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142화 (141/174)

142화

개방의 명성이 진동함과 동시에 뜻밖의 소식도 들려왔다.

천하에 산재한 거지들이 체해서 많이 아프다는 소식이었다.

왜?

개방이 천하를 구했으니, 개방의 거지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어떻겠느냐?

찬밥 한 덩이 주던 걸 두 덩이 세 덩이 열 덩이씩 주고.

심지어 마을의 거지들을 집으로 초대해 연회를 벌여 주는 곳도 있다고 했다.

천하의 거지들이 배 터지게 따시고 맛난 밥을 급하게 먹다가 체했다는 웃픈 소식이었다.

하지만 기쁜 소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신성불사대전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

다시 한번 무림을 커다란 충격에 빠뜨리는 소식이 천하 각지로 번졌다.

데몬 언데드와 용맹하게 싸우다 크게 다쳤던 무림맹주가 인사불성이 되어 생사고비를 넘기다가 결국… 죽음.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곧 죽을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무림맹에서는 이미 그의 장례와 차기 맹주 선출에 관해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응, 안 죽음.

내가 살렸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이야기냐 하면.

닷새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신성불사대전이 끝난 다음 날 이른 새벽.

* * *

"당가 장로, 독선께서는 아직이신가?"

"미, 미안하오. 전서응을 다섯 마리, 전서구를 서른 마리나 날렸소. 아마 지금 촌각을 다투며 이곳으로 오고 있을 것이오. 조금만, 조금만 맹주님을… 미안합니다."

사천당가의 무림맹 당가 장로는 죄를 지은 것도 없으면서 연신 사과를 했다.

신성교에 꾸려진 무림맹 임시 본부의 내전 중심 전각.

그곳에서 사경을 헤매는 무림맹주가 혼절한 상태로 생사를 오가고 있었다.

무림맹 약룡전 의원들이 별의별 노력을 다 해 봤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맹주는 깨어날 수 없었고, 그의 호흡과 기운은 서서히 힘을 잃어 가고 있었다.

결국…….

무림맹 약룡전의 전주가 모여 있는 무림맹 장로들을 향해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이 상황이라면… 휴우. 죄송합니다. 한 시진을 넘기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 후에 독선이 도착한다고 하여도, 아니 그 후에는 대라신선이 와도 방법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모두가 커다란 슬픔에 빠지는 순간이었다.

"맹주님! 엉엉."

"맹주님! 엉엉엉."

순화자와 속리자는 그를 얼싸안고 오열까지 터뜨렸다.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맹주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었다.

맹주가 순화자, 속리자의 말처럼 꽤 괜찮은 사람이었나 보다.

나는 맹주가 위독하다는 상황에 이곳을 찾아왔고, 전각 밖에서 기감을 통해 이러한 상황을 모두 감지하고 있었다.

- 상취개 장로님.

- 태한아, 지금 맹주님께서…….

- 저 좀 데리고 들어가 주세요.

- 무슨 일이냐? 상황이 심각하다.

- 그러니까 저를 데리고 가 달라는 말이에요. 잊었어요? 탈혼독의 해독약을 만든 게 누군지.

- 하지만 무림맹 약룡전의 전주도 가망이 없다고 했다.

- 어차피 돌아가실 거, 제가 한번 보는 게 낫죠. 저, 안 믿어요?

- 믿는다.

- 그럼, 어서요.

상황이 꽤 심각한지라, 상취개 장로도 살짝 망설인 것 같다.

하지만 그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들 제 말 좀 들어 보시겠습니까?"

모두가 커다란 슬픔과 충격에 잠긴 상황.

곡소리와 흐느낌만이 들리던 장내에 상취개가 나섰고.

모두의 시선이 쏠리자 상취개가 조심스럽게 다음 말을 이었다.

"지금 이곳에 탈혼독의 해독약을 만든 저희 방도가 와 있습니다. 그 방도에게 맹주님을 한번 보게 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상취개의 말에 자리에 있던 무림맹 장로들은 순간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너무나 큰 슬픔과 충격이, 무림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들마저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의외의 인물이 나섰다.

무림맹 약룡전의 전주였다.

"혹시 멸마협 나태한 대협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전주님."

"어서! 어서 모시고 와 주십시오!"

약룡전주의 다급한 반응에 몇몇 장로들이 의아해했다.

누군가가 말했다.

"멸마협 나 대협이 이번 신성불사대전에서 큰 공로를 세운 건 제가 직접 보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맹주님이 위독한 상황에 그를 왜 부르자는 것입니까? 아무리 탈혼독의 해독약을 만들었다 한들, 좀 과한 거 아닙니까?"

곧바로 약룡전주가 말했다.

"대자연단에 대해 들어 봤습니까?"

"어……."

"그거……."

"아!"

여기저기서 얕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소림의 대환단에 버금간다는 영약입니다. 다들 아시지 않습니까? 그걸 만든 게 바로 나태한 대협입니다."

다시 누군가가 말했다.

"그거야 좋은 영초나 영단, 그렇지! 붉은 코뿔소의 뿔이 워낙 좋은 재료이기에 가능했던 것 아닙니까?"

"좋은 재료가 있다고 누구나 훌륭한 영단을 만들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왜 소림사의 대환단을 소림사에서만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다들 아시지 않습니까? 당가에서 무형지독을 복용하고도 나 대협은 이를 스스로 해독하였습니다."

"그, 그게… 헛소문이 아니었습니까? 어찌 무형지독을 복용하고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허무맹랑한 헛소문으로 치부했거늘… 어허!"

"우리 약룡전의 부전주 그리고 질풍백호대의 대주가 현장에 있었습니다. 소문은 하나의 거짓이 없는 모두 사실입니다.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어서 나 대협을 모시고 와야 합니다. 맹주님을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어서요!"

"이미 와 있습니다."

상취개가 다시 나섰고.

덕분에 나는 곧바로 전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약룡전주를 제외한 모두를 전각 밖으로 내보냈다.

무림맹 장로들은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또 몇몇은 노골적으로 불신의 눈빛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난.

약룡전주가 지켜보는 가운데 맹주의 상태를 살폈다.

대자연의 기운을 그에게 주입하였고, 그의 오장육부와 대맥은 물론 세맥까지… 음.

뭐지?

이 양반 말이다.

지금 꾀병을 부리고 있다.

- 맹주님?

- …….

- 맹주님? 깨어 계신 거 다 알아요.

- …….

- 맹주님!

- …….

분명 깨어 있는데, 대꾸가 없다.

이 양반 뭐야?

내상이 있긴 있고, 심각한 수준은 맞다.

심지어 불사괴의 그 사이한 기운까지 고스란히 머금고 있다.

하지만 맹주 정도의 고수라면,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분명 며칠이나 십 며칠이 걸릴 수는 있다 한들 스스로 치료가 가능한 수준이다.

- 야!

반말을 좀 해 봤다.

- 야이, 새끼야!

욕도 슬쩍 해 봤다.

그래도 꿈쩍도 하지 않는 맹주.

- 어쭈? 이 새끼가, 어디서 꾀병이야? 한 대 맞을래?

그때였다.

- 혼난다.

- 엇! 맹주님!

- 아무리 그래도 맹주한테 ‘이 새끼야’는 너무 심한 거 아니냐?

- 죄송합니다! 이게 충격 요법이라는 신종 치료법입니다.

- 구라치지 마.

- 아! 그래도 살아 계셔서 다행입니다.

- 모른 척해. 다 생각이 있어서 이러는 거니까.

- 혹시 그 생각이 무슨 생각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 그냥 가만히 있어. 깊은 뜻이 담긴 계책이야.

- 한 시진 후에 돌아가셔야 하는데요?

- 어험. 뭐, 적당히 자네가 둘러대.

- 뭐라고요?

- 자네 의술 뛰어나지 않은가? 탈혼독 해독약 만들었다고, 내가 친필로 서신도 써 주고 우리 무림맹의 영단인 무룡단(武龍丹)도 하사하고. 그 정도면 좀 알아서 해 줄 수 있잖은가.

- 에이, 그건 또 아니죠. 아까 순화자 장로님하고 속리자 장로님 오열하는 거 못 봤어요? 그 노인네들이 우는데, 저도 울컥하더라고요. 어떻게 그런 사람들한테 거짓말을 해요? 전 못 해요.

- 그것도 구라야.

- 네?

- 그 인간들도 알고 있다고. 짜고 치는 거야.

- 아!

- 휴우. 자넨 정말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군. 탈혼독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놀랐고, 전장에서도 나를 놀라게 하더니, 이젠 내가 작정하고 부리는 꾀병까지 꿰뚫어 보는군. 허허. 약룡전주까지 속였는데.

- 순화자, 속리자 장로님께 여쭐까요?

- 어쩔 수 없지. 지금 무슨 상황인지는 그들에게 듣고. 아!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

- 무슨 방법요?

- 계책을 좀 변경해야겠네. 이제부터 자네도 한패야. 내가 하는 이야기 잘 듣게. 그러니까…….

잠시 후.

"끄으으응."

"맹, 맹주님! 맹주님, 정신이 드십니까?"

맹주가 깨어났고, 이를 지켜보던 약룡전주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고 말았다.

"여긴… 어딘가? 끄응. 아니, 불사괴는… 불사괴는 어떻게 됐나?"

약룡전주가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신성불사대전의 결말을 설명했다.

몇 마디 말이 더 오간 후.

"나 대협이… 날 살린 건가?"

"그렇습니다, 맹주님."

"나 대협……."

"네, 맹주님. 아직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잠시 기력을 북돋운 것뿐입니다. 여전히 치료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더 시간이……. 순화자, 속리자, 상취개를 부르게. 마지막이 될지 모를… 끄윽, 유언……. 어서…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시간이 없네."

그날부터 맹주의 치료는 내가 전담하게 됐다.

순화자, 속리자, 상취개가 항시 맹주 곁에서 그를 지키고, 간호하며… 응, 구라다.

매일 무림의 훗날을 위한 대책 회의를 이어 갔다.

"그래서 왜 꾀병을 부린 건데요?"

"아! 목말라. 상취개 장로, 혹시 숨겨 둔 술 없나?"

"있긴 있는데… 태한아, 맹주님께서 술 마셔도 되느냐?"

상취개가 품속에서 술병을 꺼내려다가 움찔하더니, 내게 물었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술병이 맹주의 손에 들리고.

벌컥벌컥.

술 못 마시고 죽은 귀신이라도 들렸는지, 술병 가득했던 술을 대번에 비워 버렸다.

이를 보며 아까워 죽는 상취개.

그러거나 말거나, 맹주가 입가에 묻은 술까지 소매로 훔치고는…….

"소림의 불존은 무려 38년 동안 숭산에서 안 내려왔어. 자기만 성불하면 되나? 중이라는 작자가 응! 백성들이 죽건 말건, 자기만 매일 수양을 쌓아요."

뭔 소리야?

"무존 그 인간도 똑같아. 무림에 떡하니 한자리를 차지하고는, 아예 무림과 다른 세상에 산단 말이지. 혼자 도도해. 혼자 천하무적이고. 아니, 힘이 그렇게 세면 남는 힘으로 남도 좀 돕고, 무림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봉사도 하고! 하여간 빌어먹을 놈들 같으니라고."

걸쭉한 맹주의 욕설에 순화자가 슬쩍 내 눈치를 보며 전음을 보냈다.

- 평소에는 저렇게까지 화를 내거나 욕을 하지 않으신다네. 이번 항주 불사괴 문제 때문에 불존과 무존에게 간절히 도움을 요청했는데, 그들이 와 주지 않아 화가 많이 나셔서 그러네. 만약 두 사람 중 한 명만 와 줬어도, 피해가 이렇게까지 크지는 않지 않았겠나.

- 그렇겠지요.

맹주가 나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그런 것일세."

"뭐가요? 꾀병 부리신 거요?"

"그래, 내가 죽는다고 하면 차기 맹주를 뽑아야 할 것이고. 불존이 아무리 싫다고 해도, 무림의 판도가 달라질 상황에서 소림사는 최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길 원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불존이 직접 오는 방법이 최고일 테니, 어떻게 해서든 이곳으로 불존을 보낼 것일세."

"아! 그런 뜻이 있었군요. 오! 대단합니다."

"무존도 마찬가지야. 스스로 무림 맹주가 되거나, 아니면 무황성과 가까운 쪽의 인사를 맹주로 추대할 걸세. 그러려면 당연히 무황성의 힘을 과시해 영향력을 행사해야 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 역시 직접 모습을 보여야겠지."

"맹주님!"

"그래, 나 대협."

"존경합니다! 탁월한 계책을 쓰셨네요."

"자네에게 칭찬을 받으니, 이거 괜히 민망하구먼. 허허허. 좀 도와주시게."

"물론입니다.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누군 개고생하는데, 자기들만 편하게 사는 꼴은 절대 못 봅니다."

"그렇지? 큭큭. 이 노인네들 오기만 해 봐라, 제대로 굴려 줘야지."

"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입니다. 저를 제대로 굴려 먹었던 것처럼, 그 인간들도 제대로 좀 부려 먹어 주십시오."

나와 맹주가 쿵쿵짝이 딱 맞아떨어지자, 상취개와 순화자 그리고 속리자가 씩 웃는다.

그러더니 나를 보며 하는 말이…….

"누굴 부려 먹는 데에는 또 우리가 전문 아닌가? 걱정 마시게. 자네를 부려 먹었던 거 열 배로, 그 노인네들을 부려 먹을 테니. 하하하."

"인정! 완전 인정! 제대로 좀 굴려요. 하하하!"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순간이었다.

* * *

다시 닷새 뒤인 오늘, 현재.

신성교에 임시로 꾸려진 무림맹 본부에 엄청난 소식이 퍼졌다.

소림사의 불존이 38년 만에 숭산을 하산해 이곳 무림맹 임시 본부에 도착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무려 사대금강과 백팔나한까지 이끌고 왔다.

다시 한 시진이 지나기도 전, 무림의 일에는 일절 상관하지 않던 무황성에서 무존이 직접 무황성의 최고수 3,000명을 이끌고 왔다는 소식이 모두를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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