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천주야, 달려!"
푸릅! 푸릅(달리고 있잖아, 미친놈아)!
"그래! 잘한다. 달려라, 달려!"
푸르르릅, 풉풉(아놔! 살다 살다 별 미친놈을 다 태우고 다니는 날이 오네).
성격이 지랄맞은 놈이다.
아니, 성격은 괜찮은데, 입이 좀 많이 거친 녀석이다.
이름이 천주마(千走馬)라 하였다.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고 하여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입이 거칠지만, 엄청난 명마는 맞긴 하다.
녀석을 타고 달리고서야, 나는 진짜 말을 타는 기분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사천에서 황궁이 있는 강소의 남경까지.
나는 천주마를 타고 고작 사흘 만에 주파할 수 있었다.
그것도 호화로운 객잔에서 맛난 음식까지 실컷 먹고, 푹신한 고급 침상에서 잠도 푹 자고.
와! 이제야 돈을 좀 쓰는 느낌이 든다.
오는 길에 옷도 새로 한 벌 맞췄다.
캬아, 좋다.
그렇게 나는 남경의 약선각(藥仙閣)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황궁의 지원과 약선의 주도로, 남경에서 시작하여 현재 중원 각지에 세워지고 있는 의각이다.
사천당가의 혜민각과 비슷한 의미의 의각이다.
오로지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운영되는 의각이라는 뜻이다.
혜민각은 사천당가에서 직접적으로 운영하고 관리하는 의각이라 할 수 없다.
혜민각의 의원 중 사천당가 출신이 많고, 또 사천당가의 의술을 기반으로 의원이 된 사람들이 많아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혜민각을 언급할 때 사천당가와 연관 짓는다.
하지만 약선각은 황궁이 지원하고 약선이 직접 관리 운영하는 의각이다.
약선이 황궁으로 들어간 이유가 바로 이 약선각 때문이었다.
황제는 약선에게 약속한 대로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1년도 되기 전 이미 중원 전역에 100개가 넘는 약선각이 지어지고 있다고 했다.
어쨌거나, 내가 그렇게 집에 가고 싶은 와중에도 이곳을 찾은 이유는…….
당연히 붉은 코뿔소의 뿔 때문이다.
"줄을 서야 합니다. 그리고 이곳은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운영되는 의각으로, 돈이 많으신 공자님께서는 가급적 이용을 자제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신출내기 견습 의원인 듯하다.
진료는 하지 않고 몰려드는 환자들의 질서를 잡고 있다.
비단옷을 입은 내가 길게 늘어선 줄도 무시하고 의각으로 들어가자, 곱지 않은 시선으로 저리 말했다.
"이곳에 약선 의원님의 수제자께서 계시다는 말을 듣고 왔습니다."
"신준 의원님은 왜……?"
"볼일이 있습니다."
"뉘신지……?"
"개방의 나태한이라고 하면 아실 겁니다."
"나, 나태한… 멸마……."
"쉿."
녀석이 멸마협이란 말을 꺼내려 할 때, 내가 먼저 제지했다.
"은밀히 도움을 받고 싶은 게 있어서 이리 찾아왔습니다. 조용히 만나고 싶습니다."
"아, 네, 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캬아!
내 명성이 이곳 남경에까지 퍼져 있을 줄은… 응, 예상하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실제 견습 의원의 반응을 보니 어깨가 들썩해지고 입꼬리가 절로 귀에 걸린다.
잠시 후, 살짝 놀란 얼굴의 신준이 서둘러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헌원세가에서 이미 몇 차례 만난 적 있는 자이다.
약선 길평의 수제자인 만큼, 약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또 내가 헌원세가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도 잘 알기도 한다.
"나 소협."
"오랜만입니다, 의원님."
* * *
아쉽게 약선 길평은 만날 수 없었다.
황제가 강소와 절강의 바닷가로 잠행을 나갔는데 동행했다고 한다.
석 달은 걸려야 돌아올 것이라고.
감사함을 꼭 표하고 싶었는데.
정말 아쉬웠다.
그래도 내가 하려는 일에는 지장이 없었다.
놀랍게도 이곳 약선각에서도 황궁 태의전과 함께 공동으로 탈혼독에 대한 해독약을 연구 개발 중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최근 사천당가의 소식을 접하고 해독약 개발을 중단한 게 바로 어제라고.
확실히 황궁에서 무림의 동태를 상세히 살피고 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 듯하다.
해독약을 최종적으로 만든 게 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약선의 수제자 신준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더불어 내가 부탁한 일들에 대해 아낌없는 지원을 해 주었다.
내가 부탁한 건……. 그리고 간절히 집에 가고 싶은데도 이곳에 들른 이유는…….
바로 붉은 코뿔소의 뿔로 영단을 만들기 위함이다.
소림사의 대환단에 버금가는 최고의 영약을 만들 것이다.
아니, 그 이상의 영단을 만들고야 말 테다.
이미 구상은 머릿속에 그려졌고.
신준의 도움으로 갖가지 최상급 약재도 빠르게 구할 수 있었다.
몇 가지 약재를 구하는 일은 황궁에서까지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멍석은 모두 깔렸고.
나는 그 멍석 위에서 천하제일 영약 제조라는 춤사위를 추기만 하면 되었다.
무림맹 약룡전 부전주에게 한 개 주고, 남은 붉은 코뿔소의 뿔은 열두 개.
커다란 약제실까지 빌렸고.
최상의 약재들도 충분히 준비했고.
난 그날부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영약 제조에 몰두하였다.
* * *
사흘, 늦어도 5일이면 될 줄 알았던 시간이 어느새 보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영약이라는 게 말이다.
그렇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소림사에서 대환단을 수십 년에 한 알 만든다는 말이 예전에는 좀처럼 이해가 안 됐는데.
아! 이제는 왜 그런지 뼛속까지 이해하고 납득할 만했다.
벌써 3일째 한숨도 자지 않고 영약 연구에 몰두 중이다.
그것도 며칠을 밤새고 한 시진 잔 다음 다시 3일을 꼬박 새우는 중이다.
그렇게 몰두 중인데도 쉽지 않다.
분명 내 머릿속에는 자연의 섭리를 완벽하게 적용한 최고의 영약이 있는데, 안 된다.
사실 최고의 영약 한 종류라면 이렇게까지 힘들지도 않았을 테다.
내가 좀 무리한 계획을 하긴 했다.
소림사에도 대환단이 있고 소환단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도 비슷한 계획을 세웠고.
거기에 한 가지 욕심을 더 냈다.
만병통치약이라고 있지 않은가?
물론 세상에 그런 거는 없다.
그건 이론상이고 뭐고 말이 안 되는 말이다.
하지만 비슷한 건 만들 수 있다.
역시나 소림사의 대환단이 그렇다.
대환단은 영약인 동시에 최고의 치료 약이기도 하다.
나는 그것을 다시 최고의 영약인 대환단과 보탬이 될 수 있는 소환단, 거기에 대환단의 치유 효과를 따로 떼어내 세 가지 약으로 만들 생각인 것이다.
그래서 일이 더 복잡했고 어려웠다.
이름도 이미 다 지어 놨고, 붉은 코뿔소의 뿔까지 그에 맞춰 다 자르고 부수고 으깨고 했는데, 이제 와서 포기할 수도 없고.
대자연단(大自然丹), 소자연단(小自然丹), 만치자연단(萬治自然丹).
이름이 좀 유치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이름이다.
조바심이 났다.
그래서 더 연구에 몰두했다.
누가 보면 미친놈이라고 할 정도로 몰두해 영단 연구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말이다.
이게 하려면 할수록 더 안 됐다.
마치 가까이 가려면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하는 짝사랑처럼.
영단 제조의 완성은 점점 나에게서 멀어져만 갔다.
결국 보름째.
손을 놨다.
잠도 실컷 자고, 시전으로 가 이것저것 구경도 하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다.
아! 돈이 많은데 버릇처럼 물건은 구경만 했다.
바보 같으니라고.
아무튼 그렇게 돌아와서도 영단 제조는 건들지도 않았다.
그냥 허무맹랑하고 황당하기만 문구가 가득한 『길평의경』의 선경을 보고 또 봤다.
영단 제조와 상관하지 않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봤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길평의경』 읽는 것도 지겨워져, 홱 하니 탁자 위로 던져 버린 후 잠이 들었는데.
캬아!
이게 거짓말 같지만, 실제 꿈속에서 막 영단 제조에 관한 깨달음들이 마구마구 샘솟는 게 아닌가.
아마도 내 오랜 수고와 노력 그리고 무심결에 읽고 고민했던 『길평의경』의 의문과 고뇌가, 무의식 속에 꿈에서 발현되어 해결이 된 듯했다.
누가 그러지 않았는가.
비우면 채워진다고.
어떤 녀석인지 이 말을 깨닫고 엄청난 고수가 됐다고 하는데.
아무튼…….
난 곧바로 침상에서 일어나 영단 제조를 다시 시작했고.
7일이 지난 후에 내가 계획했던 모든 영단을 완성할 수 있었다.
"신 의원님, 이거 약선 어르신께 전해 주세요."
"이건… 나 대협께서 한 달 가까이 연구해 완성한 영단 아닙니까?"
"네, 맞아요. 대자연단이라고 해요."
"열어 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내가 건넨 목함을 조심스레 열어 보는 신준.
목함이 열리자마자 대자연의 기운이 방 안 가득 번졌고, 신준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건… 이건 마치 제가 대자연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느낌이에요."
난 씩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그래서 대자연단이라고 합니다."
"아! 대자연단. 이름 그대로네요, 나 대협."
"네, 신 의원님."
"『길평의경』의 치경을 대성하셨군요?"
"네."
"설마… 선경까지 대성하신 건가요?"
"아니요, 그러면 제가 여기 이러고 있겠어요? 벌써 우화등선했겠죠."
"선경을 보긴 보셨어요?"
"네, 절반 정도 깨우쳤어요."
"허헉!"
그가 이번엔 놀라움을 넘어 경악한 얼굴을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 그게… 그 선경이… 사부님께서 장난치신 게 아니라, 진짜였어요?"
아! 이 녀석.
『길평의경』의 선경을 장난인 줄 알았나 보다.
뭐,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워낙 기괴한 의문들만 가득한 의경이니 말이다.
그래도 수제자란 녀석이……. 하하.
"진짜예요. 선경은 진짜 의선이 되는 길이 기록된 의경이에요."
"사부님께서도 본인이 만든 의경이지만, 그 초입까지 밖에 이해하지 못하셨다고 하셨는데……."
"뭐, 기연이 있었습니다."
신준은 너무나 놀라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계속 이러고 있을 수 없어서 작별 인사를 했다.
"전 가 봐야 할 곳이 있어서 이만 떠나야겠습니다. 도움 주신 거, 정말 감사합니다."
"나 대협."
"네."
"태선이 죽고 남은 한 자리."
"네? 무슨 말씀을……?"
"천하 3대 의선이 천하 2대 의선이 됐는데."
이 녀석 설마……?
"다시 천하 3대 의선의 시대가 열렸네요."
"감당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내 답에 신준이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으며 말했다.
"나 대협이라면 충분히 그러한 칭호를 받아 마땅합니다."
"됐어요. 그렇지 않아도 바빠 죽겠어요. 의선이 되면 바쁠 거잖아요. 거지가 바쁘게 살면 안 되는데, 하하. 대자연단이나 약선께 꼭 전해 주시고,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신 의원님."
녀석이 나를 보는 눈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이건 뭐, 미인국의 부인들이 나를 보는 그런 눈빛과 비슷하지 않은가.
그래서 서둘러 인사를 한 후 약선각을 벗어났다.
곧바로 약선각 마구간의 천주마를 데리고 나왔고.
"천주야, 달려!"
이히히히히힝(이 새끼는 뭘 처먹었는데 기분이 이렇게 좋아? 같이 좀 먹자)!
이번엔 진짜 집을 향해 달렸… 그전에 들를 곳이 또 있다.
* * *
붉은 코뿔소의 뿔 아홉 개를 이용해 대자연단 아홉 개 제조 성공.
약선에게 하나 줬으니, 현재 여덟 개.
약선에게 은혜 갚았고.
붉은 코뿔소의 뿔 한 개로 소자연단 50개 완성.
붉은 코뿔소의 뿔 두 개로 만치자연단 200개 완성.
부자다.
돈도 부자.
무공도 부자.
영약까지 부자다.
물론, 영약은 은혜를 갚기 위한 용도다.
하아!
그래서 말이다.
정말 가기 싫은데.
이러다가 진짜로 만리상단에 엮이고 말 텐데.
어쩔 수 없다.
이게 그냥 그렇고 그런 영단도 아니고.
확실한 곳에 맡겨야 했다.
만리표국(萬里錶局).
"개방의 걸일번과 걸삼번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개방 총타로 보내시면 그쪽에서 알아서 처리할 겁니다. 혹시 총타가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개방과 깊은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걸일번, 걸삼번이라 하시면 비걸개를 말씀하시는 것일 테니, 육 장로 상취개 대협께 전달하면 될 것 같은데, 그리해도 되겠습니까?"
"네, 정확히 알고 계시네요."
"그리고 이건… 음, 저희 만리상단 본단으로 보내시는 거군요. 총상단주님의 금지옥엽 연주언 소저께요."
"네, 그리로 보내면 됩니다."
"이건… 이것도 개방이네요?"
"네, 하지만 장소가 다릅니다."
"두 개는 각각 이 장로 무치개 대협의 제자인 묘안개와 저육개. 다른 한 개는 무걸개 훈련소 훈련생 소용개."
"보낼 장소를 아시나요?"
"말씀드렸듯 저희 만리상단은 개방과 오랜 세월 깊은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차질 없이 정확히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헌원세가는 아시죠?"
"물론입니다. 천하에 태사부 헌원세가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헌원세가의 독자 헌원공량 공자도 모르는 사람이 없고요. 그런데 헌원세가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데, 어찌 직접 전하지 않으십니까?"
"관무불침이라잖아요. 헌원공량이 아무리 어리다고는 하지만, 황궁에 속한 사람이고요. 공부하기 바쁜 녀석 시간 빼앗기도 그렇고."
"아! 네. 그렇다면 저희가 정확히 또 정중히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헌원세가에는 두 개를 보냈다.
착한 헌원공량 녀석이 아버지에게 자기 것을 양보할까 싶어서다.
아니, 그럴 녀석이다, 헌원공량은.
헌원문장이 대자연단 복용하고 오래 살아야 천하도 태평할 것이고.
그렇게 아홉 개의 대자연단 중 여덟 개를 만리표국 남경지부에 의뢰했다.
돈을 안 받겠다고 하는 걸 억지로 손에 쥐여 줬다.
그렇게 남은 대자연단은 단 한 알.
이건 단문령에게?
그럴 필요 없다.
단문령에게는 이미 충분히 은혜를 갚았으니 안 줘도 된다.
단문령이 어디 있는지도 몰라 만리표국에 의뢰할 수도 없고.
일단 마지막 한 알은 내가 갖고 있자.
휴우.
사람들에게 받은 은혜가 많아 갚을 것도 많았는데, 이렇게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으니 너무나 뿌듯하다.
"천주야, 달려! 바람을 가르며 달려 보자!"
이히히히힝(이 새끼, 또 혼자서 좋은 거 처먹었나 보네. 힘이 넘쳐요. 같이 좀 먹자고.)!
천주마 녀석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다시 열라게 바람을 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진짜 집이다.
낭만개 아저씨, 저 지금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