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126화 (125/174)

126화

"태한아, 미안하구나. 이번 일은 내가 도울 수 없겠어."

수호존 임명식이 진중하면서도 경건하게 마무리된 후, 낭만개 아저씨가 나에게 한 말이다.

"괜찮아요, 아저씨. 더 중요한 일을 맡으셨잖아요. 다른 거지들을 대신해서 아저씨한테 감사해요. 아저씨가 자랑스럽기도 하고요."

내 말에 낭만개 아저씨가 미소로 답했다.

다시 식탁에 모두 자리를 잡고.

방주가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말고도 다른 구파와 오대세가에서도 긴박하게 만반의 준비를 하는 중일세. 아마 자네같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던 은거 고수가 있다면, 이번에 모두 모습을 드러낼 거야. 뭐, 자네만 한 고수가 또 있을 리는 없겠지만 말이야."

"……."

낭만개 아저씨가 대꾸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방주는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일단 자네도 그렇고 태한이도 그렇고. 이 일은 절대 비밀에 부쳐야 할 걸세. 마교라는 말 자체가 무림을 엄청난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수 있으니 말일세."

"네, 명심하겠습니다."

"낭만개, 자네는 이제부터 나와 함께 움직여야 할 걸세. 구체적인 일은 나중에 자세히 설명해 주겠네. 일단 태한이 임무부터 마무리 지으세."

낭만개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이자, 방주가 다시 나를 향했고, 내가 맡아야 할 임무에 대해 몇 가지를 더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낭만개 아저씨가 방주에게 물었다.

"하루만 더 머물러도 되겠소?"

"자네? 자네는 계속 여기 있어도 돼. 아니, 여기 꼼짝 말고 있어야 해. 위급한 순간이 도래하면 바로 움직일 수 있게. 어딜 가게 된다면 꼭 미리 나에게 말하고."

"나 말고, 태한이."

"태한이?"

"그렇소. 못다 한 말들이 많이 있소."

"어차피 당장 출발해야 할 것도 아니고. 하루 이틀 더 머물다가 출발하도록 하게."

내가 곧바로 말했다.

"내일 하루 머물고, 모레 아침 일찍 절강으로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방주님."

"내가 고맙지, 태한아."

"네, 방주님."

"진심이다. 네 수고를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세상이 너를 필요로 하는구나. 힘이 되어 주어라."

"네, 꼭 그리 노력하겠습니다. 이번만은요."

모호한 나의 답변에 방주가 피식 웃었다.

상취개와 순화자, 속리자도 웃는 얼굴인데, 다음에 또 날 어떻게 부려 먹을지 벌써 머리 굴리는 소리가 사방에 진동하는 것 같다.

아무튼 그날은 늦은 시각까지 훈훈한 분위기 속에 모두가 만취할 때까지 술을 마셨다.

* * *

당가에서 우모침이 도착했다.

무려 500개나 된다.

당우국의 서신도 동봉되어 있었다.

녀석의 능글맞은 얼굴을 상상하며 서신을 읽었다.

독선이 독려하고, 사 장로가 직접 장인들과 며칠이나 밤을 새워 완성한 우모침이라 하였다.

혹시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새롭게 만든다고 하였는데, 완벽하다.

드워프들이 본다면 어떤 평가를 내릴지는 모르겠지만, 내 관점에서는 매우 만족스러운 결과의 우모침이었다.

실제 극소 기관연사궁에 장착해 발사도 해 봤는데, 역시나!

확실히 사천당가가 괜히 독과 암기로 최고라 불리는 게 아니다.

그렇게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고, 당우국에게 답신도 보내 줬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나야 해서, 이제 우리 분타 거지들하고 대충 작별 인사도 해야 하는데.

어른 거지들과는 인사를 대충 했고.

어린 거지 녀석들 데리고 시전에 가서 맛난 것 좀 사 주며 인사를 하려는데, 녀석들이 글공부 중이다.

글공부가 끝나면 곧바로 무공 수업 시간이다.

타구봉법 1초식과 2초식을 배운다.

무공 선생이 미리 와 글공부하는 녀석들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난 슬쩍 그런 무공 선생 옆으로 가 자리에 앉았다.

무공 선생도, 글 선생도 모두 거지다.

아무튼…….

"멸마…협. 하하. 나 대협은 볼 때마다 믿기지 않네요."

"왜요? 제가 옥면공자가 아니라서요?"

"앗! 그게… 그게 아니라… 제 말은 워낙 유명하신 분이라, 이렇게 직접 뵙는 게……."

"농담이에요. 하하."

"아, 네. 하하. 하하하."

"우리 애들 어때요?"

"열심입니다. 아직 기본기를 배우고 있지만, 잘 따라와 주고 있습니다."

오! 이 녀석들.

매일 먹는 타령만 해서 걱정했는데, 제법인데?

"그런데……."

"네?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타구봉법은 열심인데, 녀석들이 글공부는 좀…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인데요? 그래도 자기 이름은 쓸 수 있지 않아요? 몇 달이나 됐는데."

무공 선생이 난처한 얼굴을 한다.

그러면서 시선을 한창 공부 중인 아이들에게로 향했는데.

내가 슬쩍 보니.

아놔!

이 미친 거지 녀석들!

한 일(一), 두 이(二), 석 삼(三) 딱 이것만 땅바닥에 반복해서 쓰고 있다.

"설마… 저 녀석들 자기 이름도 못 써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이게 모두 자기 탓인 것처럼 미안해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무공 선생.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글 선생을 보니, 거의 반쯤 포기한 얼굴로 아이들에게 넉 사(四) 자를 가르치고 있다.

아! 심각하군.

결국, 내가 나서야 했다.

"동작 그만."

말을 하며 다가서자.

꾸벅꾸벅 졸던 녀석.

한없이 심심해하며 땅바닥에 일, 이, 삼만 반복적으로 쓰던 녀석.

글공부는 뒷전이고 옆에 친구와 장난치던 녀석까지 일제히.

"와! 양꼬치다! 양꼬치 사 줘! 양꼬치! 양꼬치!"

일제히 나를 향해 달려든다.

"동작 그만!"

응, 내 말은 듣지도 않는다.

하지만 방법이 있다.

"말 안 들으면 양꼬치 안 사 준다."

마구 달려들던 녀석들이 일제히 걸음을 멈춘다.

그래도 양꼬치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 녀석들.

몇몇은 벌써 침을 폭포수처럼 흘려 댄다.

"잘 들어. 두 번 말하지 않는다. 양꼬치와 관련한 일이다."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집중하는 녀석들.

이런 집중력으로 공부했으면, 이름 석 자가 아니라 사서삼경을 벌써 통달했겠다.

"하루에 양꼬치 스무 개!"

"와아아아아아아!"

"쉿! 아직 말 다 안 끝났어."

"넵!"

양꼬치 앞에서는 존댓말도 잘하는 녀석들이다.

"매일 양꼬치 스무 개를 모두에게 주겠다. 단! 조건이 있다."

"……."

"자기 이름 쓸 줄 아는 녀석들만."

순간, 나는 녀석들이 하늘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얼굴을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다.

녀석들에게 양꼬치는 절대적 신념이다.

또한 거룩하고 경건한 신앙이다.

의지를 불태운다.

오! 제법인데?

"보름 동안은 이름만 써도 줄 것이고. 다시 보름 동안은 글 선생님이 제시하는 글을 모두 익혀야 하고. 매번 보름마다 숙제를 줄 것이다. 그걸 다 완수하면! 매일 양꼬치 스무 개다."

"와아아아아아!"

"할 수 있나?"

"넵! 와아아아아아!"

"못 쓰면 국물도 없어. 그래도 할 수 있어?"

"뭣들 해? 오늘 양꼬치 스무 개 먹으려면, 당장 자기 이름부터 써야 해!"

우르르르르르르르.

"내 이름! 글 선생! 내 이름 가르쳐 줘! 어서! 어서!"

이제는 글 선생에게 달려가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녀석들이었다.

됐다.

이 정도 의지라면, 1, 2년 안에 천자문은 모두 뗄 수 있을 것 같다.

* * *

낭만개 아저씨와 함께 엄마 산소에 왔다.

정성스레 제사를 지낸 후, 오늘은 조금은 무거운 마음으로 마주 보며 앉았다.

지난번 듣지 못한 답을 들을 시간이기 때문이다.

"타구봉법이 낙백구검이고, 낙백구검이 바로 타구봉법이니라. 또한 네가 익힌 세 가지의 절기 역시 다르지 않다."

"음, 낭만개 아저씨."

"그래, 너무 쉽지?"

"아니요. 부탁인데, 제 수준에 맞춰서 설명을 좀 해 주시겠어요?"

"아! 그래.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그래서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 물음에 낭만개 아저씨가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지난번 말했지만, 네 육체는 이미 나를 넘어섰다."

"그건 좀……."

"아니다, 사실이다. 다만, 네 무학에 대한 깨달음은 절정에 머물러 있다."

"그런 듯해요."

"그리고 수련법은 역시나 지난번 말한 것 같이, 일류 무사나 이류 무사들이 하는 수련법을 계속 이어 오고 있지."

"음… 네, 그래서요? 이제 어떻게 하면 되죠? 바위 위나 폭포수 아래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깨달음을 구해야 하나요? 아니면 동굴?"

아저씨가 씩 웃는다.

그냥 웃겨서 웃는 거다.

"그것도 좋다. 하지만 그건 방법에 불과하고, 지금 내가 말하려는 것은 네 무학의 방향이고 길이다."

"방향이라… 네."

"초식에 얽매일 필요 없다. 너는 봉법과 검법을 나누어 쓰며, 그것을 구분 짓고 또 혼돈하지 않게 매우 노력한다. 맞느냐?"

"네, 정확해요."

"그럴 필요가 없다. 이미 네 육체는 이를 초월한 지 오래고, 네 무학 역시 그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단계에 오래전에 올라섰다."

"아……."

"검법도, 봉법도 아니다, 지금 네가 익혀야 할 것은."

"그럼 뭘 수련해야 하는 거죠?"

"네 무공이다."

"그러니까요. 제가 무슨 무공을 익혀야 하냐고요."

"너만의 무공."

"저만의 무공이 뭐냐고요?"

"그건 네가 알아서 찾아야지."

나도 답답하고, 낭만개 아저씨도 답답하고.

무치개 장로가 했던 말이 다 헛소리는 아니었나 보다.

낭만개 아저씨가 뭘 가르치는 데에는 확실히 뛰어나다고는 못 하겠다.

"음, 그러니까 말이다."

"네, 아저씨."

"초식, 검법, 봉법 이런 것에 집착하지 말고. 네가 원하는 대로, 검이 가자는 대로, 네 기운이 가야 하는 곳을 찾아야 한다. 틀에서 벗어나라는 말이다."

"오! 뭔가 쪼금, 아주 쪼금 알 것 같아요. 그래서요?"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틀! 네! 오! 그래요. 그래서요? 틀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응? 그게 다인데?"

"……."

"……."

눈만 껌뻑껌뻑 뜨고 한참을 서로 바라보며 침묵이 흘렀다.

결국…….

"태한아."

"네, 아저씨."

"보통 이 정도면 엄청난 깨달음을 얻고, 갑자기 몰아지경에 빠지고 그래야 정상인데……."

"제가 좀 그렇죠?"

"아주 살짝. 정말 쪼금 그렇긴 하구나. 그래도 내 눈에는 언제나 네가 최고다."

"휴우. 됐어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밥을 숟가락으로 떠서 입에 넣어 주기까지 했는데, 씹어 달라고 하는 건 제 욕심이죠."

그제야 아저씨가 조금은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천천히 생각해 보아라. 급할 게 없고, 급히 한다고 깨달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다. 틀을 깨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순간, 너는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될 것이다."

"아저씨는 이런 생각을 하고 얼마나 있다가 성과를 얻었는데요?"

"나? 나는 뭐… 조금 빠르긴 했지. 아주 조금."

"그래서 얼마나 걸렸는데요?"

아저씨가 슬쩍 내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그 자리에서 바로 깨달았다. 방금 말하지 않았느냐? 이 정도 말을 해 주면, 바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몰아지경에 빠져야 한다고. 내가 그랬거든."

미친!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낭만개 아저씨 같지는 않다고요!

나는 천재가 아니란 말이에요.

"괜찮다. 괜찮아. 천천히,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내가 해 준 말을 되새겨 보아라. 그러면 언젠가는 그게 어떠한 의미인지 알게 될 테다."

"네."

사실 알 것도 같고, 막막하기도 하고.

애매했다.

낭만개 아저씨는 ‘틀에서 벗어난다.’라는 문구가 머릿속에 떠올랐을 때, 곧바로 한 단계 상승의 경지로 올라설 수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상식으로는…….

그것을 깨달으면 낭만개 아저씨처럼 한 단계 위의 경지로 올라설 수 있지만, 실제 9할 9푼 9리.

대부분의 무인이 죽을 때까지 이를 깨닫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아마 나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왜?

나야말로 지랄맞도록 평범한 무재… 큭큭.

하지만!

나에게는 행운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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