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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이번 여행기-106화 (105/174)

106화

"자네… 휴우, 말은 고맙네. 하지만 나 대협, 아들은 가망이 없다네. 나도 후인이를 편히 보내 주겠다고 이미 마음을 먹었다네."

"할 수 있어요. 기회를 주세요."

"자네, 진심인가?"

"네."

확신에 찬 내 대답.

야수왕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아니, 건들면 눈물이라도 쏟을 기세였다.

"야수왕, 사돈의 입장에서, 또 장인 자격으로 부탁합니다. 나 대협에게 기회를 주시지요. 보지 않으셨습니까? 저와 야수왕은 물론, 이곳에 있는 모든 생명을 앗아 갈 밀독왕의 마지막 독을 어떻게 처리하는지요. 나 대협은 대단함을 넘어 신비로운 힘까지 가진 자입니다."

태양왕이 간곡한 모습으로 야수왕에게 부탁했다.

"정말… 정말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네, 살아만 있다면,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호왕을 내주겠네."

어흐으응.

야수왕의 말에 곧바로 야수왕의 호랑이 호왕이 다가와 반응했다.

난 녀석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부탁해, 호왕아."

어흐응(얼른 타기나 해).

"알았어."

어흐응(너, 내 말 알아듣냐)?

"당연하지."

어흐응(너… 인간 아니지)? 어흐응(정령이냐)?

"풉. 인간 맞아."

어흐응(정령의 느낌인데)?

"인간이라니까. 하하."

야수왕이 살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

"자네, 호왕과 대화가 가능한가?"

"네, 다른 동물들과도 가능해요. 이제는……."

슬쩍 미소까지 지어 보인 후.

"모든 자연과 소통이 되네요."

야수왕이 순간 경악한 얼굴을 하고 말았다.

태양왕 역시 내용을 알고 있는 듯, 비슷한 얼굴을 하며.

"나 대협, 자네는 정말 알면 알수록 사람을 놀라게 하는군. 야수왕, 자연과의 대화라면 설마 그것 아닙니까? 야수궁에 전설로만 전해진 그 경지……."

어흐으응. 어흐으응.

태양왕의 말에 호왕이 연신 야수왕을 향해 어흥거렸다.

그 말을 듣는 야수왕은, 혼이 나간 얼굴로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인 후에야 입을 열 수 있었다.

"호왕이 그러는군요. 지금 나와 태양왕께서 생각하는 게 맞을 것이라고요."

두 밀림의 절대자가 다시금 나를 보며 경악한 얼굴을 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때.

"야수왕 폐하."

아까 전쟁에서 보았던 중원 무림에서 온 고수들.

200명 중 무리를 이끌던 한 사내가 빠르게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엄청난 덩치에, 그 덩치에 어울릴 만큼 커다란 대도를 지니고 있는 대단한 고수였다.

"백호대도 태 대협."

백호대도 태 대협?

설마 저 사람……?

"야수왕 폐하. 저희는 이만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태 대협."

"네, 야수왕 폐하."

"내, 태 대협과 무림맹주님께 입은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태 대협이라는 자가 슬쩍 태양왕과 내 눈치를 살핀 후 야수왕에게 답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휴가를 온 것이라고요. 무림맹과 전혀 상관없는 일입니다. 개인적으로 휴가를 왔다가 난리에 휩싸였을 뿐입니다."

태 대협의 말에 야수왕과 태양왕이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네, 그렇지요. 중원 무림과 무림맹에서는 절대 우리의 일에 관여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절대로요."

야수왕의 말에 이젠 태 대협이란 자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태양왕은 이미 산 아래에서 인사를 했고. 나 대협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마 일부러 온 듯하다.

내가 그를 보았듯, 그 역시 이미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개방의 비걸개 나태한이라고 합니다."

"아! 개방……. 하아! 그렇군요. 누구실까 계속 궁금했는데. 개방에 용이 탄생했네요."

"감사합니다."

"앗! 죄송합니다. 저는 무림맹 질풍백호대 소속 대주 태거충이라고 합니다."

중년의 나이다.

그것도 무림맹 3대 무력대 중 하나인 질풍백호대의 대주.

심지어 그는 초절정의 끝자락이라는 경지에 오른 자이기도 하다.

무림에서 그의 명성은 태산과 같이 높고 대해와 같이 깊다.

실로 어마어마한 신분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깍듯한 예를 갖추었다.

"무림으로 돌아가면 꼭 다시 만나기를 바랍니다, 나 대협."

"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 그냥 별이 마구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무림맹 3대 무력대의 대주답게 절제할 줄 알았다.

곧바로 시선을 거둬 야수왕과 태양왕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더 많은 이들이 보기 전에 저희는 중원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너무 급한 거 아닙니까? 승전을 축하하는 술 한잔도 들지 못했는데요."

"저희의 존재가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맹주님께서 난처한 상황에 처해질 수 있습니다."

"음, 그렇다면 말릴 수도 없겠군요. 진심으로 고마웠습니다, 태 대협. 이곳의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꼭 찾아뵙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네, 폐하."

태거충은 그렇게 떠났다.

질풍백호대를 이끌고 서둘러 전장을 떠나는 그들이었다.

"폐하, 그럼 저는 먼저 야수궁으로 가 보겠습니다."

야수왕이 내 두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부탁하네, 나 대협."

"네."

* * *

어흐으으으응!

"달려! 달려라, 호왕! 야호!"

어흐으으으으응!

"그래, 달려! 달려!"

엄청나다.

야수왕의 단짝 호왕.

영물 중의 영물, 영물들의 왕이란 이름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숭불산에서 윙슈트를 타고 날아가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싶었는데, 기우였다.

호왕은 바람보다 더 빨리, 윙슈트보다 더 잽싸게 밀림을 헤치며 질주하였다.

그렇게 야수궁에 도착.

반후인 녀석, 살아 있다.

하지만 죽어 가고 있었다.

그의 곁으로 보파 공주와 열랑.

전장으로 떠난 아버지를 대신해 야수궁을 다스리고 있는 큰형 반송락.

그리고 막내인 반구삭과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청안.

그들이 반후인의 곁에서 슬피 울고 있었다.

죽어 가고 있는 반후인과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모습들이었다.

"폐관할 수 있는 장소를 내주십시오."

반후인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대뜸 그리 외쳤다.

모두가 구슬피 울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왕자님!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어서 후인이와 함께 폐관할 장소를 마련해 주십시오."

큰형 반송락에게 강한 어조로 말했지만,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어흐으으으응! 어흥!

"아버지… 아버지께서?"

어흥! 어흐으응!

"바로 준비하겠네, 나 소협."

그렇게 나는 반후인 녀석과 함께 폐관에 들었다.

* * *

반후인의 큰형 반송락은 폐관실이 아닌 커다란 지하 동굴을 우리에게 내주었다.

지하수가 시냇물처럼 흐르고, 물고기까지 살고 있었다.

곳곳은 신비로운 수정들과 수천 년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끼들이 자라고 있었고.

몇 개의 야명주가 그런 동굴의 벽에 박혀 빛을 밝혀 주기까지 하였다.

아름다운 곳이고, 태고의 자연 상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자연의 기운이 그대로 나를 반겨 주는 완벽한 장소였다.

나는 반후인을 들어 지하 동굴에 들어오자마자 옷을 모두 벗었다.

반후인의 옷까지 모두 벗긴 후.

아! 이건 반후인의 몸에서 고열이 나는 이유기도 하지만, 자연 상태의 모습으로 치유하기 위함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반후인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자연의 기운을 내 몸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그걸 반후인에게 전하였다.

생명의 기운이며, 정화의 기운이 그렇게 나와 반후인에게로 물 흐르듯 계속하여 흐르고 또 흘렀다.

사흘이란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물고기야, 너 좀 먹을게."

첨벙.

물고기가 대답을 하기 전에 녀석을 잡았다.

불을 피우고, 구웠다.

먹었다.

맛있다.

참 이상하다.

확실히 이곳의 자연과 자연국의 자연은 다른 자연이다.

자연국의 자연은 모두가 하나로 이어진 유기체와 같다.

하지만 이곳의 자연은 서로 간에 이어짐이 있긴 했으나, 그것을 명확히 하나라고 단정 짓기 힘들 만큼 미미한 연결점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물고기 녀석 말이다.

자연국의 물고기들과 달리 단순하다.

대화가 통하지 않을 만큼 단순한 뇌, 사고를 가졌다.

돌도 그렇고, 이끼도 그렇고.

내가 사는 세상에서는 호왕, 열랑, 청안과 같은 영물들과의 대화만이 가능한 것 같다.

물과 바람, 햇살마저도 말을 하지 않았다.

분명 그들의 마음이 전해지지만, 자연국에서 했던 것처럼 말로 소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연국의 모든 생명체는 하나로 연결된 유기체라, 그 지혜마저 하나이다.

나보다 더 뛰어난 사고와 철학 그리고 이지를 가지고 있기에 대화가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말했듯, 자연과 자연 사이의 연결점이 미미하다.

지혜를 공유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단순한 생물이나 동물의 경우 대화가 불가능한 것이 당연한 일이다.

기이하면서도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지만, 결국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원인은 인간 때문일 테다.

아!

그나저나 자연국 자연이들은 괜찮을까?

많이 놀라고, 많이 화나고 그랬을 텐데.

우주선을 타고 온 인간들.

아마 수백 년 전, 자연이 내뿜은 독을 피해 우주로 피해 있다가 돌아온 인간들인 모양이다.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 마지막 순간 그리 외쳤던 말 말이다.

‘자연을 해치지 마!’

사실 그건 그들을 위해 그리 외쳤던 것이다.

자연을 살리기 위함이 아니었다.

인간들을 살리기 위해 그랬던 것이다.

자연은 죽고 살고, 모든 것이 자연의 섭리며 다시 자연이들 모두가 그리 받아들인다.

하지만 인간들.

그들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고, 자연을 소중히 생각하지 않아 마구잡이로 자연을 해칠 때.

자연은 다시 인간들을 향해 반격을 가할 것이다.

이는 인류의 2차 멸망으로 이어질 것이고.

그렇게 수백 년 만에 돌아온 인간들이 위험했다.

그들이 자연에 의해 죽게 될 것이 뻔했다.

그래서 그렇게 다급히 외쳤던 것이다.

수백 년 만에 돌아온 마지막 인류를 살리기 위해서 말이다.

어떻게 됐을까?

신조의 인류 멸망 보고서는 봤을까?

그것이라도 봤다면 상황이 조금 달라졌을 텐데.

자연이들은 돌아온 인간들을 어떻게 했을지.

휴우, 언젠가는 꼭 돌아가 그들이 어떻게 됐는지 내 두 눈으로 확인할 테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아마 내 이야기의 끝날쯤에야 이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 형."

어라?

저 녀석 깼네?

"깼어? 몸은 좀 어때… 왜 울어?"

"나 형!"

반후인 녀석이 깨어났다.

눈물을 글썽이는가 싶더니, 이내 폭풍 울음을 터뜨리며 네발로 기었다.

그렇게 사족 보행으로 나에게 오더니, 다시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 이거 쫌……. 지금 둘 다 발가벗고 있는데.

느낌이 이상하네.

"나 형! 엉엉엉! 나 형! 엉엉엉."

"왜? 왜 울어?"

"나 형! 엉엉엉."

"그만 울고 말을 해! 미친놈아!"

"나 형! 엉엉. 미안해. 엉엉엉. 나 때문에, 엉엉엉."

"그러니까 뭐? 왜 우는데?"

"나 때문에 나 형까지 죽은 거잖아. 엉엉엉. 미안해. 엉엉."

"죽긴 왜 죽어, 미친놈아!"

퍽!

녀석을 냅다 발로 차 버렸다.

쿠당탕탕.

지하 동굴 바닥을 몇 번이나 뒹군 후에야 벌떡 일어나는 반후인.

그것이 덜렁거린다.

그러더니 놀란 얼굴로 주위를 마구 살핀다.

그러더니 다시!

"엉엉엉. 죽은 거 맞잖아. 엉엉. 미안해, 나 형."

"아니, 미친놈아! 죽긴 누가 죽어!"

"여기 지옥 아니야? 엉엉. 착하게 살걸."

"넌 죽어서 지옥 가도, 나는 천국 갈 거야."

다시 눈물을 뚝 그친다.

그러더니 주위를 다시 한참이나 살핀다.

"나… 살았어? 여기 저승 아니야?"

"살았어. 이 형님이 살렸다. 그보다… 야! 저기 옷 있으니까 입어라. 아, 나도 좀 입자. 다 나았으니 치료할 필요 없네."

난 서둘러 벗어 놨던 옷을 입었다.

하지만 반후인 녀석은 여전히 그 조그만 그것을 덜렁이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기만 했다.

"뭐해? 옷 입으라니까."

"나… 나 진짜로 산 거 맞아?"

"살긴 살았는데, 정신은 좀 오락가락하나 보다. 여기 야수궁 지하 동굴이야. 보파 공주가 위에서 널 애타게 기다리고 있고. 맞다. 밀독궁은 무너졌어. 네 아버지이신 야수왕과 태양왕 그리고 이 형님이 합심해 밀독왕을……. 야! 떨어져 좀! 옷을 입든가! 야!"

녀석이 눈물을 휘날리면 달려와 나를 꽉 끌어안았다.

아! 이 새끼.

옷 좀 입고 하든가.

돌겠네.

* * *

"열랑, 물어볼 게 있어."

으르렁(얼마든지).

"너, 옛날에 왜 매일 내 엉덩이 물었어?"

으르렁(맛있으니까). 으르렁(네 엉덩이가 쫄깃쫄깃 씹는 식감이 좋았거든).

"후인이 녀석은 네가 날 좋아해서 그랬다던데?"

으르렁(구라야).

"하아, 됐다. 하여간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니까."

으르렁(정말 가는 거야)?

"응, 청안이 태워 주기로 했어."

으르렁(근데 너 정말 정령 아니야)?

"정령이란 게 나처럼 잘생겼어?"

으르렁(궁금한 게 있는데, 네가 하는 농담에 웃어 주는 사람이 있긴 있어)?

"됐다. 나, 간다."

으르렁(또 보자, 쫄깃한 엉덩이).

야수궁과 태양궁은 화친을 맺었다.

반후인과 보파 공주의 혼인도 두 궁전의 협력 속에 성대하게 준비되고 있고.

동시에 밀독궁의 잔당을 소탕하는 대규모 작전도 시행 중이다.

나는 지하 동굴을 나오자마자 서둘러 모두와 작별 인사를 했다.

혼인식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내가 반후인과 지하 동굴에 있는 사이.

야수왕과 태양왕은 나를 위해 직접 밀독궁으로 쳐들어가, 그곳에 보관하고 있던 붉은 코뿔소의 뿔 열세 개를 구해다 주었다.

붉은 코뿔소의 뿔은 도합 열네 개나 된다.

이제 한시라도 빨리 사천당가로 가 이 뿔들을 전해 주면 된다.

"청안! 부탁해."

휘이이이이잉(꽉 잡아, 친구야).

청안을 타고 하늘을 날았다.

엄청나고 또 엄청난 속도다.

그렇게 나와 청안은 구름 위까지 날았고.

"이쯤이면 운남이겠네. 청안, 됐어. 여기까지만 바래다줘도 돼. 이제부터는 나 혼자 갈 수 있어."

휘이이이잉(또 볼 수 있는 거지)?

"물론이지."

휘이잉(잘 가, 친구야).

"그래, 너도 잘 살아. 그럼 간다!"

난 청안의 등에서 훌쩍 뛰어 구름 위로 몸을 날렸다.

하늘을 나는 느낌은 언제라도 신비롭기 그지없다.

동시에.

처처처처처처척!

신형 윙슈트가 장착되었고, 나는 날개를 펼쳤다.

이 정도면 당가가 있는 사천 성도까지 단번에 날아갈 수 있다.

내가 바람과 하나가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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