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150화 (149/174)

150화

이른 새벽.

만리상단의 상단주 연단첨과 함께 교역을 위해 떠나기 위한 마지막 점검을 하는 거대한 행상을 지켜보고 있다.

"비단길의 여러 통로 중, 청해와 회홀(回鶻, 위구르)을 통해 대식국(大食國, 아라비아)으로 가는 상행일세."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수레만 1,500대에 이르고, 쟁자수는 무려 5,000명이다.

표사의 수도 1,000명이 넘었다.

이건 흡사 전쟁터에 보급을 하러 가는 것 같다.

"노련한 행주가 이번 상행을 총괄하게 될 테고, 자네와 삼부협은 행주를 보조하는 총관으로 합류하는 것일세."

"총관이요?"

"그렇지. 이런 큰 상행에는 보통 스물에서 서른 명가량의 총관이 함께 움직이지. 자네들 넷이 더 있다고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안심해도 된다네."

"음, 상단주님, 혹시 총관 말고 표사는 안 될까요?"

"표사?"

"네, 표사요."

"표사가 적들의 공격을 대비하는 게 주 임무라지만, 경계도 서고 수색도 하고, 알게 모르게 고된 일을 많이 한다네. 굳이 편한 총관 자리를 두고 왜 표사를 하려는 건가?"

"그게요… 실은 제가 한때 간절하게 표사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거든요."

"풉. 자네가? 천하의 멸마협이 표사가 되길 간절히 원했던 적이 있었어?"

"네."

"그럼 하면 되지 않았나?"

"그게, 안 뽑아 주더라고요. 정원이 다 찼다고요."

"그래서?"

"결국 쟁자수가 됐지요."

"풉. 푸하하하. 자넨 정말 사람을 웃게 하는 재주가 있군. 그렇지 않아도 딸아이가 다시 예전처럼 환하게 웃고 활기차 보여 기뻤는데, 쉴 틈도 안 주고 나를 또 웃게 만들어 주는군. 허허허."

"진심이에요. 가능하면 표사로 합류하게 해 주세요."

"허허. 여부가 있겠나. 일반 표사는 일이 고될 수 있으니, 특별히 이번 상행을 위해 외부에서 초빙한 표사로 하겠네. 행주와 대표두에게 말해 놓을 테니, 그렇게 하도록 하게. 허허. 허허허허!"

"감사합니다, 상단주님."

"감사는 내가 해야지. 나 서방 덕분… 어험, 미안하네. 하하. 나 공자 덕분에 우리 딸아이가 다시 기운을 차려, 내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다행이에요."

"뭐라도 주고 싶은데, 돈은 자네도 많고. 혹시 내가 도울 만한 게 없을까? 뭐든 말만 하게나."

"그럼 혹시 성수를 조금 얻을 수 있을까요? 휴대할 수 있는 술병이나 물병으로 세 병 정도요."

"어려울 게 있나? 당장 준비해 주겠네."

나는 세 병의 성수를 단씨 삼 형제에게 나누어 주었다.

비단길로 향하는 거대한 상행은 곧 출발하였다.

상행이 만리상단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연주언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멀리, 저 높은 전각 위에서 그녀가 떠나는 나를 보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왜?

아마… 부끄러웠나 보다.

어제 뽀뽀가 많이 극렬했거든.

* * *

곤륜파가 자리한 청해.

중경에서 사천을 통과해 청해에 접어들었다.

중원과는 언어도 다를 뿐만 아니라, 그 사는 사람들의 의복과 생활의 전반이 중원의 것과 달랐다.

나와 단씨 삼 형제는 최대한 조용히 무리에 섞여 이동하였다.

중경에서 청해까지만 해도 보름이 넘게 걸렸다.

산도 많이 건넜고, 얕은 물도 수십 번을 건너야 했다.

하지만 아무런 사고도 없었다.

상행의 규모 자체가 어마어마하다 보니, 그 흔한 산적이나 마적 같은 놈들도 감히 길을 막을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수십 기에 달하는 만리상단의 깃발이 안전을 보장해 준 덕분일 테다.

정말 너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 무료하다는 생각이 다 들 정도였다.

그렇게 청해의 깊은 곳까지 이르렀을 때였다.

오!

있다.

정말 심심했는데.

무려 20일 동안 그냥 말을 타고 움직이는 것 외에는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일이 없어 심심해 죽을 뻔했는데.

저 멀리.

정말 아주 멀리.

보통 사람의 청력으로는 들리지도 않을 정말 먼 곳.

그곳에서 뭔가 살벌한 기운과 뭔가 급박한 움직임들이 내 기감에 감지되었다.

자연에 물으니.

때마침 그곳에서 불어온 바람이 알려 주었다.

50인의 말을 탄 사람들이, 수레와 말을 타고 또 걸어서 이동하던 사람들을 포위하여 탄압하고 있다고.

아마도 우리와 같은 상단일 테다.

표국의 표행일 수도 있고.

말을 탄 50인은 산적이거나 마적 떼다.

심심하던 찰나, 잘됐다 싶었다.

"행주님."

선두에서 대표두와 함께 나란히 말을 몰아 가던 행주에게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신가?"

"우리가 가는 길, 저 언덕 넘어 지금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행주.

행주는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절정 끝자락의 노련한 고수이자 이번 상행의 대표두인 석검호귀(析劍護鬼) 노적삼이 있다.

행주가 노적삼에게 눈짓으로 물었다.

하지만 아무리 노고수라고 하여도 그의 기감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무려 4리(里)가 넘는 앞쪽, 그것도 커다란 언덕에 가로막혀 있는 곳의 상황을 감지할 리 만무하다.

행주를 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 노적삼.

그러자 행주가 나에게 물었다.

"확실하신가?"

"네, 행주님."

"음… 어떤 상황인지도 알 수 있으신가?"

"작은 상단이나 표국이 마적 떼에게 공격을 당하지 않나 싶습니다."

순간, 행주와 대표두가 동시에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동공까지 크게 떨리는 그들이었다.

"그게… 그걸 어찌 아는가?"

"제가 기감에 좀 예민한 편입니다."

이젠 입까지 쩍 벌리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내가 육십 평생을 넘게 살며 엄청난 고수라는 자들을 수도 없이 봤건만, 나 대협은 내 평생의 상식을 송두리째 무너뜨려 버리는군."

"과찬이십니다."

행주가 정말 많이 놀란 모양이다.

심호흡을 몇 번이나 크게 하며 놀란 마음을 가라앉힌 후 대표두에게 명령을 내렸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인 것을 넘어, 우리 만리상단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는 경우가 없네. 표사들을 이끌고 먼저 가 그들을 돕도록 하시게."

"네, 행주님."

대표두가 곧바로 표사들을 소집하려 했다.

"잠시만요."

내가 그런 그를 불러 세웠고, 행주와 대표두에게 동시에 말했다.

"상단주님께 들으셨겠지만, 제가 이번에 맡은 임무가 매우 엄중합니다. 상행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제 임무에도 지장이 있을 테고요. 그러니 대표두님은 이곳에서 상행을 지켜 주세요."

행주가 곧바로 물었다.

"그럼, 곤란에 처한 저 앞길의 사람들은 어쩌고? 설마 자네 혼자 가려는 건 아니겠지? 자네가 아무리 상식 밖의 고수라고는 하나, 이곳의 마적 떼를 쉽게 봐서는 안 되네."

씩 웃었다.

"괜찮아요, 쉽게 봐도."

내 대답과 자신감에 허탈함을 숨기지 못하는 행주.

"상황이 급박한 것 같으니, 먼저 가 보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뒤를 쫓겠네. 위험하다 싶으면 몸을 피하시게. 나 대협의 신상에 문제가 생긴다면, 내 평생을 바친 일자리도 잃게 될 걸세."

"네. 알겠습니다, 행주님."

말을 마침과 동시에 신법을 전력으로 펼쳤다.

단씨 삼 형제가 그림자처럼 그런 내 뒤를 따라왔다.

음, 정말 상황이 심각해지는 것 같군.

현장의 살기와 광기,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비명이 선명해지고 있다.

* * *

"꺄아아아악!"

"대형 유지해!"

"끄아아악!"

"표물은 생명이다! 목숨을 걸고 표물을 지켜라!"

바람의 전언은 정확했다.

50여 명의 마적 떼가 칠팔십 명의 표국 사람들을 포위한 채 말을 몰아 빙빙 돌며 압박하고 있었다.

흉포하고 기세등등한 마적 떼의 압박에 표국 사람들은 대형을 유지하고 있지만, 불리해 보인다.

표사의 수도 적고, 표사들의 수준이 만리상단 표사들에 한참이나 못 미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마적 떼는 한두 번 이런 일을 한 게 아닌 노련한 놈들이다.

곧바로 표국을 덮치지 않고, 압박을 통해 두려움부터 느끼게 하는 중이다.

그리고 곧, 표국의 국주가 목이 터져라 외쳤던 대형 유지가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노련한 마적 떼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곧바로 빈틈을 뚫고… 어라?

신용표국(信用鏢局)이네?

- 단 형님들, 기다리세요.

단씨 형제를 뒤에 남겨 두고, 나 혼자 몸을 날렸다.

쉬이이이이이익.

퍼퍼퍼퍼퍼퍼퍼퍼펑!

"끄아아아아악!"

"이히히히히히힝!"

기회를 포착하고 회심의 공격을 하려던 마적 떼에게 연이어 검기를 날렸다.

곧바로 열세 명의 마적 떼가 말 위에서 떨어져 땅바닥을 굴렀고.

"웬 놈이냐! 저놈부터 쳐라!"

마적 떼 스물이 나를 덮쳐 왔다.

멍청한 놈들.

쉬이이이이이이익!

다시 순천검을 휘둘렀고.

퍼퍼퍼퍼퍼퍼퍼펑!

나를 향해 무섭게 말을 몰아 달려오던 마적 떼 스물이 곧장 피를 뿜으며 다시 땅바닥을 굴렀다.

"이때다! 마적 떼를 물리쳐라!"

"와아아아아아아!"

나의 활약과 신용표국 국주의 명령에 겁에 질렸던 표사들이 힘을 내어 함성을 지르며 남은 마적 떼들에게 공격을 가했고.

퍼퍼퍼퍼퍼퍼퍼펑!

채채채채채챙!

채채채채채챙!

"후퇴! 후퇴하라!"

나까지 가세하자 순식간에 말 위에 남은 마적은 몇 명이 되지 않았다.

마적 떼의 우두머리 놈이 제일 먼저 도망치며 후퇴를 명령했지만.

쉬이이이익.

퍽!

쿠당탕탕탕.

놈을 포함해 아무도 도주에 성공한 자는 없었다.

"놈들을 포박하라! 항거하면 목을 베어라!"

"넵!"

곧바로 신용표국의 표사들이 쓰러진 마적들 중 산 놈들을 포박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국주는 마적들이 모두 밧줄에 단단히 묶이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나에게 다가왔다.

여전히 놀란 마음을 다 진정시키지 못했는지, 그 호흡이 매우 거칠었고 상기된 얼굴이었다.

"대협! 대협의 도움으로 곤륜파로 향하는 표물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대협 덕분에 우리 신용표국 사람들의 목숨을 건질 수 있었… 어? 자네는……?"

씩 웃어 줬다.

"자, 자네… 자네! 자네는 분명……!"

"잘 지내셨어요, 국주님?"

신용표국의 국주 장하평이다.

그러니까 이 양반이 누구냐 하면.

내가 무치개 이 장로를 처음 만나고 헤어진 후 집으로 갈 때.

진짜 수중에는 철전 한 닢 없고, 배는 고파 뒈질 것 같았던 그때 말이다.

내 꼴을 보고 불쌍해서 쟁자수로 써 줬던 그 양반이 바로 이 양반이다.

나도 놀랐다.

중원도 아닌 이 먼 청해 땅에서 장하평 국주를 다시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말이다.

"자네… 자네……!"

"국주님, 하하하! 자네 소리만 몇 번을 하시는 거예요?"

"어떻게 된 일인가?"

여전히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란 눈으로 말하는 장하평 국주.

난 얼굴에 미소를 가득 지은 채 답했다.

"어떻게 된 일이냐니요? 제가 그때 분명 말씀드렸잖아요. 표사가 되겠다고."

"표, 표사. 맞아! 자네 분명 나에게 표사로 써 달라고 떼를 쓰던… 어? 어?"

이러다 이 양반 숨넘어가겠다.

그래도 재밌으니 조금만 더 놀리자.

"저 취직했어요. 표사로요. 국주님이 표사로 안 써 줘서, 다른 데 취직했잖아요. 하하."

한참을 놀란 얼굴만 하던 장하평 국주가 혼잣말과 같은 말을 했다.

"내가 분명… 내가 분명 그때… 언제든지 나를 찾아오면 최고참 쟁자수와 같은 품삯을 주겠다고… 자네라면 사람이 넘쳐흘러도 꼭 최고의 조건으로 고용하겠다고… 어라? 분명 자네는 쟁자수였는데?"

"와! 다 기억하고 계시네요? 제가 했던 말도 기억하세요? 저 고수라고 열 번도 더 말씀드렸어요. 하하."

"아! 아! 그게… 그게 진짜였구나?"

"굶어 죽을 상태인 저에게 따신 밥 든든히 먹게 해 준 국주님께 왜 거짓말을 했겠어요?"

"하아. 허어어……."

국주는 너무 놀란 나머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날 쳐다보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하는 말이…….

"어디에 취직했나?"

이 양반 말이다.

좋은 사람이다.

배고픈 나를 보고 일부러 쟁자수로 써 줬고.

심지어 약속했던 은자 넉 냥에 한 냥을 더해서 주기까지 했다.

이렇게라도 도울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은혜를 조금은 갚은 것 같아 기뻤다.

우리 개방에 말해서 신용표국 뒤 좀 봐줘야겠다.

이렇게 좋은 사람은 오래 살아야 좋은 일도 많이 하지 않겠나.

"왜요? 이제라도 절 표사로 써 주시게요?"

"최고참 표사와 같은 품삯을 주겠… 하아! 내가 너무 양심 없는 놈처럼 보이지? 허허!"

"말씀은 고맙습니다, 국주님. 그런데 좀 곤란할 거 같아요."

"……?"

국주가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할 때.

땅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저 언덕 너머로 만리상단의 거대한 행렬이 보였다.

1,000명의 표사, 5,000명의 쟁자수, 1,500대의 수레.

거기에 거대한 만리상단의 깃발 수십 개를 펄럭이며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그것을 본 장하평 국주는.

"하아! 만리상단이라……. 허허, 허허허!"

그저 온몸에 기운이 쭉 빠지는 허탈한 웃음을 지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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