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귀, 귀신.
귀신이다.
젠장!
귀신.
열라 무섭다.
그런데, 음?
없다.
소리만 들린다.
그래서 더 무섭다.
뭐냐고!
뜬금없이 귀신이 왜 나오냐고!
난 얼음이 되어 꼼짝도 못 하고 식은땀만 계속 흘려 댔다.
그런데, 그때.
귀신이 또 말을 했다.
"살살 따. 아파."
"물러나랏!"
두려움에 소리를 버럭 질렀다.
고요하다.
대꾸가 없다.
내 호통을 듣고 귀신이 도망갔나?
주위를 살펴봤다.
수백 마리의 동물들이 어느새 내 곁으로 몰려와 있다.
보통 내가 쳐다보면 딴청을 피우던 녀석들이, 지금은 멀뚱멀뚱 그냥 나를 대놓고 쳐다본다.
미친놈을 보듯 본다.
상관없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갔어…요? 귀신님? 귀신아?"
조심스레 주위를 살폈다.
기감도 최대로 끌어 올렸고.
음, 이상한 게 없다.
스산한 기운이라든가, 그런 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먹을래? 배고프면 먹어."
다시.
다시!
나는 얼음이 됐다.
사슴이다.
얼마 전 내가 잡아먹으려다가 포기한 사슴.
사슴이… X팔!
말을 한다.
내가 미쳤나?
계속 혼자 있으면 이렇게 미치는 건가?
"배 안 고파? 배고프면 먹어도 돼."
진짜다.
사슴이 말을 한다.
나를 빤히 쳐다보며.
다른 수백의 동물들까지 다 나를 쳐다본다.
그때, 사자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이놈은 경계를 어느 정도 해 줘야 하는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사슴이 말을 했잖아!
그런데 다가온 사자가 또 나를 향해.
"사슴 먹을래? 내가 잡아 줄까?"
미친!
미친!
미쳤어!
쟤들이 미친 게 아니라 내가 미친 게 맞아!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
그냥 웃음이 났다.
눈물이 나는데, 광소가 터졌다.
내가 진짜 미쳤나 보다.
사슴이 말을 하고, 사자가 말을 한다.
어라?
그럼 아까 말한 건?
난 시선을 돌려 감나무를 봤다.
"딸 거면 살살 따. 아파."
"하하하! 하하! 말을 하네? 나무가?"
눈물은 계속 나고, 다리는 후들거리고.
내가 말을 하는데, 이건 내가 말하는 게 아니다.
내 정신이 내 정신이 아니라는 뜻이다.
방금 나무가 말을 했다.
"배 덜 고픈가 보다."
"배가 너무 고파 정신이 오락가락한 거 아니야?"
"쟤는 첫날부터 정신이 오락가락했어."
"조용히 말해. 듣겠다."
다 들려.
파랑새가 말을 했고, 닭이 대답했고, 원숭이가 그 대화에 끼어들었다.
미친!
뭘까?
뭐, 답은 하나다.
내가 진짜로 미쳤나 보다.
나도 모르는 사이 주화입마에 빠졌나?
이곳의 대기에 아직도 치명적인 독이 남아 있었던 거야?
그래서 운기조식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주화입마에 빠졌고, 그래서 이런 지랄맞은 환각과 환청이 보이고 들리고?
하아!
어쩌지?
모르겠다.
귀신이건 미쳤건, 일단 어떻게든 해 봐야겠다.
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았다.
* * *
며칠이나 지났을까?
꽤 오랜 시간 운기조식을 하며 동시에 명상을 했다.
몸은 더없이 가볍고 개운하다.
정신도 맑다.
내가 정말로 미쳤었던 걸까?
그래, 잠깐 그럴 수도 있지.
무림으로 돌아가면 곧장 약선을 찾아가 봐야겠다.
그나저나, 이젠 눈을 좀 떠야 하는데.
꼬르륵.
배도 고프고.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운기조식과 명상만 했더니, 배가 정말 많이 고프다.
그렇게 눈을 뜨고 일어나 뭐라도 먹어야 하는데.
아!
무섭다.
눈을 뜨는 게.
하지만, 용기를 내어 떴고.
응, 알고 있었다.
기감이 알려 줬다.
내 주위에, 몰려들었던 수백 마리의 동물들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내가 눈을 뜨자.
"야! 저 녀석 눈 떴다."
"더럽게도 오래 자네."
"그런데 인간은 원래 앉아서 자?"
"서서 자는 닭이 할 소리는 아니지."
동물들이, 아직도 말을 한다.
아니, 아직도 나는 환청이 들려온다.
왜일까?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또 눈물만 났다.
"배 안 고파? 감 따다 줄까?"
다람쥐다.
내가 이번 운기조식을 하기 전, 나에게 감을 따 줄 것처럼 하다가 들고 냅다 튄 그 녀석이다.
녀석이 내 앞에 바싹 다가와,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이며 그리 말했다.
뭘까?
무슨 놈의 환각과 환청이 이렇게 지랄맞게도 생생하지?
꼬르륵.
"배고픈 것 같은데? 따 줘? 필요 없어?"
나는 그런 다람쥐를 한참이나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노려보다가.
"따… 줘."
"알았어."
타타타타타탓.
다람쥐가 감나무 위로 올라간다.
"잘 봐. 감을 딸 때는, 감나무가 아프지 않게, 이렇게. 이렇게 하는 거야. 내가 보여 줬었잖아. 이렇게 살살, 부드럽게. 마치 사랑하는 연인의 볼을 쓰다듬듯."
타타타타탓.
"자, 먹어."
다람쥐가 진짜로 감을 내 앞에 가져다줬다.
말이… 통한다.
환청이 아니었어?
내가 미친 게 아니었어?
내 앞에 놓인 감.
이건 진짜다.
"왜 안 먹어? 먹어도 돼."
난 감을 한 손으로 들어 입으로 가져다 댔다.
달다.
달아.
정말 달아서 눈물이 또 찔끔 났다.
"난 자연이라고 해."
다람쥐가 자신을 소개했다.
"자, 자연?"
"응, 난 자연이야. 너는?"
다람쥐와 통성명이라.
휴우, 해야지.
행운석이 이번에 나를 데리고 온 곳은, 정말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신비로운 세상이다.
"나태한이라고 해."
"인간 맞지?"
"응."
"신기하다. 인간은 처음 봐."
"나도 말하는 다람쥐는 처음 봐."
"안녕, 나는 자연이라고 해."
다람쥐가 아니다.
나무, 감나무다.
다람쥐까지는 이해하겠다.
그런데 나무가?
너무 놀라 대꾸할 수 없었다.
"놀랄 필요 없어. 나는 자연이야. 반가워, 태한아. 그리고 배고프면 언제든 내 감을 따 먹어. 살살 따 주기만 하면 돼. 자연이가 설명한 대로, 사랑하는 연인의 볼을 쓰다듬듯 그렇게 부드럽게."
"다람쥐하고 이름이 같네?"
"안녕, 태한아. 어흥. 나는 자연이라고 해."
사자다.
"안녕. 꼬꼬. 나는 자연이라고 해."
닭이다.
"컹컹. 나는 자연이야. 반가워, 태한아."
이번엔 원숭이.
그리고 돼지, 늑대, 개, 코끼리, 앵무새, 칠면조, 꿩, 뱀, 쥐까지.
모두 이름이 자연이다.
* * *
"자연아, 알지? 고통 없이 한 방에."
오리가 사자에게 머리를 들이밀며 태연하게 말했다.
"응, 걱정 마.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이에 대답하는 사자도 태연하긴 마찬가지다.
그러더니.
퉁!
앞발로 냅다 오리의 머리를 쳐 버렸다.
즉사다.
수백 마리의 동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리는 그렇게 죽었다.
모두가 무덤덤하다.
"뭐 해? 오리고기 먹고 싶다며? 먹어, 태한아."
사자가 앞발로 죽은 오리, 그러니까 피투성이가 되어 축 늘어진 자연이를 내 앞으로 들이밀었다.
X팔!
이걸 어떻게 먹으라고!
미친놈들아!
한 시진 뒤.
화르르.
모닥불 위에 아까 죽은 자연이가 잘도 익어 간다.
한 입을 베어 물었는데.
맛이 기가 막히다.
"그런데 자연아, 정말 불 피워도 돼?"
옆에 있는 공작새 자연이가 답했다.
"안 될 건 뭐가 있어? 하고 싶은 대로 해."
두더지 자연이가 물었다.
"맛있어?"
"응, 엄청나게 맛있어. 쩝쩝."
"나중에 나도 먹고 싶으면 먹어."
X팔!
입맛이 뚝 떨어진다.
그래도 꾸역꾸역.
이게 몇 달 만에 먹는 고기인가.
난 그렇게 오리 자연이를 깨끗이 발라 먹었다.
* * *
자연이들과 대화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이젠 자연이들과 대화하는 게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냥 일상이다.
"자연아, 궁금한 게 있는데. 너는 어떻게 이곳에 있게 된 거야? 여긴 고려 땅으로 알고 있는데. 너도 그렇고, 사자 자연이, 코끼리 자연이, 악어 자연이 모두 원래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자연이들이잖아."
하마 자연이가 내 물음에 친절히 답을 해 줬다.
"예전에 동물원이라는 곳이 있었데. 인류가 멸망하기 전에. 우리를 가둬 놓고 구경하는 곳이라고 하더라고."
"음… 그곳에서 탈출한 거야?"
"인류가 멸망하며 대부분은 그곳에 갇혀 죽었는데, 몇몇이 살아남아 우리가 이 땅에 정착할 수 있게 됐어."
"춥지는 않아? 겨울에는 매우 춥잖아."
"네가 이곳에 왔을 때가 겨울이었어. 따뜻했잖아."
"이곳은 정말 지상 낙원이구나."
하마 자연이와 또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수백의 자연이들까지, 그냥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냥 미소가 아니다.
인류에 의해 망가져 버린 자연.
그로 인해 직접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건 아마도 이들 동물 자연이들일 테다.
신조라는 작가도 인류 멸망 보고서에 남기지 않았나.
수천 종, 수만 종의 동물들이 인간들 때문에 멸종했다고.
나를 향해 미소 짓고 있는 자연이들을 보며, 미안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고, 인류가 멸망한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맞다! 자연아. 내가 이곳에 온 첫날, 신조라는 작가가 쓴 인류 멸망 보고서가 들어 있던 가방. 너희가 일부러 나한테 굴려 보낸 거야?"
"응."
"아! 그랬구나."
"사실 우리도 네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고 깜짝 놀랐어. 분명 우리의 기억 속에 있는 인간의 모습인데. 인간은 분명 멸망했는데, 네가 나타나서. 또 우리 자연을 괴롭히는 게 아닌가 겁도 나고."
"이해해. 나도 인간이지만, 인간이 그토록 무서운 짓을 너희 자연에게 했다는 것에 막 가슴이 아팠고 지금도 아파."
"그래서 널 관찰했어. 반년 동안."
"역시 날 관찰했던 거였구나. 그런데 너희 연기 더럽게 못하더라. 큭큭."
"그랬어? 우린 아주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는데. 하하."
"짝짓기는 좀 많이 과했어. 어이! 거기, 토끼들! 너희 말하는 거야."
"태한아."
"응, 자연아."
"너는 참 착한 인간이더라."
"내가 원래 좀 착해."
"처음에는 얘가 좀 모자란 인간인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어. 착한 인간이었어."
"그래서 대화를 시작한 거야?"
"응, 너라면 우리가 마음을 열어도 된다고 생각했거든. 너라면 다시 우리 자연이 받아 줄 수 있다고 결정했어."
"누가?"
"내가."
"너만?"
"우리가 나고, 내가 우리야. 우리는 모두 자연이야."
"알아, 너희가 하나라는 거."
그렇다.
자연이들은 처음부터 하나였다.
나무가 사자고, 사자가 새였으며, 새가 뱀이며, 뱀이 풀이다.
사자는 오리를 죽여 나에게 줬지만, 이는 오리가 사자를 죽인 것이기도 하고, 다시 자연이 자연을 희생해 자연을 살리려는 순리의 이치가 담겨 있다.
사자와 오리는 처음부터 하나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자연의 섭리라 한다.
각기의 생명체지만, 또 그것이 하나의 유기체이기도 하며, 독립적이지만, 다시 자연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애초에 인간은 자연과 하나였는데, 인간이 자연을 죽였기에 인간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과도 같다.
자연과 나는 구분되지 않고, 하나다.
이는 무학(武學)과 『길평의경』에도 나오는 말이기도 하다.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이념이기도 하며, 이를 다시 무학에 빗대자면 신검합일의 이치와도 같… 음.
"자연아."
"응, 태한아."
"나 잠시……."
"그래, 얼마든지."
난 두 눈을 깊게 감았다.
* * *
[세상에 하찮은 생명은 없다. 단지, 이를 하찮게 여기는 교만한 인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신조의 마지막 글귀가 떠올랐다.
삼류 작가 따위의 말에서 절정의 깨달음을 얻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자연과 인사를 했다.
자연과 대화를 나눴다.
어느새 우리는 친구가 됐다.
친구가 됐다는 것은, 내가 그들을 하나의 소중한 생명으로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우리는 더 가까워졌고, 나는 자연스레 그들의 삶에 녹아들었다.
그러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정말, 정말로 놀라운 변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