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항주는 넓다.
그리고 크다.
사람도 무지하게 많다.
사람이 많으니 무림의 문파나 세가도 역시나 발에 차일 정도로 많다.
말추가 약속한 대로 순찰패를 들고 왔고.
고맙기도 하고 녀석이 기특하기도 하고, 그래서 선물로 소자연단 한 알과 만치자연단 한 알을 주었다.
그게 정확히 뭔지도 모르면서, 그냥 눈물까지 글썽이며 고마워하는 녀석이었다.
나는 노야장에게 이런저런 핑계를 댄 후 야검당을 벗어났다.
어디부터 가야 하나……?
길게 생각할 필요 없었다.
일단 무림맹과 신성교, 남궁세가에서 가장 의심하고 있는 곳부터 들르면 된다.
나와 단씨 삼 형제는 첫 번째 방문지로 일심방을 찾아갔다.
가기 전, 일단 단씨 형제들에게 검은색 계통의 멋진 무복도 새로 사 주고, 그럴듯한 검도 하나씩 사서 허리춤에 매달게 했다.
그들이 검객은 아니지만, 그래도 좀 위엄 있어 보이라고 그랬다.
워낙 한 얼굴들씩 하는 단씨 형제들을 그렇게 꾸며 놓으니, 정말 뭔가 엄청 있어 보였다.
아무튼 우리는 일심방을 찾아갔고.
순찰패를 보이자마자 방주가 버선발로 튀어나왔다.
확실히 불사괴 때문에 항주와 절강 일대가 난리긴 난린가 보다.
우리의 신분을 묻기는커녕, 내가 지시하는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하였다.
꽤 규모가 큰 문파였다.
한 시진이 조금 넘어서야 방도가 모두 모였는데, 무려 1,100명이나 되었고.
다시 일꾼과 식솔 등등을 모두 합치면 2,300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없다.
불사괴는 이곳에 없었다.
"우린 이만 가 보겠소. 협조에 감사하오, 방주."
"정말이십니까? 그럼 우리 일심방은 안전한 건가요?"
"그렇소."
"감사합니다, 대협!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하!"
얼마나 좋았는지 입이 찢어지는 일심방 방주였다.
떠나는 내게 이것저것 뇌물을 엄청나게도 챙겨 줬는데, 죄다 거절했다.
내가 청렴해서?
응, 거지가 청렴하면 누가 밥 먹여 주나?
원래 주는 건 다 받는 게 거지다.
하지만 내가 가진 돈과 보물들에 비하면 그냥 짐이 될 뿐이라 거절한 거다.
대신 인근 거지들에게 많이 베풀라 했고, 방주는 입꼬리가 귀에 걸려 몇 번이고 그러하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렇게 일심방을 떠나… 한 사람이 우리 뒤를 밟았다.
나는 모른 척 길을 걸으며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 따라오시오.
곧바로 인적이 없는 산으로 몸을 날렸다.
* * *
일심방에 머물던 식객 중 외팔이 검객이 있었다.
젊은 검객인데 외팔이였고, 내가 익히 잘 아는 인물이었다.
화산파 예매화(銳梅花) 이백운.
그와 인적 없는 산중에 만났다.
"나 대협, 그간 잘 지내셨소?"
"저야 잘 지냈는데, 이 도장께서는……."
"왜요? 한쪽 팔이 없는 게 불쌍해 보이오?"
"아니요, 그 정반대네요. 신수가 훤해 보이네요?"
녀석이 피식 웃는다.
하지만 내가 한 말은 결코 허튼 말이 아니다.
이미 일심방에서 그의 경지를 확인했다.
예전보다 훨씬 더 강한, 더 지고한, 이제는 무림의 후기지수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그에 대한 모독일 정도로 그는 변모해 있었다.
"어떻게 된 건가요?"
"고맙소, 나 대협. 감숙에서 나 대협이 내 목숨을 구해 줬고, 나는 그걸 넘어 나 대협의 활약을 보며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아… 전 뭐 그냥… 살려고 한 짓이었는데."
"사부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좌절하지 않고, 나 대협처럼 굳건히 싸워 나가려 노력하는 제 모습을 보며, 사부님께서 많은 것을 저에게 전수해 줬습니다. 모두 나 대협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진심으로요."
닭살 돋는 이야기를 오래 하기는 힘들었다.
나를 보는 녀석의 눈빛이 너무 느끼하기도 했고.
난 녀석을 축하하며 소자연단 한 알과 만치자연단 한 알을 선물로 준 후 자리를 떠났다.
말추처럼 대놓고 울먹이지는 않지만, 녀석도 크게 감동한 빛을 숨기지 못했다.
* * *
다음 목적지인 금륭문을 향해 길을 걷던 중.
사람들이 술렁이는 게 보였다.
뭔 일인가 해서 가 보니.
무황성의 3대 무력대 중 하나인 철권무적대가 큰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창궁검무대만큼이나 유명한 무력대라, 이를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몰려들었다.
나도 까치발까지 하며 간신히… 전음을 보냈고, 인적 없는 야산에서 녀석을 다시 만났다.
"궁 대협, 주먹이… 새로 생겼네요?"
과거라면 몰랐을까, 지금 녀석은 천하에서 손에 꼽히는 철권무적대를 이끄는 대주다.
대협이라는 호칭이 적당했다.
"풉. 하하하! 나 대협 엉뚱함은 여전하군요?"
"정말 어떻게 된 거예요?"
궁도산 녀석이 씩 웃는다.
그냥 단순한 웃음이 아니다.
깊은 회상이 깃든 그런 웃음이었다.
녀석의 두 주먹.
감숙에서 불사괴를 상대하다가 통째로 터져 버린 녀석의 두 주먹이 새로 생겨났다.
물론 사람의 뼈와 살로 만들어진 주먹이 아니다.
말 그대로, 그냥 철권(鐵拳)이다.
철로 주먹을 만들어 그의 손목에 붙였다.
소철권(小鐵拳) 궁도산이 진짜 철권이 된 것이다.
그리고 보였다.
그 역시 한 단계 성장하였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의 궁도산도 절대 이백운의 아래가 아니다.
천하의 무엇이라도 부술 것 같은 강인함이 그에게서 마구 뿜어져 나왔다.
"고맙습니다, 나 대협. 덕분입니다."
이백운과 비슷한 말을 해 댔다.
이백운보다야 좀 더 느끼하고 덜 닭살이 돋았지만, 역시 부담스럽기는 했다.
내가 한 게 뭐라고.
나 살려고 한 짓 아니겠는가.
아무튼 다들 고마워하니, 내가 더 기뻤다.
그래서 녀석에게도 소자연단 한 알과 만치자연단 한 알을 선물로 주었다.
그렇게 헤어지려고 했는데.
문득 궁금한 게 떠올랐다.
"궁 대협, 근데 밥은 어떻게 먹어요? 그러고 보니 좀 핼쑥해진 것 같기도 하고."
녀석이 또 씩 웃는다.
그러면서 두 주먹을 내게 뻗어 보인다.
"여기 구멍 보여요?"
"아! 오른 주먹에 두 개, 왼 주먹에 한 개. 작은 구멍이 총 세 개나 있네요?"
"여기에는 젓가락, 여기에는 숟가락. 큭큭큭. 그렇게 먹긴 먹어요. 하하하!"
"아! 그렇군요."
핼쑥해진 녀석의 두 볼이 괜스레 마음에 걸렸다.
* * *
당우국도 만났고, 서예도 만날 수 있었다.
당우국은 나를 보자마자 또다시 방정맞게 달려와 반가워했다.
서예는 먼발치에서 열심히 임무 중인 것만 확인했다.
이백운, 궁도산만큼은 아니어도 둘 다 제법 과거의 어린 티를 벗고, 한 명의 당당한 무인이자 고수가 된 모습이었다.
특히 당우국은 현재 사천당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가주 경쟁에서 유력한 후보라는 말도 들을 수 있었다.
녀석에게는 필요할까 싶었지만, 소자연단 한 알과 만치자연단 한 알을 주었다.
그렇게 숭검문, 현일방, 묘산파, 우청파 등등을 계속 순찰하며 인간 불사괴를 찾는… 어라? 저 녀석이 여긴 왜?
- 따라와.
내가 전음을 보냈고, 한창 임무를 수행 중이던 녀석이 눈치를 살핀 후 곧바로 신법을 펼쳐 내 뒤를 따라왔다.
"걸십칠번! 네가 여긴 웬일이야?"
"내가 물을 말이야. 걸이번, 네가 여긴 웬일이야?"
"분명 비걸개 중에서는 나에게만 이번 임무를 맡긴 걸로 알고 있는데."
"나야말로 그렇게 알고 왔어."
하아!
이 빌어먹을 노인네들.
하여간 잔머리 굴리는 데에는 천하제일이라니까.
노인네들 농간에 우리가 넘어간 거다.
엄청난 사명감과 책임감을 갖고 임무를 수행하게 말이다.
걸십칠번은 그래도 좀 편한 녀석이다.
녀석과는 산 중턱에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녀석도 많이 바뀌었다.
아직 이백운, 궁도산에게는 못 미치겠지만, 거의 근접했다.
보는 녀석들마다 한 단계 성장한 모습을 보여 줘서 이게 쉬운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한 단계가 아니라 아주 작은, 무공에 정말 코딱지만큼의 성장을 얻기 위해서는 땀을 폭포수처럼 흘려야 하고, 피를 샘이 솟듯 쏟아야 한다.
또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어야 할 것이다.
녀석이 그렇다.
녀석이 나와 했던 약속, 그 다짐을 지켜 내고 이루어 낸 것이다.
나와 헤어질 때 했던 말.
‘두고 봐라. 다음에 나를 다시 만나면, 오늘과는 완전히 다른 내가 되어 있을 테니까.’
놈이 진짜 완전히 다른 걸십칠번으로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오! 대단한데? 어디서 영약이라도 주워 먹은 거야?"
"훗. 하여간 말하는 거 하고는……. 이게 말이다. 이 형님께서 응! 정말 생사의 고비를 수십 번을 넘어 지금의 경지에 이르셨다, 이 말이지. 하하하."
나도 그렇고, 녀석도 그렇고.
오랜 친구처럼 가볍게, 재밌게, 또 장난처럼, 한참을 웃을 수 있었다.
난 녀석에게 소자연단 한 알과 만치자연단 한 알을 주었다.
"야! 그거 지금 먹지 마!"
늦었다.
누가 거지 아니랄까 봐 녀석이 소자연단을 벌써 꿀꺽해 버렸다.
"오? 뭐야? 주고서 왜 먹지 말라고……. 어? 어… 잠깐."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는 녀석.
어쩌겠는가.
그래도 같은 방도인데.
나와 단씨 삼 형제는 녀석의 호법을 무려 두 시진이나 서야 했다.
녀석의 내공이 5년 치나 증가하는 순간이었다.
"한 알만 더 주라."
"나한테 뭐 맡겨 놨어?"
"에이, 친구 좋다는 게 뭐냐? 한 알만 더 줘. 응? 나 형. 형님!"
큭큭큭.
하여간, 이 녀석도 진짜 거지는 맞다.
거지가 구걸하는데 줘야지.
난 나중에 먹으라고 몇 번이나 말을 한 후에 녀석에게 소자연단 한 알을 더 주었다.
든든했다.
걸십칠번 녀석이 있으니, 우리 개방의 미래는 분명 밝을 것이다.
* * *
야검당으로 돌아왔다.
시골에서 올라온 촌뜨기가 아닌 인간 불사괴 순찰 무인의 신분으로 방문하였다.
정문에서 순찰패를 들이밀자마자 야검당 전체에 난리가 났고.
막 기루로 가기 위해 준비 중이었던 야검당의 당주 한예덕은 놀란 얼굴로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뛰쳐나와 나를 맞이했다.
아무도 우리를 알아보지 못했다.
당주야 내가 이곳에 머무를 때에도 직접 상대할 일이 없었고.
몇몇 무사들은 대화도 나눈 적이 있지만, 달라진 우리 외모와 신분에 감히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라고는 상상치도 못하는 모습이었다.
"대협, 우리 야검당 사람들을 모두 소집할까요?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당주가 연신 손바닥을 비비고 굽실굽실하며 나에게 말했다.
참, 이런 사람이 한 문파의 수장이라는 게 좀 그랬다.
확실히 무림에는 어울리지 않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뭐, 내 알 바 아니고.
"야검당은 이미 은밀히 감사를 끝냈습니다."
"엇? 언제……. 그럼… 결과는…요?"
눈알을 사정없이 굴리며 초조해하는 당주.
"이곳은 안전합니다."
"휴우,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대협."
"제가 방문한 것은 야검당의 야장 솜씨가 훌륭하다고 하여 한 가지 부탁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개인적인 일이니 거부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어이쿠! 어디 그럴 수 있겠습니까? 무림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이렇게 애써 주시는 대협의 명이라면, 무엇이든 해야지요. 오히려 영광입니다. 하명해 주십시오, 대협."
"이곳의 야장들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가능하다면 경험이 많은 야장을요."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이리로 가시죠."
당주가 직접 나를 안내했고, 나와 단씨 형제는 곧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열심히 일했던 대장간으로 갈 수 있었다.
당주가 직접 높은 사람을 모시고 왔다는 말에, 대장간의 모든 작업은 중단되었고.
수십 명에 달하는 야장들이 일제히 도열해 고개를 숙인 채 우리를 맞이하였다.
그 첫 번째 자리에 역시나 노야장이 있었다.
"대협, 이 노인이 저희 야검당에서는 가장 오래되고 솜씨가 좋은 야장입니다. 다들 노야장이라고 부르니, 대협께서도 그리 부르시면 될 것입니다. 뭐 하나? 어서 대협께 인사드리게."
"네,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노야장이라고……. 어?"
인사를 하며 슬쩍 나를 보다가 말문이 막혀 눈을 동그랗게 뜨는 노야장.
내가 씨익 웃으며 전음을 보냈다.
- 나중에 당주한테 혼나지 말고, 제대로 인사해요, 노야장. 큭큭.
곧바로 상황을 파악한 것인지, 아니면 놀란 마음을 추슬렀는지, 아니면 당주에게 혼날 것이 두려웠는지.
어쨌거나 노야장은 다시 나에게 제대로 인사를 했고.
"노야장, 이렇게 생긴 물건을 만들어 줄 수 있겠소? 최대한 멋지고, 실용적으로 말이오."
내가 그에게 한 장의 그림을 보이며 말했다.
내가 건넨 그림에 노야장은 물론 당주까지 몇 번이나 고개를 갸우뚱했다.
노야장이 나에게 물었다.
"삼지창처럼 생겼는데… 크기는 젓가락 크기고. 이건 무엇에 쓰는 물건입니까, 대협?"
"포크(fork). 음식을 찍어 먹는 도구요."
"포, 포크요?"
"네, 포크."
"아……."
순간 노야장과 당주 모두 좀 당황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왜요? 만들기 어려워요?"
"아, 아닙니다. 만들 수 있습니다."
노야장이 서둘러 답했고, 곧바로 당주가 나에게 물었다.
"이걸 어디에 쓰시려는 건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선물이에요. 저희가 바빠서 가능하다면 야검당에서 직접 전달해 주면 좋을 것 같은데, 가능할까요?"
"물론입죠. 당연히 저희가 전하겠습니다. 어느 분께 전하면 되겠습니까?"
"현재 신성교에 머물고 있는 철권무적대의 대주, 궁도산 대협께 전해 주면 됩니다."
"허걱! 앗! 넵! 넵! 제가… 제가 직접… 직접 궁 대협께 전해 드리겠습니다."
야검당이 동네에서 방귀 좀 뀐다는 문파라면, 무황성과 철권무적대 그리고 궁도산은 사는 세상 자체가 다른 차원이다.
천하제일을 논하는 무황성이 아니겠는가.
야검당주가 기겁을 하며 놀라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노야장을 불렀다.
"노야장."
당주 눈치를 슬쩍 본 후 답하는 노야장.
"네… 대협."
난 슬쩍 얄궂은 미소와 함께 그에게 말했다.
"잘 만드셔야 해요. 뺀질거리지 말고. 아셨죠?"
"물, 물론입니다. 최선을… 끄응, 최선을 다해 만들겠습니다, 대…협."
눈빛으로 수천 번의 망치질을 하며 나를 때려죽일 듯 보면서도, 끝까지 공손한 말투로 대답하는 노야장이었다.
노야장, 서운해 마시오.
오늘은 그냥 장난을 좀 쳐 본 거고.
내가 다 그대를 위해 좋은 일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난 그렇게 끝까지 노야장에게 얄궂은 미소를 지으며 야검당을 떠났다.
내가 정문을 지난 후까지, 야검당주의 깊게 숙인 허리는 펴질 줄 몰랐다.
그나저나 포크가 있으면 궁도산이 이제 밥은 좀 더 수월하게 먹을 수 있겠군.
핼쑥해진 얼굴이 마음에 걸렸는데, 이젠 녀석 밥 먹는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아! 포크?
당연히 드워프 세상, 도토리국에서 썼던 물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