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두 분이 여긴 어떻게……?"
"이야기는 잠시 후에 하지."
야수왕이 나에게 그리 말한 후, 곧바로 몸을 날렸다.
당연히 밀독왕을 향해서였다.
"호왕! 가자!"
어흐으으으으응!
밀독왕이 몸을 날리자, 그의 단짝 호랑이가 함께 거대한 도약을 했다.
수십 장의 거리를 단번에 점하며 곧바로 밀독왕을 향해 앞발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야수왕과 태양왕의 동시 등장.
밀독왕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기도 전, 호왕의 무지막지한 앞발질에 이어 야수왕의 맹렬한 공격까지 받아야 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실로 어마어마했다.
대자연의 기운이 야수왕의 몸으로 마구 쏟아지고, 그것이 다시 정제돼 두 주먹을 통해 분출하는 것이 내 눈에는 보였다.
호왕, 호랑이 녀석도 괜히 왕이라 불리는 영물이 아니었다.
앞발질 한 방에 땅을 터뜨리고 대기를 찢어발기는 무지막지한 힘이 실린 말 그대로 괴수급 영물이었다.
밀독왕을 가운데 두고, 야수왕과 호왕이 사방을 점해 움직이며 정말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맹공을 마구 퍼부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이런 개새끼들! 다 죽여 버리겠다!"
콰콰콰콰콰콰콰쾅!
밀독왕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그의 두 손에서, 또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은 말 그대로 인간이 뿜어내거나 만들 수 있는 독 따위가 아니다.
아니, 애초에 인간이 사는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되는 그런 무지막지한 독이 엄청난 기운에 실려 강기와 함께 터져 나왔다.
콰콰콰콰콰콰쾅!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순식간에 그들이 싸우는 장소는 초토화가 되었다.
숭불사의 절반 이상이 그냥 다 터져 나가는 것을 넘어, 숭불사가 있던 산의 봉우리마저 하늘로 치솟고 수백 장 밖으로까지 비산하였다.
아무래도 야수왕의 다친 몸이 아직 온전치 않은 모양이다.
내가 도와야겠다.
"제가 돕……."
"사돈! 제 몫도 좀 남겨 주시지요. 우리 태양궁의 복수도 해야 합니다. 허락하시겠습니까?"
나보다 태양왕이 더 빨랐다.
하지만 그는 내공을 가득 실은 음성으로 말하면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야수왕의 허락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사돈?
음, 그건 일단 천천히 생각하고.
두 사람 사이가 좋아 보이기는 한데, 과연 야수왕이 허락할까?
"으악! 사돈! 좀! 얼른 도와주시오! 이 새끼, 만만치 않아요!"
"앗! 네! 넵! 갑니다!"
야수왕이 좀 급했나 보다.
아니, 호왕이 조금 다쳤다.
자존심이고 뭐고 급하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에 태양왕도 다급히 몸을 날렸다.
콰콰콰콰콰콰쾅!
쿠르르르르르르르콰아아아아아아앙!
무지막지했다.
세 명의 화경급 고수의 싸움.
아!
수십 장 밖에서 보고 있지만, 그냥 보고 있는데 몸을 지탱하고 서 있는 것조차 힘들다.
주위를 둘러봤다.
야수궁의 고수들과 동물들.
그리고 태양궁의 고수들.
다시 이들의 등장에 힘을 얻은 숭불사 스님들까지.
모두 힘을 내어 수천에 달하는 밀독궁 병사들을 몰아붙이고 있다.
우이이이이이잉!
그들 중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역시나 코끼리 떼였다.
어마어마하다.
코를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댓 명의 밀독궁 병사들이 새처럼 날아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투투투투투투투퉁.
그들이 냅다 달리면, 이를 막을 수 있는 밀독궁 병사는 없었다.
몇몇 밀독궁 고수들이 용감히 그들에게 덤벼 봤지만, 닿는 즉시 몸의 한 곳이 터져 버리고 만다.
뒤를 이어 별의별 동물들과 또 사람들이 혼비백산하는 밀독궁 병사들을 도륙하고 있다.
맞다.
이건 싸움이 아니다.
도륙이다.
태양궁의 고수들도 야수궁에 절대 뒤지지 않았고, 소수지만 정예 고수라 할 수 있는 숭불사 스님들도 오늘만큼은 자비를 베풀지 않고 무지막지한 살수를 펼치고 있다.
그런데, 음.
저들은 누구지?
코끼리떼 만큼이나 엄청난 활약을 펼치며 내 시선을 사로잡는 한 무리, 대략 200명가량의 고수들이 보였다.
태양궁과 야수궁, 그리고 숭불사의 스님 중 최고수급에 해당하는 몇몇을 단체로 뭉쳐 놓은 것 같다.
200명 모두가 엄청난 고수다.
심지어 마치 군대를 보는 듯, 그들은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움직인다.
마치 적들을 마른 볏짚을 베듯 빠르게 베며 전장을 종횡무진 중이다.
무엇보다, 그들이 입고 입는 무복은 이곳 현지의 것이 아닌 중원의 것이다.
중원 무림에서 온 자들인데.
어느 단체에 소속되었다는 표식 같은 게 없다.
누구지?
"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악!"
다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일방적인 도륙과 혼비백산 도주하기 바쁜 적들의 반복이다.
진즉 이랬다면 어땠을까?
야수궁과 태양궁 그리고 숭불사가 힘을 합쳤다면.
진한 아쉬움이 남았지만, 이미 지나간 시간이다.
이제라도 이렇게 힘을 합쳐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다행이라 생각해야 했다.
어흐으으으으으으응!
"죽어라!"
"네, 이놈!"
시선을 다시 돌려 산봉우리, 이제는 흔적조차 남지 않은 숭불사의 터로 향했다.
야수왕과 호왕 그리고 태양왕이 마무리를 하려 한다.
그를 중심으로, 마친 오랜 시간 합격술이라도 익혔던 것처럼.
야수왕과 호왕 그리고 태양왕은 완벽한 공세를 펼치고 있다.
밀독왕이 끝까지 발악해 보려 하지만, 무리다.
불가능하다.
야수왕과 태양왕은 작은 반전조차 허용하지 않고 있다.
확실히 밀림의 왕들이라 불릴 엄청난 고수들, 아니 절대자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그들이다.
이 모습을 반후인 녀석과 보파 공주가 함께 봤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없다.
반후인은 아직 사경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살아 있어야 하는데.
보파 공주와 열랑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마도 야수궁으로 떠난 모양이다.
싸움도 끝나가고, 밀독왕도 곧 최후를 맞을 것 같다.
나도 야수궁으로 빨리 움직… 어라?
70여 장의 거리.
하지만 내 눈에는 정확히 보이고, 내 기감은 다시 세밀히 이를 감지하고 있다.
밀독왕의 기운이 변한다.
뭐지?
곧 죽을 상태인데.
그의 몸이 불규칙적으로 실룩거리며, 피부의 색마저 변하는 게 보였다.
그를 중심으로 흐르는 기운의 밀도와 형태가 바뀌고 있다.
동시에 내 예감이 강하게 위험함을 경고하고 있다.
아니, 자연이 내게 경고하고 있다.
아! X팔.
엿됐다.
저 새끼, 지금 자폭하려 한다.
샤이닝 라이트(Shining Light)!
산백신법(散魄身法) 일점공(一占空)!
"물러나십시오!"
난 곧바로 몸을 날렸다.
샤이닝 라이트와 산백신법을 동시에 펼쳐, 순식간에 70장의 거리를 좁혔다.
불안한 예감은 나만 느낀 게 아닌 모양이다.
내가 밀독왕을 향해 몸을 날리자마자, 야수왕과 호왕 그리고 태양왕이 몸을 펄쩍 뛰어 20, 30장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 밀독왕.
뭔가 틀어졌다고 생각했는지, 그 짧은 찰나 나를 노려보는 눈이 무섭다.
아니, 사악하다.
그러더니 웃는다.
파멸의 웃음이다.
등골이 서늘할 정도의 사악함이 보였다.
네 뜻대로는 안 될 것이다.
"블랙 스톰(Black Storm)!"
쿠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솨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땅에서 검은 흙의 소용돌이가 솟구쳤다.
오로지 하나의 거대하고 엄청난 회오리.
그것이 자폭하려는 밀독왕을 단번에 가두어 버렸다.
하지만…….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밀독왕의 마지막 발악.
그가 나의 블랙 스톰마저 부수어 버리려 하며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하지만 블랙 스톰은 끝내 그를 완벽히 놔주지 않았고.
블랙 스톰과 함께 30장 높이의 허공으로 치솟은 밀독왕.
나는 그를 향해 마지막 한 방을.
"아이언 스노우(Iron Snow)!"
갑작스레 하늘이 검게 변하더니,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졌다.
허공에 주먹만 한 쇠의 강기가 수천, 수만 개가 형성되었고.
이내 그것들이 눈의 폭풍이 되어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로지 블랙 스톰에 갇힌 밀독왕 한 사람에게 쏟아지는 쇠의 눈 폭풍이며 눈보라였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숭불사의 산, 숭불산.
그 봉우리는 이미 세 사람의 화경급 고수들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거기에 나의 아이언 스노우까지 쏟아지자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고.
그 폭발은 끊이지 않고 계속하여, 다시 또 계속 또 계속 쏟아져 내렸다.
숭불산 봉우리는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지름 30장에 깊이는 50장에 달하는 커다란 구덩이가 형성되었다.
난 그 구덩이 안으로 곧바로 몸을 날렸다.
밀독왕은 이미 형체를 찾아볼 수 없었다.
문제는…….
아이언 스노우로 그를 죽일 수 있었지만, 그가 마지막에 자폭하며 내뿜은 독들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쉬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난 블랙 스톰을 멈추지 않았다.
블랙 스톰이 밀독왕의 독을 가두고 있다.
커다란 구덩이 한가운데로 다시 내려와, 한쪽 무릎을 꿇고 다시 한 손을 구덩이의 중심으로 가져다 댔다.
"블랙 스톰, 소멸."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리 외치며 기운을 땅속으로 몰아넣었다.
파멸의 독을 머금은 블랙 스톰이 천천히, 그렇게 땅속으로 사라져갔다.
그게 끝이 아니다.
난 이곳의 자연에게 말했다.
"밀독왕의 독을 정화시켜 줘. 부탁이야, 자연아."
자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에게 미소를 지었다.
긍정의 답이다.
차원 이동하여 내 세상으로 돌아오자마자 느낀 것은, 이곳의 자연과 자연국의 자연은 다르다는 것이다.
모든 자연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충격이었다.
자연국의 자연이 나에게 마음을 열고 호의적이었던 것과 달리, 이곳의 자연은 나를 경계하고 의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다르지 않았다.
왜?
내가 자연이고 자연이 나이기 때문이다.
자연국에서만큼은 아니지만, 분명 나는 이곳의 자연이다.
그렇게 반 각 정도 한쪽 무릎을 꿇고, 다시 한 손을 땅에 가져다 댄 상태로.
나는 밀독왕이 마지막으로 뿜어낸 독을 모두 자연으로 되돌려 보낼 수 있었다.
쉬이이익.
척.
곧바로 야수왕과 호왕, 태양왕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괜찮은가? 방금 그 독… 이곳에 있던 모두를 죽이려고 밀독왕이 작정한 것이었는데. 나 소협, 자네 어떤가?"
야수왕이 서둘러 내게 물었다.
난 그런 그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 괜찮습니다."
"말, 말도 안 돼."
태양왕도 놀란 마음을 숨기지 못했고.
"정말 괜찮아요. 믿기 힘드시겠지만, 이젠 만독불침입니다."
"아……."
동시에 두 사람이 입을 크게 벌리며 놀라워했다.
* * *
마치 화산이라도 폭발한 흔적이라도 남긴 것처럼 커다란 구덩이가 생긴 숭불산 정상.
그 정상에서 나와 야수왕 그리고 태양왕이 함께 나란히 서서 전쟁의 뒷수습을 지켜보고 있다.
"그런데 두 분은 정말 어떻게 오신 건가요?"
내 질문에 먼저 답한 건 야수왕이었다.
"밀독왕이 숭불사를 노릴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네."
태양왕이 야수왕의 말을 덧붙였다.
"우리도 그리 짐작하고 있었지. 우리 태양궁과 야수궁이 양패구상하여 움직일 수 없는 기회를 노리고, 그들에게는 눈엣가시나 다름이 없던 숭불사를 이참에 공격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지."
"아! 그래서 숭불사를 구하러 오신 거였어요?"
내 질문에 두 사람이 나를 보며 피식 웃는다.
다시 야수왕이 나섰다.
"어디 그럴 형편이 됐겠나? 나 대협도 잘 알지 않은가? 우리가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었는지. 알아도 못 올 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지."
"그런데 어떻게……?"
"청안이 도착했네. 화살을 다섯 방이나 몸에 꽂은 위중한 상태로 돌아왔지. 곧바로 막내 녀석이 상황을 듣게 됐고, 이 소식은 야수궁 전체로 퍼졌다네. 자네를 구하러 가는 문제로 야수궁에서 큰 논란이 일었었네."
"그렇군요."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어. 그래도 외인인 자네가 홀로 밀독궁과 싸우고 있다는 말에 많은 이들이 용기를 냈지. 결정적으로……."
"……?"
"사경을 헤매던 후인이 녀석이 순간 깨어나 소식을 듣고,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나와 대신들에게 간곡히 부탁했다네. 자네와 보파 공주… 어험, 우리 새아기를 구해 달라고. 어험."
어색해하는 야수왕.
하지만 웃고 있다.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시선을 태양왕에게 돌렸다.
그도 웃고 있다.
야수왕만큼이나 기분이 좋은 얼굴이다.
"나야 알지 않나? 보파가 가출해, 이를 구하기 위해 상황이 좋지 않음에도 움직였지. 자네와 함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이곳으로 왔다네."
"보파 공주는요?"
"산 아래에서 만났네. 열랑과 함께 야수궁으로 먼저 갔다네."
야수왕이 눈치를 슬쩍슬쩍 보는가 싶더니, 헛기침을 연신 해 대며 우리의 주의를 끌었다.
"어험. 어험. 저… 태양왕."
"네, 야수왕."
"그게… 어험. 어험."
"네."
"미안하게 됐습니다. 지난번에 우리가 그리하면 안 됐는데. 어험."
"먼저 공격한 건 저희 측이었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저희가 큰 실수를 해, 두 궁에 큰 인명 피해를 입혔습니다."
"아니지요. 작은 실수에 크게 반응한 저희 측 잘못이 더 큽니다. 그런데… 미안합니다, 태양왕. 보파 공주는 태양궁으로 다시 데리고 가셔야 할 겁니다."
"반후인 왕자의 상태가 많이 안 좋습니까?"
"저도 보파 공주만큼 훌륭한 며느릿감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들은 혼례를 올릴 상황이 아닙니다. 승전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죄송합니다, 태양왕."
"아닙니다. 야수왕께서 사과할 일이 아니지요."
"태양왕."
"네, 야수왕."
"앞으로 잘해 봅시다. 수백 년 전 우리의 선조들이 그랬듯 평화로운 밀림을 다시 만들어 봅시다."
"간절히 바라던 바입니다. 고맙습니다, 야수왕."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수백 년의 깊은 원한.
그것을 푼 것은 사랑이었다.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
아니다.
그건 자식에 대한 아버지들의 부정(父情)이었다.
"저기 두 분 폐하."
두 사람의 닭살 돋는 대화에 내가 슬쩍 끼었다.
"아직 살아 있다면… 제가 살릴 수 있어요."
밀림의 두 절대자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