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푸하하하! 어찌 그런 표정이냐? 본좌의 말에 너무 감격해 대답도 못 할 지경이더냐? 하하하하!"
아놔!
그냥 한 대 치고 튈까?
됐다.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말자.
"혼인할 여인이 있습니다."
뚝.
광소를 터뜨리던 교주가 웃음을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그러더니 무시무시한 눈으로 나를 노려본다.
"딸아이의 속살을 봤다."
"치료 때문이라 말씀드렸습니다."
"딸아이의 속살을 만졌다."
"의원이라 말씀드렸습니다."
"본좌의 딸은 신교 제일 미녀인 동시에 천하제일 미녀다."
"제가 마음에 둔 여인이야말로 저에게는 천하제일 미녀입니다."
"네 이놈!"
왜 이놈!
목까지 차올랐지만, 당연히 내뱉지는 않았다.
부들부들 떠는 교주.
솔직히 말이다.
진짜 솔직히.
교주가 무섭지는 않다.
왜?
날 죽이지 않을 거란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짜 솔직히.
교주 때문이 아니라, 살짝 흔들리긴 했다.
아! 내가 바람둥이인가?
그런데 정말 아주 조금, 솔직히 조금 흔들리긴 했다.
단문령이나 연주언이나 소신녀나 예쁘긴 매한가지다.
그런데 단문령하고 연주언은 살짝 정신이 좀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내가 본 소신녀는 매우 정상이다.
그래서 정말 쪼금 흔들렸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오락가락하는 단문령이나 연주언보다야 소신녀가 낫지 않겠냔 말이다.
그런데…….
그건 또 아니다.
다른 사람은 사랑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있어서 사랑은 의리다.
의리.
그렇다.
의리는 지키는 거다.
"우룡검을 빌려드리는 대신 다른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본좌의 딸아이… 뭐가 마음에 안 드는데?"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고귀하고, 품격도 있고, 무엇보다 정상… 어험, 그게 아니라, 총명하시기까지 한 훌륭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 마음에 이미 다른 여인이 있다고요."
"차 버려! 아니면 본좌의 딸을 첫째로 두고, 그 여자를 둘째 아내로 하면 되잖아."
"혈우도마 장로님과 환영비마 장로님 그리고 마천주 뇌마께 한 명의 주군만 있듯, 제 마음에도 한 명의 여인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들이 두 명의 주군을 섬길 수 없듯, 저 또한 두 명의 여인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건 거짓말이다.
미인국에서 수만 명을 사랑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상황이 상황이라, 대충 그리 말했다.
그런데 의외로 이게 또 통했다.
"음… 놈. 말로는 이길 수 없군."
여전히 날 못마땅한 눈으로 보고 있지만, 더는 억지를 부리려 하지 않았다.
다행이다.
"우룡검을 빌려주는 조건이 뭐냐?"
"신교의 힘."
"본교의 힘?"
"네, 교주님."
"……?"
"제가 도움을 요청하면 중원으로 와 주십시오."
"중원? 불사괴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흥, 어렵겠구나. 본좌와 본교의 교도들이 불사괴 따위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다. 본교가 중원의 땅을 밟는 순간, 정파 놈들이 난리를 칠 게 뻔한데, 어찌 피를 볼 것을 뻔한 곳에 발을 들이겠느냐?"
난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불사괴가 지금 수준이면 교주님의 말씀대로일 것입니다. 하지만 제 예감이 그러하지 않습니다. 원흉을 찾아 제거하지 못한다면, 불사괴는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화를 불러일으킬 것이고, 이는 천하의 멸망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현재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그렇습니다. 만약 그리된다면, 신교가 중원에 오는 것을 경계할 중원의 무림인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정말 최악의 상황이 된다면, 모두가 두 팔을 벌리고 고개를 숙여 교주님의 도움에 감사를 드릴 것입니다."
"음… 자네."
"네, 교주님."
"정말 지금이 최악의 상황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인가?"
"가능성은 반반입니다. 그리고 제가 교주님께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면, 그건 이미 천하가 최악의 상황에 빠져드는 순간일 것입니다. 또한, 만약 중원이 그렇게 된다면, 신교 또한 온전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최악의 상황이 도래하면 당연히! 힘을… 합쳐야 합니다."
교주는 꽤 오랜 시간 아무 말도 없이 괜한 턱만 어루만지며 나를 지켜보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
"네 제안, 수락하겠다. 불사괴로 인해 천하가 도탄에 빠지게 된다면, 본좌는 친히 본교의 모든 고수를 이끌고 도움을 주겠다."
난 내 허리에 두르고 있던 요대, 그러니까 우룡검을 풀어 뻗었다.
스르르르륵.
번쩍!
요대는 풀리자마자 검으로 변신했고.
검으로 변신한 우룡검은, 레드 드래곤 오니푸네의 그 무지막지한 기운을 사방에 뿌려 댔다.
처음으로 교주의 놀란 얼굴을 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 * *
닷새가 지났다.
교주는 사기꾼이다.
아니, 사기급 인간이다.
분명 보름이 걸려야 7, 8할가량의 공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당연히 교주의 경지와 모든 걸 종합해 내린 진단이다.
그런데 고작 4일이 지났을 때, 그는 9할 이상의 공력을 모두 회복했다.
닷새째는 그냥 힘이 철철 넘쳐흘렀다.
아픈 곳은 찾아볼 수 없는 그였고.
그렇게 마교 본교를 향해 출정을 떠났다.
필승칠책?
응, 다 말해 줬다.
마뇌가 교주의 눈치를 사정없이 살피며 설명했고,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내가 보충 설명까지 해 줬다.
다시 말하지만, 일곱 가지 계책 모두 정말 누가 들어도 까무러칠 정도의 무지막지한 계책들이다.
그런데 그 엄청난 필승의 일곱 가지 계책을 다 들은 교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뇌마에게 말했다.
"더 없어? 더 확실하고, 화끈하고, 천마신교다운 그런 계책은 더 없냐고?"
그러자 필승칠책을 모두 설명하며 사정없이 눈치를 보던 마뇌가 굳은 결심을 한 듯, 비장한 얼굴로 목소리에 잔뜩 힘까지 주어 답했다.
"있습니다!"
"그 계책은 뭔데?"
"그냥 죄다 쓸어 버리는 것입니다!"
미친.
미쳤다.
그런데 교주의 떨떠름했던 표정에 미세한 미소가 피어올랐고.
그걸 놓치지 않은 마뇌는 허리춤에 있던 검까지 검집째 뽑아 자기 앞에 척 하니 놓더니.
"가장 확실한 계책은! 압도적인 힘으로 놈들을 죄다 쓸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냥 죄다! 쓸어 버리고! 찢어발기고! 목을 베고! 불에 태우고! 껍질을 벗기고! 다시는! 감히 다시는 놈들이 교주님께 고개를 들지 못하게, 다른 마음을 품을 수 없게! 쓸어 버리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최고의 상책입니다."
"풉. 푸하하하하! 크하하하하하하! 역시 마뇌 자네는 신교 제일의 두뇌라니까! 크하하하하하하!"
이렇게 결정되었다.
역시나 그냥 닥치고 공격이다.
와!
그나저나 이따위로 마교에서 공격해 왔는데, 과거에 이런 걸 못 막았던 정파 무림은 도대체 얼마나 약해 빠졌던 거야?
아니다.
마교가 너무 강해서 그랬을 테다.
더불어 마교는 뇌가 없었기에… 에휴, 말을 말자.
아무튼 우리는 천마신교의 본교를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 * *
"교주님."
천마신교 본교에 10리만을 남겨 둔 거리.
여전히 빠르게 이동하며, 나는 허리에 묶여 있던 우룡검을 풀어 교주에게 건넸다.
약속대로 그에게 우룡검을 빌려주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우룡검을 한 번 쳐다보고, 또 나를 한 번 쳐다보고.
안 받는다.
그냥 웃는다.
"교주님?"
"훗. 됐다. 우룡검이 없어도 충분하다."
"교주님, 악령 불사괴는 그렇게 가볍게 봐서는 절대 안 될 위험한 존재입니다."
또 웃는다.
"그래도 된다, 본좌는."
뭐지?
뭔가 더 권하고, 악령 불사괴의 위험성을 더 자세히 설명해 줘야 할 순간인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엄청난 위엄이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다.
감히 말도 걸 수 없을 만큼 그가 거대해 보였다.
마치, 하늘을 뚫고 치솟은 거대한 산을 보는 느낌이었다.
"걸일번이라는 그 아이를 꼭 만나 봐야 한다고 했지?"
"엇! 아, 네. 네, 교주님."
"그 아이가 살아 있길 바란다. 꼭 만나 불사괴의 진실을 풀어라."
"감사합니다, 교주님."
교주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더는 그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이 인간.
싸움을 앞둔 천마신교의 교주는.
그야말로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 존재였다.
* * *
댕댕댕댕댕댕댕!
부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천마신교 본교에 도착.
거대한 성이었다.
그리고 네 방향의 문이 이미 굳게 잠겨 있었다.
우리가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 그 안에서는 경종과 경계의 호각이 울려 퍼졌다.
이미 도착하기 한참 전부터 우리가 공격해 오고 있음을 놈들도 알아챈 것이다.
하지만 선두에서 달리던 교주는 속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 뒤를 따르는 혈우도마, 환영비마, 뇌마를 비롯한 수천의 고수들 역시 같았다.
그들은 그냥 닥치고 공격이었다.
그렇게 본교의 성벽에 100장을 남겼을 때.
교주가 번쩍!
허공을 향해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100장 높이까지 날아간 교주.
그의 손에서 거대한 검강이, 형성강기를 통해 무시무시한 마기를 뿌리는 검으로 만들어졌다.
이내 하강과 동시에 검을 그냥 냅다 내려치는 교주.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와!
어마어마하다.
이건 그냥 어마어마하다는 표현만으로는 그 엄청남을 100분의 1도 표현하지 못할 정도다.
교주는, 내가 예상했던 것의 수백 배, 수천 배 더 강한 존재다.
아니, 인간이 맞긴 할까?
성이.
성벽이.
성문이.
교주의 한 방에 의해 수십 장이 초토화되어 버렸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배신자들을 죽여라!"
"잡귀의 개들을 죽여라!"
무너진 성벽과 성문으로 기세가 오른 수천의 고수들이 함성을 지르며 공격해 들어갔다.
선두에는 역시나 혈우도마가… 와!
저 할배 말이다.
내가 처음 봤을 때 그 느낌이 정확했다.
콰콰콰콰콰콰콰쾅!
콰콰콰콰콰콰콰콰쾅!
괴물이 광혈도를 휘두르니, 그냥 모든 것이 파괴되고 있다.
막아?
막으면 부수고.
도망가?
도망가면 터진다.
산 것과 죽은 것, 숨 쉬는 것과 그렇지 않은 모든 것을 미친 듯 파괴해 버리는 혈우도마 일 장로였다.
환영비마 삼 장로는?
성벽 위 가장 높은 곳, 적들의 침입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일부러 더 높게 쌓은 전망대 위로 날아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모든 내공을 실어 천마신교의 안쪽을 향해 사자후를 터뜨렸다.
"교주님께서 돌아오셨다! 천마신을 숭배하고, 강자존을 지키며, 잡귀의 사술에 현혹되지 않은 진정한 무인들은 칼을 들고 일어서라!"
"와아아아아아아!"
"기다렸습니다, 교주님!"
환영비마는 연신 사자후를 터뜨렸고.
천마신교의 곳곳에서 교도들이 들고일어나, 우리의 공격을 막고 있는 교도들을 쓸어 버리기 시작했다.
그것만이 아니다.
저 멀리.
우리가 지나왔던 곳.
어떻게 알았는지 수천, 수만 명에 달하는 교 밖의 고수들이 함성을 지르고 천세 삼창을 하며 몰려들고 있다.
아! 그때 불마를 해치우고 소신녀를 구할 때 그냥 보내 줬던 300명의 마인들도 교도들 틈에 섞여 있군.
그들까지 교 내로 진입하자, 이건 뭐…….
"크하하하하하! 곤륜마선 이 잡귀 새끼야! 본좌가 돌아왔다! 어서 모습을 드러내라!"
허공에 떠 있었다.
조금도 움직임이 없다.
허공을 걷고 달리는 건(허공답보, 虛空踏步), 삼존이성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구천마제 교주처럼, 아무런 움직임 없이 허공에 떠 있을 수 있는 건 삼존이성이라고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의 엄청난 사자후는 천마신교를 넘어 하늘과 땅을 진동시켰고.
그렇지 않아도 수세에 몰려 간신히 방어를 하고 있던 본교의 교도들은, 그런 교주의 엄청난 신위와 위엄을 보더니.
"항복! 항복하겠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제가 잠깐 미쳤었나 봅니다!"
"교주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는 자가 엄청난 숫자와 속도로 늘어 갔다.
그리고 그때.
음, 저놈이 바로 곤륜마선인가 보다.
악령 불사괴 한 구.
인간 불사괴 두 구.
또 그들을 따르는 엄청난 고수들.
휴우.
다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다.
진짜는 따로 있었다.
곤륜마선과 함께 나타난 수천의 고수들.
그들이 진짜다.
혈우도마와 환영비마에 버금가는 고수들만 십수 명이고.
아니, 그건 문제가 아니다.
결국 교주와 곤륜마선의 싸움이 모든 걸 결정하게 된다.
지금에라도 우룡검을 줘야 하나?
난 걸일번을 찾으러 가기로 이미 말이 끝난 상태인데.
싸움이 시작되면 나는 천마전 지하 뇌옥으로 가기로 한 상태다.
천마신교의 내부 지도까지 밤을 새워 달달 외웠는데.
그래서 지금 가야 하는데.
곤륜마선이 너무 강해 보였다.
성존보다 더 강한 느낌이다.
아니, 확실히 성존보다 훨씬 강하다.
심지어 그자가 손에 쥔 검은, 분명 저것이 바로 천마신검이다.
천마신교의 모두가 천하제일 검이라 확신하는 그 절대의 검.
반대로 교주는 공수(空手, 빈손)다.
아무리 그가 무기에 의존할 경지가 아니라고는 하나, 우룡검이나 천마신검과 같은 절대병기는 그 의미가 다르다.
줘야 하는데.
내 우룡검을 교주에게 건네야 하는데.
뭐지?
그를 보고 있자니, 머리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내 마음이.
지금.
말하고 있다.
그를 그냥 지켜보라고.
천마신교의 교주는.
강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