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118화 (117/174)

118화

"아! 태한아, 잠시만."

대성검을 품에 안고 아이처럼 기뻐하던 아저씨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엄마 산소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이내 냅다 손으로 땅을 파기 시작한다.

"여기 있었군. 하하."

한 척 깊이의 땅을 파더니, 무언가를 꺼내어 다시 돌아온다.

기다란 나무 상자였다.

퍽!

냅다 주먹으로 그 상자를 부수니.

검이 한 자루 나왔다.

"이게 뭐예요?"

"네가 선물을 줬으니, 나도 주려고. 받아 보아라."

난 낭만개 아저씨가 준 검을 건네받았다.

"순천검(順天劍)?"

검의 손잡이 부분에 검의 이름이 새겨 있었다.

"그게 순천검이었던가? 맞아, 그랬던 것 같구나. 하하. 네가 준 대성검에는 비할 바는 아니지만, 빈손으로 다닐 수는 없지 않겠느냐? 더 좋은 검을 구하기 전까지는 그걸 가지고 다녀라. 뭐, 마음에 안 들면 버려도 되고. 난 괜찮다. 나도 주운 거라서. 하하하."

스르르릉.

검을 뽑았다.

나는 무엇에라도 홀린 듯 내 의지가 아닌 본능에 이끌려 그렇게 검을 뽑았는데.

아!

이거 말이다.

낭만개 아저씨가 틀렸다.

보검이다.

그것도 엄청난 보검.

대성검에 비할 바가 아니라, 대성검에 절대 부족하지 않은.

어쩌면 대성검보다 더 뛰어난 검이다.

검의 울부짖음이 내 심장을 마구 뛰게 한다.

정말 엄청난 보검.

우룡검이 없었다면, 어쩌면 천하제일의 보검 자리를 다퉈도 될 정도로 훌륭한 검이다.

"아저씨……."

"어, 그래. 왜? 조금 볼품이 없느냐? 그럼 내가 나중에 더 좋은 검을 구해다 주마."

"아니요, 그게 아니라 이거 너무 좋은 건데요?"

"그래?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구나, 하하하. 하하하!"

그냥 뭐든 다 좋다.

낭만개 아저씨는 지금 기분이 최고인 상태다.

거의 1년 동안 웃을 것을 지금 다 웃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아저씨, 무슨 거지가 이렇게 엄청난 보검을 가지고 있었대요? 그것도 왜 땅에 숨겨 놓았고요?"

"주웠다고 했잖느냐."

미친!

마교의 천마신검을 땅에서 줍고, 무당파의 태청검을 땅에서 줍고, 화산파의 자하신검을 땅에서 줍고, 천하 10대 보검을 땅에서 주웠다고 하면 누가 믿겠나.

순천검은 분명 그러한 검들과 어깨를 나란히 겨눌 만큼 정말 대단하고 또 대단한 보검이 분명하다.

드워프국에 다녀온 후 내 눈이 얼마나 높아졌는데 말이다.

"나야 쓸 일이 없어서 땅에 묻어 뒀다. 거지가 칼을 들고 다니면 누가 동냥을 해 주겠느냐. 그래서 매일 오는 여기에 묻어 뒀었지. 혹시라도 흉년이 들어 우리 분타 거지들 구걸 못 하면, 이거라도 팔아서 끼니를 때울 수 있게 하려고."

"이거 팔면 끼니를 때우는 게 아니라, 작은 마을 하나는 통째로 사겠는데요?"

"풉. 또 뭘 그렇게까지. 음, 그러고 보니 내가 주는 선물이라서가 아니라, 검이 그래도 쓸 만해 보이기는 하는구나. 그때 그 녀석이 했던 말이 전부 허풍은 아니었었나 봐."

"그때 그 녀석이요?"

"그런 일이 있었다."

"말해 주세요. 이거 어떻게 구했는지."

"말했잖느냐. 주웠다고."

"아니, 이런 보검을 어떻게 그냥 주워요?"

"진짜라니까. 진짜 주운 거야."

"몰라요. 말 안 해 주면, 저 이거 안 받을 거예요. 이거 들고 다니다가, 갑자기 엄청난 고수가 ‘그 검은 돌아가신 사부님께서 들고 다니시던…….’ 이러면서 냅다 절 죽이려 하면 어떻게 해요?"

"아! 진짜로 주운 건데……."

"전혀? 전혀 아무 일도 없었고요?"

"그게… 실은 말이다……. 어험."

슬며시 내 곁으로 다가와 다시 자리에 앉는 낭만개.

살짝 기억을 되짚는 얼굴을 하더니, 순천검에 얽힌 사연을 풀기 시작했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아마 내가 스무 살 때쯤이었을 때다. 그때는 나도 한 성격 했는지라, 이놈 저놈 많이도 때리고 다닐 때였지."

스무 살이면, 낭만개 아저씨가 무치개를 만나기 전이었고, 단령도문이라는 거대 문파를 홀로 박살 내기 1년 전이다.

"누굴 때리고 다녔는데요?"

"그 노인네들 이름이 뭐였더라? 이름은 기억이 안 나고. 그때는 아마 검왕, 도왕, 창왕, 혈사신마, 흑수존, 수라권마……. 좀 많이 때리고 다녀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X팔!

장난해?

스무 살에 검왕, 도왕, 창왕, 혈사신마?

그리고 뭐?

흑수존?

수라권마?

별호만 들어도 대충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알겠다.

몇몇은 비걸개 훈련생 때 익히 들었던 고수들이기도 하고.

아놔!

돌겠네.

이 아저씨가 지금 누굴 바보로 아나?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이 인간.

낭만개 아저씨.

지금 진지하다.

저 표정 말이다.

한 치의 거짓이 없다.

아!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혼란스럽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요? 설마… 다 저세상으로 보냈어요?"

"에이, 내가 무슨 살인마도 아니고, 시비 좀 걸었다고 사람 목숨까지 빼앗겠느냐? 가만히 있는데 자꾸 귀찮게 해서 그냥 아주 살짝 손을 좀 봐준 정도다."

어라?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검왕, 도왕, 창왕은 모두 주화입마로 죽었다고 배웠는데?

"그게 끝이에요?"

"몇 대 때려 줬더니 순간 착한 사람이 되더라고."

"그, 그래서요?"

"잘못했다면서 싹싹 빌더구나.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뭐, 나이도 지긋한 양반들이 그렇게 비는데… 아! 맞다."

"뭐요?"

"그 노인네들이 잘못했다고 싹싹 빌면서 똑같은 부탁을 했었어."

"무슨 부탁이요?"

"절대 비밀에 부쳐 달라고."

"아저씨한테 맞은 거요?"

"응."

"그래서요? 정말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요?"

"말하고 싶어도 말할 사람이 없었다. 그때는 친구가 한 명도 없었거든. 그리고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그걸 떠벌리고 다니겠느냐? 괜히 힘없는 노인네들 때렸다고 나만 욕먹을 게 뻔한데."

검왕, 도왕, 창왕이 순간 힘없는 노인네가 되는 순간이었다.

아!

난 정말 이 인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검왕, 도왕, 창왕이란 인간들 말이다.

주화입마가 아니라 화병으로 죽은 게 분명하다.

새파랗게 젊은 놈에게 두들겨 맞아 혼자 끙끙 앓다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그렇게 혼자 고민하다가 화병으로 죽었을 테다.

휴우.

됐다.

이제 20년도 더 된 지난 이야기다.

순천검에 대해서나 듣자.

"그래서 순천검은 어떻게 얻은 거예요?"

낭만개 아저씨는 힘겹게 오래된 기억을 되살리려 노력하며 말했다.

"그때 나는 한 마을에 꽤 오래 머물며 구걸을 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모진 마을 사람들이 나에게 찬밥 한 덩이도 안 주더구나."

제대로 구걸을 안 하고 퍼질러 잠만 자니, 마을 사람들도 포기한 거겠지.

"며칠을 굶었다. 이러다 굶어 죽겠다 싶어서 등가죽에 붙은 배를 부여잡고, 힘겹게 이웃 마을로 구걸을 하러 움직였지."

초절정?

초절정 극상?

말이 안 되는 소리긴 하지만, 어쩌면 이 인간 그때 이미 화경의 반열에 올랐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양반은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다.

화경의 고수가 며칠 굶었다고 죽어?

천주마 녀석이 들으면 게거품을 물며 욕을 할 일이다.

"정말 너무 배가 고팠다. 배가 고파 죽을 거 같아 걸을 힘도 없었지. 눈에 독버섯이 보였는데, 그냥 먹을까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로……."

"아저씨."

"응? 왜?"

"구라 그만 치시고요."

"녀석, 구라는. 진짜다. 아무튼 정말 배가 고팠고, 다음 마을로 가기 위해서는 높은 산을 넘어야 했는데, 기운이 없어서 산 중턱에서 주저앉고 말았단다."

"에휴, 아니에요. 계속하세요.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독버섯을 먹을까 말까? 계속 고민하며 주린 배를 잡고 있는데. 갑자기 산 위쪽에서 한 사내가 뭐가 그리도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총총걸음으로 오는 게 아니겠더냐."

"그래서요?"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난 기분이었다. 곧바로 기다시피 해 그에게 갔고. 정말 간절하게 구걸을 했다."

"구, 구걸을요? 그 상황에서요?"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았다. 눈에 뵈는 게 없었어."

"네, 알았어요."

"싱글벙글, 기분 좋게 산에서 내려오던 사내는 내 딱한 사정을 보고는 봇짐에서 무언가를 꺼냈는데, 와! 세상에 그렇게 맛있어 보이는 주먹밥은 정말 처음이었다."

"아저씨, 지금 주제가 주먹밥이 아니라 순천검인 건 알고 있죠?"

"안다. 알아. 지금 그 얘기를 하는 중이다."

"네."

"그가 주먹밥을 꺼내 나에게 주다가. 아!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주먹밥을 주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나를 놀리려고 했는지, 갑자기 안 주는 거야."

"왜요?"

"그러니까!"

그때 배가 많이 고프긴 했나 보다.

지금 낭만개 아저씨 과몰입 중이다.

"난 울먹이기까지 하며 그 주먹밥에 모든 신경을 쏟고 있는데, 이 미친놈이 갑자기 길쭉한 봇짐을 하나 등에서 풀더니 내게 보여 주더구나. 두 자루 검이었다."

"두 자루요?"

"그래, 그러더니 이 사악한 놈이 하는 말이, 자기 얘기를 다 들어 주면 주먹밥을 주겠다더구나."

그 사람도 정상은 아니었나 보다.

인적 없는 산 한가운데서 정상이 아닌 두 사람의 만남.

살짝 궁금하긴 하네.

"나야 주먹밥을 먹기 위해서는 염라대왕의 멱살도 잡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 그깟 이야기 몇 마디 못 들어 주겠느냐. 그래서 자리까지 턱 하니 잡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지. 자신이 만든 두 자루 검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사람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나 봐요?"

낭만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으려다가 갑자기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그건 모르겠고. 아놔! 주먹밥. 다시 생각해도 열받네."

"그냥 얘기 계속해 주세요. 궁금해요."

"무슨 당(堂)이었다고 했는데. 대대로 검을 만들어 오는 야장 집안인데, 꽤 대단한 곳이긴 한 것 같더라. 무슨 문파도 아닌 대장간에 당이란 글자까지 붙인 걸 보면."

당?

그런 대장간이 있나?

"그는 그 야장 집안의 둘째로 태어났다고 하더구나. 어렸을 적부터 천재적인 재능으로 훌륭한 검을 만들었고, 모두가 그의 재능을 칭찬했단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만큼은 그를 단 한 번도 칭찬하지 않았고, 오로지 그의 형인 장자만을 칭찬하고 감쌌단다."

"배고파 죽을 것 같았다고 하면서 들을 건 다 들었네요?"

"너에게 말을 하다 보니 새록새록 그 기억이 떠오르는구나. 그 사내의 슬픈 표정도 기억이 나고."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언제나 형보다 좋은 검을 만들었지만, 아버지는 형의 검만을 칭찬했고. 그자는 결국 형과 대결을 원했다고 했다. 주위 사람들이 이를 찬성해 대결은 성사가 됐다. 그렇게 대결을 시작했는데……."

"둘째가 이겼겠네요?"

"아니다. 둘째의 검은 첫째가 만든 검에 힘도 써 보지 못하고 부서졌다고 하더구나."

"천재 아니었어요?"

"모르지, 천잰지 아닌지는. 하지만 그자가 그러더구나. 공정한 대결이 아니었다고. 나중에 몇 번이나 더 대결을 했는데, 대결을 할 때마다 자신이 만든 검이 형이 만든 검에 의해 부서지고 부러지고 깨지고 했다더구나."

"음……."

"아버지였어."

"아버지가 맏아들을 몰래 도왔던 거예요?"

"그랬다고 하더구나. 그 사실을 안 후 그자는 크나큰 배신감에 휩싸였고, 결국 가출을 결심했단다. 집안에 있던 현철을 비롯한 귀한 철과 도구를 몰래 챙겨 가출을 했고, 나와 만났던 산에서 무려 10년 동안 은거하며 검을 만들었단다."

"와! 확실히 범인은 아니네요."

"그럴지도 모르지. 이 순천검을 만든 게 그 사람이니까. 그 사람이 그러더구나. 아무것도 안 하고 10년 동안 검만 만들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불이 보이고 물이 보이고 흙이 보이며 쇠가 보였다고. 종국에는 자신이 만든 검의 결이 보였다고 하더구나."

"와! 그거 신검합일, 물아일체 그 비슷한 거 아니에요?"

"그럴지도 모르지. 눈빛이 대단해 보이긴 하더구나. 그런데 다시 말하지만 나는 정말 배가 고팠어. 그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아주 세밀한 것까지 모두 정확히 기억하고 있고만.

"마지막 1년. 그러니까 나를 만나기 정확히 1년 전부터 그간의 모든 깨달음을 바탕으로 두 자루의 검을 완성했단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순천검이다."

"엇? 그럼 나머지 하나는요?"

"그게… 그게 말이다. 어험. 쿨럭."

화경의 고수가 기침을 한다.

뭔가 구린 게 있다는 뜻이다.

"뭔데요?"

"말했잖느냐. 배가 너무 고팠다고."

설마 먹지는 않았겠지.

가끔 모자라 보이기는 해도, 낭만개 아저씨가 진짜 바보는 아니니 말이다.

"배는 고파 죽겠는데, 그 사람의 이야기는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계속 자신이 만든 검에 대한 자랑만 하고. 진짜 배고파 죽을 것 같았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모르게 뭐요?"

"두 자루의 검 중 하나를 만지작거리다가 그만 툭 하고 반을 부러뜨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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