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꼬르륵.
아! 젠장.
못 하겠다.
뱃가죽은 난리를 치는데, 도저히 저 맑은 눈의 사슴을 죽일 수 없었다.
그래서 옆으로… 닭이다.
닭고기가 먹고 싶다.
닭을……!
근데 닭이 왜 여기 있지?
모르겠다.
닭을 잡자!
닭고기를 먹자!
그렇게 녀석을 향해 대성검을 휘두르… 못 하겠다.
젠장할!
토끼도, 오리도, 돼지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조금도 경계하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보는데 어떻게 죽일 수 있냔 말이다!
결국.
척!
대성검을 다시 검집에 돌려놓아야 했다.
"운 좋은 줄 알아."
괜히 알아듣지도 못하는 동물들에게 한마디를 뱉은 후, 다시 걸었다.
사실 고기가 먹고 싶었던 것이지, 다른 먹을 게 없는 건 아니다.
먹을 것 천지다.
탐스러운 과일들이 곳곳에 매달려 있다.
문제는, 다 처음 보는 과일이라는 게 문제다.
"오! 저건 감하고 좀 비슷하게 생겼는데?"
진짜 굶어 죽을 것 같아 열나게 달렸다.
진짜 감이다.
아니, 완전한 감은 아닌데 그나마 감하고 비슷하게 생겼다.
이걸 먹으면 죽을까?
독이 들었으려나?
굶어 죽으나 독에 중독돼 죽으나!
모르겠다.
그렇게 감나무의 감을… 아!
이것도 못 하겠다.
독에 한두 번 당했어야지.
어쩌지?
난 감나무 아래에서 한참을 고심한 끝에.
결국…….
땅에 떨어져 반쯤 으깨진 감을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레 찔러, 맛을 봤다.
달다.
맛있다.
얼마나 맛있는지 눈물이 핑 돈다.
그래!
먹고 죽은 귀신 때깔도 곱다고 하지 않았나.
먹자.
차마 나무에 매달린 감을 따 먹을 용기는 없고.
땅에 떨어진 그 반쯤 으깨진 감을 깨끗한 부분만 주워서 입으로 직행.
정말, 정말로 맛있다.
그리고…….
혼절.
* * *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X팔! 나더러 어쩌라고!"
깨어났다.
깨어나자마자 괴성을 지르며 마구 욕지거리까지 했다.
난 정말 바보인가?
그렇게 당하고도 또 독에 당했다.
얼마나 혼절해 있었던 걸까?
아프고 뭐고를 떠나, 독에 계속 당하는 내 자신이 한심스러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댄 것이다.
덕분에 내 주위에… 어라?
이젠 50마리가 넘네?
도대체 얼마나 혼절해 있었던 거야?
그냥 콱 잡아먹을까 보다.
아!
난 왜 이럴까?
계속 독에 당하고, 또 당하… 어?
혼절해서 깨어나고 한심한 자신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문득.
내 몸 상태를 확인하기도 전에 화와 짜증을 마구 냈는데.
몸이… 좋다.
그냥 가만히 있는데, 깃털이 된 것처럼 가볍다.
아니, 그냥 허공에 둥둥 뜨는 느낌이다.
이 느낌.
한 번 느껴 봤다.
실버 드래곤 히포네우스가 나를 환골탈태시켜 줄 때,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뭐야?
저 감… 영과였어?
난 멍한 정신으로 일어서 감나무를 살폈다.
떨어진 감도, 또 매달린 감도 보고 또 봤다.
영과는 아니다.
소인국의 대기나 그곳의 과일, 음식 등에 비한다면 이건 기의 응축이고 뭐고도 없을 미비한 수준이다.
그냥 내가 살던 중원의 것과 비슷한 양의 기운만을 머금고 있다.
그런데…….
아!
감이 머금고 있는 미약한 기운과 영양분이 정순하다.
대기와 같은 느낌이다.
그 무엇에도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의 결정체라고나 할까?
아니, 그게 맞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역시, 인간이 없기 때문인가?
이곳의 과일만 먹는다면, 모르긴 몰라도 나는 무공 없이도 수백 년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오랜 시간이 지나도 늙는 것을 넘어 젊어지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이곳의 모든 것들이 그렇게 정순하고 순수하다.
음, 난 그제야 다시 이곳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확실히 아름답다.
마치 설화에 나오는 무릉도원, 지상낙원, 극락, 뭐 이런 것들이 바로 이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인간은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망가뜨렸던 거였지?
모르겠다.
* * *
혼절에서 깨어난 후 이곳에서의 생활 방식을 바꾸었다.
온종일 걷던 걸음을, 하루 한 시진으로 줄였다.
그냥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걷는다.
그래도 있을지 모를 사람을 찾는다기보다는, 산책의 개념이다.
이곳의 자연을 느끼고 싶은 욕망이 컸다.
자연과 함께하는 산책.
좋았다.
걸음을 멈추고 싶지 않을 정도로 이곳에서의 산책은 좋았다.
그다음에는 『길평의경』을 읽었다.
초경(初經)을 보았는데, 대부분 아는 내용이었다.
탈혼독 도적 떼들에게 인질로 잡혔을 때, 이시초와 탁치행에게서 배웠던 내용이 고스란히 그곳에 기록되어 있었다.
거의 복습의 개념으로 『길평의경』의 초경을 훑어보았고, 나는 곧바로 『길평의경』의 치경(治經)으로 넘어갔다.
어렵다.
그것도 많이.
아주 많이.
오후에는 무공 수련을 했다.
낙백구검, 타구봉법, 미인국에서 얻은 세 가지 절초까지.
그리고 밤이 되면 운기조식을 했다.
이곳에서 나에게 위해를 가할 존재가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
마음 놓고 운기조식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운기조식을 할 때마다 황홀경에 빠져들고 만다.
너무 좋아서 몇 번은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운기조식을 했고, 3일 내내 운기조식만 한 일도 있었다.
신기한 일이다.
그래도 멈추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서 운기조식을 통해 느끼는 자연은 그런 느낌이었다.
사실 다 때려치우고 정말 운기조식만 할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만큼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1년이 지나 무림으로 돌아가면.
곧바로 밀독왕과 싸워야 한다.
독으로 화경의 경지에 오른 어마어마한 고수다.
그리고 현재 이곳에서 나를 도와줄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사람 자체가 없다.
1년 동안 나 혼자 이를 이루어 내야 한다.
그래서 더 처절하게, 또 처절하게 무공을 수련하고 의경을 익혔다.
약선 길평도, 또 평리의각의 이시초도 같은 말을 하지 않았겠나?
내 의술의 경지가 올라갈수록, 무공의 경지 또한 상승한다고.
심지어 상대는 밀독왕이다.
『길평의경』이 나에게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라는 확신에, 나는 더 집중적으로 『길평의경』의 치경을 익혔다.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석 달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석 달이 지났다.
이곳에 온 지 반년이 훌쩍 지나가 버린 것이다.
그리고 반년 동안 나는, 땅에 떨어진 과일과 물만 먹었다.
불은 피우지 않았고, 피울 필요도 없었다.
땅에 떨어진 과일조차 최소한의 양만 먹었다.
이곳의 자연이 나에게 정순한 기운을 계속 북돋아 줬기에, 나도 이곳의 그 상태를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 코끼리를 보았다.
얼마 전에는 사자도 봤는데, 대한민국이 고려 땅이 아니었나?
어떻게 코끼리와 사자가 이곳에 있지?
며칠 뒤에는 기린도 봤다.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신기한 건 신기한 거고, 나는 갈 길이 바쁘다.
모든 것이 아름답고, 순수하며, 평화롭기 그지없는 세상이지만.
나 홀로 치열하다.
운기조식에 대한 욕망은 시간이 갈수록 커졌다.
나중에는 내가 그 욕망을 억제하기 힘들어질 정도였다.
결국!
나는 무공 수련하는 시간을 포기하고, 그 시간에 운기조식을 했다.
『길평의경』의 치경은 이미 몇 번을 읽고 또 읽고 계속 읽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너무 어렵다.
어찌 아니겠는가?
치경을 대성하면, 그 경지가 약선의 근처에 다다를 수 있다고 했는데 말이다.
내가 천재도 아니고.
몇 달 봤다고 그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는가?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이해가 안 되도 물어볼 사람도 없고.
읽고, 또 읽고, 계속 읽고.
* * *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1년이 되려면 얼마나 남았지?
모르겠다.
요즘은 『길평의경』까지 손에서 놓고 온종일 운기조식에만 몰두하고 있다.
이를 통해 밀독왕을 상대할 수 있을까?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기적?
반전?
응, 그런 거 없다.
사실 내 몸에 엄청난 변화가 있는 건 사실이다.
마치 갓 태어난 아이와 같다고 할까?
아니, 그보다 더 깨끗한 몸이 되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곳의 정순한 자연과 내가 어느 정도 동화된 느낌이다.
그래서 무슨 깨달음이나 무공의 상승 이런 거 없냐고?
응, 없다.
오히려 무공이 퇴보된 느낌이다.
꼬르륵.
그 와중에도 배는 계속 고프다.
음, 그러고 보니 며칠 동안 계속 물만 마셨다.
그래서 더 허기가 지는 모양이다.
물만 마셨던 이유는 땅에 떨어진 과일을 내가 모두 먹었기 때문이다.
운기조식이 더 하고 싶어서, 다른 장소로 가는 시간도 아까웠고.
이러다 거지가 아니라 도사가 되겠다.
어쩌면 이곳에서 우화등선할지도 모르겠다.
꼬르륵.
또 뱃가죽이 노래를 부르네.
가부좌를 풀지 않고 앉은 상태로, 슬쩍 위를 올려다봤다.
탐스러운 과일이 주렁주렁 참 많이도 열렸다.
일어나기 귀찮네.
누가 좀 따 줬으면 좋겠다.
주위를 둘러봤다.
가까운 곳부터 저 먼 곳까지.
어느새 내 주변에 몰려든 동물들은 수백 마리나 되었다.
"야!"
소리를 질렀다.
풀을 뜯던 녀석, 싸움을 하던 녀석, 뜀박질을 하던 녀석, 그리고 아놔! 저 새끼들은 왜 또 짝짓기를 여기서 하는 거야?
아무튼 내가 소리를 지르자, 수백 마리에 달하는 동물들이 하던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누가 저기 나무에 열린 감 좀 따 줘."
소리를 한번 크게 질러 봤다.
그리고 한참이나 혼자 실없이 웃었다.
"큭큭큭. 아! 나도 미친놈이다. 너무 혼자 오랫동안 여기에 있어서 그런가? 하하."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다.
멀뚱멀뚱 나를 가만히 보는가 싶더니, 풀을 뜯던 놈들은 다시 풀을 뜯고, 싸움하던 녀석들은 다시 싸움을 하고.
야! 너네는 짝짓기 좀 다른 데 가서 하라고!
아놔! 저 자식들을 그냥.
꼬르륵.
배가 너무 고프다.
귀찮지만 일어나 직접 과일을 따 먹어야겠다.
몇 달이 지나는 동안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다.
이곳의 과일은 물론 다른 풀이나 나무 그러한 모든 것들.
아니,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양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순수한 기운이며 또 순수한 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게 우스운 일이다.
내가 이를 받아들이고 소화하면 더없이 훌륭한 영양분이 되는데, 다시 이를 거부하고 소화하지 못하면 더없이 치명적인 독이 된다는 사실이다.
사실 만물의 이치가 그러하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고, 태양이 강하면 그늘도 짙어지는 법.
뭐, 이게 무슨 엄청난 깨달음이 되고 다시 무공에 또 어떠한 상승 작용으로 이어지고, 그런 건 없다.
그냥 이곳에서 체득하고 깨달은 정보일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무공에 조금도 도움이 안 된다.
그나저나 큰일이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도 모르겠는데, 무공은 아예 물 건너갔고, 『길평의경』도 손에서 놨으니 말이다.
감 하나만 따 먹고 『길평의경』이라도 다시 봐야겠다.
그래야 밀독왕을 상대할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지 않겠나.
그렇게 결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샤샤샤샤샥.
뭔가의 움직임에 얼른 고개를 들어 위를 봤더니.
다람쥐다.
다람쥐가 감나무 위에 올라갔다.
가장 탐스럽게 익은 감 바로 앞에 멈추어 서더니, 나와 감을 연신 번갈아 본다.
설, 설마……?
꿀꺽.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한 번 삼킨 후.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어?"
고개를 갸우뚱하는 다람쥐.
알아듣는 건가?
"그래, 그거야. 감. 감을 좀 따 줘. 배가 너무 고파."
소통이다.
열랑, 청안과 그랬듯.
이곳의 동물들과도 소통할 수 있다.
이미 내 몸이 느끼고 있지 않았나?
이곳의 자연에 일부분 동화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건 이곳의 동물들과도 소통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할 수 있다!
갑자기 온몸에 희열이 느껴졌다.
"그래, 착하지. 다람쥐야, 다람쥐야. 나에게 감 하나만 따 주지 않을래?"
다시 고개를 갸우뚱하는 다람쥐.
하지만 이는 잠시.
다람쥐가 그 탐스럽게 잘 익은 감의 꼭지를 양손으로 잡는다.
다시 그것을 이빨로 갉기 시작했다.
통한다!
내 뜻이 다람쥐에게 전해진 것이다.
결국 다람쥐는 그 감을 깔끔하게 따서… 타타타타탓!
잽싸게 저 멀리 달아나 버렸다.
"젠장!"
빌어먹을 다람쥐 새끼.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왜 하필 여기까지 와서 감을 따 먹고 지랄이야!
속으로 마구 욕을 했다.
결국, 나는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을 쭉 뻗었는데.
아! 손이 닿질 않는다.
올라가려니 감나무 가지가 너무 비실비실해 보여 부러질 것 같고.
결국 슬쩍 다리에 힘을 쥐고.
펄쩍 뛰어 감나무에 열린 감을 땄다.
"아얏!"
내가 아니다.
내가 낸 소리가 아닌데?
누구지?
순간, 온몸의 털이 죄다 일어섰다.
기감까지 풀어 주위를 경계하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고.
기감으로 또 눈으로, 다시 귀로.
사방을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환청을 들었나?
아니다.
분명 들었는데.
심장이 두근두근.
꿀꺽.
마른침을 나도 모르게 살피고.
X팔!
뭐냐고!
움직일 수가 없다.
이곳, 이 세상!
행운석이 나를 이곳에 보낸 이유를 깨달았다.
귀신… 젠장할!
귀신을 만나게 해 주려고 보낸 거다.
왜?
나, 귀신 싫다고!
나는 무려 한 식경이나 그렇게 선 상태로 얼어붙어 꼼짝도… 한 식경이 지나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
환청이었나 보다.
정말 너무 오랫동안 혼자 있어서 순간 살짝 미쳤던 게 맞다.
세상천지에 귀신이 어디 있다고.
꼬르륵.
그제야 배고픔이 다시 몰려왔고, 나는 허겁지겁 조금 전에 땄던 감을 해치워 버렸다.
음, 그런데 놀라서 그런가?
감 하나를 다 먹었는데도 허기가 가시지 않는다.
나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펄쩍 뛰어, 잘 익은 감 하나를 땄다.
"아얏! 아프다고."
귀, 귀신이다.
이번엔 진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