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108화 (107/174)

108화

아놔! 남궁무검, 이 새끼.

인생에 도움이 안 돼요.

이러니 내가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냐고.

됐다.

잊자.

그딴 놈하고 나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나에 대한 모욕이다.

"불사괴는요? 더 출현하지 않았어요?"

"네, 그 이후로는 아직 잠잠하네요. 그래도 다들 불안해하고 있어요. 무림사에 비슷한 것들이 등장해 피바람을 일으킨 적이 꽤 있잖아요."

"강시요."

"그렇죠, 그래서 항마의 힘이나 복마의 힘이 실린 신병이기가 원래도 비쌌는데, 요즘은 그냥 부르는 게 값이에요. 아, 맞다! 감숙에서 우리와 함께 행동했던 팔선문의 말추 술사 기억하죠?"

"기억하다마다요."

"요즘 너무 바빠서 정신없다고 하더라고요. 사술이니 미신이니, 백성을 현혹하느니 하며 천시할 때는 언제고, 팔선문부터 시골의 작은 현문(玄門)까지 사람들이 줄을 선대요."

"불사괴 때문이군요."

"네, 부적도 비싼 값에 팔리고, 자신의 검에 항마의 힘을 넣어 달라고 하기도 하고. 호남에서 나타난 불사괴는 사람과 너무 똑같아, 직접 고명한 술사를 문파로 초빙해, 무문의 사람 중에 불사괴가 있는지 아닌지 확인도 하고. 하여간 엄청나게 바쁘대요."

"무림맹에서는요?"

"무림맹에서도 팔선문의 문주와 장로들은 물론 소림사의 스님과 도문의 도사들까지 직접 맹으로 초빙해 이것저것 대비하고 있나 봐요."

"성과가 있어요?"

"아직 새롭다고 할 만한 건 없지만, 그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하더라고요."

"왜요?"

"항마의 힘과 복마의 힘이 그들을 물리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라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그에 대한 준비는요?"

"무림맹과 남궁세가를 중심으로 불사괴의 출현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고, 그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무문과 세가들에서 알아서 대비하고 있어요."

음, 이 정도면 내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무림이란 게, 괜히 1,000년의 역사를 유지해 오고 있는 게 아니다.

그만한 힘을 지니고 있기에 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리고 내가 걱정한다고 뭐가 바뀌겠는가?

난 이미 무림과 천하를 위해 할 만큼 했다.

나도 이제 나를 위해 좀 살자.

뿔만 전달하고, 곧바로 집으로 갈 거다.

문 꼭 걸어 잠그고, 아무도 안 만날 거다.

특히 상취개, 순화자, 속리자 이 노인네들.

보이기만 해 봐라.

나이고 뭐고, 그냥 엉덩이를 냅다 발로 차 쫓아낼 거다.

"도착했어요, 나 소협. 여기가 치독전이에요. 우리 당가의 중심."

* * *

내가 당가에 왔다는 소식을 이미 전해 들은 모양이다.

당우국의 큰형 천독패 당소호는 물론, 수염이 허연 당가의 장로들까지 모두 자리하고 있었다.

긴말이 필요 없었다.

다들 나를 환대했고, 나는 곧바로 붉은 코뿔소의 뿔을 그들에게 건넸다.

봇짐 가득 담겨 있는 뿔을 본 그들은 하나같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붉은 코뿔소의 뿔은 거의 영물의 내단 급으로 취급하는 영약에 가까웠다.

그걸 열네 개나 선뜻 내놓는 나에게 그들은 더없는 감사와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정말 자넨 대단하군. 이걸 다 가지고 오다니. 역시 멸마협이란 별호가 괜히 생긴 게 아니야. 하하하!"

그런데 당우국의 큰형은 언제 봤다고 반말인지 모르겠다.

사람이 나쁜 것 같지는 않은데, 처음 존대를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은근슬쩍 반말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대단하긴 대단한 인물임은 맞다.

고작 마흔한 살의 나이에 완연한 초절정의 경지에 접어들었다.

남만에서 봤던 독곡의 곡주, 밀림독선 사연손과 그 경지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기분이 나쁜 건 나쁜 거다.

됐다.

사천당가 사람들이 안하무인에 제멋대로이고 지랄맞은 성격인 거 모르는 사람은 없다.

뭐, 언제 또 볼지도 모를 사람이다.

또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내가 그걸 따질 상황도 아니고.

그리고 어느 미친놈이 사천당가의 내전 중심에서 곧 가주가 될 사람한테 반말했다고 따지겠는가?

그냥 나왔다.

천독패 당소호는 물론, 장로들까지 치독전 밖까지 따라 나와 그런 나를 배웅하며 연신 감사를 표했다.

그렇게 나와 당우국은 치독전을 완전히 벗어났고.

"당 소협."

"네, 나 소협."

"혹시 탈혼독의 해독약에 대한 제조법을 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이미 만천하에 모두 공개한 제조법입니다. 바로 가져다드릴게요."

"탈혼독의 제조법도요."

"네, 나 소협. 잠시만 기다리세요."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나와 함께 치독전을 빠져나온 당우국이 다시 치독전으로 들어갔고, 이내 두 장의 종이를 들고 나와 나에게 건넸다.

난 그걸 유심히 들여다보았고.

"왜요? 뭔가 이상해요?"

"글쎄요."

"나 소협이 의술에도 능통한 줄은 몰랐네요."

"그냥 겉핥기 정도……. 음, 이거 가지고 가도 되죠?"

"물론이죠. 제가 나 소협이 묵을 전각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 * *

당가에서 나에게 내준 전각은 두말할 필요 없이 훌륭했다.

전각을 지키는 호위 무사 여럿이 있고, 어리지만 꽤 똘똘한 시비들까지 넷이나 붙여 주었다.

뭐, 저녁 먹을 때 잠깐 보고 그들을 볼 일은 없었다.

나는 밥을 먹고, 대충 씻고.

밤새 탈혼독과 해독약의 제조법을 보고 또 보고.

음.

이게 말이다.

좀 이상하다.

내가 이상한 건가?

아니다.

내 의술은 이미 약선을 뛰어넘었다.

약선과 독선을 비교해, 누가 더 뛰어난지는 알 수 없다.

천하는 두 사람의 의술이 신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여 의선이라 불렀지만.

실제 그런지는 알 수 없다.

아니, 최소한 약선은 그러한 경지가 아님을 나는 잘 안다.

그렇다고 독선이 또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확실한 건.

약선이 실제 신선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신선이라 부를 만큼 대단한 의술을 지닌 의원이 맞고, 내가 현재 그의 의술을 뛰어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 해독약은 독선도 아닌 그의 아들 당소호가 만들었다.

역시 그의 의술에 대한 경지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모른다.

다만, 그가 최소한 약선의 아래라는 데에는 당소호 본인도 인정하지 않을까 싶긴 하다.

그래서 말이다.

그런 내 의술과 관점으로 봤을 때.

사천당가에서 만든 탈혼독의 해독약은 매우 비효율적이다.

심지어 곳곳에 자연의 기운을 역행하는 잘못된 약리(藥理)가 섞여 있다.

더 나를 당황하게 한 것은…….

애초에 탈혼독의 해독약을 만드는 데에, 붉은 코뿔소의 뿔이 필요 없었다는 것이다.

왜지?

아마 몰라서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탈혼독 해독약의 핵심은, 한번 복용으로 최소 수년에서 최대 수십 년까지 그 약효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언제 어디서 중독될지 모를 탈혼독에 대비할 수 있고, 그래야 감히 삼류 도적들이 탈혼독을 이용해 나쁜 짓을 못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그래서 대단한 기운을 머금은 붉은 코뿔소의 뿔을 선택한 모양이다.

하지만.

틀렸다.

굳이 붉은 코뿔소의 뿔이 아니라 하여도, 탈혼독을 무용지물로 만들 방법은 수백 수천 가지나 된다.

심지어 영구적으로 이에 대항할 수 있다.

사실 내가 자연국에서 자연이 됐을 때.

물아일체의 깨달음을 얻었을 때부터 의문이 들긴 들었다.

어떻게 탈혼독을 만드는 재료는 흔하디흔한 약초들인데, 이를 해독하는 약이 귀한 붉은 코뿔소의 뿔이어야만 하는지 말이다.

자연의 이치는 그러하지 않다.

자연의 섭리는 언제나 문제의 가장 가까운 곳에 답을 주기 마련이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면,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그 나무는 뜨거운 태양을 피할 그늘을 만들어 주는 것과 같은 이치다.

탈혼독 역시 마찬가지다.

쉽게 만들 수 있고, 쉽게 해독할 수 있다.

탈혼독의 제조법을 보고 더 확신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

이건 의심이다.

탈혼독의 해독약 말이다.

이게 탈혼독에 대한 해독의 약효도 있지만, 음…….

다른 독에 대한 저항력을 약화되게 할 수도 있다.

특히 이곳 사천당가에서 가득 풍기는 독에 대해서는 치명적인 면역 저하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해독약이 완성되면 이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물론, 중원 각지의 무문과 무가에 배포될 것이다.

수만 명, 수십만 명의 무인들이 이 해독약을 복용하게 될 테고.

그러면… 음…….

이건 정말 기우이길 바란다.

날이 벌써 밝았군.

일단 이곳 의원을 만나 봐야겠다.

* * *

약왕전(藥王殿).

사천당가에서 독과 약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곳이다.

당가의 가주가 집무를 보는 치독전에도 쓰이지 않은 ‘왕(王)’ 자가 이곳 현판에 떡하니 쓰인 걸 보니, 이곳 당가 사람들이 독과 약에 대해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그곳으로 들어가 해독약을 만드는 의원을 만나려 하는데.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나 소협."

얄짤없다.

신분도 밝히고, 약왕전을 지키는 무인들도 내가 붉은 코뿔소의 뿔을 가지고 온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약왕전 출입은 불가능했다.

당가 가주의 첩이 지내는 전각을 몰래 드나드는 것은 허락해도, 약왕전만큼은 들어갈 수 없다고.

결국 당우국을 불러야 했고, 그와 함께하고 나서야 약왕전에 들어갈 수 있었다.

당우국의 도움으로 약왕전의 전주를 만날 수 있었다.

독선 당태식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라고 그를 만나기 전 당우국이 귀띔해 주었다.

그렇게 만난 약왕전의 전주.

초췌한 몰골이다.

"숙부님,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이런저런 인사가 오간 후 당우국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어디 아니겠느냐? 붉은 코뿔소의 뿔이 도착했고, 곧바로 해독약 제조에 들어갔다. 사흘 뒤 무림맹 약룡전(藥龍殿)에서 사람들이 올 거야. 그때까지 최대한 많이 만들어야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지 않겠느냐."

"그래서 밤을 새운 거예요?"

"나만 새운 게 아니다. 다들 한숨도 자지 못하고 해독약 만드는 데에 몰두하고 있다. 나 소협."

"네, 전주님."

"당가의 한 사람이자 약왕전의 전주로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정말 큰일을 해냈습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당가 사람들이 죄다 괴팍하고 안하무인인 건 아닌 것 같다.

머리며 수염이며 죄다 허연 60대의 노인이고, 편히 말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음에도 끝내 존대를 하는 약왕전주였다.

"그런데 전주님, 사흘 뒤에 무림맹에서 사람이 온다고 하셨습니까?"

"그렇소, 해독약이 만들어지면 무림맹으로 옮겨지고, 무림맹에서 다시 천하 각지로 배포하게 될 것이지요."

"그때까지 다 만들 수 있나요?"

"그건 아니에요. 일단 급한 대로 만들 수 있는 양까지 만들 텐데. 아마 붉은 코뿔소의 뿔 반 개 정도가 소모될 것 같아요. 나머지 열세 개 반의 양은 계속 만들어야겠지요."

사흘 뒤라.

그때까지 내 의문을 풀어야 한다.

그런데 또 당가 사람들이 괴팍하고 안하무인인 것만큼 유명한 게 있다.

쓸데없는 자존심이 지랄맞게 높다는 거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천하에 단 한 사람도 사천당가와 척을 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나도 마찬가지다.

잘못 말했다가는 괜히 미운털 박힐 텐데.

그렇다고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안 물어볼 수도 없고.

혼자 갈등에 고심을 그렇게 하는데.

"나 소협,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약왕전주가 내 표정을 읽은 듯했다.

어쩔 수 없다.

나는 조심스레 그에게 지난밤 고심했던 생각을 털어놓았다.

물론, 탈혼독의 해독약이 다른 독에 대한 면역 저하를 일으킬 수 있다는 부분은 빼고 말했다.

그랬더니 약왕전주도 심각한 얼굴이 되어 한참이나 고민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

"음, 일리가 있는 말이군요. 나도 비슷한 고민을 해 본 적이 있긴 한데, 상황이 급한지라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에요."

"숙부님, 큰형에게 말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일단 해독약 제조부터 멈추고요."

"그래야겠구나. 나 소협, 잠시 기다려 주시오."

"네, 전주님."

약왕전주가 급히 약왕전으로 들어갔다.

사방의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던 연기가 서서히 멈추기 시작했고.

분주하게 움직이던 약왕전의 의원들도 동작을 하나둘 멈추기 시작했다.

해독약 제조를 중단한 것이다.

잠시 후 약왕전주가 나왔고.

"치독전으로 갑시다. 소가주와 상의해 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전주님."

약왕전주가 나에게 말을 하고, 내가 다시 그에게 감사를 표했을 때는, 이미 우리 모두 빠르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런데 깊은 고심에 빠져 빠르게 걷던 약왕전주가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뒤를 돌아 나를 보았다.

"나 소협."

"네, 전주님."

"의술을 익혔나요?"

"네."

"혹 우리 가주님의 가르침을 받았나요?"

여기서 가주라 함은 독선 당태식을 말한다.

나는 그에게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스승으로 모시지는 못했지만, 짧게 약선 어르신의 가르침을 받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어허, 음… 역시……. 허허허. 일단 갑시다."

그는 그렇게 뜻 모를 웃음을 지으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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