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136화 (135/174)

136화

순식간이었다.

남궁무검과 창궁검무대가 나를 막아서자마자, 인간 불사괴는 전력으로 도주를 했는지 빠르게 내 기감 밖으로 벗어났다.

놓쳤다.

화가 났다.

정말, 정말로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았다.

남궁무검에게.

"너, 이 X새끼!"

채채채채채채채채채챙!

내 욕지거리와 동시에 나를 향해 검을 뽑아 드는 창궁검무대.

창궁검무대 100명이 전력으로 싸우면 한 명의 화경의 고수를 상대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조금도 두렵지 않다.

지금 내 분노가, 모든 두려움을 까맣게 지워 버렸다.

사실, 난 그래도 마지막까지 놈을 믿고 싶었다.

간절히 놈이 아니길 바랐다.

그래도 십수 년 함께 해 온 전우가 바로 녀석 아닌가.

아무리 재수가 없어도, 그 힘든 시기를 모두 함께 이겨 냈는데.

그래서 정말 녀석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었는데.

그 기대와 간절함이 이제는 모두 분노로 바뀌었다.

"남궁무검, 방금… 방금 다 봤다. 네가 인간 불사괴에게 하는 짓거리."

"비걸개 훈련생 때부터 덜떨어진 놈인 건 알고 있었는데, 너는 정말 머리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구나. 너, 그거 알아? 비걸개 훈련생들이 걸삼번보다 너를 더 걱정했던 거. 네가 싫어서 비걸개에 떨어지길 바랐던 게 아니야. 네가 비걸개가 되어 무림으로 나가면 죽을까 봐 네가 떨어지길 바랐던 거라고. 걸삼번이 아니라, 걸이번 너!"

"되지도 않는 소리로 뭔가 해 보려고 하는데. 남궁무검아! 너… 이미 엿됐어, 새끼야."

꿈쩍도 안 한다.

화를 내지도 않고, 그냥 가만히 나를 보고 있다.

그러더니 하는 말이…….

"휴우, 그래도 정말 널 죽일 수는 없고. 걸이번, 기회를 주겠다. 조용히 따라와라. 이번 일이 모두 끝나면 조용히 풀어 주겠다."

"진심이냐?"

"약속한다.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마. 좋게 가자, 걸이번."

"아니. 너 지금 진지하게 묻는 거냐고?"

"……?"

"내가 할 소리를 지금 네가 하고 있잖아! 너랑 네놈의 졸자들 모두 칼 버리고 무릎 꿇어. 그러면 죽이지는 않을게."

순간, 남궁무검은 물론 창궁검무대 100명 모두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난 여전히 시선을 남궁무검에게 고정한 채, 뒤에 있는 단씨 형제에게 외쳤다.

"기도! 개방!"

"넵! 매제 형님!"

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내 뒤를 바치고 서 있는 삼 형제.

그들이 꼭꼭 숨겨 두었던 마공을 개방하자, 엄청난 소용돌이가 우리를 중심으로 몰아쳤다.

곧바로 100명의 창궁검무대와 거의 맞먹을 것과 같은 엄청난 마기를 뿜어 대는 이들.

남궁무검이 인상을 와락 구겼고, 창궁검무대도 조금은 당황한 기색이 살짝, 아주 살짝 보였다.

"믿는 구석이… 저 산적같이 생긴 놈들이었냐? 그래서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설치고 다녔던 거야?"

나를 비꼬는 남궁무검.

하지만 그따위 말은 가볍게 무시하고.

나는 놈이 조금 전에 했던 말을 고스란히 되돌려 주었다.

"자수해라, 남궁무검. 그럼 네 목숨만큼은 살려 달라고 내가 윗선에 선처를 구해 보겠다."

부들부들 떤다.

남궁무검 녀석도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은 모양이다.

버럭 소리까지 지르며.

"미친놈아! 지금 네가 얼마나 큰일을 망치고 있는지나 알아? 아무것도 모르면 그냥 좀 잠자코 있으라고, 거지새끼야!"

"큰일? 내가 망친다고? 얼마든지 망쳐 주지. 아니, 내 목숨이 다할 때까지, 네놈이 하는 짓 모두를 망가뜨려 버릴 거다."

"하아! 정말 답답해 미치겠… 잠깐!"

제 화를 스스로 억제하지 못해 분통을 터뜨리던 녀석이 문득 무슨 생각이라도 떠올랐는지 토끼 눈을 떠 나를 보았다.

그러더니 하는 말이.

"너… 설마, 너도 한패냐?"

"뭔 개소리야?"

"네 곁에 있는 세 녀석. 마공을 익힌 마인들이잖아! 개방은 분명 아니고… 너 걸이번 이 새끼, 마교하고 내통하고 있었던 거야?"

"하아! 이젠 하다 하다 나를 마교하고 엮으려고? 그러면 네놈이 한 짓이 없던 게 돼? 다 봤어! 봤다고! 네가 인간 불사괴를 풀어 주며 내렸던 명령 모두를 내가 똑똑히 보고 들었다고, 새끼야!"

내 버럭에 놈은 여전히 뭔가 잔대가리를 굴리는 듯 눈알을 마구 굴리기만 할 뿐, 대꾸하지 않았다.

계속 나와 내 뒤에 있는 단씨 삼 형제를 번갈아 보기만 했다.

나도 마음을 좀 진정시켰다.

이미 모두 드러난 진실이지만, 그래도 그 진실을 알고 싶었다.

놈의 입을 통해서 말이다.

"남궁무검, 묻겠다."

"……?"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지? 정말 무림 정복이라도 꿈꾸고 있는 것이냐? 검제가 몰랐을 리는 없고. 검제가 시킨 일이냐?"

순간!

검제를 입에 올려서일까?

창궁검무대에서 짙은 살기가 폭발하였다.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남궁무검이 아직 명령을 내리지 않았기에 참고 있지만, 뭔가 아주 작은 계기만 있어도 일제히 우리를 향해 검을 휘두를 기세의 놈들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겉으로는 착한 척, 의로운 척, 협객인 척, 좋은 일은 혼자 다 하는 것처럼 하더니. 결국 한다는 게 불사괴 같은 사이한 존재를 만들어 무림을 혼란에 빠뜨리고,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그래서 무림에 군림하는 거였어? 검제와 네가 원하는 게 그런 거냐고! 대답해! 대답해 보라고, 남궁무검 이 배신자 새끼야!"

"닥쳐라! 감히 그 천한 입으로 어디 나의 아버지를 논하느냐!"

"미친 새끼, 돌아도 단단히 돌았군. 천해? 내가? 한때 이 마을 저 마을 돌며 구걸하던 과거는 잊은 거야? 너 혼자 이제 고상한 거냐고!"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 원망하지 마라. 난 분명 너에게 한 번의 기회를 줬다. 거부한 건 너다. 창궁검무대!"

처처처척!

"충!"

"놈들을 잡는다! 항거하면 죽여도 무방하다!"

"충!"

"그래, X팔! 오늘 누가 죽나 끝까지 해 보자. 단 형님들!"

"넵! 매제 형님!"

"저 새끼들… 다 밀어 버려요. 오늘 빚 한 번 다 갚아 보자고요."

뚜두둑.

뚜두둑.

단씨 형제들은 애가 타고 있었다.

나와 남궁무검이 말싸움만 주고받으니까, 혹시라도 싸움이 흐지부지하게 끝날까 봐 걱정한 거다.

그러면 빚 못 갚잖아.

그렇게 내 명령이 떨어지자.

고개를 좌우로 뚜두둑, 뚜두둑.

다시 주먹을 빙글 돌리며 뚜두둑, 뚜두둑.

빚 갚는다는 말에, 염라대왕의 목이라도 딸 기세로 한없이 기뻐하며 슬금슬금 앞으로 나왔다.

"창궁검무대, 공격!"

"단 형님들! 갑시다!"

그렇게 우리 넷과 남궁세가의 싸움이 시작되었… 아!

"멈추어라!"

깊은 산중에 육합전성(六合傳聲)이 울려 퍼졌다.

젠장!

성존의 목소리다.

그의 목소리가 상하좌우 사방에서 들려 방향을 알 수 없었다.

아니, 원래라면 알 수 없어야 하지만 나는 알 수 있다.

한 곳을 주시하자 곧 성존이 모습을 드러냈다.

엄청난 속도로 이곳을 향해 날아오는 성존.

그런데 젠장!

혼자가 아니다.

150명에 달하는 신성교 고수들을 이끌고 온다.

돌겠네.

쉬이이이이이이이익.

처처처처처처처척.

가뿐하게 착지하는데, 누가 봐도 남궁세가를 돕고 우리의 퇴로를 차단하는 포위의 진이다.

나와 시선을 마주친 성존.

씩 웃는가 싶더니, 곧바로 남궁무검에게로 다가간다.

"남궁 공자, 괜찮은가?"

그런 성존의 말에 내 눈치를 보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남궁무검.

성존은 이미 모든 것이 드러났다고 생각한 모양이고, 남궁무검은 둘의 관계를 나에게 들키지 않으려 그런 것일 테다.

"별일 없어 보이니 안심이군. 만약 남궁 공자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검제를 볼 면목이 없었을 텐데 말이야. 허허허."

어깨까지 툭툭 치며 말하는 걸 보니, 보통의 관계가 아닌 게 확실하다.

남궁무검은 더더욱 당황했고.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주님."

"허허. 염려는 뭐, 우리 사이에. 허허허. 이만 물러나 있으시게. 저 발칙한 녀석은 우리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하지만……."

남궁무검이 나서서 뭔가 말을 하려고 하자, 성존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아무 걱정하지 마시게. 검제와는 다 말이 끝난 일이니. 허허."

말이 끝나?

무슨 말?

역시!

X새끼들, 모두 한패였어.

설마, 이들 말고 더 있을까?

하아! 머리가 복잡하다.

아니, 그보다… 여기서 어떻게 살아남지?

다시 남궁무검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친 후 몸을 돌려 나를 향하는 성존.

"의심 간다는 게 남궁 공자였냐?"

"한패…였구나?"

웃는다.

그냥 웃기만 한다.

"내가 먼저 물었다, 거지야."

"인정하는 거냐?"

"내가 먼저 물었다고 하지 않느냐, 어린 거지야."

"틀렸다."

"……?"

"의심하고 있었던 건, 남궁 녀석과 너까지 둘이었다."

조금도 당황하지 않는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또 웃는다.

"아까 너에게 기회를 줬는데, 멍청하게도 눈치채지 못하고 남궁 공자를 따라 이곳까지 왔구나. 과욕은 화를 부르는 법인데, 쯧쯧."

"어쩔 셈이지? 살인멸구라도 할 생각이냐?"

놈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희번덕거리는 광기 어린 미소다.

그러면서 놈이 슬금슬금 다가온다.

"글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하아!

젠장!

빌어먹을!

행운석도 통하지 않을 테다.

행운석이 발동하기도 전에 내 목은 떨어질 게 분명하다.

아니, 행운석이 발동하고 되돌아온다고 해도, 내가 저놈을 이길 가능성은… 영에 가깝다.

그때였다.

"매제 형님."

첫째 단두령이 나직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시선을 성존에게 고정한 채였다.

내가 뭐라 답을 하기도 전, 그가 말을 이었다.

"여동생… 저희 여동생을… 부탁합니다."

곧바로 둘째 단행령이 말했다.

"평생 오빠 노릇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속만 썩였습니다."

셋째 단발령도 말했다.

"미안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매제 형님."

세 형제가, 그렇게 한마디씩을 하며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빚을 갚기 위해?

아니다.

그들의 비장한 눈빛은, 여동생을 위해 나를 살리려 하는 것이다.

젠장!

저들도 저렇게 용감하게 싸우려고 하는데, 패배부터 생각한 내 꼴이 너무 우스웠다.

한심해도 어떻게 이렇게 한심할 수가 있겠냔 말이다.

"단 형님들, 저 사이비 교주 새끼는 제가 맡습니다."

성큼성큼 걸어 삼 형제 앞으로 나섰다.

순간 당황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삼 형제도 나를 말리지 못했다.

고수 간의 대치,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하늘만큼 커다란 구멍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성존.

"풉. 재미난 녀석들이군."

또, 웃는다.

하지만 우린 웃지 않았다.

웃을 수 없었다.

최선을, 정말 모든 것을 끄집어내 놈과 싸울 테다.

내가 성존에게 말했다.

"덤빌 거면 덤벼, 사이비 교주 새끼야."

피식.

정말 웃긴 듯 웃는… X새끼, 계속 웃네.

정말 딱 한 대, 딱 한 대만 놈의 면상에 주먹을 처박고 싶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할 테다.

그리고 내가 그런 각오를 다지자마자.

놈의 기세가 변했다.

부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그를 중심으로 엄청난 기의 용오름이 치솟았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그가 기운을 끌어 올리자, 150에 달하는 신성교의 고수들이 진법의 묘리까지 더해 일제히 기운을 끌어 올렸다.

우리는 그 진의 중심에 갇힌 꼴이 되었고, 그들의 기운에 항거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놈에게 한 방 먹이겠다는 내 각오만큼은, 더더욱 굳세어져 갔다.

그렇게 놈과 신성교의 고수들이 일제히 우리를 향해… 아!

"제자야! 나의 제자야!"

엄청난 사자후가 산 전체를 들썩이게 할 정도로 울려 퍼졌다.

그냥 사자후일 뿐인데,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과 같은 엄청나고도 다시 엄청난 기운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이내 어둠을 뚫고 혜성처럼 떨어지는 한 인영.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단순히 땅에 착지하는 것만으로도 주변이 초토화가 되었다.

거지다.

그것도 덩치가 엄청난 거지.

무치개 이 장로가 온 것이다.

그는 땅에 착지하자마자 서둘러 나에게 다가왔다.

"제자야! 괜찮으냐?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누가 괴롭히지는 않았느냐?"

"저… 이 장로님, 제가… 이 장로님 제자는 아닌 걸로 아는데요?"

"어허! 예비 제자도 제자고, 다 그런 거 아니겠느냐?"

"그런데… 혹시 혼자 오셨어요?"

"그렇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상대가 좀 많은데……."

"괜찮다. 나다, 나. 무치개."

어쩌면 천하제이인.

그래, 무치개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때.

"훗. 후훗. 거지가… 한 명 더 늘었군."

빌어먹을 성존이 또 비웃음을 흘린다.

그리고 그건, 나만 들은 게 아니다.

내 어깨를 양손으로 감싸고, 내가 어디라도 다쳤는지 이리저리 살피던 무치개의 얼굴이 순간 뚝 하고 굳어 버렸다.

그러더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돌려 우리를 비웃고 있는 성존을 향한다.

여전히 비웃음을 머금은 채, 시선을 내리깔듯 무치개를 쳐다보는 성존.

그런 놈을 향해 무치개가 싸늘한 음성으로 정확히 한 마디를 뱉었다.

"웃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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