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집이다.
드디어 집에 도착했다.
하남 신양 황천 분타.
기분 탓일까?
10년 만에 돌아온 느낌이다.
그런데 또 어제도 온 것 같고.
눈에 들어오는 모든 풍경이 정겹다.
음, 낭만개 아저씨는 없군.
구걸하러 갔나?
아니면 엄마 산소에?
일단 어린 거지 녀석들부터.
"얘들아! 형님 왔다!"
내가 큰 목소리로 꼬맹이 거지 녀석들을 부르자, 분타 마당의 땅바닥에서 땅따먹기를 하느라 여념이 없던 녀석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조금 놀란 얼굴을 한다.
왜지?
마치 낯선 사람을 보는 것처럼 거리감까지 살짝 느껴지는 분위기다.
그러더니 한 녀석이 혼잣말 같은 말을 하는데.
"멸, 멸마협이다."
하아!
이곳에까지 내 명성이 진동하는군.
푸하하하하!
"그래, 멸마협 나태한 형님이 돌아오셨다, 이 녀석들아! 크하하하하!"
"와아아아아아!"
"형아아아아아!"
"형! 우리 형! 멸마협이다!"
"칠룡사봉이다! 와아아아!"
어색함도 찰나였고, 곧바로 어린 거지 녀석들이 떼를 지어 달려와 내 품에 안긴… 젠장!
"먹을 거! 먹을 거 사 줘!"
"양꼬치 사 줘! 양꼬치 먹을 거야!"
"빨리 돈 내놔!"
"양꼬치 사 주라고!"
아놔! 이 거지새끼들!
"갑자기 웬 양꼬치 타령이야? 오리고기 열 마리나 사 왔잖아. 우선 이거 먹어."
"와아아아아! 오리고기다! 내일은 양꼬치 사 줘!"
"와아아아아!"
"싸우지 말고, 천천히 먹어."
"꺼져! 내일은 양꼬치 사 줘!"
아놔, 진짜 이 거지새끼들을 그냥 콱!
됐다.
참자.
그래도 내가 사 온 오리고기를 맛있게 먹는 걸 보니, 내 배가 다 부르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태한이 왔느냐?"
어린 거지들의 소란에 몸이 불편해 구걸을 나가지 못한 어른 거지가 힘겹게 움막의 천을 걷어 내며 나왔고.
"아저씨, 이거요. 드세요. 저 소악귀 녀석들이 다 먹기 전에 드세요."
"허허. 매번 고맙다."
"낭만개 아저씨는요?"
"뻔하지. 항상 가는 그 자리에서 햇살을 맞으며 낮잠이나 자고 있을 거다."
"네, 이따가 낭만개 아저씨랑 다시 올게요."
"그래라."
난 서둘러 마을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 그가 있었다.
어쩌면 천하제일인 낭만개.
땡그랑.
길을 가던 누군가가, 길바닥에서 퍼질러 자는 낭만개 아저씨의 동냥 그릇에 철전 한 닢을 던져 주고 가던 길을 간다.
아하! 정말 왜 저러고 산대?
이해가 안 간다.
"아저씨! 저 왔어요."
* * *
이것저것 사 들고 엄마 산소에 올라왔다.
낭만개 아저씨랑 함께 왔다.
아저씨와 함께 간단히 제사도 지내고.
제사 음식을 나눠 먹으며 나란히 앉아 맞은편 산을 보고 있다.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뭐가 말이냐?"
"저에 대해서요."
"휴우,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다."
"무슨 말이에요?"
"너 말이다. 네가 잘 알지 않느냐? 네가 몇 달 사이 얼마나 변해서 돌아왔는지. 보고 있어도 믿기지 않는구나."
"조금 더 해 주세요. 얼마나 기대하고 있었다고요."
"너를 보고 놀랄 내 모습을?"
"네. 큭큭."
"녀석도. 말하지 않았느냐?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라고. 이젠 너무 놀라, 더 놀랄 힘이 없구나. 허허."
"많은 일이 있었어요. 죽을 뻔도 했고요. 아저씨 남만 알아요?"
"알지, 그곳에도 다녀왔느냐?"
"네, 거기서 독곡의 곡주랑 밀독왕과도 싸웠어요."
"음……."
"왜요?"
"위험했겠구나. 아니, 변한 네 모습보다, 살아남은 게 더 놀라울 정도다."
"아저씨."
"……?"
"저 정말 많이 변했어요."
"안다. 말하지 않았느냐. 놀랄 힘이 남아 있지 않을 만큼 네 변한 모습에 놀랐다고."
"독곡의 곡주는 제가 직접 상대해서 처리했고, 밀독왕은 태양왕과 야수왕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결국 그자도 제 손으로 끝을 봤어요."
"기적이다. 운이 많이 따라 주었고."
"저, 예전과 같지 않아요."
"안다니까."
"기적 아니에요. 운이 따라 준 건 맞지만, 운보다 실력이 더 크게 작용한 당연한 결과예요."
맞은편 산을 무심한 얼굴로 보던 낭만개가 고개를 돌려 나를 향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심각한 얼굴일까?
"왜요? 뭐가 잘못됐어요?"
"위험하구나."
"뭐가요?"
"네가."
"제가 왜요? 저 지금 최고예요."
"그래서 위험하다."
"……?"
"숨기지 않았구나?"
"뭘요?"
"네 실력을."
"그게……."
"가장 기본이다. 비걸개 훈련생 때도 수없이 배웠다며? 그새 잊은 것이냐?"
"3할의 실력을 숨기라는 거요?"
"그렇다."
"그게… 상황이 좀 그랬어요."
"무림이라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언제 가장 많이 죽는 줄 아느냐?"
"언젠데요?"
"스스로 최고라고 생각하는 순간이다."
하아!
젠장.
반박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했다.
나를 보는 낭만개 아저씨의 눈에 담긴 진심이 내 심장을 마구 쑤셔 댔다.
아팠다.
그의 근심과 걱정이 고스란히 내 심장으로 파고들어 나를 아프게 했다.
"환골탈태까지 했구나."
"네."
살짝 의기소침해 대답했다.
"자연기를 끌어다 쓸 수 있느냐?"
"네."
"내가 네 몸을 좀 살펴도 되겠느냐?"
"네."
난 그에게 선뜻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가 내 맥문을 잡았다.
잠시 후.
"내공에 있어서는 네가 천하제일이겠구나. 허허! 이걸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허허허."
살짝, 아주 살짝 우울해 있었는데.
낭만개 아저씨의 말에 곧바로 입꼬리가 귀에 걸려 버렸다.
아! 좀 자제하려고 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낭만개 아저씨가 저리 말하니, 어찌 기쁘지 않겠느냔 말이다.
"그런데 태한아."
"네, 아저씨."
"여전히 호랑이 앞의 하룻강아지로 보이는구나."
"조심할게요. 정말이에요."
"그럴 땐 진지하게 말하는 거다. 지금처럼 웃으면서 말하는 게 아니고."
"알았어요. 그런데 아저씨, 그래도 제 내공이면 어디 가서 쉽게 죽고 그러지는 않지 않아요? 안 되겠다 싶으면, 그냥 검강 한 방 무지막지한 걸로 날리고, 냅다 튀면 되잖아요."
낭만개 아저씨가 씩 웃는다.
그러더니 조금 전 놓았던 내 오른손 팔목을 다시 잡는다.
그의 기운이 내 오른손 팔목의 맥문을 통해 밀려 들어오는 게 느껴진다.
뭐 하자는 거지?
설마 내공 대결을 하자는 건가?
방금 본인 입으로 내 내공이 천하제일이라고 했는데?
낭만개 아저씨가 웃는다.
대결하자는 거 맞다.
뭐, 다른 건 몰라도 내공이라면.
나도 씩 웃으며 자연기를 끌어들였다.
대자연의 기운이 순식간에 내 몸으로 들어와 나의 기운이 되어 낭만개 아저씨의 기운을 막았다.
낭만개 아저씨의 내공은 내 오른팔의 팔꿈치 부근에서 막혀 꿈쩍도 하지 못… 어라?
어? 이게 뭐지?
낭만개 아저씨는 실제 장난과 같이 약간의 기운만을 주입했다.
내 기운의 100분의 1도 되지 않는 미비한 기운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그게 거짓말처럼 태산과 같은 내 기운을 뚫고, 순식간에 내 전신의 혈도를 마구 휘저으면 타고 흘렀다.
스으으으으으윽.
놀란 나를 보며 미소를 지은 후, 천천히 자신의 내공을 거두어들이는 낭만개 아저씨.
"아, 아저씨… 이게…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내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기까지 했다.
그러자 낭만개 아저씨가 더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설명해도 지금으로서는 알아듣기 힘들 거다. 네 경지가 더 상승의 단계로 올라서야 이해할 수 있는 이치란다."
"아직… 제가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그러신 거예요?"
그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많이 부족한 건 아니다. 솔직한 말이니라. 아주 약간, 정말 미세하지만 부족한 게 몇 가지 보이는구나."
"그 말씀은… 휴우, 그 작은 부족함 몇 개가, 진짜 고수들 앞에서는 하룻강아지의 어설픔으로 보인다는 말씀이시지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낭만개.
"그리고 그 약간의 어설픔은 곧 생명과 직결되는 거고요."
이제는 내 등까지 두들겨 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
거의 다 된 줄 알았는데.
아직 멀었나 보다.
낭만개 아저씨의 눈에 그리 보인다는 건, 아마 독선도 봤다는 뜻일 테다.
독선이 그나마 나에게 한 수 접어 주는 태도를 보인 건, 못난 아들 때문일 테고.
또 자신의 세상이 끝났을 때, 자신의 자식들과 내가 적대적이 아닌 우호적 관계의 친분을 쌓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가능성도 있고.
독선도 복잡한 마음으로 그렇게 나를 대했던 것이다.
내가 잘나서 그런 게 아니라.
그의 눈에는, 지금 낭만개 아저씨가 나를 보듯 약점투성이였을 것이다.
아! 갑자기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다.
쪽팔려.
쉽지 않구나, 무림이란 게.
"태한아, 앞으로 위험한 곳에 갈 때는 나를 불렀으면 좋겠구나."
"남만 같은 곳이요?"
"그래. 나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밀독왕이나 태양왕, 야수왕 같은 고수들은 지금의 네가 상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란다. 이번엔 정말 위험했구나. 이렇게 살아 돌아와 다행이긴 하지만 말이다."
"네, 앞으로는 꼭 그럴게요."
사실 나도 그렇게 위험할 줄 알았으면 당연히 낭만개 아저씨를 불렀을 거다.
안 간다고 해도, 멱살이라도 잡고 끌고 갔을 테다.
그런데 거기서 그런 일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냐는 말이다.
가기 전, 개방에서 남만의 상황까지 나에게 알려 주지 않았고.
난 그냥 코뿔소 한 마리 잡아서 뿔만 슬쩍 잘라 오면 되는 줄 알고 간 건데 말이다.
뭐, 이런 걸 지금 다 말하기는 그렇고.
천천히 말해 줘야겠다.
시간은 많으니까.
"아저씨, 저 이번엔 집에 오래 있을 거예요."
"그래, 그러면 좋지. 아이들도 좋아하고."
"그거 말고요. 이번에 오래 있을 테니 진짜 제대로 제 무공 좀 봐줘요."
"넌 내가 아니어도 알아서 기적이라 할 만큼의 성과를 보는 것 같은데?"
"아이! 그래도 좀! 좀 봐줘요. 부탁이에요."
"허허. 알았다. 알았어."
"제대로 봐줘야 해요. 대충대충 말고요."
"사실 나도 그럴 생각이었다. 너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는 게 좋을지 나름 고민도 많이 했었고."
"아저씨……."
와! 감격이다.
그냥 길거리에서 퍼질러 잠만 잔 게 아닌가 보다.
내 무공에 대한 고민도 많이 했었나 보다.
"너무 감격한 눈으로 보지 마라. 고민 끝에 너에게 가장 필요한 몇 가지 가르침을 생각해 놨는데, 다 버리고 다시 고민하게 생겼으니 말이다."
"제가… 변해서요?"
"변해도 너무 변했구나. 허허. 아무튼 걱정하지 마라. 당분간 나도 네 무공의 부족한 점을 채워 주기 위해 온 힘을 쏟아 볼 테니."
"고마워요, 아저씨. 아! 맞다. 이거 받아요."
난 허리춤에 달린 대성검을 검집째 풀어 낭만개 아저씨에게 건넸다.
"검에 이름이……. 대성검?"
"뽑아 봐요."
스르르릉.
그가 대성검을 뽑자, 성스러운 기운과 수많은 전쟁을 겪으며 품었던 그 힘이 단번에 뿜어져 나왔다.
그런데 그게 달랐다.
그것도 아주 많이 다른 느낌이고, 굉장히 강렬한 기운이었다.
그래서 놀랐다.
같은 검인데, 내가 뽑았을 때와 낭만개 아저씨가 뽑았을 때의 대성검은 다른 느낌이 들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대성검은 지금까지 나를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낭만개 아저씨를 만났고, 낭만개 아저씨를 주인으로 인정한 것인지 모르겠다.
"정말 좋은 검이구나."
좀처럼 물욕이나 식욕을 표현하지 않는 아저씨가 정말 오랜만에 그 감정을 제대로 표현했다.
대성검을 보는 아저씨 눈에서 별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좋아요?"
"좋지. 암, 좋고말고. 하하하."
정말 좋아한다.
아니, 그래도 명색이 어쩌면 천하제일인이 그간 저렇게 보검을 좋아하면서 왜 매일 빈손으로 다녔대?
참 신기한 일이다.
낭만개 아저씨는 얼마나 좋은지 이제는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그리고 대성검을 마치 엄청난 보물인 것처럼, 아! 보물이 맞긴 맞는데.
아무튼 엄청난 보물인 것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기까지 한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다 웃음이 나왔다.
"뭘 그렇게까지 좋아해요? 하하하."
"좋지, 어찌 안 좋겠냐? 네가 나한테 처음으로 주는 선물인데. 하하. 하하하. 내가 죽을 때까지 들고 다니겠다. 나중에 나 죽으면 꼭 엄마 옆에 묻어 주고, 그때 이 검도 함께 묻어 줘라. 하하. 하하하."
이 인간.
낭만개 이 인간!
젠장!
대성검 자체가 좋아서가 아니라.
내가 준 거라서.
내 첫 번째 선물이라서 좋아하는 거였어.
철없는 아이처럼 대성검을 꼭 끌어안고 환히 웃는 아저씨를 보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