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111화 (110/174)

111화

혜민각 의원들과 밤을 새웠다.

각주는 당가가 무섭다고 하면서도, 탈혼독의 해독약을 만드는 데에 직접 참여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다른 의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탈혼독이 현재 천하 각지의 백성들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입히고 있는지 잘 아는 터라, 이들은 지치고 힘든 것을 다 잊고 아침이 될 때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대량의 해독약을 만드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응, 밤새 정확히 열세 번 나에 대한 독살 시도가 있었다.

개새끼들.

꾹 참았다.

나쁜 놈들이긴 한데, 또 착한 놈들이기도 하고.

몇 대 때려 줄까 싶기도 했는데, 한 손이 부족한 상황이라 끝까지 참았다.

덕분에 수레 세 대 분량의 해독약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당우국은 이미 혜민각에 와 있었다.

오늘만큼은 혼자가 아니었다.

명색이 사천당가의 직계 아니겠는가.

그의 직속 휘하에 있는 사검풍도대(死劍風刀隊) 50명을 모두 이끌고 왔다.

그들의 삼엄한 호위 속에 우리는 사천당가로 출발하였다.

* * *

당가의 정문에서 수문 무사들과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다.

중요한 날이라, 외인은 출입을 금한다는 수문 무사들과 당우국 사이의 실랑이였다.

결국 당우국이 살기를 마구 뿜어 대며 검까지 뽑은 후에야 우리는 정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당가 내전의 약왕전.

가주 대리 당소호와 여섯 명의 장로들.

그리고 무림맹 약룡전의 의원들과 무림맹의 고수들까지 모두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가 기세등등하게 약왕전에 들어서자, 당소호와 장로들은 인상을 구겼고, 무림맹 사람들은 뭔가 하는 얼굴을 했다.

곧 장로 중 한 명이 의아해하는 무림맹 약룡전 의원들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했고.

약룡전의 부전주라는 자가 호기심을 보이며 나에게 다가왔다.

"탈혼독의 해독약을 만들었다고요?"

"네."

"멸마협 나태한 소협이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개방의 방도라 알고 있는데, 의술을 익혔습니까?"

"기연이 있어, 약선 길평 어르신께 짧지만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제가 나 소협이 만든 해독약을 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곧 약룡전의 부전주는 다른 의원들에게 손짓을 했고.

열댓 명이 우르르 몰려와 수레에 실린 해독약을 살피고, 냄새도 맡고, 맛도 보고.

그들은 신중했다.

보고 또 보고.

몇 번을 맡고 맛보고.

"어허!", "오오!" 연신 탄성이 그들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그럴수록 당소호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구겨져만 갔다.

한참이란 시간이 지나 약룡전의 부전주가 다른 의원들과 많은 논의를 마친 후.

"이 약도 모두 무림맹으로 가지고 가겠습니다. 조금 더 확인이 필요하겠지만, 최대한 빨리 작업을 마치고 천하 각지로 배포해야 할 것 같네요. 정말 큰일을 해 주셨습니다, 나 소협."

난 웃었다.

약룡전의 부전주를 향해서가 아닌, 당소호를 향해 비웃음을 날린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돌려.

"부전주님."

"네, 나 소협."

"실은… 내기를 하나 했습니다."

"내기요?"

고개를 갸우뚱하는 약룡전 부전주.

"제가 만든 해독약과 당소호 소가주가 만든 해독약 중, 누가 만든 해독약이 더 나은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부전주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던 의원들과 무림맹 고수들까지 살짝 놀란 얼굴을 했다.

하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다.

"내기의 대가로 저는 목을 걸었습니다."

"그, 그게……!"

이젠 다들 살짝 놀라는 게 아니라, 크게 놀라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는 얼굴들이었다.

훈훈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살벌하게 변한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당가 약왕전의 경계는 원래가 살벌했는데, 내 말이 나오자마자 은은한 살기가 돌기까지 하였다.

당소호와 장로들은 체면을 크게 구겼다고 생각했는지, 대놓고 나에게 적대감을 드러냈다.

정문에서까지는 천하무적의 고수인 것처럼 위풍당당했던 당우국은 눈치만 보며 식은땀을 뻘뻘 흘려 댔고.

무림맹에서 온 의원들과 고수들마저 눈치를 마구 살피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아무도 입조차 뻥끗하지 못하는 상황.

내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지면 목을 내놓고. 당소호 소가주가 지면……."

"꿀꺽."

상황이 상황인지라, 모두가 숨소리마저 죽인 채 나에게 집중하고 있었고.

어느 누군가의 공연한 마른침 넘기는 소리만이 작은 울림이 되어 장내에 울려 퍼졌다.

다시 내가 말을 이었다.

"당소호 소가주가 지면, 제 앞에 무릎을 꿇고 개처럼 짖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당 소가주님?"

비웃음과 함께 당소호에게 그리 말했고.

살벌했던 분위기는 극에 달하고 말았다.

당소호는 당장에라도 나를 쳐 죽일 것처럼 노려보다가…….

어라?

놈이 웃는다.

나와 똑같은 비웃음을 짓는다.

"그리 약속했소."

녀석, 허세를 부리는 거다.

결과는 뻔하다.

놈도 그걸 안다.

자신이 만든 해독약이 쓰레기라는 사실은, 누구보다 만든 이가 가장 잘 알지 않겠나.

하지만 놈은 마지막 발악, 곧 산산이 무너져 버릴 그 허세를 끝까지 유지했다.

그가 그렇게 불안한 비웃음을 머금으며 다가왔다.

"약룡전 부전주님."

그도 참 당황스러울 테다.

해독약 가지러 왔다가, 갑자기 이런 가시방석 같은 자리에 앉게 됐으니 말이다.

"네, 당 소가주님."

"말씀해 주시지요."

"무얼……?"

"제가 만든 해독약이 더 뛰어난지, 아니면 나 소협이 만든 해독약이 더 뛰어난지 말입니다."

당소호의 말에 부전주는 불안 증세마저 보이기 시작했다.

다른 무림맹의 의원들과 고수들도 같은 반응이었다.

어찌 아니겠는가.

이곳 사천당가에서 약왕전의 전주가 장로들 못지않은 권력과 위세를 가지고 있지만, 다른 곳은 다르다.

오로지 힘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무림의 순리 상, 의원들은 언제나 약자일 수밖에 없다.

그건 무림맹이라고 다르지 않다.

곧 사천당가의 가주가 될 당소호는, 그들에게 있어서도 부담스럽고 두려울 수밖에 없는 존재일 테다.

하지만 괜찮다.

아무리 그들이 당소호를 두려워해도, 눈에 보이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이는 대낮에 호롱불을 켜 놓고, 태양과 빗대어 무엇이 더 밝느냐 하는 질문과 같다.

답은 하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난 그렇게 자신만만해 무림맹 약룡전 부전주를 향해 말했다.

"말씀…해 주십시오, 부전주님."

식은땀을 비 오듯 쏟는다.

부전주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의 곁에 있는 의원들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최소한 의원이라면.

그도 무림맹 소속의 한 사람이라면.

태양과 호롱불을 두고 거짓을 말하지는 않을 테… 어라?

"모릅니다."

뭐야?

뭔 개소리야?

저 노인네, 지금 장난하나?

"당 소가주님, 그리고 나 소협."

대꾸하지 않았다.

나도, 당소호도.

그냥 뚫어져라 부전주를 쳐다볼 뿐이다.

그러자 그가 두렵고 놀란 마음을 가라앉힌 듯, 숨을 길게 내쉬며 말을 이었다.

"휴우. 제가 무림맹 약룡전의 부전주라는 중책을 맡기는 했지만, 제가 독선 대협도 아니고 약선 의원도 아닌데, 어찌 당장 두 해독약 중 무엇이 더 뛰어난 해독약이라 단정 지을 수 있겠습니까?"

아! 뭐야?

어쩌라고!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전주는 이제 담담해지기까지 한 얼굴로 말을 계속 이었다.

"최소한 수일에서 수십 일은 걸릴 일입니다. 또 실제 탈혼독에 중독된 최소 수십에서 수백 명에게 해독약을 복용하게 한 후, 다시 며칠 이상 관찰해야 그 대략적인 값을 알 수 있습니다. 당연한 일이고 상식입니다."

맞는… 맞는 말이다.

아! 젠장.

내가 너무 무림맹 의원들의 수준을 높게 생각했었나 보다.

내 의술이 너무 높은 경지에 이르러, 다른 이들의 의술까지 같다고 착각했다.

내 탓이다.

나도 모르게 당소호를 향해 짓던 비웃음이 사라졌고, 그런 내 얼굴을 본 당소호는 더 짙은 비웃음을 머금으며 거만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어쩌지? 무림맹 약룡전의 부전주께서 무엇이 더 나은 해독약인지 당장 결정 짓기 힘들다고 하시는데."

"운 좋은 줄 알아라, 당소호."

"네, 이놈!"

당소호를 향한 내 말에, 뒤에 있던 장로들이 대로하여 당장에라도 출수할 것 같이 호통을 쳤다.

그런 장로들을 당소호가 한 손을 들어 제지한 후.

여전히 더러운 웃음을 얼굴에 지은 채 나를 향해 말했다.

"그래도 결판은 지어야 하지 않을까?"

"뭔 수작이야?"

"너한테 유리한 수작이야."

이 새끼, 이미 이러한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나 보다.

그리고 나를 죽일, 그것도 정당하게 나를 죽일 음모까지 꾸미고 있었던 거야.

갑자기… X팔! 불안해진다.

"생각해 봐. 지금이 너한테는 가장 유리한 상황이야. 무림맹 약룡전 의원들께서 참관하시고, 또 무림맹의 고수들께서 지켜보고 계시잖아."

"그래서 뭘? 뭘 어쩌겠다는 건데?"

"어차피 네 의술과 내 의술 중 누가 더 뛰어난지 비교하자는 거 아니었어?"

"결론만 말해."

새끼, 또 웃는다.

더 불안하다.

지금이다.

무슨 음모를 꾸몄는지, 놈이 말한다.

"독 대결."

개새끼!

"독?"

"그래, 독 대결."

이 빌어먹을 새끼!

"지금… 나하고 독 대결을 하자는 거야?"

"왜? 겁나? 네가 그랬잖아. 독과 약은 같은 거라고. 네가 만든 해독약이 내가 만든 해독약보다 훨씬 뛰어날 거라며? 그럼 독도 그렇게 뛰어난 거 아니야?"

치사한 새끼!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어 내 얼굴이 마구 일그러졌고.

놈은 그런 나를 더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

"겁나면… 포기해. 그럼 목숨은 거두지 않을게. 대신 지금 이 자리에서 무릎 꿇고 개처럼 짖어. 그럼 뭐, 용서해 주지. 큭큭."

"독… 독 대결이란 말이지?"

"응, 왜? 할 수 있겠어?"

새끼야!

당소호 이 미친 새끼야!

눈물 나게 고맙다!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놔!

내 얼굴이 마구 일그러지는 건, 지금 막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기 때문이다.

진짜 배꼽을 잡고 땅을 마구 구르며 미친 듯 웃고 싶다.

눈물이 찔끔 났다.

놈은 또 그걸 보며 웃는다.

내가 쫄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새끼야! 그런데 말이다.

공자 앞에서 한자를 쓰고.

항우 앞에서 힘자랑하고.

드워프 앞에서 손재주 자랑하고.

미인국에서 예쁜 척 춤을 춰 보란 말이다!

와아아아아아!

하여간 이렇게 자기만 잘난 줄 아는 놈들이 언제나 자기 무덤을 판다니까.

아무튼 고맙다, 새끼야.

넌 오늘 네발로 엎드려 목청 높게 개처럼 짖어야 할 것이다.

표정 관리부터 하자.

아! 계속 웃음이 나려 한다.

참아야 한다.

놈이 말을 바꾸면 안 된다.

계속 이렇게, 화가 난 것처럼, 또 두려운 것처럼 연기해야 한다.

큭큭큭.

멍청한 새끼.

"그 도전… 응하겠다."

"풉. 큭큭. 어험. 나 소협, 남아 일언 중천금이라 했어. 여기 무림맹 분들이 증인이시고."

"절대… 절대 말을 바꿀 일은 없다. 난, 목을 걸겠다. 너도 무림맹 분들 앞에서 맹세해라."

"그래, 그래야지. 여러분! 나 당소호는, 여러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오늘의 내기를 정정당당하게 치를 것이고, 또한 패하게 될 경우, 나 소협과 약속한 대로 무릎을 꿇고 개처럼 짖을 것이오! 당가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겠소."

여기저기서 한탄과 아쉬움 그리고 씁쓸한 탄성들이 새어 나왔다.

대부분 무림맹 사람들의 것으로, 나를 안쓰럽게 생각하고 걱정하여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온 것들이었다.

반면 당소호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않았고.

여섯 명의 장로들 역시 일이 계획한 대로 척척 진행되고 있다는 듯, 만족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살벌하지만 훈훈한, 초조하고 불안하지만 흥분되는 당가 사람들의 분위기였다.

물론 내 옆에 있는 당우국은 하늘이라도 무너져 버린 것 같은 얼굴을 해 주었다.

이 녀석이 그래도 의리는 꽤 있는 놈이다.

은원도 확실한 녀석이고.

마음에 든다.

녀석을 생각해서라도, 녀석의 큰형인 당우국의 목숨은 살려 줄 테다.

물론, 산 게 산 것이 아닌 것 같은 고통은 맛보아야겠지만 말이다.

무릎 꿇고, 개처럼 짖고, 가주직과도 영원히 안녕이 될 테다.

아니, 오늘의 수치로 다시는 무림에 얼굴을 들이밀지 못하게 만들어 줄 테다.

난, 만독불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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