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130화 (129/174)

130화

"뒤로 물러나 계세요. 제가 나서 달라고 할 때까지 움직이면 안 됩니다."

"넵!"

2,000명이 넘는 산적들은 다짜고짜 우리를 덮쳐 왔다.

난 그 길목을 막고, 오롯이 비귀부 하나로 놈들을 상대했다.

쉬이이이이이이익!

콰콰콰콰콰콰콰콰쾅!

"으아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악!"

쉽지 않았다.

상대를 죽일 수 없기에, 더더욱 힘들었다.

확실히 산적이라고 만만히 볼 게 아니었다.

심지어 2,000명 중 제대로 된 고수는 나서지도 않고 있다.

녹림왕은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았고.

나는 태왕채, 그러니까 녹림삼십육채의 총채에서도 하급에 속하는 산적들만을 상대로 무려 한 식경을 싸워야 했다.

그리고 곧…….

절반이 넘는 산적들이 땅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질러 댈 때.

"네, 이놈!"

여덟 명이 동시에 몸을 날려 나를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부기(斧氣)와 부강(斧剛)을 뿜어 대는 진짜 고수들이었다.

이번에는 나도 가볍게 상대할 수 없었다.

전력을 다해야만 했다.

쉬이이이이이이이익!

"조심해!"

"함께 막아라!"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허공에서 엄청난 폭발이 연이어 일어났다.

태왕산 전체가 들썩일 무시무시한 폭발이었다.

쉬이이이익.

척!

비귀부는 그렇게 일곱 명의 절정과 한 명의 초절정 고수들을 저 멀리 날려 보낸 후 내 손으로 돌아왔다.

태왕채의 부채주와 두령급 산적들로 보였다.

부채주와 두령들까지 단번에 쓰러져 바닥을 구르자, 산적들은 완전히 사기를 잃었다.

아니, 여전히 서 있는 일천에 달하는 산적들은 싸울 의지는커녕 귀신을 본 듯한 얼굴로 덜덜 떨기만 했다.

난 그런 그들을 비웃어 주며, 천천히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내가 다가갈수록 그들의 떨림과 공포는 더욱 짙어졌고.

그때, 녹림왕이 결국 모습을 드러냈다.

쉬이이이이익.

쿠우우우우우웅!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것과 같이 내려와 엄청난 충격과 함께 착지하는 녹림왕.

곧바로…….

쿠쿠쿠쿠쿠쿵!

여섯 명의 절정과 초절정 고수들이 그 뒤에 착지하였다.

녹림 총채의 진짜 전력이 바로 이들인 듯했다.

만약 싸운다면, 어쩌면 단문령 오빠들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상대는 그만큼 대단한 기운을 머금고 있는 고수들이다.

하지만…….

내 예상대로 싸울 필요는 없었다.

녹림왕 팔부살백(八斧殺百) 적거식.

소문과 다르고 별호와는 완전히 다른 생김새.

5척이 조금 넘는 작은 신장에, 체구마저 상당히 왜소하다.

허리춤에는 여덟 개의 도끼가 꽂혀 있는데, 역시나 일반 도끼가 아닌 작은 손도끼다.

누가 저렇게 작고 왜소한 노인을 보고 녹림왕이라고 하겠는가?

하지만 절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고수며 절대자가 바로 그다.

그가 천천히, 천천히 한 곳을 응시하며 다가온다.

내가 아닌 내 손에 들린 비귀부를 보며 오는 것이다.

"멈춰."

내 나직한 말에 번뜩 정신을 차리고 걸음을 멈추는 녹림왕.

그가 처음으로 비귀부에서 시선을 떼어 나를 향했다.

그러더니 웃는다.

미소다.

"좋은 도끼를 가지고 있구나?"

"응, 천하제일신부(天下第一神斧), 최고의 도끼지."

내 반말에 녹림왕은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그 뒤에 있던 여섯의 산적 고수들이 흉흉한 기운을 뿜어 댔다.

하지만 녹림왕이 손짓으로 그들을 간단히 제지한 후.

여전히 뭐가 그리도 좋은지 희번덕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보인다. 단연코 천하제일 도끼가 바로 네 손에 들린 도끼다."

"안목이 대단하군. 그런 의미로 이 녀석의 이름을 말해 주지."

"오! 어! 어! 어서 알려 줘. 천하제일 도끼를 무어라 불러야 하는지."

"비귀부."

"비…귀…부. 하아! 이름이 정말 딱 어울리는군. 날아 돌아오는 도끼라! 하하! 하하하하! 역시 천하제일 도끼야. 아니, 이건 고금을 통틀어 제일이라고 할 수 있겠어. 도대체 어디서 그런 도끼를 얻은 것인가? 새외에서 들여온 건가?"

"비슷해. 전설과 같은 곳에서 날아온 도끼거든."

"신비롭기까지 하군. 꿀꺽."

어느새 녹림왕의 시선은 다시 비귀부에 꽂혀 있었고.

그는 자신이 지금 어떤 상태인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놓고 탐욕의 눈빛과 함께 침까지 꿀꺽 삼키고 있었다.

결국…….

"이보게, 젊은이! 내가 말을 돌려서 못 해."

"안 팔아."

순간, 녹림왕은 하늘이 무너진 것과 같은 얼굴을 했다.

진짜 건들면 아이처럼 펑펑 울 것과 같은 얼굴이었다.

"팔아!"

"안 판다고."

"부탁이네. 내가 누군지 이미 알지 않나? 나, 녹림왕이야. 내가 이렇게 부탁함세."

"응, 안 팔아. 꺼져."

"네, 이놈!"

안 되겠다 싶었는지, 녹림왕이 기세를 폭발하며 호통을 쳤다.

"기세 거둬. 안 그러면 뒈진다."

"네 놈이 정녕! 도끼 한 자루 때문에 목숨을 버릴 참이더냐!"

어지간히도 갖고 싶긴 한 모양이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욕지거리를 하고 막말을 뱉었는데, 녹림왕은 그에 관한 언급은 하지도 않고 오로지 도끼 얘기만 하고 있다.

"뒈진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산에서 빌어먹는 너희가 불쌍해서 손에 사정을 뒀지만, 나도 점점 인내에 한계가 오고 있다. 좋게 말할 때 꺼져라."

"너… 너 정말… 벌주를 마시겠다는 것이냐? 고작 도끼 한 자루 때문에?"

"고작 도끼 한 자루 때문에 목숨을 거는 건 너야. 내가 아니라."

- 형님들, 슬쩍 나와 주시죠.

- 넵! 처남 형님!

내 전음에 단씨 삼 형제가 마기를 펄펄 뿜어 대며 내 뒤로 다가왔다.

그러자 녹림왕의 뒤에 있던 고수들은 물론, 비귀부에 정신이 팔려 있던 녹림왕까지 놀란 얼굴을 해 댔다.

확실히 사람 겁주고 놀라게 하는 데에는 마공만 한 게 없는 것 같다.

녹림왕도 상황을 제대로 인지한 모양이다.

"너… 너희는 정체가 뭐냐?"

내가 녹림왕에게 슬쩍 비웃음을 날리며 말했다.

"개방. 비밀 고수."

"비밀… 고수? 개방에 그런 게 있었어?"

"응, 있어."

반신반의하는 녹림왕.

협박 따위가 통하지 않음은 이제 제대로 깨우친 모양이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들린다.

싸웠을 때 어떻게 될지, 빠르게 계산 중인 모양이다.

녹림왕이 사실 원래 저렇게 막무가내는 아니다.

비걸개 훈련생 때 무림의 주요 고수들에 대해 다 배우고 시험도 몇 번이나 보고, 아무튼 정확히 안다.

산적이라지만, 제법 의협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자가 바로 녹림왕이다.

다만,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데.

도끼를 보면 환장한다는 점이다.

특히 손도끼, 작은 체구 때문인지 그는 젊었을 적부터 손도끼에 대한 집착이 매우 심했다.

지금 허리에 차고 있는 여덟 개의 손도끼, 저것을 얻기 위해 그는 일평생을 바쳤고.

여덟 개를 모두 허리에 매달기까지, 수백 명의 고수와 목숨을 건 사투를 벌였다고 했다.

난 그러한 사실을 자세히 알고 있었고, 오늘 이렇게 일을 크게 벌인 이유도 다 그러한 사실에 기반하여 계획한 것이다.

"휴우……."

녹림왕이 계산을 끝낸 모양이다.

우리와 싸워 이길 수 있어도 그 피해가 너무 클 것이라는 결괏값을 얻은 모양이다.

그의 긴 한숨과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비귀부에 대한 욕망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부르는 대로 주겠다. 내가 평생 모은 진귀한 보물들도 있고, 천하 10대 보검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에 준하는 검과 도 등의 병기도 있고. 황금은… 네가 얼마를 말하든 바로 주겠다. 그러니 그 도끼, 그 비귀부를 나에게 다오."

"그렇게까지 갖고 싶어?"

"응, 정말 갖고 싶어. 정말이다."

고개까지 마구 끄덕이며 초롱초롱한 눈빛을 발사하는 녹림왕.

그 모습이 하도 어이도 없고, 귀엽기도 하고.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음… 돈은 나도 많은데?"

"신병이기 아니면 영약, 영초. 100년을 넘게 산 호랑이 내단도 있어."

"영약은 나도 많아. 그리고 아무리 좋은 신병이기라도 어디 비귀부에 비길 만하겠어?"

"그, 그렇겠지?"

울상까지 지으며 긍정하는 녹림왕.

사실 검객이나 도객이었다면 당장 부정했을 테다.

녹림왕이기에, 도끼에 환장한 노인이기에 바로 긍정해 버리는 것이다.

"아무래도 내가 손해인데?"

"뭐든! 뭐든 말만 해! 내가 다 구해다 줄게. 응? 제발! 이 늙은이를 불쌍히 생각해서라도, 그거 나 주라."

"에잇! 안 되겠어. 아무래도 내가 손해야. 안 팔아. 그만 가 봐. 바쁜 사람 길 막지 말고."

녹림왕의 다리가 후들거린다.

지금 저 노인네, 비귀부를 얻기 위해 무릎을 꿇을까 말까 갈등하고 있는 거다.

하아!

정말 저렇게까지 갖고 싶은가?

이해가 안 됐다.

뭐, 나한테는 좋은 일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내가 좀 과했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무슨 미친놈도 아니고, 늙은이가 무릎 꿇는 게 좋을 리 있겠는가?

이제 슬슬 본론을 꺼내야겠다.

"혹시……."

"어? 뭐! 말만 해! 뭐든 다 들어줄게! 정말이야!"

무릎을 막 꿇으려다가, 내가 말을 꺼내자 화색이 되어 버리는 녹림왕.

난 여전히 고심하는 얼굴로 슬며시 말했다.

"그게 실은……."

"어, 응!"

"내가 개방의 비밀 고수라고 했잖아."

"그렇지, 엄청 훌륭한 일을 하는 고수라고 했지."

"그런데 가끔 도움이 필요할 때도 있고. 아! 내가 하는 일은 다 좋은 일이야. 개방과 무림맹, 뭐 알지? 천하를 구하고, 마두도 잡고, 요즘 말이 많은 탈혼독이나 불사괴니 하는 것들도 상대하고."

"오! 대협! 대단하십니다!"

아놔!

진짜 저 노인네, 비귀부가 진짜 갖고 싶긴 한가 보다.

웃지 말자.

웃으면 끝이다.

끝까지 진지하게.

"그래서 말인데. 가끔 녹림의 도움도 받고 그럴 수 있을까?"

"도, 도움? 당연히 도와야지! 천하를 구하는 영웅께서 도와달라는데, 내가 천하의 녹림도를 모두 불러 도울게. 정말이야! 정말!"

"에이. 말은 누가 못 해. 나도 말로는 천하가 아니라 우주를 구하겠다."

"아니야! 진짜야! 진짜라고! 잠깐만! 자! 이거 받아."

왔다.

녹색의 신패.

녹림지존패(綠林至尊牌)다.

그때였다.

"채주님!"

"채주님, 안 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상황을 못마땅하다는 듯 살벌한 눈으로 지켜보던 산채의 고수들이 일제히 소리까지 지르며 녹림왕을 말렸다.

하지만 녹림왕은 이미 정신이 나간 상태다.

"놔! 감히 어느 놈이 내 말을 거역하겠다는 거냐! 항명이냐?"

"그, 그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녹림지존패는 녹림삼십육채의 모든 녹림도에게 명령권을 가질 수 있는 신패입니다. 신중히 결정하십시오, 채주님."

수하의 간절한 충언.

녹림왕도 정신을 차린 것일까?

고민한다.

눈동자가 흔들린다.

아!

다 된 줄 알았는데.

산적 놈 중에도 제법 정신이 제대로 박힌 놈이 있는가 보다.

하지만…….

비귀부는 그 정도로 폄훼할 물건이 아니다.

도토리국에서도 최고의 도끼가 바로 비귀부다.

물론, 이런 게 그곳에는 수천 개도 더 있지만 말이다.

난 눈동자에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크게 떨고 있는 녹림왕을 향해.

살랑살랑.

비귀부를 얄밉게, 줄 듯 말 듯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다른 산적 고수들이 인상을 와락 구겼지만, 녹림왕은 다시 비귀부에 정신이 팔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래서는 안 된다.

이렇게 녹림지존패를 얻은들, 저들 때문에 제대로 그걸 쓸 수 있겠냔 말이다.

내가 비귀부를 살랑살랑 흔들어 대자, 녹림왕은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것처럼 양손을 뻗어 나에게로 다가왔다.

그렇게 막 손에 비귀부가 닿을 듯 말 듯 할 때.

내가 다른 손을 뻗어 그를 제지했다.

그런 후 지금의 상황을 모두 숨죽여 지켜보고 있는 이천여 산적들을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녹림지존패를 얻으면, 천하의 모든 녹림도를 호령할 수 있다. 하지만 비귀부를 얻는 자, 곧 천하를 호령할 수 있다! 내가 지금 이를 증명해 보이겠다."

자연아, 도와줘.

태왕산은 녹림삼십육채의 총채가 수백 년 동안 터를 잡아 왔듯 대단한 산이다.

그 태왕산에 가득한 대자연의 엄청난 기운이 일시에 나에게 몰려들었다.

그리고 나는 곧.

태왕산의 기운을 모조리 비귀부에 쏟아 하늘로 도약했다.

땅에서 무려 스무 장 이상의 하늘로 솟구친 나.

동시에 비귀를 높이 치켜들었고.

비귀부에서는 도끼의 강기, 부강(斧剛)이 무려 열 장의 크기로 뿜어져 나왔다.

그냥 부강이 아니다.

한 마리 대호(大虎)를 형성화한 형성강기(形成剛氣).

그것이 실제 호랑이의 모습이 되어 대기를 찢는 울부짖음까지 진동시켰고.

나는 이내 그것을 땅으로 내리꽂았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무려 100장이 넘는 길이의 땅이 갈라졌다.

그 깊이는 너무 아득하게 깊어 끝을 알 수 없었다.

마치 거대한 태왕산을 반으로 갈라 버린 것과 같은 엄청난 위력이 태왕채 녹림도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펼쳐졌고.

응, 다른 건 몰라도 내공만큼은 내가 천하제일이거든.

이 광경을 지켜본 모두.

녹림왕부터 부채주, 두령들 그리고 일반 산적들까지.

모두 이 엄청난 기사에 눈알이 튀어나오고, 턱은 빠져 무릎까지 내려오고.

아무튼 그랬다.

녹림지존패가 내 손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그날 나는 단씨 삼 형제와 함께 태왕채로 가서 음식 대접도 받고, 녹림왕을 비롯한 산적 녀석들과 친구도 먹고.

술도 잔뜩 마시고.

안주는 곰 발바닥 요리에 멧돼지 통구이, 뱀탕, 사슴 갈비볶음, 토끼 양념구이, 꿩 구이 등등이었고.

산적들과 함께 산채의 음식도 먹고 술도 마시고, 그렇게 깊은 밤을 보내게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