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인류 멸망 보고서]
[(상략)
모든 것은, 바람이 불어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중략)
2043년, 지구의 인구는 99억 명을 넘어 100억 명의 시대에 진입하였다.
과학 기술은 신의 영역에 접근하였다고 할 만큼 고도의 발전을 이루어 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인류의 삶은 윤택해져 갔지만, 지구는 피폐해져 갔다.
아니, 소수의 인류만이 윤택한 삶을 살아야 했고, 대다수의 인류는 지구와 함께 극심한 고난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국가 간에 더 심각해졌고, 고도의 문명사회를 이룩한 세계의 곳곳에서는 역설적으로 식량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은 굶어 죽어야 했지만, 부유한 나라에서는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지 못해 힘들어했다.
그래서 그들은 개발, 개발, 개발.
숲이 사라져 갔다.
북쪽의 대륙에서도, 남쪽의 대륙에서도.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선 숲이란 것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곳엔 인간들이 만들어 낸 공장들이 자리를 대신했다.
8년 전 지구상의 모든 고래가 멸종했다는 뉴스를 봤다.
이제 고래는 박물관에서 모형으로 봐야 하고, 돌고래는 동물원에서… 아! 이젠 못 본다.
인류가 멸망했으니, 박물관도 동물원도 없다.
(중략)
북극의 얼음이 모두 녹았다.
해수면이 상승했다.
세계의 섬들이 침몰했다.
8년 전, 일본이 침몰했을 때 8,000만 명이 넘는 난민이 우리나라로 넘어왔다.
일본이 침몰하기 전까지, 그들은 지난 과거에 대해 단 한 번도 진심 어린 사과를 하지 않았다.
세계는, 모든 것을 잃은 그들을 받아 주기를 꺼렸고.
그것이 아니라 하여도, 일본인들은 우리나라가 그들에게 가장 살기 좋은 나라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제야 우리에게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다.
우리는 그 사과의 진정성을 놓고 오래 고심하였다.
결국 우리는 그들을…….
(중략)
와타나베 녀석이 화장실 청소만큼은 꼼꼼하게 잘했는데.
다 지난 일이다.
바람이 불었고, 인류는 그렇게 멸망했다.
(중략)
사실 인류의 멸망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계속하여 간곡히 호소했다.
빙하가 해빙하였고, 서식지를 잃은 북극곰들은 남쪽으로 내려왔다.
붉은 곰, 회색 곰들과 교배하여 새로운 종의 곰들이 탄생했고, 북극곰은 사라졌다.
수백 년 주기로 찾아오던 전염병은 수십 년 주기가 됐고, 다시 수년에 한 번씩 발발하더니, 결국 코로나 이후 매년 또 계절마다 새로운 전염병이 창궐해 세상을 휩쓸었다.
지진, 화산 폭발, 토네이도, 가뭄, 화재, 장마.
화부단행(禍不單行)이라, 악재는 혼자 오지 않는다고 했다.
자연은, 지구는 우리에게 계속하여 그렇게 호소했다.
이를 우리가 보지 않고, 듣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결과는 끔찍했다.
바람이 불었다.
어느 날 불어온 바람에 사람들이 쓰러졌다.
전염병 따위가 아니었다.
손을 쓸 사이도 없이, 단 몇 초 만에 사람들은 그렇게 죽었다.
지구는 독을 내뿜기 시작했고, 그 독은 바람에 실려 인류를 멸망시켰다.
사람들이 죽자, 인류의 이기였던 도구들은 다시 화(禍)가 되어 인류에게 되돌아왔다.
세계 곳곳의 원자로가 폭발했고, 사람이 살던 모든 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다시 그것들은 자연이 내뿜은 독들과 하나가 되어 마지막 인류의 희망마저 앗아 갔다.
(중략)
미안하다, 지구에게.
미안하다, 자연에게.
작은 풀 한 포기라도, 우리 인류는 그것에 깃든 소중한 생명이 있음을 존중하지 못했다.
지구상의 마지막 인간으로서, 너에게 사과하마.
미안하다, 자연아.
(중략)
바람이 분다.
더는, 바람을 피하고 싶지 않다.
귓불을 스치는 느낌이 좋다.
바람에 머릿결이 흩날린다.
이런 느낌이었구나.
잊고 있었다.
바람이 어떤 느낌이었는지.
시원하다.
좋다.
오랜만에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웃음이겠지만, 시원하게 웃고 떠나겠노라.
잘 살아라, 지구야.
건강해라, 자연아.
인간들 때문에 더는 아프지 말고.
미안했고, 고마웠다.
세상에 하찮은 생명은 없다.
단지, 이를 하찮게 여기는 교만한 인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 신조, 2047년 어느 날]
* * *
"음……."
인류 멸망 보고서를 다 읽었다.
"음……."
그런데 말이다.
"음……."
인류의 마지막 인간 신조라는 작가 말이다.
"진짜 글씨 더럽게 못 쓰네."
정말이다.
행운석이 작동해서 처음 보는 문자지만 읽을 수 있었다.
아니, 읽을 수 있어야 했는데, 진짜 이건 내가 추론에 추론을 해서야 끝까지 읽을 수 있었을 정도의 악필(惡筆)이다.
발가락으로 글을 썼나?
뭔 놈의 작가가 글씨를 이렇게도 못 쓰지?
신조라는 삼류 작가는 글씨를 못 쓴다.
됐고.
주위를 둘러봤다.
착각이 아니었다.
수백 수천 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것 같은 주위의 풍경.
기감을 펼쳤다.
최대한 멀리 그렇게 기감을 펼쳐 감지했다.
그런데…….
없다.
진짜 아무도 없다.
뭐, 그래도 어딘가에는 있겠지.
행운석이 날 이곳으로 보낸 이유가 있을 테니까.
일단…….
밀림독선의 독부터 치료하자.
이러다 죽겠다.
주위에 위협이 될 만한 존재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고.
난 곧바로 가부좌를 틀어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 * *
꼬박 하루 동안 운기조식을 했다.
운기조식을 시작한 후 덜컥 겁이 났다.
공기 중에 독이 퍼져 있으면 어쩌나 싶은 생각이 그제야 든 것이다.
그런데 없었다.
독 따위는.
신조라는 작가가 거짓말을 한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았는데.
그렇게 계속 운기조식을 하며 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곳의 대기 말이다.
정순하다.
그냥 순수의 결정체라고 할 만큼 완벽하게 정순하다.
운기조식을 통해 자연의 기운을 끌어오고, 다시 내뱉고를 하루 내내 반복했는데.
일말의 탁기조차 느끼지 못했다.
어떻게 이렇게 정순한 기운이 있을까 싶어, 운기조식 중에 너무 놀라 내상을 입을 뻔했다.
그렇게 계속 운기를 하면 할수록, 나는 황홀감을 느낄 수 있었다.
소인국에서의 황홀감과는 다른 황홀감이다.
그곳의 대기는 엄청나게 높은 밀도의 기운을 머금고 있어서 나를 놀라고 황홀하게 했다면, 이곳의 대기는 말 그대로 정순함만으로 나를 그리 황홀하게 만든 것이다.
덕분에 독곡의 곡주 밀림독선 사연손이 나에게 중독시킨 독을 해독하는 일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또 한 가지 다행인 건.
운기조식을 통해 해독하며 깨달았는데, 사연손 이 인간이 정말로 나를 제자로 삼으려 했다는 것이다.
뭐, 다른 생각이 있었을 수도 있겠다.
최소한, 확실히 나를 죽이려고 하독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의 경지를 보아, 이렇게 쉽게 해독이 가능할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나는 딱 하루의 시간만으로도 완벽하게 그의 독을 모두 해독하고 체외로 배출할 수 있었다.
"캬아아."
다시 돌아온 정상의 몸.
아니, 그 이상이다.
이곳에서 운기조식을 하고 나니.
이전의 내 몸보다 훨씬 더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다.
그걸 넘어, 그냥 계속 운기조식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마구 샘솟았다.
이곳의 대기는 정말로 대단하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 있지. 설마 정말로 아무도 없으려고?"
난 자리를 털고 일어나 홀로 피식 웃은 후 발걸음을 떼었다.
사람을 찾기 위함이다.
당연히 있을 것이다.
사람이 있어야 뭐든 할 수 있고, 그것이 바로 행운석이 나를 이곳으로 보낸 이유일 테니까.
웬만하면 미인이었으면 좋겠는데.
일단 출발.
* * *
없다.
3일 동안 쉬지 않고 걸었다.
없다.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없었다.
아니, 있긴 있다.
아마도 수백 년 전?
수천 년 전?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있는데.
최근에 살았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이 정말 나와 같은 사람이었나 싶은 의심도 해 보았다.
믿기 힘들겠지만, 100층짜리 전각이 있다.
그곳에 꽃과 나무, 넝쿨이 가득했지만, 분명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전각이 분명했다.
아니, 사람이 저렇게 높은 건물을 짓는 게 가능해?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나는 3일 동안, 정말 믿기 힘든 많은 것들을 목격하고 보게 되었다.
정말 나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땅속에, 수레 수십 개를 연결한 줄줄이 마차 같은 게 있다.
이곳의 과거에선 그걸 지하철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진짜다.
마차가 줄줄이 사탕처럼 엮여 땅속으로 다녔단다.
자동차라는 것도 있고, 오토바이라는 것도.
진짠데.
비행기는 말하지 않겠다.
나를 거짓말쟁이가 아니라 미친놈이라 생각할 수 있으니 넘어가겠다.
뭐, 그 모든 것에 풀과 나무가 자라고 꽃을 피웠다.
"음… 정말로 사람들이 저런 걸 입고 다녔다고?"
포목점이다.
옷을 파는 포목점인데, 여성들의 옷만 전문적으로 팔았던 포목점 같다.
사람과 거의 흡사한 인형이 여럿 서 있는데, 입고 있는 옷이.
아! 좋다.
아니, 어험.
짧다.
가끔 짧다와 좋다는 같은 의미로 사용… 어험.
이곳의 인류가 멸망하기 전에 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진한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다시 이틀을 더 걸었고.
또 사흘을 더 걸었다.
도읍의 중심지에 아주 오래전 인류가 살았던 흔적들이 있고.
도심 외곽에도 꽤 많은 흔적이 남아 있긴 하다.
하지만 최근의 것은 없다.
기감을 계속 극대화하여 찾았지만, 사람은 감지되지 않았다.
그렇게 열흘이 되었을 때.
나는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정말 없나?
인류는 정말 멸망한 것인가?
행운석은 왜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이지?
아!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그리고 그때.
꼬르륵.
뱃가죽이 진동했다.
주위를 둘러봤다.
내가 이곳에 온 첫날.
작은 새 한 마리와 이름 모를 작은 짐승 한 마리가 보였다.
이틀째 되던 날 그것은 다섯 마리로 늘었고.
열흘이 되는 오늘, 주위를 둘러보니 서른 마리가 넘는 크고 작은 동물들이 내 주변에 있었다.
설렁설렁 따라오며 나를 지켜보고 있는데.
내가 고개를 돌려 녀석들을 보면, 이것들이 갑자기 풀을 뜯기도 하고 먼 산을 보기도 하며 딴청을 피운다.
더럽게 연기를 못한다.
감시하는 건가?
내가 미쳤나?
동물들이 왜 나를 감시해?
꼬르륵.
아! 젠장!
배고프다.
열흘 동안 물만 마셨다.
내가 정말 바보 천치같이 계속 독에 당하지 않았겠나.
그래서 조심하려고 아무것도 안 먹었다.
인류가 독에 멸종당했다는데, 어떻게 아무거나 막 먹겠냔 말이다.
그렇게 열흘 동안 물만 마셨는데, 이젠 한계다.
고기, 고기가 먹고 싶다.
주위에는 서른 마리가 넘는… 아! 저 토끼 정말 맛있겠다.
저 사슴도 맛있겠고.
사냥, 해야겠다.
성큼성큼.
그냥 다가갔다.
열흘 동안 안 사실인데, 얘들은 나를 조금도 경계하지 않는다.
정말 인간이 없기 때문이리라.
인간을 본 적 없기 때문에, 인간이 자신들의 천적인 것을 모른다.
내가 그렇게 성큼성큼 걸어서 다가가자, 사냥감으로 지목당한 사슴 녀석과 그 주위에 있던 녀석들이 곧바로 딴청을 피운다.
풀을 뜯기도 하고.
다른 동물들과 싸움도 하고.
저 새끼… 저 새끼들은 왜 여기서 짝짓기를 하는데?
그것도 갑자기.
무시하고.
사슴 녀석 바로 앞에 왔다.
풀을 뜯는 척하다가, 내가 바로 한 걸음 앞까지 다가오자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멀뚱멀뚱.
눈을 껌뻑거리며 나를 보는데.
눈이 참 예쁘다.
꼬르륵.
하지만 내 뱃가죽이 먼저다.
등에 달라붙었다.
미안하다, 사슴아.
지금 배가 너무 고프다.
난 대성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는 사슴 녀석은 무슨 상황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
스르릉.
대성검을 뽑아 치켜들었다.
여전히 눈만 깜빡이며 날 쳐다보는 사슴.
그래, 차라리 모르고 죽는 게 낫다.
고통 없이 보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