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뭣들을 하는 것이냐!"
독선의 호통.
그가 성큼성큼 걸어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거의 1년 만에 폐관 수련을 접고 출관한 모양이다.
당우국 녀석이 나를 살리려고 독선을 부른 것이겠고.
당소호는 내 독 때문이 아니라 갑작스레 나타난 자신의 아비.
독선 당태식 때문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 아버지."
쨍그랑.
젠장!
놈이 일부러 그런 것인지, 아니면 너무 놀라 그런 것인지.
입으로 가져다 대려던 내 독이 담긴 그릇을 놓쳤고.
땅바닥에 떨어진 그릇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내가 폐관 수련하는 동안에는 최대한 자중하며, 가문의 내치에 힘쓰라 일렀거늘. 지금 무슨 짓을 벌이는 것이냐!"
"그, 그게… 그게 아버지……."
"일 장로!"
"가, 가주님."
독선의 호통에 일 장로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조르르 달려왔다.
이내 그간의 사정을 빠르게 설명하는 모습이었다.
탈혼독부터 시작해 해독약과 지금 대결이 성사된 과정까지 모두.
물론 당가와 당소호 입장에서의 설명이었다.
독선은 묵묵히 이를 듣고 있었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그의 표정이 얼마나 그가 화가 났는지 잘 보여 주고 있었다.
그렇게 일 장로의 설명이 모두 끝나자.
독선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개방의 방도라고?"
"네."
"일단 무형지독은 내려놓… 뭐 하는 짓이냐!"
그때까지 나는 무형지독이 담긴 작은 병을 들고 있었고.
독선이 말리기도 전.
벌컥벌컥……. 음, 좀 멋지게 마시려고 했는데, 고작 몇 방울이 전부였다.
아무튼 마지막 한 방울까지 깨끗하게 다 털어 입으로 집어넣었다.
당소호와 곁에 있는 일 장로 그리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모두가 경악한 얼굴이 되는 순간이었다.
독선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입을 떡하니 벌리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는 찰나에 불과했다.
그가 다급히 손을 뻗었다.
"당장 무형지독을 토하고, 해독을……."
쉬이이익!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고통스럽거나 괴로운 연기도 하지 않았다.
독은 독이고, 독이 바로 나이다.
내가 자연이며, 자연이 독이고, 다시 독과 자연은 하나다.
무형지독이 아무리 전설의 독이라고 하여도, 나를 어쩌지……. 아! 속이 좀 쓰리긴 하다.
아무튼 괜찮다.
안 죽는다.
내가 손을 들어 제지하자,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보기만 하는 독선.
"그냥 개방의 방도가 아니라 개방의 방도 나태한이라고 합니다."
"자, 자네……."
난 독선에게서 시선을 떼고 당소호를 바라봤다.
무형지독을 마시고도 멀쩡한 나를 보며,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시 만들어 주지, 네가 마실 독. 이번엔 희석되지 않은 원액이야."
탁.
빈 그릇을 다시 탁자 가운데 놓고.
똑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불끈 쥔 주먹에서 검은 액체가 뚝뚝 떨어져 하얀 그릇에 담겼다.
멍청한 놈들은 언제나 죽을 때가 돼서야 자기가 무얼 잘못했는지 깨닫는다.
지금 바로 당소호가 그랬다.
새하얗게 질린 걸 넘어, 새파래진 얼굴로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기만 할 뿐.
감히 내 독에 손을 델 엄두조차 못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그래도 제 자식인지라, 살리려고 한 것일까?
독선이 긴 탄식과 함께 나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을 떼려고 할 때였다.
"소가주님! 소가주님!"
약왕전의 출입문으로 얼마 전 봤던 수문 무사가 급히 달려왔다.
급히 출입문을 통과한 그는 순간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이내 주위를 빠르게 살피는가 싶더니.
"커억! 가, 가주님."
독선을 보고 놀란 얼굴을 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무림맹과 개방의 손님들이 계시는데, 이 무슨 경거망동이냐!"
독선의 호통에 수문 무사는 두려움에 덜덜 떨면서도, 자세를 낮추며 다가왔다.
"그게… 죄, 죄송합니다. 지금 밖에 무림맹 질풍백호대가 찾아왔습니다."
질풍백호대?
남만에서 만났던 그 사람들?
음, 이제야 중원에 도착한 모양이군.
그래도 굉장히 빠른 속도다.
아마 말을 타고 전력으로 달려 돌아온 모양이다.
그런데 왜 무림맹으로 가지 않고 이곳으로 왔지?
"모셔라."
"넵!"
수문 무사가 다시 약왕전의 출입문을 통해 나갔고.
이미 외전 접객전에 있던 모양인지라, 질풍백호대의 대주 백호대도(白虎大刀) 태거충과 그의 수하 댓 명이 약왕전 마당으로 들어섰다.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그와 그의 수하들도 약왕전 마당으로 들어서며 주위를 한 번 살피기는 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는 당당한 걸음으로 독선에게 다가와 포권을 했다.
"무림맹의 질풍백호대 대주 태거충이 근 5년 만에 독선 당 대협을 뵙습니다."
"오랜만이네. 잘 지내셨는가, 태 대주?"
"염려해 주신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감사합니다, 당 대협."
"그래, 기별도 없이 무슨 일인가?"
"아! 기별은 이미 맹에서 드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곧바로 일 장로가 독선에게 전음을 보내는 것 같았다.
티가 나진 않았지만, 미세한 기의 파동이 내게 느껴졌고, 이내 독선이 고개를 몇 번 끄덕이는 게 이를 추정케 했다.
아! 전음 보내는 것도 감지가 되는군.
내 능력이지만 신통방통하다.
"탈혼독의 해독약을 호위해 무림맹으로 가기 위해 남만에서 곧바로 우리 당가로 왔다고?"
"네, 당 대협."
"음, 그렇군. 그래."
생각에 잠겨 영혼 없는 대답과 동시에 깊은 상념에 잠긴 독선.
그때 무림맹 약룡전의 부전주가 그런 독선의 눈치를 살피며 슬며시 태거충에게 다가왔다.
감히 독선 앞에서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는 못하고, 그냥 눈짓으로 현재 이곳의 분위기가 심각함을 알려 주려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이내 혼자만의 상념에서 깨어난 독선이 이를 눈치챘고.
"휴우, 약룡전 부전주."
"네? 아, 네. 네, 당 가주님."
"그냥 설명해 주시게."
"아… 네. 넵."
부전주가 태거충에게 귓속말로 현재의 상황을 빠르게 설명했다.
태거충은 부전주의 설명을 들으며 눈으로 주위를 빠르게 살폈고, 이내 나와 눈까지 마주쳤다.
그는 나에게 짤막한 눈인사를 했고.
설명이 이어질수록 그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부전주의 설명이 모두 끝나자.
"소가주께서는 괜찮으십니까? 살아 계십니까?"
그가 다급히 독선에게 물었다.
태거충의 물음에 독선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태 대주, 독 대결을 했는데, 어찌 나태한 소협이 아닌 내 아들을 걱정하는가?"
하지만 태거충은 단호했다.
"나 소협은 남만에서 이미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저기 멀쩡하게 서 있지 않습니까? 아니, 그보다 소가주께서는… 살아 있는 게 맞습니까?"
태거충의 다급한 모습에 독선은 더더욱 알 수 없다는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저기 못난 얼굴로 서 있는 게 부끄럽지만 내 큰아들일세."
여전히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떨고 있는 당소호를 확인한 태거충.
"휴우, 다행입니다. 살아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제야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태거충이었다.
"아직 내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네, 태 대주."
독선의 물음에 태거충은 가슴을 한 번 더 쓸어내린 후 고개를 들었다.
"독곡의 곡주가 죽었습니다."
"그들이 남만으로 도망가 정착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태 대주와 질풍백호대가 남만으로 갔을 때 처치한 것인가?"
독선의 물음에 태거충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후, 나와 한 차례 눈까지 마주친 다음 독선에게 답했다.
"나태한 소협이 직접 죽였습니다. 일대일로 싸워 깔끔하게 해치웠다고 하더군요."
순간.
독선을 비롯한 모두가 경악한 얼굴을 해 댔다.
당가와 독곡은 수백 년이나 경쟁 관계였다.
당대에 이르러 당가 사람들이 독곡을 상대할 일은 없었지만, 당연히 무림의 그 누구보다 독곡의 위험함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고작 약관의 나이인 내가 독곡의 곡주를 홀로 물리쳤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게 끝이 아닙니다, 당 대협."
놀라움이 다 가시기도 전 태거충의 말이 이어졌다.
"남만은 태양궁과 야수궁 그리고 밀독궁이라는 세 세력으로 나뉘어 무려 300년 동안 전쟁을 이어 오고 있었습니다. 우리 무림에도 알려졌지만, 태양왕과 야수왕은 화경의 경지에 이른 대단한 고수들입니다. 그런 태양궁과 야수궁을 밀독궁이 홀로 압박하며 상대하고 있었습니다."
"밀독궁과 밀독왕에 대해서는 나도 들어 봤는데……."
"밀독궁이 무너졌습니다. 독선 당 대협과 비교하기는 그렇지만, 밀독궁의 밀독왕 역시 독공으로 화경의 반열에 오른 고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그가 죽었습니다. 그 밀독왕을 죽인 게 바로 나 소협입니다. 아니, 나 대협입니다. 태양왕과 야수왕이 돕기는 했다지만, 결국 밀독왕의 숨통은 나 대협이 직접 끊었습니다."
또 한 번 모두가 충격의 도가니에 빠지고 말았다.
천하의 독선마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모두가 그렇게 놀라 입도 뻥끗 못 하는 사이.
태거충이 나에게 성큼성큼 걸어 다가왔다.
"나 대협, 저희보다 더 빨리 무림으로 돌아오셨군요."
"네, 야수궁에서 도움을 줘 빨리 올 수 있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무형지독에 대해 물은 것이다.
그의 얼굴 가득 걱정과 염려가 담겨 있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방끗 웃으며 답했다.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그렇게 태거충에게 답한 후, 몸을 돌려 다시 당소호를 향했다.
이제는 서 있는 것도 버거워 보일 정도로 덜덜 떨고 있는 당소호다.
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런 당소호를 향해 얄밉게 웃으며 말했다.
"마셔."
하늘이라도 무너진 것 같은 얼굴을 하는 당소호.
아까의 그 천상천하 유아독존과 같은 오만함은 온데간데없고.
건들기라도 하면 펑펑 눈물을 쏟을 것 같다.
그러더니 이내, 정말 죽기는 싫은 모양이다.
체통이고 뭐고 다 버리고, 눈물을 글썽이며 제 아비인 독선을 향해 간곡한 눈빛을 보냈다.
그런 당소호를 한심한 듯, 또 못마땅한 눈으로 본 독선이 내가 있는 탁자로 다가와 나를 향해 말했다.
"나 대협, 내가 맛을 봐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선뜻 답하는 나를 잠시 응시하더니.
독선은 직접 검지로 내 독을 콕 집어 입으로 가져다 댔다.
눈까지 감으며 독을 음미하는 독선.
자리에 있는 모두는 그런 독선을 복잡한 심경으로 지켜보고 있었고.
결국…….
"휴우우우우."
정말 아주아주 긴 한숨을 내쉬며 독선이 아들 당소호를 향했다.
"아, 아버지… 살려 주세요."
아마 지켜보는 눈이 없었더라면, 따귀라도 한 대 후려갈겼을지 모르겠다.
내가 봐도 한심한 모습의 당소호였다.
집안 망신이란 게, 딱 지금의 당소호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휴우우."
아들에게 대꾸 대신 다시 긴 한숨을 내뱉는 독선.
그가 몸을 돌려 나를 향했다.
"몸은 괜찮으신가?"
무형지독을 걱정하는 것이다.
"멀쩡합니다."
생각이 깊어지는 독선.
그가 나를 세심하게 관찰하는 듯하다가 다시 아들 당소호를 향해 말했다.
"진짜를 내놓은 것이냐?"
"아, 아버지, 살려 주세요."
"네가 나 대협에게 복용하게 한 무형지독이 진짜냐고 물었다!"
이어지는 독선의 호통.
이내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며, 또 동공에 지진이 일어나 눈치를 마구 살피며.
당소호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네."
"한심한 놈."
곧바로 독선의 질책이 이어졌지만, 당소호에게 지금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다.
"아버지! 살려 주십시오! 제가 저 독을 먹으면 어떻게 될지 아시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저놈이 자신의 실력을 숨기고 저와 대결을 한 것입니다! 음모입니다! 살려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
놈의 간절함을 넘어 처절하기까지 한 부탁에 독선은 눈을 질끈 감았다.
폭발하려는 화를 참으려는 것이다.
그의 심경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오죽하면 내가 다 위로하고 싶었겠는가 말이다.
아주 약간의 시간이 흘러 분노를 삭인 독선이 눈을 떠 당소호를 향해 말했다.
"너에게는 두 가지 선택권이 있다. 첫 번째는 이 독을 마시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아버지!"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딱 당소호가 그 꼴이었다.
오히려 소리를 지르며 독선을 부르는 게 아닌가.
하지만 곧 그는 자세를 낮출 수밖에 없었다.
터지려는 분노를 간신히 삭인 독선이 다시 폭발 일보 직전의 분위기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당소호가 울먹이며, 다시 눈치를 마구 살피며 물었다.
"독… 저 독을 마시면… 어떻게 되는데요?"
독선의 얼굴이 실룩실룩, 붉으락푸르락.
큰아들의 한심한 모습에 그는 정말 인내의 끝판왕이 되어 입을 열었다.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한다. 남자구실도 못 하고, 걷지도 못하고. 무공은 아예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네가 자초한 일이다."
순간 당소호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이는 한순간에 불과했다.
갑자기 놈의 기세가 변했다.
떨지도 않고, 지진이 일었던 동공도 굳게 멈추었다.
그러더니 나를 부릅뜬 눈으로 노려보며.
척!
무릎을 꿇었다.
"멍멍! 멍멍멍! 멍멍! 멍멍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