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분위기 파악이란 게 있다.
상취개는 술에 취했다 치고 백번 양보하자.
순화자와 속리자는 무려 무림맹의 장로씩이나 되는 양반들이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있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싱글벙글 입꼬리는 귀에 걸렸고.
날 보며 양팔을 쭉 뻗어 마구 흔들어 댄다.
"보기 끔찍할 수 있으니, 힘들면 눈 감고 있어라."
낭만개 아저씨는 그런 세 노인네를 보며, 나에게 나직한 음성으로 이 말만을 남기고, 번쩍!
한 번의 도약으로 수십 장을 날아갔다.
당연히 세 노인을 향해서고.
그제야 뭔가 크게 잘못된 걸 깨달은 세 노인네.
응, 늦었어.
쉬이이이이이익!
낭만개 아저씨가 양손을 뻗자, 곧바로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반격하는 세 노인.
그래도 명색이 개방의 장로며, 무림맹의 장로들 아니겠는가.
세 노인네는 각자의 절기.
개방과 종남 그리고 제갈세가의 신공이라 할만한 절기를 각자 전력을 다해 쏟아 냈고.
쾅!
쾅!
쾅!
정확히 세 번의 엄청난 폭발.
응, 끝났어.
폭발의 여운이 가시자마자 드러나는 세 노인네.
온몸이 땅에 깊숙이 박히고, 머리만 드러내고 있다.
와!
이건 어떻게 한 거지?
신통방통하다.
세 노인네는 그렇게 온몸이 땅속에 무처럼 박혀, 고개만 내밀고 눈만 뻐끔뻐끔한다.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고, 억울하고, 어리둥절한 얼굴.
그러거나 말거나.
단 세 수만에 무림의 기라성이라는 세 노인네를 땅에 무처럼 박아 버린 낭만개가 흉악한 기세를 마구 뿌리며 다가갔다.
"낭만개! 낭만개! 나야, 나! 육 장로 상취개라고! 왜 이러시나?"
술이 퍼뜩 깬 얼굴로 사색이 되어 다급히 상취개가 외쳤다.
그러나 낭만개의 입에서는 싸늘한 대답만이 돌아왔다.
"육 장로씩이나 되는 사람이, 아직 다 크지도 않은 어린아이를 괴롭혀?"
어?
내가 스무 살인데 앞으로 좀 더 크려나?
"이보시오, 낭만개 대협! 빈도는 종남파의 도사요! 무림맹 종남장로 순화자요!"
"낭만개 대협! 제갈세가! 저는 제갈세가 사람이오. 무림맹 제갈장로입니다! 지금은 저도 도사예요! 도사요!"
다급한 순화자와 속리자의 외침.
낭만개 아저씨는 이제 살기까지 흘려 댄다.
"도사라는 사람이… 어린아이를 괴롭혀? 그것도 집단으로?"
아! 내가 아직 많이 크려나 보다.
다 큰 줄 알았는데, 아직 어린아이였어. 큭큭.
"오해가! 오해가 있어요! 우리가 오늘 온 이유는……."
"닥쳐!"
호통과 함께 낭만개 아저씨가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다.
퍽.
어?
뭔가 엄청난 폭발이 일어날 줄 알았는데, 아니다.
그냥 맨땅을 주먹으로 쳤고, 평범한 퍽 소리가 한 번 들리는 게 전부… 오! 아니었군.
"으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악! 살려 줘!"
"살려주시오! 살려 줘! 으아악!"
역시, 낭만개 아저씨가 보통의 고수가 아니었어.
지기(地氣)다.
땅을 통해 기운을 발출.
그것이 대충 봐도 분근착골(分筋錯骨)로 이어지고 있다.
생각해 보니 저게 더 무섭긴 하겠다.
사실 너무 흔하게 분근착골이니 어쩌니 하지만, 저거 생각해 보면 정말 무지막지하게 아픈 거다.
온몸의 근육을 찢어발기고, 온몸의 뼈를 죄다 부서뜨리는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게 한다.
실제 찢어지거나 부러지지 않기 때문에, 그 고통은 단발성이 아니라 계속해서 지속된다.
얼마나 아프겠는가.
그런데 낭만개 아저씨는, 오! 더 무섭군.
저게 발버둥이라도 치면, 심리적으로라도 좀 나을지 모르겠는데.
땅속에 박아 버렸으니, 꿈쩍도 못 하고.
머리는 고스란히 땅 밖으로 나와 있고.
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런데 왜 계속 웃음이 나오지?
큭큭큭.
‘낭만개 아저씨, 힘내요! 조금만 더! 힘내라, 힘!’
계속 웃음이 나온다.
노인네들의 고통스러운 얼굴과 비명에, 10년 묵은 채증이 확 풀리는 느낌이다.
그러게 내가 적당히 부려 먹으라고 했잖아, 이 양반들아!
큭큭큭.
제대로 반성할 때까지 지켜보다, 좀 심하다 싶으면 그때 구하면 된다.
아직 멀었다. 하하.
그런데 그때였다.
"멈추어라!"
엄청난 사자후.
곧바로 등장하는 거지.
거지?
누구지?
처음 보는 거지인데, 무지막지한 고수다.
수십 장을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점해, 곧바로 낭만개 아저씨를 향해 기다란 봉을 휘둘렀다.
낭만개 아저씨도 바로 반격.
콰아아아앙!
한 번의 엄청난 폭발.
응, 멋지게 등장한 고수 거지도 땅에 머리만 내밀고 박힘.
큭큭큭.
아놔!
뭐야?
이 노인네들이 오늘 정말 단체로 날 웃기려고 작정했네.
다시 흉흉한 분위기를 마구 뿜어 대며 땅을 향해 주먹을 내려치려는 낭만개 아저씨.
그때였다.
다른 세 노인네는 사색이 되어 두 눈을 질끈 감았고.
멋지게 등장했다가, 다른 노인네들과 같은 꼴이 된 고수 거지 할아버지가 다급히 외쳤다.
아니, 다급하다기보다는, 조금 뻘쭘한 얼굴로 말했다.
"이봐, 낭만개. 그래도 내가 방주인데,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미친!
방주였어.
우리 방주.
걸왕(乞王) 귀행개(鬼行丐).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거지들 사이에서는 거의 신선급으로 추앙받는 방주 귀행개!
"아저씨! 잠깐만요!"
낭만개 아저씨가 방주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 땅을 내려치려는 순간 내가 외쳤다.
동작을 멈추는 낭만개 아저씨.
난 살짝 당황하고 주춤하며, 땅에 박혀 고개만 내민 방주를 향해 말했다.
"어, 저… 방주님이세요?"
"허허. 반갑군, 걸이번. 내가 방주일세. 허허허. 이거 초면에 좀 그렇군. 허허허. 나 좀 꺼내 주면 안 되겠나?"
"나도! 나도!"
"나도 꺼내 줘!"
"태한아! 오해야! 오해라고!"
"휴우. 아저씨,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죠."
"이 노인네들이 널 괴롭혔다며? 뒷일은 걱정하지 마라. 오늘 단단히 정신 개조를 시켜 줄 테니."
"아니에요, 방주님은 절 괴롭히지 않았어요. 저도 처음 봬요."
"그래? 그럼 방주만 꺼내 주고, 나머지는 다시 정신 교육."
"됐어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요. 충분해요."
"음, 뭐, 정신 교육은 언제든 할 수 있으니."
상취개, 순화자, 속리자가 동시에 안도의 눈물을 주르르 흘리는 순간이었다.
* * *
땅에서 나온 노인네들은 아까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한참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지옥에라도 다녀온 얼굴들이었다.
시간이 꽤 흘러 놀란 마음과 아픈 몸을 추스르는 듯했지만, 낭만개 아저씨가 쳐다볼 때마다 화들짝 놀라 경기를 일으켰다.
"방주."
낭만개 아저씨가 열댓 살은 더 나이가 많은 방주를 불렀고.
"어허, 그게… 하하, 거지들 사이에 아무리 나이가 그렇고 직분이 그렇고 해도. 하하하! 그래도 가끔 님 자는 붙여 주는 게 어떤가? 하하. 뭐, 싫으면 굳이 할 필요는 없고, 그냥 권고 사항. 하하하."
"방주."
낭만개 아저씨가 또 님 자를 빼고 부르자, 인상을 아주 살짝 구기는가 싶더니 다시 미소를 짓는 귀행개 방주.
"응, 왜?"
"도대체 애들 관리를 어떻게 했기에, 다 늙은 장로들이 아직 세상 물정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집단으로 괴롭히게 하는 거요?"
"하아. 오해라니까, 오해. 태한이가 비걸개 아닌가?"
"……."
"어험. 대꾸는 좀 해 주는 게……. 아닐세. 아무튼 태한이가 비걸개지만 그냥 비걸개도 아니고, 엄청나게 뛰어난 비걸개 아닌가?"
"음, 그건 맞는 말이지."
"당연히 뛰어난 인재에게 명성도 쌓고, 공도 세울 기회를 많이 주는 게 공정한 일이고."
"음,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한데."
"멸마협이야, 멸마협. 우리 개방에서 무치개 이후로 처음 나온 칠룡사봉이고. 몇 년 만인 줄 아나? 우리 걸이번, 아니 우리 태한이가 그렇게 대단한 인재라고. 영웅이야, 영웅!"
방주 저 인간.
낭만개 아저씨의 약점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
"흐흐. 하하. 그렇긴 하죠, 방주. 우리 태한이가 좀 잘났어야지. 하하하."
"이해해 주니 고맙군. 하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두려워 가까이 오지는 못하고, 꽤 떨어진 곳에서 귀동냥을 하고 있던 세 노인까지 슬그머니 미소를 짓는 게 아니겠는가.
- 아저씨, 정신 차려요.
- 어, 그래. 알고 있다.
"그래서 뭐? 또 우리 태한이 사지에 보내려고 왔소?"
"어허! 오해라니까, 오해. 사지는 무슨 사지? 상을 주려고 왔네."
"상?"
"그래, 상! 우리 개방에서 주는 상. 방주인 내가 직접 걸이번 나태한의 공로를 치하하고 내리는 상. 그리고 이건 뭔지 아나?"
"그건 뭐요?"
"무림맹주가 친필로 서신을 써서 태한이의 공로를 치하하고, 상품까지 하사했네. 직접 오려고 했지만, 급한 일이 있어서 오지 못한다고 몇 번이나 이해해 달라는 말을 전해 달라고 했어. 그래서 무림맹주 대신 순화자와 속리자 장로가 맹주 대리 자격으로 온 거고. 다시 돌아갈까?"
하아!
방주 저 할배.
고수다.
완전 우리 낭만개 아저씨를 가지고 논다.
낭만개 아저씨 입꼬리가 귀에 걸려 버렸다.
아니다.
낭만개 아저씨가 바보도 아니고.
방주가 낭만개 아저씨를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다.
전대의 방주와 장로들도 낭만개 아저씨를 어쩌지 못한다고 했다.
지금의 방주와 장로들 역시 낭만개 아저씨의 눈치를 봤으면 봤지, 뭐 하나 임무 한 번 하달한 적이 없다고 했다.
사정에 사정을 해 간신히 이곳 황천 분타의 분타주를 맡긴 게 전부라 하였다.
그런데 왜?
낭만개 아저씨가 갑자기 바보가 됐나?
아니다.
나 때문이다.
고집불통에 외길 인생이었던 낭만개 아저씨에게, 나라는 치명적인 약점이 생겨 버린 탓이다.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만약, 나를 이용해 낭만개 아저씨를 이용한다면, 그때는 내가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음, 무림맹에서는 무슨 상품을 줄까?
궁금하네.
기대되고.
"어험. 상취개 장로."
"네, 방주님."
"준비하시게."
"네, 방주님."
"순화자와 속리자 장로님들도 준비해 주시오."
"네, 방주님."
곧바로 상취개가 거적때기를 땅에 깔았고.
그 옆에 순화자와 속리자가 붉은 천을 깔았다.
먼저 개방.
방주가 낭만개를 대할 때와는 달리 근엄하면서도 위엄 있는 자세로… 오! 이러고 보니 걸왕 맞다.
낭만개 아저씨 옆에 있을 때의 그 하찮음은 온데간데없다.
아무리 거지라지만, 별호에 왕(王) 자가 괜히 붙는 게 아니었다.
엄청난 위엄이다.
곧 그가 누런 종이를 꺼내 나를 치하하는 말을 잔뜩 읽기 시작했고.
무릎은 안 꿇었다.
왜?
원래 거지들이 위아래가 없다.
거지는 밥 주는 사람에게만 무릎을 꿇는다.
그것도 배가 고파 죽기 직전에만 꿇는다.
그 외에는 방규에도 방주고 장로고 무릎 꿇으라는 소리는 없다.
아무튼, 아! 자꾸 웃음이 나네.
그렇게 나를 치하하는 방주의 일장 연설이 끝나고.
스으으윽.
방주가 품에서 더러운 끈 하나를 꺼냈다.
"이건 뭐죠?"
"이제부터 너는 삼결제자가 아닌 사결제자다. 커다란 권한이 주어지는 만큼, 그에 따른 책임도 막중하니 항시 만사에 신중을 기하여 행동하길 바란다."
"아, 네. 네, 감사합니다, 방주님."
내가 사결제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방주는 직접 그 더러운 끈을 내 허리에 묶어 주었다.
"잘 보고 기억해라. 삼결과 사결은 묶는 방법이 완전히 다르다. 상취개 장로가 다시 알려 주기는 하겠지만, 머리에 꼭 새기도록 하여라. 하나의 매듭이 추가되는 건, 네 어깨와 허리에 많은 의와 협의 책임 또한 달리게 된다는 뜻이니라."
"네, 명심하겠습니다."
일전에 내가 설명한 적이 있긴 하지만.
무결제자는 그냥 방도고 그냥 거지다.
일결제자도 그냥 방도고 그냥 거지다.
물론 일결은 타구봉법 1초식과 2초식을 기본적으로 수련한 거지기도 하다.
그리고 정말 깡시골, 우리 황천 같은 깡시골의 분타주 같은 별 볼 일 없는 분타주도 일결제자다.
이결제자는 제법 규모가 되는 마을의 분타주.
삼결제자는 작은 도읍, 마을이 아닌 도읍 하나를 총괄하는 분타주다.
삼결부터 꽤 대단하다.
물론 우리 비걸개도 처음 시작이 삼결이다.
사결제자는 더 어마어마하다.
대도읍이나 구파와 오대세가가 있는 도읍, 황궁이 있는 남경 같은 곳을 총괄하는 개방 분타의 분타주가 바로 사결 제자다.
방주와 장로들만 접할 수 있는 최고급 정보가 아닌 이상, 개방의 모든 정보를 접할 수 있는 권한까지 있으며.
심지어 주변의 개방 방도들을 소집하고 지휘할 수 있는 권한까지 있다.
내가 사결제자가 된 거다.
"그럼 우리도 시작해 볼까?"
무림맹 차례다.
순화자가 무림맹주의 친필 서신을 역시나 진지하게 읽어 나갔다.
하나같이 영웅이 어쩌고 의협이네 어쩌네, 치하 일색이었다.
무림맹은 일반 문파와 그 결을 달리한다.
당연히 여기서도 아무리 맹주의 치하라고 한들, 무릎을 꿇을 필요가 없다.
그렇게 순화자가 계속 맹주의 서신을 읽었고.
응, 빨리 읽고 상품이나 줘.
뭘까?
뭘 줄까?
궁금하네.
드디어 맹주의 하사품이 나에게 전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