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131화 (130/174)

131화

밤은 깊어졌고, 산적들과의 술자리는 계속되었다.

"오! 왔는가? 어서 와 앉게. 이것 좀 보라고!"

다들 취했고, 녹림왕도 비귀부를 얻은 기쁨까지 더해 잔뜩 취한 상태였다.

하지만 마치 엄청난 보물을 손에 쥔 듯 품속에 꼭 품고 있던 그가, 한 사내가 오자마자 거짓말처럼 품에 품고 있던 그 비귀부를 건넸다.

의아했다.

부채주에게조차 만지지도 못하게 하는 비귀부를 선뜻 내준 그 사내가 누군지.

심지어 그는 무공조차 익히지 않았고, 외모마저 지극히 평범해 산적이라고는 절대 볼 수 없는 그런 사내였다.

그자가 자리에 앉고, 녹림왕이 건넨 비귀부를 유심히 또 진지한 눈으로 살피고 또 살폈다.

도대체 그가 누구이기에 그 모습을 녹림왕은 물론, 술에 만취해 시끌벅적했던 산적들 모두가 숨까지 죽이며 지켜본단 말인가?

그리고 그때.

드디어 사내가 입을 열었다.

"좋군요, 좋아요."

녹림왕이 곧바로 물었다.

"자네 입에서 좋다는 말은 처음 듣는군. 그래서 어느 정도로 좋다는 말인가?"

"제가 천하에 있는 모든 도끼를 다 봤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없지만, 뭐?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마치 신이 만들었다고 해도 믿겠네요. 단언하건대, 이 도끼야말로 천하제일 도끼이며, 천하 10대 보검이라 불리는 검들과도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최고의 도끼입니다."

"그렇지? 그래? 하하하! 다들 들었지? 비귀부가 천하제일 도끼라고, 크하하하하! 뭣들 해? 다들 잔 들어! 축배를 들자고! 건배!"

"건배!"

긴장감이 살짝 돌았던 분위기가, 다시 시끌벅적한 축배의 장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 말이 맞았어. 난 처음부터 재능 같은 게 없었던 거야. 검이 안 되면, 최고의 도끼라도 만들어 보려고 했는데. 후훗."

사내가 쓸쓸히 혼잣말을 하며 술잔을 비웠다.

그런데 저 대사!

분명 어디에서 들어봤는데.

설마……?

난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다시 슬쩍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도끼를 만드시는 분이세요?"

나를 힐끔 보는가 싶더니, 고개만 끄덕이는 사내.

눈이 붉게 물들어 있다.

"원래는 검을 만드는 분이셨어요?"

이번에는 조금 오래, 나를 바라본다.

"네, 예전에는……."

"지금은 도끼를 만들고요?"

"네, 그런데 누구신가요? 처음 뵙는 분이신데."

"비귀부의 원래 주인이 저입니다."

"아!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궁금하지 않으세요? 누가 저 도끼를 만들었는지."

사내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린다.

듣고 싶은데, 차마 들을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듯, 그렇게 갈등하는 속내가 고스란히 비치고 있다.

"이 세상에서 만든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내가 농담을 하거나 놀리려는 줄 알았을 테다.

하지만 사내는 놀란 얼굴을 했다.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우리 인간이 사는 세상 말고 다른 세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중 한 곳에 신의 손재주를 넘어선 뛰어난 야장들만이 사는 세상이 있지요."

"지, 지금 무슨 말씀을……?"

"비귀부는 그곳에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당신이 좌절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요."

사내는 대꾸하지 못했다.

혼란하고 또 커다란 충격을 받은 것과 같은 얼굴을 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내가 허리춤에 묶여 있던 순천검을 검집째 꺼내 그에게 보여 줬다.

이번엔 눈까지 화등잔만 해져 놀라는 그였다.

"이건… 이건 순천검……."

"역시, 알아보시는군요."

나는 미소 지었지만, 그는 웃지 못했다.

놀람도 잠시.

그는 다시 극도의 좌절감에 빠진 듯했다.

나는 잠시 그런 그를 지켜보다가 다시 말했다.

"순천검의 나머지 반쪽이 어떻게 됐는지 아세요?"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꿈쩍도 하지 않는가 싶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에게 말했다.

"역천검을 부러뜨린 그분과 아는 사이신가 보네요?"

"네. 저와 가장 가까운 사이예요. 아빠와 아들 같은 사이."

"……."

"그래서, 소문 들었어요?"

"무슨 소문을……."

"역천검."

또 한 번 그의 입이 오물오물, 묻고 싶지만 차마 묻지 못하고 갈등하였다.

"무황성이라고 들어 봤어요?"

고개를 끄덕인다.

"그곳의 부성주가 외팔이 검객이에요. 독비검절(獨譬劍絶) 태사경이라고 엄청난 고수죠."

"들어… 봤습니다. 그렇게 유명한 분을 모르는 게 더 이상하겠죠."

난 미소를 더 짙게 지으며 말했다.

"그 사람이 들고 다니는 검에 대해서도 들어 봤어요?"

또 한 번, 사내의 눈동자에 엄청난 지진이 일어났다.

"맞아요, 역천반검. 반쪽짜리 부러진 검. 그게 역천검이에요. 반쪽짜리 부러진 검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당대 무림의 천하 10대 보검이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 절대 명검이요."

사내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감정이 북받쳐 올라 스스로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난 다시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순천검은 지금 누가 가지고 있는 줄 알아요?"

"소협께서……."

"그럼 제가 누군지 아세요?"

"개방의 비밀 고수라고만 들었습니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꾸역꾸역 답을 이어 나갔고.

나는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 훗날의 천하제일인. 지금은 고작 칠룡사봉 중 한 명에 불과하지만, 저는 언젠가 천하제일인이 될 거랍니다. 그리고 당신이 만든 이 순천검은, 그 훗날의 천하제일인이 천하를 호령하고 악을 무찌를 때 만천하를 진동케 할 것입니다.

결국…….

사내가 눈물을 뚝, 뚝.

닭똥 같은 눈물이 사내의 눈에서 하염없이 떨어져 내렸다.

* * *

이른 아침 태왕산을 내려왔다.

녹림왕이 수하들을 시켜 이것저것 뭔 놈의 선물을 네 마리 말에 가득 실어야 할 정도로 싸 주었다.

태왕산을 넘자마자 안휘에 도착했고.

나는 서둘러 개방 분타를 찾아 낭만개 아저씨에게 서신을 보냈다.

낭만개 아저씨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다.

쌍천검의 원주인을 찾았다는 내용의 서신이었다.

그렇게 낭만개 아저씨에게 서신을 보낸 후, 태왕채에서 하루를 머물며 지체한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빠르게 말을 몰았다.

덕분에 이틀 만에 절강 항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 * *

절강 항주.

달리 지상낙원이라고 불리기까지 하는 항주인 만큼, 도읍 전체가 화려하고 풍요로웠다.

다만, 우리가 도착한 항주는, 그 화려함과 풍요로움보다 먼저 살벌한 분위기가 더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곳곳에 도검을 들고 순찰을 도는 무인들이 가득하였다.

대부분이 신성교 교도며 무인인 자들이었지만, 무림맹과 남궁세가 등 중원 전역에서 몰려든 무인의 수도 상당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가 맡은 임무만 수행하면 된다.

먼저 빠르게 개방 항주 분타를 찾아갔……. 뭐야?

여기가 개방 분타 맞아?

거지 소굴 맞냐고?

와!

X팔, 무슨 놈의 거지 소굴이 기와집이냐?

심지어 청소까지 해 놨네?

하아!

돌겠다.

항주가 대도읍이다 보니, 이곳 항주 분타의 분타주도 나와 같은 사결제자다.

그런데 이 거지 새끼가 말이다.

비단옷을 입고 있다.

살은 뒤룩뒤룩 쪄 걷는 게 가능할까 의심이 들 정도다.

얼마나 거지 소굴이 거지 소굴 같지 않았는지, 처음에는 내가 잘못 찾아온 줄 알았다.

"헤헤. 헤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나 대협. 헤헤. 헤헤헤헤."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간사한 웃음까지 마구 짓는 항주 분타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 인간이 왜 이렇게 좋은 분타의 분타주가 됐는지 나는 금세 알 수 있었다.

"관련 자료들을 다 수집해 놨습니다. 야검당에 잠입할 위장 신분은 이 서류들이고, 최대한 빠르게 외우셔야 합니다. 또한 항주와 신성교 내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한 정보는 여기 있고. 추가되는 대로 나 대협께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또한 이곳 개방의 전력은……."

생긴 것과 다르게 엄청나게 유능한 돼지… 아니, 거지였다.

덕분에 나와 단씨 삼 형제는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야검당에 잠입할 수 있었다.

시골에서 농기구 만드는 야장 일을 하다가 항주로 올라온 촌뜨기들 신분이다.

첫날부터 나는 눈치껏 야검당의 이곳저곳을 누비며 살폈다.

만약 이곳에 불사괴가 있다면, 분명 감지할 수 있다.

실버 드래곤 히포네우스가 나를 환골탈태 시켜 준 덕분에, 나는 불사괴를 몸으로 감지할 수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레드 드래곤 오니푸네의 갈비뼈로 만든 우룡검이 있기에, 만약 불사괴가 근처에 있다면 우룡검이 검명을 울릴 것이다.

또 있다.

자연국에서 내가 자연이 됨과 동시에, 나는 대자연의 기운을 보고 듣고 만지면 느낄 수 있다.

불사괴와 같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기운이라면, 분명 내 기감이 이를 감지할 것이다.

단씨 삼형제는 열심히 무거운 쇠를 나르고 불도 피우고, 잔심부름까지 도맡아 일을 하고 있고.

나는 그사이 계속 불사괴를 찾아다녔다.

* * *

야검당에 온 후 사흘이 지났다.

불사괴?

응, 없음.

첫날부터 정확히 오늘 새벽까지.

한숨도 안 잤다.

야검당은 돈이 많은 문파다.

장원도 엄청나게 크고 대지도 넓고 사람도 무지하게 많다.

내 위장 신분이 신분인지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고.

밤이 되면 은형술을 펼쳐 곳곳을 살폈다.

정말 쥐구멍까지 샅샅이 찾았다.

그런데 말이다.

없다.

진짜 이곳에는 없다.

단씨 삼 형제는 이곳에 진짜 취직이라도 한 것인지, 오늘도 열심히 일하는 중이고.

나는 그런 단 씨 형제들을 보며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입에는 마른 풀 하나를 물고, 콧노래도 살짝 흥얼거렸다.

심심해서 그런 거다.

"와아! 너도 참 대단하다. 어떻게 다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일하는데, 대놓고 콧노래까지 부르며 농땡이냐?"

야장들 중에서도 제일 고참인 할아버지 야장이다.

다들 노야장이라 부르는데, 나이가 많은 것도 그렇지만, 성이 노씨라서 겸사겸사 그리 부른다.

"노야장, 궁금한 게 있어요."

내가 묻자, 80근은 족히 돼 보이는 철을 들고 있던 노야장이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투욱!

쇳덩어리까지 땅에 툭 던지고는…….

"하하! 내가 살다 살다 정말 너 같은 녀석은 처음이구나? 아니, 같이 온 네 마을 사람들은 저렇게 일당백이라 할 만큼 열심히 일하는데, 넌……. 하아!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오네."

"에이, 그러지 말고 잠깐 앉아 보세요. 여기, 여기에 앉아요. 정말 궁금한 게 있어서 그래요."

"하하!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그래, 물어볼 거 있으면 다 물어봐라. 궁금한 거 끝나면, 짐 싸서 여길 나가고."

응, 바짓가랑이 잡고 말려도 나갈 겁니다.

"저기, 저 사람이요."

"이놈이 정말! 출타하시는 당주님더러 저 사람이 뭐야?"

"에이, 야장들이 당주 욕하는 거 저도 다 들었어요. 왜 그래요, 새삼스럽게? 노야장도 술만 마셨다 하면, 당주 욕하면서. 큭큭."

"비, 비밀이다. 어험. 어험."

"그런데 매일 당주는 이 시간만 되면 어딜 저렇게 차려입고 쏘다니는 거예요?"

"항주에 처음 왔다고 했지?"

"네."

"항주가 뭘로 유명하냐?"

"기루?"

"그렇지."

"아! 기루를 매일 가요?"

"매일 간단다. 뭐, 자기는 야검당의 세력을 늘리기 위해 인맥도 쌓고 사업도 논의하고 그런다는데. 쯧쯧."

막 야검당의 정문을 벗어나는 당주의 뒷모습을 보며, 노야장이 혀를 찼다.

"그런데 노야장, 여긴 도대체 뭐 하는 곳이에요?"

내 질문에 노야장이, ‘뭐 이런 미친놈을 봤나?’ 하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너, 진심으로 묻는 거냐? 여기가 어딘 줄도 모르고 들어온 거야?"

"아니, 시골에서 큰 도읍으로 야장 기술이나 좀 배우려고 왔는데, 여기가 제일 유명하다고 해서 왔지요. 그런데 이건 야장인지 무림 문파인지. 당주가 쇠 만지는 걸 한 번도 못 봤네요."

"나도 네가 쇠 만지는 거 한 번도 못 봤다."

"저는 일단 넘어가고요. 당주는 야장 아니에요?"

"휴우……."

노야장의 입에서 수십 년 쇠를 단조하며 맡았던 뜨겁고 거친 쇠 바람이 길게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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