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걸일번은 어떻게 지내요?"
"걸일번은 너 못지않게 훌륭한 일들을 처리 중이다."
"무슨 일을 하는데요?"
"걸일번은 정식으로 비걸개가 된 후부터 계속 사술(邪術)과 사마외도(邪魔外道), 좌도방문(左道傍門), 환술(幻術) 등 사이한 술법과 주술, 그런 문파 등에 관한 일을 전문적으로 맡겼다."
"불사괴가 출현하기 전부터요?"
"그렇다. 그런데 불사괴가 출현하고 나서 그 아이의 임무가 더 막중해졌지."
"위험하지는 않아요?"
"어찌 위험하지 않겠느냐. 처음에는 고서적이나 연구하고 그러라고 시킨 건데, 휴우… 지금은 십만대산 근처에 있을 것이다."
"마, 마교? 마교로 걸일번을 보냈다고요?"
"근처까지만이다. 혹시라도 배교의 흔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허락한 것이긴 한데. 걸일번이 그 전에 이미 그 단서를 여러 개나 직접 찾았다. 이번 십만대산행은 그 아이가 자청해서 간 거야."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네요."
"그러게 말이다. 적당히 하는 법도 좀 배우고, 너처럼 뺀질거리는 요령도 알고 그래야 하는데. 너무 적극적이야. 훌륭한 거지가 돼서 방에 은혜를 갚고, 사부님께도 자랑스러운 제자가 되겠다며, 물불을 가리지 않아서 걱정이란다."
생각났다.
그녀와 헤어질 때 나누었던 대화.
* * *
그녀는 나에게 마음이 있음을 은연중 고백했고,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나 정말 멋진 비걸개가 될래. 엄마에게 약속한 그대로, 또 우리 집안의 가훈처럼. 훌륭한 거지가 돼서 우리 개방에서 받은 은혜를 두 배, 세 배, 열 배로 갚고 싶어.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어? 어… 응. 지금은 연애할 생각이 없다는……."
"미안. 정말 너를 좋아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 내 마음… 이해해 줄 수 있지?"
눈에 힘까지 꽉 쥐며, 그녀를 노려보듯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러자, 그녀의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마구 섞여 쏟아진다.
제발, 울지는 마.
제발.
결국.
"응! 그래. 너무 멋지다. 나도 사실 그래야 하는 거 알고 있었는데. 사부님께서 나와 사형에게 거는 기대가 커서, 이제는 내가 두 사람 몫을 해야 하는데 깜빡하고 있었네. 고마워, 걸이번. 나도… 나도 너처럼 훌륭한 거지가 돼서 방에 은혜를 갚고, 사부님께도 자랑스러운 제자가 될게."
* * *
설마… 그래서?
나 때문에?
아니길 바란다.
그러면 내가 너무 나쁜 놈이 되잖아!
아니, 그래도 좋고 아니라도 좋으니, 제발 건강하게만 돌아와 줬으면 좋겠다.
간절히, 정말 간절히 바란다.
"걸일번을 꽤 걱정하는구나?"
"같은 조였잖아요. 전우예요. 무려 3년이나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 걱정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래, 네 마음 안다. 곧 돌아올 때가 됐으니, 그 아이가 돌아오면 너에게도 기별을 주도록 하마."
"고맙습니다, 장로님."
나는 상취개와 임무에 관한 몇 가지 사항을 더 논의한 후 헤어졌다.
* * *
내 집, 황천 분타를 떠났다.
황천을 떠나기 전 공주 양꼬치집에도 잠깐 들렸다.
단문령에게 인사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 분타 어린 거지들 때문이다.
나를 보며 반가워하는 그녀에게 예의상 가볍게 작별 인사와 함께, 우리 분타 어린 거지들에게 글공부 성과에 따라 양꼬치를 줄 것을 당부했다.
나를 잡고 안 놔주려고 애를 썼지만, 나는 그렇게 공주 양꼬치집을 떠났고.
오랜만에 천주마 녀석을 타고 절강으로 향했다.
황천은 작은 시골이라서 곧바로 인적이 없는 산길에 접어들었고, 나는 천주마에게 ‘달려!’를 외치며 본격적으로 속도를 끌어 올리려 했… 어?
산적이다.
"처남 형님!"
세 명의 산적.
나를 발견하자마자 뭐가 그리도 좋은지, 화색이 도는 얼굴로 허리 숙여 인사도 하고 손도 마구 흔들고.
"여긴 어쩐 일이세요?"
"처남 형님을 따라가기 위해 왔습니다!"
우렁찬 대답.
난 여전히 영문을 몰랐고, 또 당황스럽기도 하고.
그러자 기분 좋게 웃으며 세 산적이 나에게 성큼성큼 걸어 다가왔다.
"처남 형님!"
"네, 네, 왜요?"
"저희도 함께 가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아… 그게… 지금 제가 하는 일이 조금 그런 건데."
"절강 항주로 불사괴인지 뭔지 하는 녀석들 잡으러 가는 거 아닙니까?"
"어? 그건 어떻게 알았어요?"
세 형제가 대꾸도 하지 않고 그냥 씩 웃는다.
그날 방주가 나에게 임무를 전달할 때, 그때 숙방에서 몰래 들었나 보다.
낭만개 아저씨가 기로 소리를 차단했다면 모를까.
방주와 장로들이 기막을 펼쳤다 한들, 제대로 펼치지도 않았고.
셋째라면 모를까, 첫째와 둘째는 충분히 듣고도 남았을 고수다.
"처남 형님!"
내가 상황을 파악하고 어찌해야 할지 몰라 주저하고 있을 때.
첫째가 큰 걸음으로 한 걸음 더 다가와 나를 큰 목소리로 불렀다.
"아… 네."
어쩌지?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음, 솔직한 게 좋긴 하죠."
"아무리 생각해도 저희 세 형제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그건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하루에 양꼬치 3만 개씩 30년을 팔아야 저희가 진 빚을 다 갚을 수 있습니다."
"듣긴 들었는데……."
"장가도 가지 못하고, 앞으로 30년을 계속 노예처럼 일해 양꼬치를 팔아 빚을 갚으면 제 나이 예순일곱입니다."
곧바로 둘째가 나섰다.
"전 예순넷입니다. 저도 장가 못 갔습니다."
셋째가 말을 이었다.
"전 쉰아홉. 저도 장가 못 갔습니다. 물론 동거는 잠깐 해 봤지만… 그래도 장가는 못 간 겁니다."
하아!
갑갑하긴 하다.
다시 첫째가 나섰다.
"저희에게는 미래도, 희망도, 꿈도 없습니다! 사악한 여동생의 끔찍한 학대와 갈취 속에 개처럼 일하는 고된 하루의 연속일 뿐입니다."
"그래서 저더러 어떻게 해 달라는 말씀이신지……?"
"거두어 주십시오!"
"제가 거두어 드리면 빚이 해결돼요?"
"넵! 처남 형님께서는 천하에서도 손에 꼽히는 부자이지 않습니까? 저희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저기… 잠시만요."
"넵!"
"돈 벌 수 있는 방법은 많잖아요. 예를 들어 마두 사냥. 그렇지! 세 분 다 엄청난 고수라는 거 알고 있어요. 맞죠?"
"넵! 저는 멸혼신권. 둘째는 혈마신장, 셋째는 백옥혈마수를 익혔습니다. 세 신공 모두 역대의 마교주와 대등한 싸움을 했던 엄청난 신공들입니다."
"오! 그럼 됐네요. 그걸로 마두나 대마두 잡고. 무림맹에 현상금 청구하세요. 그럼 뭐, 몇 달도 되기 전에 빚 다 갚겠네요."
"처남 형님!"
"아이고, 깜짝이야. 귀 안 먹었으니까, 소리는 안 질러도 돼요."
"넵! 처남 형님!"
또 지른다.
"네, 제가 무림맹에 아는 사람이 있으니, 소개해 줄 수 있어요."
"이미 해 봤습니다."
"마두 사냥을요?"
"넵!"
"그래서요?"
"마두는커녕, 잡졸 한 마리 구경도 못 했습니다. 우린 싸움은 잘하지만, 누굴 추적하고 이런 거에 영 소질이 없습니다!"
둘째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때 석 달 동안 마두 잡겠다며 쓴 밥값이랑 숙박비랑 빚만 은자 스무 냥을 더 지게 됐습니다."
"휴우. 그럼 산적! 그렇지 산적! 녹림삼십육채는 좀 그렇고. 나쁜 산적들이 얼마나 많아요? 산적 때려잡아 좋은 일도 하고, 그 산적들이 빼앗은 돈도 챙기고. 좋네!"
"처남 형님!"
"소리는 안 질러도……."
"산채를 하나 털었습니다!"
"그랬는데요?"
"인질로 잡혔던 여인들, 죽은 시체들, 또 산적들에게 당한 인근 마을 사람들. 산채에 있던 건 죄다 시전으로 다 가져다가 팔았는데도, 그들이 입은 피해의 절반의 절반도 돕지 못했습니다."
다시 둘째가 나섰다.
"그 피해자들이 사흘 밤낮을 통곡하며 우는데, 얼마나 불쌍했는지……. 다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겠더라고요. 큰형은 열흘 동안 잠도 못 잤습니다."
"아! 그게……. 휴우, 그러면 뭐 어디 산이라도 가서 산삼이나… 쩝, 그것도 아닌 것 같고. 그렇지! 호랑이! 호랑이 잡아서 가죽을 팔면……."
"처남 형님!"
"아이고, 깜짝이야."
"저희는 산 짐승은 못 죽입니다."
"양꼬치……."
"죽은 양을 사 옵니다. 저희가 직접 죽이지 않습니다."
"그럼 그 죽은 양을 손질하고 양꼬치를 구워 팔면……."
"넵! 그래서 그렇게 했는데, 그게 30년입니다, 처남 형님!"
하아! 진짜 돌겠다.
그때였다.
눈치를 살피고 있던 막내가 나섰다.
"처남 형님, 사실 저희가 이것저것 안 해 본 게 없습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게 뭔데요?"
"저희 셋은 뭘 해도 안 된다. 저희가 무슨 일을 꾸미고 실행하면 무조건 망한다. 빚만 계속 쌓인다. 이러다 진짜로 굶어 죽는다. 그게 아니면 빚쟁이들한테 맞아 죽는다. 이 사실을 뼛속까지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문령이를 찾아가 바짓가랑이를 잡고 사정했고, 지금 상태에 이른 것이지요."
와!
진짜 이 인간들 답도 없다.
아니, 저렇게 대단한 무공을 익히고 있으면서 저렇게 사는 것도 진짜 능력이라면 능력이겠다.
안 되겠다 싶으면, 진짜 어디 목 좋은 곳에 무관이라도 하나 차려서… 아! 그것도 망했다고 했지?
돌겠네.
그때였다.
"처남 형님! 거두어 주십시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셋이 허리를 깊이 숙이며 동시에 외쳤다.
사실 이 세 사람이 대단한 인재이기는 하다.
초절정 고수가 둘에, 절정 끝자락의 고수가 하나다.
그것도 심지어 마흔이 되기 전에 무공에 전념한 것도 아닌데, 저 경지에 이르렀다.
그들이 익힌 무공은 마공이라 하나, 역대의 마교주와 거의 대등하게 싸움을 했다는 혈교 최고의 신공들 아니겠는가?
됐다.
내가 거둬야겠다.
분명 어디 써먹을 데가 있지 않겠나.
남 주기는 아깝고.
또 이것도 인연인데 말이다.
"저기요."
"넵! 처남 형님!"
"그거, ‘처남’ 그 소리는 빼세요."
"저 따라오시려면, 그 ‘처남’ 자 빼라고요!"
"앗! 죄송합니다, 처… 아니, 그냥 형님!"
그렇게 혈교의 절대 신공을 익힌 세 명의 고수가 나를 따르게 되었다.
* * *
인근 마을로 가 말을 세 마리 샀다.
만리상단에서 눈치채기 전, 빠르게 좋은 말을 물색.
넉넉한 값을 쳐주고 말을 살 수 있었다.
나와 단문령의 오빠들은 그렇게 말을 타고 절강 항주로 향했… 아!
"저는 단두령입니다, 형님!"
첫째의 이름은 단두령이다.
"저는 단행령입니다, 형님!"
둘째는 단행령.
"저는 단발령입니다, 형님!"
셋째는 단발령.
뭐야?
단문령까지.
뭔 놈의 이름들을 저렇게 지었대?
돌겠네.
이름마저 웃긴 세 형제였다.
"형님 자도 빼라니까요."
"알겠습니다, 형님!"
"빼라고요!"
"넵!"
그때였다.
길을 잘 아는 셋째 단발령이 선두로 달리다가 말을 멈추어 세웠다.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문제까지는 아닌데, 미리 말씀은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뭔데요?"
"여기가 태왕산입니다. 녹림삼십육채의 총채가 있는 곳이요."
"음… 빨리 가야 하는데."
"태왕산을 반나절 넘으면 곧바로 안휘입니다. 이 속도로 계속 달리면 닷새도 되기 전에 절강 항주에 도착할 수 있고요."
"산적들하고 시비도 붙기 싫은데요."
"태왕산을 우회해 가려면 족히 안휘까지 가는 데에만 열흘은 더 걸립니다."
녹림왕(綠林王) 팔부살백(八斧殺百) 적거식.
무려 녹림삼십육채의 총채주다.
그리고 이곳 태왕산.
천하의 산적들을 다스리는 녹림의 총채가 있다.
동시에 천하에서 손에 꼽힐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듣지 않았나.
태왕산을 넘으면 반나절, 우회하면 열흘.
보통의 산적들이 죄다 이런 교통의 요충지에 산채를 짓는 건 아니다.
이것도 자리싸움이고, 힘이 있어야 좋은 자리를 차지한다.
그래서 녹림삼십육채는 이렇게 모두 좋은 교통의 요충지에 터를 잡고 산채를 짓는다.
알면서도 이 길을 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나마 다행인 건, 녹림삼십육채에 속한 산적들이 나름의 규율을 정하고 이를 엄중하게 지킨다는 것이다.
정해진 통행료를 받고, 함부로 인명을 해하지 않는다.
그걸 잘 알기 때문에 사람들도 그 무섭다는 산적이 수백, 수천 명씩이나 우글대는 것을 알면서 이곳을 지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소림사가 있는 하남과 남궁세가가 있는 안휘의 경계에 산적들의 총채가 터를 잡고 수백 년이나 아무 탈 없이 지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끔 발을 헛디뎌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맹수의 습격을 받는다거나, 위급한 환자가 발생한다거나,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미끄럽다거나.
이런 경우에는 산적들이 친절하게 돕기도 하고, 눈도 쓸기도 한다고.
아놔!
산적 맞아?
아무튼 다른 산적들이라면 모를까, 그래서 녹림삼십육채는 엄연히 무림의 한 개 세력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가 이들에 대해 이렇게 길게 고찰하고 있는 이유는…….
중원 전역에 산재한 산적들의 숫자가 엄청나고.
또 그 무력이 실제 무시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 태왕산처럼 천하를 잇는 주요한 길목에 모두 이들의 산채가 있다는 점이다.
산적이라 껄끄럽긴 하지만, 분명 가치가 있는 놈들인 건 분명하다.
뭐, 그게 아니더라도.
난 이놈들에게 볼일이 있다.
난 내 허리 뒤에 매달린 비귀부(飛歸斧, 날아 돌아오는 손도끼)를 슬쩍 만져 확인한 후.
"가시죠. 여기선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태왕산을 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