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무룡단(武龍丹)일세."
순화자가 맹주의 서신을 읽고, 속리자가 상품을 내게 건넸다.
무룡단, 영약이다.
소림사의 대환단에는 비교할 수 없으나, 그래도 무림에서는 그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한 영약이다.
얼마나 대단할까?
난 살짝 설레는 마음으로 속리자가 건넨 작은 목함을 열었… 이게 뭐야?
실망이다.
내가 만든 대자연단의 10분의 1?
진짜 잘 쳐줘야 5분의 1이다.
아니, 그보다.
애초에 나한테는 영약 자체가 필요 없는데.
아!
이 노인네들, 단체로 헛발질하네.
"왜? 마음에 안 드나?"
속리자가 내 떨떠름한 얼굴을 보며 그리 말했고, 곧바로 순화자가 말을 이었다.
"10년에 한 알을 겨우 만드는 대단한 영약일세. 무림맹에도 몇 알 없고, 근 10년 사이 이 무룡단을 하사받은 사람은 최근에 한 명밖에 없어."
"그게 누군데요?"
"남궁무검."
젠장!
더 재수 없다.
버릴까?
됐다.
나중에 그냥 다른 사람 주고, 오늘은 그냥 사결제자가 된 것에 만족하자.
"축하한다, 태한아. 정말 자랑스럽구나."
내 속을 모르는 낭만개 아저씨는 벅찬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기뻐해 주었다.
어쩌겠는가.
나도 그냥 웃었다.
"이런 날 축배를 빠뜨릴 순 없지. 가자고! 오늘은 내가 거하게 한잔 살 테니까."
"방주님, 무림맹에서 받은 임무 수행비가 넉넉합니다. 오늘은 저희가 한잔 살 수 있게 해 주시지요."
방주와 순화자, 속리자가 서로 술을 사겠다고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잠시 했고.
그러다 방주가 슬며시 나에게 묻는다.
"그런데 여기 조용히 술 마실 곳이 있나? 우리 신분이 신분이니만큼, 괜히 우리가 나타났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할 텐데."
응, 하나도 안 부담스러워해요.
거지라고 쫓아내지 않으면 다행이지.
상취개는 술에 취한 거지, 방주는 얼굴만 신선을 살짝 닮은 더러운 거지.
그냥 둘 다 거지다.
"아는 곳이 있어요. 시간도 시간이고, 우리 황천 같은 곳에서는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실 곳이 없으니 따라오세요."
"그래, 우리의 영웅. 태한이가 가자는 곳으로 가자고."
그렇게 우리는 공주 양꼬치집으로 향했다.
* * *
"태한아!"
오라버니들을 들들 볶고 있던 단문령이, 나를 발견하자마자 한걸음에 달려와 반겼다.
"자주 못 온다며? 그사이 내가 보고 싶어서 온 거야? 아잉, 그렇게 못 참으면 어떻게 해? 몰라, 몰라."
얘가 하루 사이 상태가 더 심각해졌다.
만치자연단을 한 번 먹여 볼까?
아니다, 이건 약으로 치료할 수 없는 병이다.
"처남 형님 오셨습니까!"
뻥 뚫린 숙방에서 단문령의 세 오빠도 나에게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를 한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특별한 손님이 오셔서 그런데, 자리 좀 해도 될까요?"
"넵! 여부가 있겠습니까!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역시, 돈이 최고다.
그렇게 빠르게 양고기 요리로 가득한 술상이 차려졌다.
분위기는 훈훈했다.
상취개는 아까의 분근착골은 까맣게 잊은 듯, 양고기와 술을 입으로 마구 쑤셔 넣기 바빴고.
낭만개 아저씨의 표정이 즐거워 보이니, 순화자와 속리자도 안심한 듯하였다.
낭만개 아저씨는 귀에 걸린 입꼬리가 내려올 줄 몰랐고.
방주는 계속 내 칭찬하기 바빴다.
그렇게 술이 몇 순배 돌고, 모두의 취기가 기분 좋게 오르고 있었다.
"거, 양고기 못 먹고 죽은 귀신이 붙었나. 적당히 좀 먹어. 이제 무림맹으로 가면 보는 눈도 많은데, 체통이란 것도 좀 생각하라고."
속리자에 이어 순화자도 상취개에게 한마디 했다.
"안 뺏어 먹어. 천천히 좀 먹으라고. 아이고, 내가 창피해서 무림맹에서 어떻게 이 인간하고 같이 다니나. 쯧쯧."
그러거나 말거나, 상취개는 계속 술을 들이붓고 양고기를 입으로 쑤셔 넣었다.
"왜 먹는 거 가지고 그래? 치사하게."
"이봐, 상취개. 무림맹 가면 매달 돈도 따박따박 나오고, 식사는 무제한으로 제공된다고. 그리고 장로들에게는 아예 담당 숙수까지 따로 배정을 해 준다니까. 이제 자네가 먹고 싶은 거, 원 없이 다 먹을 수 있어. 그러니 이렇게 급하게 좀 먹지 말라고."
"오! 그래? 무림맹 복지가 정말 좋군. 하하하."
이 인간들, 지금 뭐 하는 거지?
마치 잘 짜 놓은 대본으로 연기를 하는 듯하다.
나에게 보여 주기라도 하는 듯 말이다.
모른 척해야 하는데, 젠장!
나도 개방의 방도는 방도인가 보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겠다.
"상취개 장로님… 혹시 무림맹으로 가세요?"
대답은 방주가 대신했다.
마치 내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내가 질문을 하자마자 그의 대답이 입에서 술술 흘러나왔다.
"우리 무림맹 개방 장로가 나이도 있고 해서 무림 은퇴를 하게 되었네. 공석이 생겼지. 무림맹주의 부탁도 있고, 나도 상취개 장로만큼 적합한 인물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를 무림맹 개방 장로로 보낼 생각이네."
이게, 이게 말이다.
머리를 살짝만 굴리면, 심각한 문제다.
이젠 상취개와 순화자, 속리자가 대놓고 뭉치겠다는 소리 아니겠는가.
뭐, 상취개가 무림맹 개방 장로가 되는 게 어찌 나 한 사람 때문이겠는가 싶겠지만, 내 느낌과 예감이 강하게 불안한 미래를 경고하고 있다.
"하하, 다 자네 덕분이야. 내가 한 게 뭐가 있겠어? 자네가 헌원세가 일도 해결하고, 탈혼독 일도 해결하고, 아무튼 자네가 한 일이 어디 한두 개인가? 태한이 자네가 잘해 줘서, 나도 무림맹으로 가 먹고 싶은 거 실컷 먹을 수 있게 됐지. 하하. 하하하!"
상취개가 정말 기쁘다는 듯 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왜?
도대체 왜 저렇게 웃으며 계속 내 눈치를 보냔 말이다.
내 예감은 적중했다.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더니.
"같이 갈래? 가면 매달 돈도 따박따박 나오고, 먹고 싶은 거 실컷 먹을 수 있다고 하잖은가. 자네만 같이 가겠다면, 내가 맹주님한테 부탁해 무림맹 내전에 커다란 전각에 예쁜 시비도 여럿 붙여 달라고 부탁해 볼 텐데. 구미가… 당기지?"
상취개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나에게 말했고.
곧바로 속리자가 말을 이었다.
"무림맹에 예쁜 여협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그렇지, 백리세가의 그 여협도 엄청난 미인이고. 단리세가의 여협은, 와! 내가 한 30년만 젊었어도 목숨을 걸고 구혼을 했을 정도로 예뻐. 그런 미녀 여협들이 무림맹 천지에 깔렸어. 하하!"
이번엔 순화자.
"자네가 무림맹에 온다고 하면, 내 당장 최고의 고수들을 소집해 무력대를 하나 꾸려 주겠네. 무적청룡대와 질풍백호대 못지않은 최고의 무력대! 캬아! 상상만 해도 멋지지 않나? 최고의 고수들을 이끌고, 무림을 종횡무진하는 우리의 걸이번 나태한! 어떤가?"
이 노인네들.
누굴 바보로 아나?
이젠 하다 하다 나를 옆에 끼고 제대로 부려 먹겠다는 소리 아닌가?
하아!
뇌가 금붕어 뇌도 아니고.
정신 교육이 부족했어.
그것도 많이 부족했어.
아까 말리지 말았어야 하는데.
"응, 안 가요."
당황하는 세 노인네.
방주까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지 말고. 좋은 자리를 권하는데 고민하는 척이라도……."
"안 간다고요."
"이봐, 걸이번. 아니, 우리의 영웅 나태한 대협. 그러니까 자네가 무림맹에 간다고 말 한마디만 하면……."
"낭만개 아저씨."
"그래, 태한아."
"아까 낮에 못 한 정신 교육……."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 노인네가 사색이 되어 두 손을 가로젓는다.
"아니야. 아니라고! 그냥 해 본 말이야! 말도 못 하나!"
"다시는 그런 말 꺼내지 마세요."
"알, 알았네. 알았다니까. 허허. 쿨럭. 쿨럭."
분위기가 바뀌었다.
당연히 아까의 훈훈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다.
그런데 이게 또 묘했다.
이 인간들, 분명 아직 못 한 말이 있다.
낭만개 아저씨가 무서워 차마 자신이 말을 꺼내지는 못하고, 서로 눈치만 마구 주며 상대에게 할 말을 미루고 있다.
척!
내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각서, 잊었어요? 장로님들 맹세, 잊었어요?"
그들이 친필로 작성하고 수인까지 찍은 각서를 올려놓은 것이다.
그러자 상취개, 순화자, 속리자는 밤이라 까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사방만 두리번거리며 딴청을 피웠다.
"표정 보아하니,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인데. 안 가요. 저한테 뭐 시킬 생각 절대로 하지 마시라고요."
"어험. 쿨럭. 우리가 언제 자네에게 뭘 시킨다고 했나? 우린 약속 지킬 거라네. 암, 그렇고말고. 안 그런가, 상취개?"
"그렇지, 우린 자네에게 아무것도 시키지 않아."
"나도, 나도."
음, 대충 된 것 같다.
분명 뭘 시키려고 한 것 같긴 한데.
내 알 바 아니다.
최소한 한두 달, 아니 진짜 딱 반년만 낭만개 아저씨한테 무공 좀 배우고 싶다.
그런데 그때.
방주다.
"할 일이 있긴 있다."
"방, 방주님. 분명 이 각서……."
"각서는 이 친구들이 쓴 거고. 난 그런 거 쓴 적도, 본 적도 없어."
"하지만……."
"걸이번."
"네, 방주님."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나 방주야."
근엄한 표정.
위엄이 가득한 분위기는……. 개뿔.
방주는 그렇게 사정없이 낭만개 아저씨의 눈치를 보며 나에게 말했다.
식은땀 한 줄기가 그의 이마 옆으로 흐르는 게, 안쓰러워 보일 정도다.
"어험. 어험. 그러니까 내 말은……."
다시 낭만개 아저씨 눈치를 슬쩍 살피며 말을 잇는 방주.
"내가 개방의 방주고, 자넨 방도고. 어험. 나에게는 명령권이 있고, 자네는 따를 의무가 있다네. 아닌가?"
"맞, 맞아요."
"만약 내 명령을 거부한다면, 나는 방의 규율에 따라 자네에게 벌을 내릴……."
빠직.
낭만개 아저씨가 식탁 위에 올려져 있던 자신의 손을 와락 쥐었다.
다시 길게 흐르는 방주의 식은땀.
동공까지 떨리고 있다.
"아니, 내 말은……. 하하하! 오해는 하지 말게. 자네가 세운 공이 이미 하늘에 닿을 정도로 대단한데, 어찌 내가 자네같이 훌륭한 방도이자 영웅에게 벌을 내리겠는가. 쿨럭. 어험. 그러니까 내 말은… 방도로서 작은 임무 정도는 내가 줄 수 있고, 시간이 좀 되면 바람이라도 쐴 겸 다녀오라는……. 어험. 어험."
하아!
이게 말이다.
이 노인네들.
작정하고 왔다.
상취개, 순화자, 속리자가 나에게 일을 맡길 수 없게 되자.
방주를 끌고 온 거다.
당했다.
젠장할!
내가 탈방하지 않는 이상 그리고 방주의 명령이 정의와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이상.
나는 그 명령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
따르지 않으면, 명령 불복종이고.
그러면 문제가 커진다.
설마 진짜 벌을 주기야 하겠냐만은 말이다.
"무슨 일인데요?"
"그냥 작은 문파에 잠입해서 동태 좀 살피고 오면 되는 거야. 위험한 거 절대 아니야."
됐다.
걸려들었어.
반격의 시간이다.
"잠입요?"
"응, 잠입. 싸우거나 그런 거 아니야. 준비는 다 해 놨고. 자넨 그냥 가서 거기 동태나 좀 살피다 오면 돼. 하하. 괜찮지? 내가 자네같이 귀한 인재한테 위험한 일을 맡기겠나? 하하하. 하하."
"신분 위장하고 그래야겠네요?"
"잠입의 기본 아닌가?"
"음, 어렵겠는데요?"
"무엇이 문제인데?"
"제가요."
"……?"
"좀 유명해졌잖아요. 그것도 많이. 들어 보셨죠? 멸마협 나태한이라고."
"음……."
방주의 얼굴이 순간 심각해졌다.
큭큭큭.
고심에 빠진 얼굴이다.
나는 그런 방주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결국.
"하하! 뭐 어쩔 수 없지. 자네가 유명해진 건 사실이니까. 하하. 어디 아니겠는가? 칠룡사봉인데, 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오! 뭐야?
뭐가 이렇게 쉬워?
"자! 그런 기념으로 한잔하자고. 다들 잔 들어. 낭만개 자네도 잔 들고. 칠룡사봉, 멸마협 나태한을 위하여!"
"위하여!"
됐다.
이젠, 지긋지긋한 임무도 안녕이다.
당분간 집에서 지내며 수련에만 몰두할 거다.
"아! 맞다. 자네 소문 말이야."
"네, 방주님."
"우리 개방에서 살짝 힘을 줬다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에이, 다 알면서. 우리 개방하면 뭔가? 정보가 아닌가?"
"그, 그렇죠."
"거의 30년 만에 우리 개방에서 칠룡사봉이 나왔는데, 어디 그냥 가만히 있을 수 있어야지."
"그래서요?"
"그래서 뭐긴? 말했듯, 소문에 힘을 살짝 줬다고."
뭐야?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려고 하네.
"어떻게 힘을 사알짝 주셨는데요?"
"있는 사실에다가, 아주 사알짝."
계속! 계속해! 어떻게 내 소문을 냈는지.
큭큭큭.
"그러니까, 우리 개방의 멸마협 나태한은, 나이는 어리지만 무공은 하늘을 찌를 듯하고, 신의는 두터워 약속을 천금같이 여기며……."
계속! 계속하시오, 방주!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갚을 줄 아는 멋진 마음을 가진 남자며."
더! 더 해 주시오, 방주님!
"우리 멸마협 나태한은, 입 찢어지겠네. 적당히 웃으면서 들어."
"앗! 넵. 큭큭. 네, 계속해 주세요. 큭큭."
"그러니까 우리 멸마협 나태한은, 엄청난 미남인데, 마치 옥으로 얼굴을 깎아 놓은 것처럼 잘생겼다고 소문에 사알짝 힘을 줬지. 하하."
"큭큭. 풉. 하하하. 하하하하하!"
"그렇게 좋은가?"
"앗, 죄송해요. 추태를 보여서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도저히 숨길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
방주가 갑자기 얼굴에서 웃음기를 확 지운 후, 정색을 했다.
"그래서 임무 수행 가능하다고."
"네? 하하. 무슨……. 하하. 무슨 임무요?"
"자네, 아무도 못 알아본다고."
뭘까?
갑자기… 싸하다.
"천하의 모두가 자네를 옥면공자로 알고 있어. 그러니 자네를 알아볼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 어느 곳에서도. 심지어 자네가 스스로 정체를 밝혀도,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거야."
"지, 지금… 지금 무슨 말씀을……?"
"임무 수행이 완벽히 가능한 상태임을 말해 주고 있다네."
X팔!
갑자기 기분이 더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