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149화 (148/174)

149화

"괜찮아?"

걱정이 되어 물었다.

머리가 많이 아픈가 싶어서 말이다.

그러자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묻는 그녀.

"뭐가?"

"너, 괜찮냐고?"

"보다시피."

"음……."

"들었구나?"

"응."

"됐어. 너같이 무심한 놈, 깨끗이 잊기로 했어."

"정말?"

"그럼 뭐? 너 때문에 엉엉 울어 주기라도 바라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다행이다, 괜찮다니."

"걱정했어?"

"조금."

"쳇. 말이라도 많이 걱정했다고 하면 어디 덧나냐?"

"응, 많이 걱정했어."

"됐다. 내가 멍석을 깔고 절을 받지."

정말 괜찮아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녀의 몸을 감싸고 흐르는 기운도 괜찮고.

음, 머리가 문제인데.

표정과 눈동자 모두 괜찮다.

그것만으로는 완전히 진단할 수 없지만, 얘가 원래 정상은 아니니 또 완벽한 정상이길 바라는 것도 좀 그렇고.

"그런데 갑자기 무림 여고수는 뭐야?"

"너 때문에 짜증 나서."

"나? 왜?"

"사람들이 말만 꺼냈다 하면 멸마협이 어떻네, 개방 고수들이 어떻네 그러잖아."

"내가 좀 유명해지긴 했지."

"와! 뻔뻔한 거 보소. 너 잊지 마. 그 팔다리, 내가 살린 거야."

"은혜는 반드시 갚아."

"흥!"

"그래서 뭔데? 내가 유명해져서 너도 유명해지고 싶어?"

"뭐, 부정하지는 않을게. 네 소식도 듣고, 불사괴 출현하면서 명성 떨치는 사람들도 그렇고. 맞다! 최근 너희 개방에 묘안개랑 저육개라는 거지들도 엄청 유명하더라고."

"내 동생들이야."

"정말? 아는 사람들이야?"

"동생들이라니까."

"음… 그래. 반 정도는 믿어 줄게."

"진짠데."

"아무튼 그래서 꾀병 좀 부린 거야."

"꾀병?"

"무림 여고수가 된다고 하면 아빠랑 엄마랑 난리 칠 거 아니야. 위험하다고. 그래서 네 핑계 대면서 아픈 척 좀 했지. 호호. 그러다 내가 무림 출두하겠다고 하니까, 쌍수를 들고 환영해 주시더라고. 호호호! 작전 성공!"

진짜일까?

표정은 밝은데.

괜히 좀, 미안하다.

"왜 그런 표정으로 봐?"

"응? 내가 뭘?"

"불쌍한 눈으로 날 보고 있잖아."

"아! 오해야, 오해. 그러니까 나는… 그렇지! 불사괴. 내가 직접 경험해 봤는데, 장난 아니더라고. 그래서 네가 무림으로 간다고 하니 조금 걱정이 돼서."

"쳇! 간신히 마음 정리했더니, 왜 이제 와서 날 걱정하고 그래? 사람 헷갈리게."

아! 얘가 말이다.

확실히 머리가 좀 아프긴 한 것 같아.

오락가락하네.

"만나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해 주는 말이야. 조심하라고. 언제 어디에서 불사괴가 출현할지 모르니까."

"흥!"

잠시 어색한 침묵이 우리 사이에 흘렀다.

하지만 정말 잠시였고.

그녀가 팔짱을 끼고 토라진 얼굴을 했다가 이내 퉁명스럽게 물었다.

"같이 가 줘?"

"어딜?"

"너, 십만대산 간다며?"

진짜 정상 아니네.

떠나기 전에 만치자연단 한 알 줘야겠다.

정신과 치료에도 효능이 분명 있으니 말이다.

"야! 농담 한번 해 봤다. 뭘 그렇게까지 얼굴을 구기고 그러냐? 사람 민망하게끔."

"그, 그래."

다시 어색한 공기가 감돌려고 했는데.

"보러 갈래?"

"뭘?"

"성물과 성수."

"볼 수 있어?"

"나 연주언이야."

"아! 그래. 맞다. 너, 연주언이지. 만리상단의 금지옥엽."

"가자. 보여 줄게."

"응."

* * *

만리상단 내에 있는 뇌옥으로 간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마차를 탄다.

곧 도착하겠지 싶었는데, 마차를 타고 한 식경을 간 후에야 우리는 만리상단 뇌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말 뭔 놈의 집이 이리도 큰지 모르겠다.

"8층?"

"응, 지하 팔 층이 가장 위험한 죄수를 가두는 뇌옥이야. 겹겹으로 철통 경계가 서 있고. 아무튼 안전해. 가자."

"그, 그래."

계단을 걸어 한참을 내려갔다.

정말 철통 경계가 층마다 깔려 있다.

웬만한 문파는커녕,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서도 이런 경계가 가능할까 싶은 고수들과 기관이 가득했다.

뭐, 그건 그렇고.

"여기야."

세 개의 뇌옥.

각 방마다 하나의 식인 불사괴가 있다.

"크으으으으으."

괴상한 소리를 내는 식인 불사괴.

곧, 경계를 서는 무인이 가장 왼쪽의 방문을 열어 주었고.

바로 다른 무인들이 성물과 성수를 가지고 왔다.

그렇게 성물을 들이밀자.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괴성을 질러 대며 난폭해지는 식인 불사괴.

동시에 예쁜 돌과 같던 성물이 마치 남포등에 불이라도 붙인 것처럼 환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신기하지? 난 볼 때마다 신기하더라."

"응, 신기하다."

"성수, 네가 직접 뿌려 볼래?"

"응."

"손끝에 조금 묻혀서 뿌려 봐."

"알았어."

그녀가 시키는 대로 성수를 손끝에 살짝 묻혀 식인 불사괴에게 뿌렸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아아아악!"

단지 몇 방울이 전부였는데, 식인 불사괴는 괴성을 질러 대며 괴로워했다.

곧, 그의 몸이 화르르르.

연단첨의 말처럼, 마치 화골산이라도 뿌린 것과 같이 녹아내리더니 곧 소멸하고 말았다.

"와! 대단하다."

"어때? 성물과 성수가 인간 불사괴나 그 악령 불사괴라는 놈들에게도 통할 거 같아?"

호기심 가득하여 묻는 연주언.

확실히 상극인 건 맞다.

다른 차원도 아닌 내가 사는 세상에도 이런 성물이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뭐, 실제 남궁무검이 들고 다니던 제왕검도 분명 인간 불사괴를 물리칠 힘이 있는 보검이다.

모르긴 몰라도 천하 10대 보검에 준하는 병기들은 아마도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거기에 낭만개 아저씨 정도의 경지라면, 굳이 드래곤 본으로 만든 검이 아니더라도 데몬 언데드와 충분히 겨룰 수 있고.

내가 사는 우리 세계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서역에까지 이런 기물이 있으니 말이다.

"어떻냐고? 통할 거 같아? 아니야?"

연주언이 재촉했지만, 나는 조금 더 자세히 성물과 성수를 살폈다.

확실히 성스러운 기운이 가득했다.

성녀검 못지않은 기운이다.

하지만 데몬 언데드라면.

"구분은 가능할 거 같아. 인간 불사괴라면. 그리고 주의를 정말 세밀하게 기울인다면 악령 불사괴도 가능할 수도 있고. 하지만 악령 불사괴는 확신할 수 없어."

"소멸은? 소멸은 가능해?"

"네 경지로는 아직 무리야. 초절정 고수만 돼도 인간 불사괴를 물리치는 게 가능할 수 있어. 가능하다는 거지, 확실치는 않아. 분명한 건, 최소한 네가 인간 불사괴로부터 도망갈 시간은 충분히 벌어 줄 수 있을 것 같아."

"마노 할아버지 알지?"

"저번에 봤던 그 흑풍절명사 마 대협?"

"응, 내가 싫다고 해도 무림행 간다면 아빠가 마 할아버지를 딸려 보낼 거야."

"인간 불사괴 따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 성물에 성수, 거기에 더해 마 대협까지 함께한다면."

"그렇지?"

"응."

"악령 불사괴는 그래도 조심해야겠고?"

"검선과 검제까지 죽인 게 악령 불사괴야. 흑풍절명사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조심해야 해."

"음, 그건 맞는 말이다."

"다만……."

"다만, 뭐?"

"악령 불사괴라 하더라도, 성수를 맞으면 분명 주춤할 거야. 운이 좋으면 도망갈 수도 있을지 모르지."

"운이 좋으면?"

"응, 말했잖아. 악령 불사괴는 무려 화경의 고수 두 명을 한꺼번에 죽였다고."

"그렇다. 생각해 보니 엄청 무섭네."

"웬만하면 불사괴가 출현했다는 곳에는 가지 마."

"뭐야? 또 걱정해 주는 거야?"

"그래."

"흥! 얘가 또 사람 헷갈리게 하네. 너, 그거 아주 나쁜 버릇이다. 적당히 해."

"내가 아는 사람 모두에게 해 주는 말이라고."

"알았다, 알았어."

"그런데 이거 되게 비싸겠다. 얼마 주고 구한 거야?"

궁금해서 물었다.

그런데 얘가 갑자기 멍한 눈을 하며 뭔가 깊은 생각에 빠졌다.

뜬금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더니 또 갑자기 하는 말이.

"맞다. 너 내일 새벽에 떠난다며?"

"응, 왜?"

입을 오물오물한다.

뭔가 말을 하려다 못 하고, 그러다 다시 하려고 하다 멈추고.

결국, 했다.

"너 말이야."

"응."

"솔직히. 진짜 솔직하게 답해야 해."

"뭔데?"

눈까지 부라리며 나에게 말하는 그녀.

"지금까지 나 보면서, 정말 단 한 번도, 진짜 단 한 번도……."

얘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솔직히 있다.

없다면 거짓말이다.

천하에서도 두 손가락, 이제는 단문령 때문에 세 손가락이지만, 세 손가락에 들 만큼 아름다운 미녀인데 어떻게 단 한 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겠는가?

아! 그런데 어떻게 답을 해야 하지?

간신히 마음을 정리한 것 같은데, 쟤 말처럼 또 헷갈리게 하는 건 나쁜 놈이고.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자니 그것도 좀 그렇고.

내가 그렇게 짧은 순간 수많은 갈등에 빠져 있을 때.

"됐다. 안 물어보련다. 이미 들었어. 너, 여자 생겼다고."

"미안."

"헐! 너 방금 한 그 ‘미안’이란 말이 날 더 비참하게 만든다는 거 알아?"

"미, 미안."

또 이어진 내 사과에 나를 째려보는 그녀.

"됐어. 깨끗이 너 잊고, 말한 대로 난 진정한 무림의 여고수가 될 거야. 나 유명해진 다음에 내 뒤꽁무니 졸졸 따라다녀도 바빠서 못 만나 준다."

"그래, 꼭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별호도 미리 정했어."

다시 말하지만, 별호는 자기가 짓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지어 주는 거다.

뭐, 됐다.

오늘은 좀 맞춰 주자.

"별호? 뭘로 정했는데?"

"절애선녀검(切愛仙女劍). 사랑을 끊는 선녀의 검. 어때? 멋지지?"

확실하다.

얘가 머리가 많이 아프다.

내 마음도 덩달아 아프다.

"응, 어울려. 아주 멋진데?"

내 답에 뿌듯해한다.

눈동자에서 비장함까지 엿보인다.

상태가 위중하다는 증거다.

"나는 정파도 사파도 아닌 정사지간의 여고수가 될 거야."

아! 갑자기 한 대 때리고 싶다.

"태한아."

"응?"

"걔… 예뻐?"

"누구?"

"모르는 척하지 마. 걔! 나보다 예쁘냐고."

솔직히 말하자.

"응."

곧바로 반응이 왔다.

"거짓말!"

연주언은 실제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본인도 태어나 지금껏 자기보다 예쁜 여자를 본 적이 없을 테니까.

또 천하가 모두 그렇게 말하고 있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확인 사살이 아닌, 그저 어색하게 웃는 것뿐이다.

그러자 연주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에게 말했다.

"정말이야?"

난 대꾸 대신 고개를 한 번 끄덕였고.

그러자 연주언은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놀란 얼굴을 했다.

"그게 가능해? 사람이 어떻게 나보다 더 예쁠 수 있어?"

아!

더는 못 참겠다.

울화가 치미는 게 아니라, 연주언의 아픈 모습을 보니 그 모든 게 내 탓인 것 같아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다.

안 되겠다.

"주언아, 이거 받아."

"엇? 이거 뭐야?"

"만치자연단이라고 해. 내가 직접 만든 거야."

내가 건넨 만치자연단을 받는 그녀의 손이 떨린다.

만치자연단에서 눈을 떼어 나를 보는데, 그녀의 동공마저 떨리고 있다.

그러더니 하는 말이…….

"너… 지금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거야?"

정답!

하지만 목까지 차오른 그 말을 당연히 내뱉지는 않았고.

"이것도 받아."

"이건 뭐야?"

"대자연단. 마지막 남은 한 알이야."

떨리던 그녀의 손이, 지진이 났던 그녀의 동공이 잠잠해졌다.

결국…….

그녀가 힘이 쭉 빠진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이걸로 퉁 치자는 거야? 나에게 입은 은혜, 이거 먹고 떨어져라? 저번처럼 다시 보지 말자? 이런 뜻으로 받아들여야 해?"

"무슨 말을 또 그렇게 하냐? 너, 무림 간다며? 악당들 물리치려면 내공도 충분해야 하고, 또 혹시라도 다치면 치료하라고 주는 거잖아."

"그, 그래?"

"그래! 우리 친구잖아."

아! 친구라는 말은 괜히 했다.

다시 연주언의 동공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도대체 속을 알 수가 없다.

내가 무딘 건가?

미녀의 거짓은 구분할 수 있겠는데, 이런 감정은 도통 모르겠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런데 그때.

그녀가 뜻밖의 말을 했다.

"빚은?"

"빚? 무슨 빚?"

"꼭 갚는다며? 나한테 진 은혜의 빚."

"음… 갚아야지. 꼭, 어떻게든 갚을게."

"지금 갚아."

"지금?"

"응."

"뭘로?"

"내 소원 들어줘."

얘가, 얘가 말이다.

병이 또 도졌다.

정말 많이 아픈가 보다.

빨리 만치자연단을 먹으라고!

"그래, 원하는 게 뭔데?"

"먼저 대답해. 내 소원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그건 아니지. 네가 무슨 소원을 말할지 모르는데."

"흥! 네 기준의 보은, 보답은 그런 거지? 대충할 수 있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고. 됐어. 필요 없어. 처음부터 기대도 안 했어."

"휴우, 아니야. 알았어. 대신, 정의와 협의 그리고 내 양심에 어긋나지 않아야 해."

"당연하지."

"우리 개방의 방규에도 어긋난 일이면 할 수 없어."

"당근."

"마지막으로, 내 능력을 벗어난 일이라면 당연히 어려워."

그녀가 씩 웃는다.

뭐지?

이 불안함은?

"정의와 협의에 어긋나지 않아. 은혜를 갚는 일이니 당연히 네 양심에도 어긋나지 않고."

"……."

"개방의 방규… 요즘 무림 문파에서는 그런 것도 관여하나? 아닐 거야. 그건 말이 안 되고."

"……."

"마지막으로 네 능력… 큭큭, 충분해. 넌……. 큭큭. 호호호."

불안, 불안하다.

내 본능이, 지금 당장 여기서 도망가라고 강하게 경고하고 있다.

"약속한 거다?"

"……."

"왜 대답을 안 해?"

"약속."

"맹세도 해."

"맹…세."

그녀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고, 내 불안감은 이제 극에 달했다.

"말할게. 내 소원."

"꿀꺽."

"너랑 뽀뽀하고 싶어."

"그건!"

내가 뭔 말을 하기도 전, 그녀가 더 빨랐다.

"방금 맹세했어!"

"하지만……."

"마지막이야. 나랑 뽀뽀해 주면, 깨끗이 잊을게. 깨끗이 너를 잊고, 나도 무림으로 가 멋진 여협이 될 거야. 도와줘. 내가 온전히 내가 바라는 내 삶을 살 수 있도록."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그녀가 눈을 감았고.

천천히, 또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또 한 번 시간이 멈추길 바랐다.

헤어나오기 싫은 황홀감이 나와 그녀를 깊은 극락의 무저갱으로 빠뜨리는 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