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129화 (128/174)

129화

"멈추어라!"

우르르르르.

말 그대로 산적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대략 스무 명가량.

그래도 명색이 녹림삼십육채 중에서도 총채의 산적들인데.

허접하기 그지없군.

아마 녹림 총채라는 이름 때문에, 산적도 그렇고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도 그렇고.

별문제를 일으키지 않아 그런 모양이다.

생긴 건 영락없이 산적들인데, 기감을 살피면 한 명이 일류고 나머지는 죄다 이류와 삼류다.

어쨌거나 스무 명이 조금 넘는 산적같이 생긴 산적들이 숲속에서 우르르 몰려나와 우리 길을 막아섰다.

기세등등.

무리의 두목으로 보이는 덩치 큰 산적이 커다란 도끼를 어깨에 걸친 채 성큼성큼.

"어험! 이 몸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 어라?"

우리에게 통행세를 받기 위해 의례적인… 아마 저 인간 많이 심심했나 보다.

일장 연설을 하려던 것 같았는데, 그러다 우리를 보고는 갑자기 입을 꼭 닫았다.

고개를 갸우뚱 갸우뚱.

뭔가 놀란 것 같기도 하고, 의아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더니 하는 말이.

"혹시… 어디 산채에서 오신 분들이십니까?"

미친!

푸하하하하하!

단문령의 세 오빠를 보고 다른 산채에서 온 산적으로 착각한 거다.

푸하하하하하!

놈을 탓할 수는 없다.

내가 봐도 단문령의 세 오빠가, 눈앞에 있는 저 산적 녀석보다 더 산적같이 생겼으니.

아! 웃으면 안 되는데.

난 혀까지 꽉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내가 나서야 하는데, 너무 웃겨서 나설 수 없었다.

그러자 큰오빠 단두령이 나를 잠시 살피는가 싶더니, 뭔가 오해를 한 듯하다.

내가 웃음을 참느라 인상을 구겼는데, 기분 나빠 한다고 오해한 모양이다.

어쨌거나 단두령이 콧바람까지 킁킁 불어 대며 제대로 화가 나 앞으로 나서서 산적과 마주했다.

"좋게 지나가려고 했는데, 네 이놈!"

단두령이 호통을 치자 두목으로 보이는 산적과 그 뒤에 있는 산적들 모두가 흠칫했다.

아마 꽤 유명한 산채의 채주라도 되는 줄 착각한 모양이다.

"실례지만… 어느 산채의 채주님이신지……?"

"아니, 그래도 이놈이!"

더 주눅이 들어가는 산적들.

곧바로 단두령이 다시 큰 목소리로 놈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어딜 봐서 산적으로 보인다는 말이냐!"

하지만 산적들은 더 납득이 안 간다는 듯, 고개만 계속 갸우뚱한다.

"녹림도가… 아니십니까?"

"아니라니까!"

"정말… 정말 아니세요?"

"도대체 어딜 봐서 내가 산적같이 보인다는 거야! 이 미친놈들아!"

"하아! 그럼 뭐 하시는 분인데요?"

"양꼬치!"

"네?"

"양꼬치 굽는다, 이 새끼들아!"

순간, 두목 산적과 떨거지 산적들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정말 아니에요? 누가 봐도 최소 두령급이신데……?"

"아니라고! 양꼬치 굽는다고!"

결국, 두목 산적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휴우. 양꼬치… 그래, 그래. 내가 동태 눈깔이라서 잠시……. 아놔! 난 우리 총채주님 의동생이라도 되는 줄 알았네. 깜짝이야. 그런데… 야, 임마!"

되레 호통을 치는 산적.

"뭐, 임마!"

"그래, 임마! 양꼬치나 굽는 놈이 왜 그따위로 생겨서 우리를 놀라게 해!"

단두령이 부들부들 떤다.

일장(一掌)에 저들 모두를 쳐 죽일 수 있는 고수가 바로 그다.

하지만 심성이 생긴 것과도 다르고, 익힌 무공과도 정반대인 게 이 삼 형제들이다.

순수하고 착한 삼 형제다.

"그만… 그만해라. 나 정말 화나려고 한다."

"이런 미친 양꼬치 새끼가! 넌 통행세 두 배! 너희 모두 두당 은자 한 냥씩 내야지 통과다!"

결국, 단두령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돌려 나를 향했다.

"형님, 잠시 교육 시간을 가져도 되겠습니까?"

난 그때까지도 이 상황이 너무 웃겨서 배를 움켜잡고 웃음을 참는 중이었다.

아! 어쩔 수 없다.

이제 그만해야겠다.

일할 시간이다.

"단 큰형님, 나오세요. 여긴 제가 처리해야 해요."

"저에게도 한 번만 기회를……."

"빚. 빚 안 갚을 거예요?"

"아! 네, 알겠습니다."

결국 물러나는 단두령.

그러다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형님, 문령이에게 형님이 고수라는 말을 듣긴 들었는데, 그래도 저 산적들이 제법 한 수 해 보입니다. 혹시라도 상황이 좀 그러면, 무리하지 마시고 말씀해 주십시오."

세 형제는 내 실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다.

난 그에게 씩 웃어 주며 어깨까지 한 번 툭 친 후 앞으로 나섰다.

단두령과 두 동생은 여차하면 나설 생각에 내 뒤에서 자리를 잡고 있고.

그렇게 산적 두목 녀석과 마주했는데.

"너도… 양꼬치냐?"

아놔, 저 새끼를.

"아니다."

"그렇지? 넌 아니지?"

"응, 아니야."

"하하하!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그래, 넌 어디 산채 소속이냐?"

미친!

저 새끼 설마, 삼 형제만이 아니라 나까지 산적으로 오해한 거야?

"야! 너… 너 설마 나까지 그렇게 본 거야?"

"뭘?"

"산적? 내가?"

"아니야?"

"아니라고! 이 빌어먹을 새끼들아!"

"그럼 넌 뭔데?"

"거지!"

나도 모르게 화가 나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랬더니, 산적들 표정이 가관이었다.

무슨 미친놈을 단체로 본 그런 얼굴이었다.

아!

말을 길게 해 봐야 내 손해다.

난 오른손을 뒤로 가져가 비귀부를 빼 들었다.

그러자 산적이 하는 말이.

"거, 봐! 누굴 속이려고! 도끼까지 들고 있네. 산적 맞지? 어디 산채 소속… 으아아악!"

비귀부를 날렸다.

엄청난 속도와 엄청난 힘.

거기에 정확한 조준력까지.

비귀는 평범한 무인이 던져도 그 위력이 대단하고, 정확히 여럿의 적을 궤멸한 후 자동으로 날아서 돌아온다.

하물며 내가 던졌는데 어떻겠는가?

쉬이이이이이이이익!

퍼퍼퍼퍼퍼퍼퍼퍼퍽!

순식간에 도끼가 날아가 날이 아닌 도끼의 등으로 놈들을 강타했다.

쉬이이이익.

척!

난 움직이지 않았지만, 할 일을 마친 비귀부가 정확히 내 손으로 날아와 잡혔다.

"끄아아아악!"

"으아아아악!"

"뭐, 뭐야? 무슨 일이……?"

땅에 쓰러져 괴로워하는 산적들.

난 그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꺼져! 다시 내 눈에 띄면, 그때는 정말로 이 비귀부가 너희의 머리를 박살 낼 것이다."

"후퇴다!"

산적들이 혼비백산해 숲속으로 사라졌다.

곧바로 셋째 단발령이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형님, 곧 놈들이 다른 산적들을 이끌고 올 겁니다. 일이 귀찮아질 수 있으니, 서둘러 가시죠."

"아니. 천천히, 천천히 갑시다."

"네? 그러다 총채주라도 오게 되면, 일이 꽤 커질 텐데요."

"단 형님들."

"넵! 처남 형님!"

"천천히 가요. 태왕산 경치가 좋잖아요."

내가 웃으며 말했고, 그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잠시 하는가 싶었지만.

"넵! 알겠습니다!"

우렁차게 답했다.

그렇게 우리는 태왕산의 산길을 유람이라도 하듯 천천히 걸었다.

천주마와 나머지 말들은 셋째가 끌고, 첫째와 둘째는 나를 호위라도 하듯 양옆에 바싹 따라붙어 걸었다.

"아! 혹시라도 놈들이 나타나면 나서지 마세요. 제가 여기서 할 일이 좀 있어서, 약간의 충돌은 불가피해요. 제가 처리해야 하니까, 단 형님들은 구경만 하세요."

* * *

우리가 한 식경 조금 모자라게 걸었을 때.

우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땅이 살짝 울리는 것 같았다.

울창한 태왕산의 수풀 사이에서 순간 300이 넘는 산적들이 몰려나와 우리의 길을 막았다.

"하아! 새끼들, 좀 빠릿빠릿 못 다니냐? 기다리다 지겨워 죽는 줄 알았다."

내 말에 우리의 길을 막아선 산적 중 선두에 있던 산적이 미소를 지었다.

황당함과 어이없음의 웃음이었다.

"너냐? 우리 애들 때렸다는 게?"

"그래, 나다. 그런 너는 뭐냐?"

"태왕채의 소두령, 거마쌍부(巨魔雙斧) 차대호 님이시다."

"미친놈이라고?"

"너… 너 이 새끼……."

별호란 게 원래 남이 지어 주는 거다.

근데 저 산적 놈은 딱 봐도 지가 지은 거다.

욕 한마디에 저렇게 흥분하는 걸 보니, 저 녀석의 무공 경지가 다 하찮아 보일 정도다.

고수급이다.

내 욕지거리와 무시에 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해 가고 있었다.

결국 놈은 참지 못했고.

"오늘… 죽는다."

"너?"

"끝까지… 뭣들 하느냐! 당장 저놈의 목을……."

비귀부를 던졌다.

쉬이이이이이이이익!

나름 고수라고, 등에 메고 있던 거대한 도끼 한 쌍을 빠르게 휘둘러 나의 비귀부를 막았다.

콰콰콰콰콰콰쾅!

제법 대단한 폭발이 일었고, 그 폭발 한 번에 거마쌍부인지 거미 새끼인지 하는 산적 놈과 그 주변에 있던 산적들 수십이 나가떨어져 땅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비귀는 내 손에 돌아오지 않고, 계속 산적 놈들을 공격해 갔다.

"으아아아아악!"

"뭐야! 살려 줘!"

"귀신 들린 도끼다! 으아아악!"

내 손을 벗어난 비귀부는, 단 한 번의 비행으로 무려 300이 넘는 산적들을 모두 초토화한 후에야 내 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던 거마쌍부 차대호.

놈이 피를 토하면서도 놀란 눈으로 혼잣말을 했다.

"이기어… 이기어검(以氣馭劍). 아니, 이기어부(以氣馭斧)… 고수다! 모두 후퇴! 후퇴해!"

혼잣말은 그의 다급한 외침으로 변했고.

그렇지 않아도 비귀부에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산적들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혼비백산하여 산속으로 달아났다.

"처남 형님!"

산적들이 모두 사라진 후, 큰형 단두령이 나에게 다가와 나직한 목소리로 불렀다.

"네, 단 큰형님."

"무공을 숨기셨습니까?"

"제가요? 왜요?"

"이렇게까지 강하신 줄 몰랐습니다."

"문령이가 얘기했다면서요?"

"그게… 죄송합니다. 문령이 얘기를 다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이 인간들 표정이 왜 이렇게 안 좋대?

둘째가 어두운 얼굴로 큰형의 말을 이었다.

"처남 형님."

"네, 둘째 단 형님."

"저희… 필요 없으신 거죠?"

"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이렇게 무공이 고강한데, 저희가 도울 일 따위는 애초에 없었던 거 아닌가요? 그렇다면 저희는 돌아가겠습니다. 불쌍해서 거두어 주신 거라면, 저희도 마지막 자존심은 지키고 싶습니다."

"빚은 어쩌고요?"

순간, 삼형제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난 웃으며 그들을 토닥였다.

"자! 잘 들으세요."

대답 대신 눈에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이는 삼 형제.

"제가 좀 고수인 건 맞아요. 그렇다고 천하무적은 아니겠죠?"

고개를 다시 끄덕인다.

"빚이 얼마라고요? 단 큰형님부터."

"전 금자 서른두 냥입니다, 처남 형님."

"전 스물여덟 냥입니다, 처남 형님."

"전… 전 마흔한 냥… 죄송합니다, 처남 형님."

"저한테 죄송할 건 없고요."

잔뜩 기가 죽은 세 사람을 향해 방긋 웃어 보인 후.

"총 일백한 냥 맞죠? 금자로."

끄덕끄덕.

"제 목숨값, 금자 100냥 쳐 드리겠습니다."

여전히 주눅이 들어 대답은 못 하고, 그래도 놀란 마음은 숨기지 못해 토끼 눈을 뜨는 삼 형제.

"세 분 중 한 분이라도 제가 위급한 순간 구해 주시면 금자 100냥 드리고, 그것 외에도 제 일을 도와주신다면 기본적으로 매달 은자 50냥씩. 어때요? 해 볼래요?"

눈물을 글썽인다.

주눅이 들어서가 아니라, 이번엔 감격해 말을 못 하고 눈물만 마구 글썽이는 삼 형제다.

결국.

"형님! 평생의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저희 여동생은 덤으로 가져가십시오!"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하하! 하하하! 수락하는 것으로 받아들일게요. 그리고, 여동생은 안 가질 테니까, 다시는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형님!"

아주 감동의 도가니가 따로 없었다.

사실 그렇다.

갑작스레 날아오는 칼보다, 서서히 옥죄어 오는 빚의 무게가 더 무서운 게 우리네 현실 아니겠는가.

좋은 사람들이다.

착한 사람들이고.

무엇보다, 내 목숨값으로 금자 100냥이면, 이건 그냥 거저먹는 거다.

저런 고수들을 고작 한 달에 금자도 아닌 은자 50냥으로 부리는 것도 역시 공짜나 다름없고.

남는 장사… 음, 왔군.

2,000명이 넘는 산적들이 땅이 흔들릴 정도로 빠르게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그중 한 명.

엄청난 기운을 머금은 고수다.

녹림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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