불사괴로 만들어 그런가?
아니면 불사괴를 만든 원흉의 능력이 더 강해졌나?
모르겠다.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다.
일단, 저놈부터 어떻게든 빨리 죽여야 한다.
"대가리를 아무리 굴려도, 내 손에 네가 죽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클클클. 어떻게 죽여 줄… 헙!"
쉬이이이이이익!
콰콰콰콰콰콰콰콰쾅!
아! X팔.
두 번째 기습도 먹히지 않았다.
"안 통한다니까, 어린놈의 새끼야!"
이번엔 놈이 나를 향해 몸을 날렸다.
마기와 시기(屍氣, 시체의 기운)가 뒤섞인 무지막지한 기운을 뿜어 대며, 반월의 기형도를 두 개나 휘두르며 오고 있다.
젠장!
빈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빠르고.
강하고.
왜지?
왜 내 눈에는 저놈이 완벽해 보이지?
일단, 막자.
경지가 딸리면 힘으로라도 막으면 된다.
우룡검을 뻗어 놈의 쌍월도를!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한 번의 충돌로 스무 장이나 뒤로 밀렸다.
단 한 번의 충돌이었으나, 놈은 나의 빈틈만 노려 집요하게 스무 번을 바꿔 가며 공격했다.
놈의 공격은 변화무쌍해 내가 좀처럼 예측할 수 없었고, 또 기형도만큼이나 기이한 방향과 곡선을 그리며 나를 괴롭혔다.
하아! X팔.
빨리 가야 하는데.
"샤이닝 라이트(Shining Light)!"
공격을 위한 움직임이 아니다.
놈이 쉴 틈도 없이 공격해 왔기에 피해야 했다.
하지만…….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뒤를 잡혔다.
왼쪽 어깨 뒤의 등 부분이 모두 찢겼다.
피가 난다.
내상도 입었다.
아! 짜증 나.
또 온다.
생각할 시간 따위를 줄 마음이 없나 보다.
당연히 그래야겠지만 말이다.
나도 어쩔 수 없다.
어떻게 될지 모를 상황이기에 힘을 아껴야 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블랙 스톰(Black Storm)!"
나를 향해 무지막지한 속도와 기세로 달려오던 놈의 발아래.
그 땅에서 검은 흙의 용오름이 치솟아 올랐다.
놈은 쉽게 이를 피했지만, 수십 장까지 치솟은 검은 흙의 용오름은 마치 살아 있는 실제 용이라도 된 것처럼 놈을 쫓아 단숨에 삼켜 버렸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일곱 마리의 흑룡이 놈을 연달아 집어삼켰고, 곧바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그런데…….
검은 용들은 모두 사라졌고.
"크하하하하하하! 어디서 배운 잡술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통하지 않는……."
"아이언 스노우(Iron Snow)!"
대기와 땅의 모든 금기(金氣).
그 기운이 순식간에 뭉쳤다.
이는 철(鐵)의 눈이 되었고.
곧 그 모든 철의 눈이 번개와 같이 놈에게로 날아갔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재차 무지막지한 폭발, 아까보다 훨씬 강력한 폭발이 수십 번이나 연달아 일어났다.
이 정도면 죽었겠지?
죽어야 하는데?
그런데 젠장!
놈이… 서 있다.
온몸에 구멍이 수십 군데나 뚫려 검은 피를 줄줄 흘리면서.
나를 보고 서 있는데.
"클클클. 클클. 안 죽어, 난. 클클클."
아! X팔.
눈물이 났다.
어쩌지?
대자연의 기운이 아무리 무한대로 내게 힘을 북돋아 준다지만, 또 내 외공이 천하제일이라지만.
번천복지(飜天覆地, 하늘과 땅을 뒤엎다)할 힘을 계속 쓰는 건 나에게도 무리다.
반대로 말하면.
그 무지막지한 힘을 저놈은 그냥 고스란히 다 몸으로 막아 버렸다는 뜻이고.
"쫄았냐? 클클클. 다시 간다!"
놈이, 아까보다 더 무시무시한 기운을 뿌리며 나를 덮쳐 왔다.
젠장!
일단 막아야 하는데.
벌써 몸이 찌릿찌릿.
내상은 더 심해지고.
피는 계속 나고.
심장은 벌렁벌렁하고.
그래도 다시 모은 기운을 끌어모아, 놈의 공격을…….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어라?
분명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는데?
왜 느낌이 없지?
폭발이 여운이 가시고.
퍽!
퍽!
퍽!
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퍽!
일 장로 혈우도마다.
혈우도마가 쓰러진 놈을 그냥 주먹으로 마구 때린다.
‘피떡이 된다.’라는 말이 뭔지 보았다.
실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람의 형상이었던 인간 불사괴가.
진짜로 떡이 되어, 무슨 반죽이 되었다.
아!
저게 가능하구나.
그러더니 혈우도마가 나를 쓱 돌아본다.
와! 저 할배.
무시무시한 건 알았는데, 정말 식겁하겠네.
"뭐, 뭐요?"
"이놈이 인간 불사괴 맞냐?"
"네."
"광혈도가 통하나 봐야… 아! 너무 때렸나? 그래도 해 봐야겠다."
자신의 등에 매달린 광혈도를 잡더니.
쉬이이익!
화르르르르르르르르.
피떡이었던 인간 불사괴가 곧바로 화르르 타 소멸하였다.
"오! 되잖아! 내 광혈도도 된다고! 크하하하하하! 다 죽었어! 나는 무적이다! 크하하하하하!"
이미 적들의 피로 온몸이 새빨간 혈우도마가 저렇게 광소를 터뜨리니, 더더욱 사람같이 안 느껴졌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더니.
나를 본다.
또 식겁했다.
같은 편인데 왜 저렇게 무섭나 싶다.
"그런데 넌 여기서 뭐 하냐? 천마전에 친구 만나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
"아! 네, 지금 가려고요."
"어! 그래, 어서 가. 여긴 다 끝나가니까."
"네."
다시 신법을 펼쳤다.
은형술을 펼칠 필요도 없었다.
혈우도마의 말처럼, 이미 승기는 기울었다.
남은 건 하나.
여전히 하늘에 대치 중인 교주와 곤륜마선이다.
그리고 내가 다시 신법을 펼치자마자.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내가 휘청일 정도의 엄청나 폭발이 하늘에서 연이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와 그들의 거리는 무려 수백 장.
그런데도 그 폭발의 충격이 나에게까지 미친 것이다.
나는 곧바로 몸의 중심을 잡고 계속 달렸다.
달리며 고개를 슬쩍 돌려 뒤의 하늘을 보는데.
와!
교주 말이다.
역시, 교주는 진짜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악령 불사괴를…….
쾅!
쾅!
쾅!
악령 불사괴의 멱살을 잡고.
쾅!
쾅!
쾅!
맨손으로, 아니 그냥 주먹으로.
쾅!
쾅!
쾅!
그냥 계속 냅다 때린다.
천마신검은 이미 교주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다.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곤륜마선에게서 천마신검부터 빼앗은 교주다.
그럼 그걸 쓰지.
왜 주먹을 쓰냐고!
그래도 계속.
쾅!
쾅!
쾅!
아놔!
이 동네는 좀 정상적인 사람 없나?
왜 다들 저 모양이야?
쾅!
쾅!
쾅!
교주의 주먹이 곤륜마선의 아구창을 가격할 때마다, 대기가 진동하고 폭발한다.
그래도 나름 엄청난 고수인 내가 작정하고 중심을 잡았음에도, 계속 휘청일 정도의 괴물 같은 충격이다.
곤륜마선, 열라 아프겠다.
됐다.
곤륜마선까지 교주가 처리할 것 같고.
난 빨리 천마전을 향해 달렸다.
천마전이 눈앞이다.
모두 싸움에 참여했는지, 지키는 무인 한 명 없… 음, 뭐지?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하늘 위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남과 동시에.
쉬이이이이이이이이잉!
무언가 무지막지한 것이 나를 향해 또 무지막지한 속도로 날아온다.
본능적 위기감에 뒤를 돌아보니.
"크하하하하하하하! 본좌는 무적이다! 크하하하하하!"
하늘에서는 교주가 광소를 터뜨리고 있고.
나에게 날아오는 건.
젠장!
곤륜마선이다.
교주가 한 방 강하게 때린 것 같은데.
놈이 하필 의식을 잃고 나에게로 떨어지는… 엇?
아니다.
놈이… 깨어 있다.
심지어 놈!
나를 보며 씩 웃는다.
일부러 교주에게 크게 한 방을 맞고 나에게 날아오는 것이다.
왜?
도대체 왜?
생각할 틈 따위는 없다.
난 곧바로 천마전으로 뛰어들었다.
걸일번이 갇힌 곳은 지하 뇌옥 가장 아래층.
지하 12층이다.
곧바로 지하로 통하는 계단으로 몸을 날렸고.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하늘에서 추락한 곤륜마선이 천마전과 충돌하며.
쿠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콰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천마전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난 더욱 속도를 높였다.
그런데 젠장!
"진즉 죽여야 했는데. 네놈 뜻대로는 안 된다!"
지하 3층을 막 지나서 지하 4층으로 내려가는데.
곤륜마선이 무지막지한 기운을 사방으로 뿌리며 무섭게 쫓아온다.
일부러 교주가 자신의 뒤를 잡지 못하게 지하 계단과 땅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며 나를 뒤쫓는 것이다.
나와 걸일번 모두를 죽일 작정이다.
자신이 죽는 한이 있어도 그러려는 것이다.
왜?
살인멸구인가?
내가 걸일번을 통해 무언가를 알아내지 못하게?
이를 달리 생각하면.
아! 걸일번이 살아 있다.
난 속도를 더 높여 지하로 달렸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지하 7층을 지나 8층으로 접어들 때.
곤륜마선의 뻗은 손이 내 뒷덜미를 잡을 듯 말 듯 가까워졌다.
폭발은 계속되고.
내 위의 지하는 모두 땅과 함께 함몰되었다.
지하 9층.
지하 10층.
놈이 내 앞길을 향해 장력을 쏘았다.
길이 막혔으나, 간신히 그걸 피했고.
쿠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땅 위에서도 엄청난 기운이 연이어 폭발하며, 이미 함몰된 땅들을 터뜨려 빠르게 내려오고 있다.
교주다.
하지만 무너져 내린 땅은 두텁고, 곤륜마선은 바로 뒤에 있고.
지하 11층.
이제 지하 12층으로 내려가기만 하면 되는데.
"끝이다, 쥐새끼."
놈이 결국 내 뒷덜미를 낚아채고, 오른손을 뻗어 내 심장을…….
- 틀에서 벗어나라.
교주의 전음이 들렸다.
낭만개 아저씨가 내게 해 주었던 말과 똑같은 말을, 이 긴박한 순간 교주가 보내 왔다.
어쩌라고?
휴우.
작동해라, 제발!
행운석아!
제발 작동하라고!
꿈쩍도 하지 않는다.
붉은 광채를 뿜는 곤륜마선의 우수가 내 심장을 관통하려는 그때까지도, 행운석은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젠장.
이대로 정말 죽는 것인가?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던 그때.
- 틀에서 벗어나라.
또 한 번, 교주의 전음이 내 귓가를……. 아니다.
내 머리가 아닌, 내 마음에 그의 음성이 들려 왔다.
그래, 해 보자.
난 우룡검을 뻗어 놈의 우수를 막았다.
아니, 막는 걸 넘어 우룡검을 놈에게 휘둘렀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좁디좁은 지하 뇌옥의 계단에서 수십 번, 수백 번의 폭발이 일어났다.
아! 이거였구나.
틀에서 벗어나라는 의미가.
샤이닝 라이트도.
블랙 스톰도.
아이언 스노우도.
낙백구검과 타구봉법까지.
그 모든 틀을 벗어나니, 놀랍게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보이는 곤륜마선의 얼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말도 안 된다는.
그런 얼굴로 놈은.
화르르르르르르.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하고 소멸하었다.
쿠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지상부터 지하 11층까지 모두 무너져 내렸다.
12층마저 무너져 내리고 있다.
나는 서둘러 지하 12층 뇌옥으로 향했고.
문은 이미 지각의 붕괴로 인해 일그러져 뜯겨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걸일번이다.
그녀가 살아 있는데.
살아만 있다.
고문을 당한 모양이다.
어디에 묶여 있지도 않고, 그냥 뇌옥 한가운데 힘을 잃어 축 늘어진 채로 쓰러져 있다.
"걸일번!"
난 서둘러 그녀에게 달려갔다.
그녀를 품에 안았지만, 쉬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대자연의 기운을 끌어다 그녀에게 주입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정말 내 한계를 넘어선 집중력으로 그녀의 아픈 곳을 살피고 보듬으며 치료했다.
하지만…….
어렵다.
그녀는 살아날 수 없다.
"쿨럭."
내 품에 안긴 채 검은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해 내는 그녀.
걸일번이 눈을 떴다.
회광반조(回光返照, 죽기 직전에 잠시 기운을 돌이키는 상태)다.
"걸, 걸일번."
내가 울먹이며 그녀를 부르자, 그녀가 힘겹게 미소를 짓는다.
"이름… 이름으로……. 쿨럭."
다시 검은 피를 토해 내는 그녀.
시간이 없다.
그녀는 이미 다른 세상으로 가고 있다.
"홍설아. 설아야."
이름을 불러 주자 더 환히 웃는 그녀.
마음이 아프다.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왜!
왜 그녀를 의심했는지, 내 뺨을 마구 때리고 싶었다.
"여긴 어떻게……?"
"미안, 미안해. 널 의심해서… 그래서 왔는데. 미안해. 정말 미안해, 설아야."
그녀는 괜찮다고.
차마 손을 들어서 날 어루만져 줄 수는 없지만, 따스한 눈빛으로 엉엉 우는 나를 위로해 주었다.
"걸사번 녀석이 뭔가를 착각했나 봐. 녀석도 죽었어. 그때 녀석이 마지막 전언으로 흉수에 관해 말해 줬었어. 말을 할 수 없는 상태라 땅에 글을 썼는데… 걸일(乞一)까지 쓰고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는데. 그래서 널 의심했어. 미안해, 설아야."
"여전… 여전하구나?"
"응? 나? 나야 뭐 항상 그렇지. 멋지고, 잘생기고. 하하."
눈물을 흘리며, 눈물을 마구 쏟으며 되지도 않는 농담을 해 봤다.
다행이다.
그녀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다.
그래서 더 미안했고, 눈물이 더 쏟아졌다.
"아니, 그거 말고."
그녀가 입가로 검은 피를 주르르 흘리며, 힘에 겨웠는지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멍청한 거."
"나? 맞아. 내가 좀 멍청하지. 하하. 미안해."
그녀가 또 힘겨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걸삼번이야. 걸사번은 네게 걸삼번(乞三番)을 써 주려고 하다가, 마지막 석 삼(三) 자에서 두 획(二)을 긋지 못하고……. 쿨럭."
무슨 말이지?
갑자기 머리가 띵했다.
다시 검은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해 낸 그녀가, 걸일번이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불사괴는… 걸삼번이… 걸삼번이 이 모든 일을……. 걸삼번을… 조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