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107화 (106/174)

107화

성도는 거대한 도읍이다.

그냥 거대한 게 아니라, 정말 거대하다.

거리도 잘 정리되어 있고, 무엇보다 범죄율이 다른 지역에 비해 거짓말이라고 할 정도로 낮다.

구파일방 오대세가 중 무려 세 개의 세력이 이곳에 자리 잡고 있지 않은가.

뭐, 아미파와 청성파는 성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고는 해도 말이다.

아무튼 사천은 예로부터 무림의 축소판이라 할 정도로, 사천당가와 아미파, 청성파라는 거대한 세력은 물론, 크고 작은 무문과 무가가 수도 없이 터전을 잡고 사는 곳이다.

그래서 범죄율이 현저히 낮다.

어떤 미친 인간이, 다른 곳 다 내버려 두고 이곳에서 범죄를 저지르겠는가 말이다.

무엇보다 성도는 사천당가의 영역이다.

당우국이 그러지 않았나.

은혜는 두 배로 갚되, 원수는 열 배로 갚는다고.

원수만 그리 갚는 게 아니다.

사천당가는 분명 정파로 분류되는 세가임에도, 그 손속의 잔인함은 사파인들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다.

그러니 미치지 않고서야 사천당가 앞마당에서 나쁜 짓을 할 수 있겠냔 말이다.

기후도 좋고, 바로 옆 중경에 만리상단의 본단이 있어서 상업도 활발하고.

이래저래 살기 좋은 동네가 바로 이곳이 아닌가 싶다.

물론, 사천당가 사람들 눈 밖에 나면, 지옥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뭐, 나는 상관없다.

뿔만 빨리 전달하고 갈 데가 있다.

새아빠, 큭큭.

낭만개 아저씨가 너무 보고 싶다.

묻고 싶은 게 너무 많다.

내 경지가 여러 방면에서 상승하니, 궁금한 것 역시 너무 많아졌다.

빨리 낭만개 아저씨를 만나서 이 모든 궁금증을 물어보고 싶다.

아니, 솔직히 내 변한 모습에 놀랄 아저씨의 표정이 제일 궁금하긴 하다.

어서 붉은 코뿔소의 뿔을 전달하고 집으로 가야겠다.

음, 그런데.

어마어마하군.

궁전은 아니고 성벽도 아니다.

그냥 거대한 장원의 담벼락인데, 끝도 없다.

옆으로 봐도 끝이 없고, 그 높이는 성벽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사천당가도 참 원수를 많이 지긴 했나 보다.

저렇게 무지막지한 담벼락을 세운 걸 보니 말이다.

묻지 않아도 사천당가를 찾아갈 수 있었고, 다시 담벼락을 따라 한참을 간 후에야 정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경계를 서는 수문 무사들의 분위기는 설명할 필요 없으리라.

그냥 살벌 그 자체다.

이건 문을 지키겠다는 건지, 눈 마주치면 칼을 찌르겠다는 건지.

아무튼 그런 분위기 속 내가 다가갔다.

등에는 커다란 봇짐, 붉은 코뿔소의 뿔이 열네 개나 담겨 있다.

허리에는 대성검을 차고 당당하게 걸어갔다.

수문 무사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자에게 다가갔는데, 내가 바로 코앞에 올 때까지 흉흉한 얼굴로 노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내가 먼저 말해야지.

"탈혼독 관련 일로 무림맹의 명을 받아 왔습니다. 가주님을 만나 뵙고 싶습니다."

"소속, 이름."

하아, 새끼.

거, 혀 한번 더럽게도 짧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신분을 밝혀야 했다.

"개방, 이름 나태한."

얄팍한 자존심에 나도 한번 혀를 짧게 굴려 봤다.

그런데…….

어라?

표정이 왜 저래?

그냥 소속과 이름을 말했을 뿐인데, 얘가 엄청나게 놀란 얼굴을 한다.

그러더니 한다는 소리가…….

"멸마… 멸마협 나태한 소협이십니까?"

엥?

멸마협은 뭐야?

"나태한은 맞는데, 멸마협은……."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모시겠습니다. 저희 당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어라?

갑자기 왜 이래?

무섭잖아!

스무 명가량의 수문 무사들 모두가 같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고, 또 갑작스레 극진한 예를 갖추기 시작했다.

어리둥절.

뭐, 어쨌거나 나는 그렇게 정문을 통과하고 다시 외원을 지나 빠르게 내원으로… 왔군.

"나 소협! 나 소협!"

저 멀리서 체통이고 뭐고 버선발로 양팔을 마구 흔들며 다가오는 녀석.

당우국이다.

칠비독우(七匕毒雨)란 무시무시한 별호는 아예 잊어버린 듯, 그냥 태어나 처음으로 눈을 본 개새끼처럼 신이 나 저렇게 달려온다.

결국 내 안내는 당우국이 하게 되었다.

"나 소협께서 와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붉은 코뿔소의 뿔을 구해 왔어요."

"정, 정말이에요?"

수문 무사들보다 더 놀란 얼굴의 당우국.

"독선 대협을 만나야 합니다."

"아! 아버지께서는 현재 폐관 중이세요. 탈혼독의 제조법이 유출되기 전부터 폐관 중이셨어요."

"그럼 해독약은 누가 만든 건데요?"

"큰형이요."

그렇다.

당우국은 독선의 4남 3녀 중 여섯 번째 자식이다.

"큰형이라면 천독패(千毒覇) 당소호 대협을 말하는 거예요?"

"그렇죠. 제 큰형이 천독패 말고 또 있겠어요? 하하."

"해독약을 개발한 것도 큰형?"

"네, 이미 몇 년 됐어요. 큰형이 20년 전에 소가주가 되고, 한 5년 전쯤부터는 실질적으로 우리 당가를 이끌고 있어요. 아버지께서 폐관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이것저것 살펴보시기는 했는데, 폐관에 들어간 후부터 모든 일은 큰형이 처리해요. 해독약도 큰형이 만든 거고요."

"아! 그렇군요."

"아직 정식 가주는 아니지만, 아버지께서 폐관에 들어가시기 전에 큰형에게 무형지독까지 줬어요."

"무형지독은 당가의 가주만이 보유할 수 있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그렇죠, 상징적인 의미에요. 이제 큰형이 가주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니, 당가의 모든 식솔은 큰형의 명령에 따르라는 아버지의 뜻이죠."

"곧 정식 가주에 오르겠네요?"

"아버지께서 출관하시자마자 그렇게 될 것 같아요."

그런데 이 녀석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계속 싱글벙글이다.

나랑 그렇게 친하지도 않았던 녀석인데,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입꼬리는 계속 귀에 걸려 있다.

우리는 그렇게 내전의 중심에 있는 당가의 치독전(治毒殿)을 향해 빠르게 걸어가며 대화를 이어 갔다.

지나가며 보이는 무인이며 시비며 일꾼들 모두가, 빠르게 걷는 우리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여 예를 갖추었다.

밖에서는 몰랐는데, 당가 안에서만큼은 당우국 이 녀석도 거의 왕자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탈혼독 때문에 난리잖아요. 그 해독약을 큰형이 직접 완성했다는 소식에 무림맹주께서 직접 우리 당가에 찾아와 큰형의 공로를 치하해 주기도 했어요."

"음, 대단하군요. 천 개의 독에 으뜸이라는 천독패라는 별호가 오히려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네요."

"우리 큰형이라서가 아니라, 대단하긴 해요. 하하."

"아! 당 소협. 그런데 멸마협은 뭔가요? 아까 수문 무사가 나에게 그리 말하는 것 같던데."

내 물음에 당황한 건 오히려 당우국이었다.

놀란 얼굴로 나를 향해 되물었다.

"못… 못 들었어요?"

"뭘요?"

"멸마협 나태한."

"음, 붉은 코뿔소의 뿔을 구하러 남만에 다녀오느라. 중원에는 지금 막 도착한 거예요."

"아! 그랬군요. 나 소협에게 별호가 생겼어요. 그게 멸마협이에요. 멸할 멸(滅), 마귀 마(魔), 멸마협(滅魔俠)이요."

웃지 말자.

웃지 마!

제발.

아! 근데 자꾸 웃음이 나온다.

멸마협이라니!

하하하하하하!

칵뉴족의 땅에서 ‘칵뉴의 하얀 사신’이란 별명을 얻었던 적은 있다.

하지만 내가 사는 무림에서 얻은 첫 번째 별호 아니겠는가?

물론 광곡개(狂哭丐)라는 별명은 내 기억에서 오래전에 지웠고.

"멋지죠?"

아놔! 웃으면 안 되는데.

"네. 뭐. 하하. 뭐, 하하하."

계속 웃음이 난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죠? 난데없이 나에게 별호가 생겼네요?"

"불사괴(不死怪) 때문이죠."

"설마… 감숙에서 그 죽지 않던 괴인을 말하는 거예요?"

"네."

"그걸 불사괴라고 불러요?"

"네."

"음, 이름은 딱 맞긴 한데. 그때 제가 했던 일들도 알려졌나요?"

"알려지다마다요. 아, 맞다! 나 소협이 칠룡사봉이 된 것도 모르겠네요?"

웃지 말자!

웃지 마, 나태한!

그깟 칠룡사봉.

애들도 아니고, 유치하게.

그런데 계속 웃음이 나온다.

아! 미치겠다.

"칠룡……. 어험, 어험, 쿨럭. 제가요?"

"정말 하나도 모르고 있었나 보네요."

"천천히, 천천히 설명을 좀 해 주시죠, 당 소협."

나는 바삐 걷던 걸음마저 속도를 늦추고, 사무적이었던 얼굴마저 부드럽게 풀며 물었다.

기분이 좋다.

"감숙 사건 이후에도 불사괴가 두 번 더 출현했어요."

"다른 지역에서요?"

"네, 산서에서 마흔세 구의 불사괴가 출현해 엄청난 인명 피해가 있었어요. 800명가량이 죽었어요. 두세 달 뒤에는 호남에서 한 구의 불사괴가 출현했는데, 그 피해는 더 컸어요. 1,200명이 죽었는데, 그중에는 국풍검 이사죽 대협과 망혈타 조이현 대협, 무정귀검 한 대협, 섬전수 단목 대협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고수들도 수십 명이나 희생당했어요."

"아! 그런 일이… 잠깐! 호남에서는 단지 한 구의 불사괴가 출현했는데, 그 엄청난 고수들이 수십 명이나 죽었다고요?"

"네, 그게… 기존에 봤던 불사괴와는 완전 다른 불사괴였어요. 평소와 같이 대화를 하던 중, 갑자기 얼굴의 피부가 손바닥만큼 떨어졌는데, 그제야 스스로 정체를 밝혔다고 하더라고요. 그전에는 그자가 불사괴였는지 아무도 몰랐데요."

휴먼 언데드다.

휴먼 언데드가 출현한 거야.

미친!

휴먼 언데드가 왜!

그나마 불완전한 휴먼 언데드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랬기에 얼굴의 피부가 떨어져 나간 것일 테고.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감숙에서 벌어진 일은 입소문을 타 이미 천하에 퍼진 상태였지만, 무림맹에서는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었어요. 그러다 산서에 이어 호남에서까지 일이 벌어지자, 불사괴에 관한 그간의 정보를 모두 공개했죠."

"항마와 복마의 힘으로 그들을 제압할 수 있다는 내용까지요?"

"네."

"무림맹에서 그들을 처치한 거예요?"

당우국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상태였다.

뭔가 뿌듯한 얼굴이었다.

"신의룡(新義龍)이 처리했어요."

"신의룡? 신의룡은 처음 듣는데요?"

"아! 그것도 모르겠군요. 남궁세가의 소가주 남궁무검 소협이요."

젠장!

그 녀석 이름이 왜 여기서 나와?

"맞다. 진짜 다 모르겠네요. 화산의 이백운 도장하고 무황성의 궁도산 소협이 감숙에서 크게 다쳤잖아요."

"그랬죠."

"그래서 칠룡사봉에서 빠졌어요. 빈 두 자리를 신의룡 남궁무검 소협과 나 소협이 대신 들어가게 된 거고요."

뭔가, 뭔가 말이다.

기분이 좋지 않다.

단순히 남궁무검 때문만이 아니다.

예감이, 그냥 더럽다.

"당 소협."

"네, 나 소협."

"왜 걔는 용(龍)이고 나는 협(俠)이죠?"

"아, 그게… 큰 의미는 없는 걸로……."

"솔직히, 우리 솔직히 말해 줍시다."

"괜찮……."

"괜찮으니까 말해 줘요, 당 소협."

"그게… 남궁무검 소협의 활약이 실로 대단했어요. 기존의 그 기라성이라 불리던 대협들이 불사괴에게 속속 당하고, 무고한 백성들이 학살당하는 상황에, 남궁무검 소협이 제왕검을 들고 창궁검무대까지 이끌고 등장했죠. 산서에서 마흔세 구의 불사괴 중 서른세 구를 베었고, 다시 호남에서 새로운 형태의 불사괴마저 죽였어요."

"그래서……?"

"단번에 칠룡사봉의 수좌라는 자리를 차지하게 됐지요. 요즘 열 명이 모이면 아홉 명은 남궁무검 소협 이야기하느라 난리예요."

"음… 나는요?"

"어험. 그게… 나 소협 이야기도 많이 해요."

"서열. 칠룡사봉에서 몇 등?"

"그게… 어험, 쿨럭, 죄송해요. 아직까지는 말석……."

당우국도 칠룡사봉이다.

내가 이 녀석 아래라는 소리다.

젠장!

기분 잡쳤다.

빨리 붉은 코뿔소의 뿔만 주고 집에나 가자.

새아빠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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