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148화 (147/174)

148화

만리상단의 본단이 있는 중경에 도착했다.

먼저 비걸개 선배와 접촉했다.

암구호를 대고.

만리상단을 책임지고 있는 비걸개다 보니, 삼결이 아닌 나와 같은 사결제자였다.

이미 만리상단에서도 선배 비걸개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나의 방문에 대해서 모두 합의를 마친 상황이었다.

비걸개 선배가 나를 만리상단의 고수에게 안내했고, 다시 만리상단의 고수와 함께 만리상단 본단의 내원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만리상단의 본단은 말 그대로 그냥 으리으리했다.

처음엔 내가 황궁에 잘못 온 게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크고 웅장하고 거대하고 화려하고, 무슨 말을 가져다 붙여도 부족할 만큼 대단한 곳이었다.

만리상단의 고수는 상단주의 대전각 밖에서 다시 나를 대총관에게 안내하였고.

대총관을 따라 상단주가 있는 대전각 안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연주언의 아버지이자 만리상단의 상단주인 연단첨.

그리고 일전에 그와 함께 봤던 만리상단의 가모이자 연주언의 어머니인 한희이가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봐도 연주언의 어머니는 그 나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젊어 보였다.

아름다운 건 두말할 나위가 없고.

살 떨리게 아름다운 그녀다.

뭐,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고.

아무튼…….

두 사람은 나를 보자마자 미안함을 가득 담은 얼굴로 사과부터 했다.

"나 대협, 어서 오세요."

"일전 귀보교상에서 신분을 속인 것은 사과하겠습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죄송해요, 나 대협."

"아닙니다. 잊은 지 오래입니다."

우리는 사과와 인사를 몇 번 더 주고받은 후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오늘 도움을 받으러 온 건 나다.

그래서 한껏 예의도 갖추고… 음.

다과(茶果)가 나왔는데.

뭐지?

차(茶)에 문외한인 내가 마시고 싶다는 욕구를 강하게 느낄 정도로 향긋한 차가 나왔다.

과자는 더 심하다.

과자에… 미친! 금가루가 뿌려져 있다.

"나 대협, 다과가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걸 들여오라 할까요?"

"아, 아닙니다. 이게 먹는 게 맞나 싶어서요."

"한번 드셔 보세요.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걸 올리라 할게요."

뭔가 의심쩍어 조심스레 금가루가 뿌려진 과자를 하나 집어 입에 가져다 댔다.

그런데…….

와!

와!

하하하!

그냥 웃음이 났다.

세상에 이렇게 맛난 과자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내가 웃자 연단첨과 한희이도 마음을 놓은 듯 미소를 지었다.

"입에 맞는 모양입니다."

"네, 혹시 이거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제 동료들에게도 주실 수 있나요?"

"삼부협이요? 이미 나갔을 겁니다. 입에 맞으시면, 가실 때 넉넉히 싸 드리겠습니다."

"냠냠. 쩝쩝. 맛있… 하하.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말씀 편히 해 주세요. 연 소저와 동년배이고 친구 같은 사이인데요."

"그래도 어찌 천하의 나 대협께 그럴 수 있겠습니까?"

우스운 이야기다.

천하의 나 대협?

그래 봐야 좀 잘나가는 무림의 수많은 후기지수 중 한 명일 뿐이다.

내 명성이 이미 그 정도를 넘긴 했다지만, 그래도 만리상단의 상단주가 저리 굽힐 수준은 절대! 결코! 완전! 아니다.

뭔가 있다.

이래저래 내가 몇 번을 더 말한 후에야 상단주는 편히 말하기로 했고, 한희이는 그래도 존대를 이었다.

분명 뭔가가 있는데.

뭘까?

내가 이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저들의 표정 그리고 몸 상태 때문이다.

일전에 봤을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표정은 어둡고, 심지어 건강마저 많이 좋지 않다.

독은 아닌데?

만리상단이라면 황궁 못지않은 대단한 의원이 분명 여럿 존재할 테고.

그런데 왜?

왜 저리 표정이 어둡고 기운은 쇠해 있는 거지?

"혹, 무슨 일 있으세요? 냠냠."

아! 젠장.

과자에서 손을 놓을 수 없다.

그래서 과자를 먹으면서 물었는데.

음, 표정이 더 어두워지는 두 사람이다.

"냠냠. 꿀꺽."

일단 과자부터 삼키고.

"정말 무슨 일이 있으시군요?"

내가 정색을 하고 물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 눈치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어두움에 이제는 난감한 기색까지 보이는 두 사람이었다.

알 것 같다.

"혹시……."

내가 다시 입을 열자, 긴장한 얼굴로 나를 주목하는 두 사람.

확신이다.

"불사괴가 이곳에도 출현했나요?"

내 말에, 조금은 허탈한 얼굴을 하는 연단첨 상단주.

"불사괴는 없다네. 직접 확인까지 모두 마쳤다네."

내 예상이 엇나갔군.

뭐, 그럴 수도 있지.

잠깐!

그런데 불사괴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을 했다고?

"인간 불사괴가 숨어 있다면 구분이 어려웠을 텐데요?"

내 물음에 연단첨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서역에 교황청이라는 곳이 있고, 또 그곳에 교황이라는 분이 계시다네. 불사괴가 출현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교황청에 연락해 인간 틈에 섞여 있는 악마를 구분할 수 있는 성물과 또 이를 물리칠 힘을 지닌 성수까지 구할 수 있었다네."

"성물과 성수요?"

"그렇네. 수천 년 전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우리 인간들의 땅에 떨구고 간 물건이 그러한 힘을 지녔고. 서역에서는 신성시되기까지 하는 성자들이 수백 년 동안 기도했던 장소에서 터져 나온 샘물이 그러하네."

"아! 그런 게 있었군요. 효험은 있나요?"

"신성불사대전에서 나타났던 식인 불사괴들(좀비) 말일세. 무림맹에 부탁해 몇 구의 식인 불사괴를 산 채로 잡아 와 이곳에서 실험을 했네. 그들을 감지한 성물은 빛을 발했고, 그들에게 성수를 뿌리자 마치 화골산을 뿌린 것처럼 괴로워하다가 한 줌의 진액으로 녹아 소멸했다네."

"어! 정말 대단하네요."

여기서 대단하다는 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지녔다.

서역의 성물과 성수의 효험이 대단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두 번째 의미는, 만리상단의 재빠른 움직임과 그러한 귀물을 얻을 수 있는 능력에 탄복함이다.

정말 여기는 없는 게 없는 그런 세상인 것 같다.

"아직 식인 불사괴 세 구가 살아 있는데, 자네가 보고 싶다면 직접 시연해 보여 주겠네."

"보고 싶기는 하네요. 지금 말고, 떠나기 전에 한 번 보여 주세요."

"그러함세. 하하."

내 호기심 가득한 얼굴에 연단첨이 웃었다.

그 옆에 있는 한희이도 옅은 미소를 지었고.

그런데, 여전히 어둡다.

두 사람 얼굴에 그늘이 가득하다.

도와야겠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난 이들에게 도움을 받으러 왔다.

은혜를 입어야 하는데, 그러면 갚아야 한다.

미리 갚는다 치자.

아니, 단문령이 타고 간 천주마도 이들에게서 받은 거다.

연주언에게 팔다리의 은혜, 목숨의 은혜도 있고.

갚아야 한다.

"표정이 어두우십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탄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다시 두 사람이 머뭇거린다.

그러다 한희이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실은… 딸 문제 때문에 작은 근심이 있어요."

"딸이요? 연 소저한테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내가 다급히 묻자, 다시 한참을 망설인 한희이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게… 휴우. 그게 실은……."

아! X라 답답하다.

뭐야?

뭐냐고?

그냥 속 시원히 말 좀 해 주십시오!

"딸아이가 나 대협과 헤어진 후 자신의 전각에서 나오지 않고 있어요."

곧바로 연단첨이 말을 이었다.

"석 달 동안은 밥도 먹지 않다가, 그나마 미음이라도 입에 대기 시작한 게 얼마 전이라네."

"저와 헤어진 후부터요?"

두 사람이 더 어두워진 얼굴로 대답 대신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생각났다.

그녀와 어떻게 헤어졌는지.

* * *

"그런데 태한아."

"왜? 나 진짜로 가 봐야 해."

"내가……."

"……?"

"내가 너 좋아하면 안 돼?"

왜지?

좀 많이 모자라고, 싸가지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연주언인데.

나를 빤히 쳐다보며 저란 말을 하는데.

정말 아주 살짝, 정말 아주아주 미세하지만 심장이 두근거렸다.

"안 돼!"

"왜?"

"그냥!"

"왜 그냥?"

"난 너 안 좋아해!"

"다른 여자 생겼어?"

"뭔 개소리야? 그리고 무슨 말이 그래? 다른 여자라니?"

"아니, 그냥. 물어보는 거잖아."

"너, 나 진짜로 좋아하는 거야?"

"조금. 재밌어, 너랑 있으면."

"휴우, 철 좀 들어라. 나, 간다."

"어디 가는데? 같이 갈까?"

"따라오면……."

"따라가면?"

주먹이 부들부들.

참자, 참아.

상대는 만리상단의 금지옥엽이다.

"따라오지 마. 나 지금 임무 수행 중이야."

"오! 멋지다."

"휴우, 연주언."

"응? 왜? 마음이 바뀌었어? 나도 같이 가도 돼?"

"고마웠다. 내 팔다리가 잘릴 위기에 도와준 거. 그리고 보석을 팔 수 있게 도와준 것까지. 이건 진심이다. 정말 고마워."

"그러지 마. 나 지금 갑자기 슬퍼지려고 해."

"잘 살아, 행복하게. 은혜는 어떻게든 갚을게. 하지만 우리가 다시 만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럼 간다."

* * *

맞아!

그때 그녀가 나에게 고백했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그냥 원래 좀 이상한 애니까 그러려니 했었다.

그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냥 떠났는데.

떠나면서도 슬쩍 걱정이 되긴 하였다.

내가 너무 매몰차게 굴었나?

얘가 울면 어쩌지?

사실 걱정보다는 그냥 좀 찝찝했던 거였는데.

아!

반년 가까이 방 밖을 나오지 않을 정도로 큰 충격이었고 아픔이었다니.

미안하다.

아주 많이.

어쩌면 그때, 그녀의 고백은 대수롭지 않았던 게 아니라, 정말 큰 용기를 내어 한 고백이었나 보다.

그걸… 난 무시했고.

연천담이 말했다.

"우리 딸아이가… 나 공자를 많이 좋아하네."

"그게……."

한희이가 말했다.

"혹시… 일전 귀보교상에서 만났을 때, 나 대협에게 여인이 없다고 했는데. 지금도 같은가요?"

미안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지금은… 생겼습니다."

순간, 연단첨과 한희이는 정말 하늘이라도 무너진 것과 같은 얼굴을 했다.

"죄송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고.

"아니네. 나 공자가 사과할 일이 아니지 않은가. 괜찮네."

그렇게 말했지만, 어찌 아비의 마음을 모를까.

아니, 표정에서 슬픔이 흘러내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 가닥 희망을 남겨 놓은 모양이다.

"나 공자, 오해하지 말고 들으시게."

"네, 상단주님."

"그게 말일세. 무릇 영웅은 3처, 4첩을 거느린다는 말도 있다네."

아! 얼마나 상황이 안 좋으면 아버지의 입에서 저런 말까지 나올까?

내 마음이 더 아프고 쓰렸다.

그런데 말이다.

무릇 불과 불이 만나면 화염이 되기 마련이다.

물과 물이 만나면 수재(水災)가 범람한다.

둘이 만나면, 분명 피를 볼 거다.

둘 중 한 명은 반드시 죽는다.

왜?

둘 다 정상이 아니지 않은가.

그것도 상태가 심하게 정상이 아니다.

솔직히 표현하자면, 예쁜 만큼 미쳤다.

둘 다.

그래서 만나면.

상극이다.

"좋은 사람인가 봐요. 나 대협이 마음에 두고 있는 그 여인이요."

한희이의 말에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재차 나에게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연단첨이 그녀의 손을 살포시 잡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내 고개를 떨구고 마는 한희이.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말이 있다.

맺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는 말로, 자신이 저지른 일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뜻이다.

"제가 연 소저를 직접 만나 봐도 될까요?"

"그래 주면 우리야 너무 고맙지."

* * *

연주언의 전각으로 갔다.

그녀 혼자 기거하는 전각인데, 작은 성을 보는 듯하다.

정문을 통과하고도 한참을 걸어야 그녀의 전각에 도착했고, 다시 또 한참을 걸어 그녀가 있다는 후원으로 갔다.

후원이… 하하.

보통 후원이라 하면 집 뒤에 있는 작은 정원을 말하지 않겠나.

그런데 이건 그냥, 무슨 작은 산과 수림을 그냥 옮겨다 놓은 듯하다.

사방에 꽃이 만발하고, 기이한 새들도 꽃들 위를 오가고.

뭐, 그렇다.

그리고 그렇게 아름답게 핀 꽃들 사이에 그녀가 서 있었다.

나에게 등을 보이고, 저 먼 곳을 바라보는 그녀.

나는 천천히 걸어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험."

그녀도 제법 고수이기에 내가 온 것을 알고 있을 테다.

그래도 일부러 기침을 했다.

"왔어?"

여전히 내게 등을 보인 채 말하는 연주언.

마음이… 안 좋다.

내 마음이 그렇다.

기세 좋게 여기까지 오긴 왔는데, 이럴 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엉거주춤, 나는 여전히 그녀의 등을 보며 바보같이 우물쭈물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그렇게 계속 서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그녀가 몸을 돌려 나를 향했다.

여전히, 여전히 눈이 멀 정도로 아름다운 그녀다.

후원에 핀 꽃이 그녀인지, 그녀가 꽃인지.

그런데 의외다.

많이 힘든 표정을 지을 줄 알았는데.

기운이… 넘치네?

그녀가 표정만큼이나 기운찬 목소리로 말했다.

"결정했어!"

"응? 어? 뭘?"

"나!"

"응."

"무림의 여고수가 될 거야."

얘가… 진짜로 많이 아픈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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