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크아아아아아앙!
열랑이다.
열랑이 어떻게 이곳에?
천 리의 냄새를 맡는다고 했지.
우리를 따라온 모양이다.
덕분에.
투투투투투투투투퉁.
열랑이 갑작스레 나타나 무리의 가장 후미에 있던 녀석을 공격하자, 붉은 코뿔소 무리가 흥분해 그쪽으로 일제히 거대한 파동을 일으키며 진격했다.
아마도 나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녀석들을 죽이지 않기 위한 나의 배려가, 그들을 안심하게 했을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열랑은 아니었다.
죽을 각오를 머금고, 최선을 다해 붉은 코뿔소 한 마리를 덮친 것이다.
녀석이 위험하지만, 유일한 기회였다.
난 열랑을 향해 달려가는 가장 뒤의 붉은 코뿔소 한 마리를 빠르게 쫓았고.
곧바로 몸을 날렸다.
대성검에 검기가 아닌 검강이 치솟았고.
타타타탓!
다시 붉은 코뿔소의 등을 밝고 도약함과 동시에.
쉬이이이이이이이익!
녀석의 뿔을 절반이나 잘랐다.
"열랑! 도망쳐! 뿔 얻었어! 도망! 도망!"
땅에 떨어진 뿔을 집자마자 열랑에게 외쳤고.
처음에는 용맹하게 붉은 코뿔소에게 달려들었다가, 자신을 향해 우르르 몰려드는 녀석들을 보며 그렇지 않아도 꼬리를 다리 사이로 만 녀석이 냅다 튀기 시작했다.
깨개개개갱. 깨개개개갱!
괴성까지 지르며 죽을힘을 다해 튀는 녀석이었다.
다행히 열랑이 붉은 코뿔소들보다 훨씬 빨랐다.
"청안!"
내가 하늘을 향해 외쳤고.
내 외침이 있기 전부터 청안은 이미 급하강을 하고 있었다.
나는 땅을 달리고, 다시 커다란 나무를 밟으며 하늘로 도약!
허공을 멋지게 가르며 청안의 등으로… 어?
쉬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땅에서 갑작스레 화살 비가 솟구쳤다.
나와 청안을 향한 화살 비는 순식간에 허공을 새까맣게 물들일 정도였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앙!
"으아아아악!"
투투투투투투투투투퉁.
쾅!
콰콰콰콰콰콰쾅!
"으아아아아아악!"
땅은 이미 지옥으로 변해 버렸다.
밀독궁의 병사들과 열랑, 거기에 더해 붉은 코뿔소 무리까지 한데 얽히고설켜 난전을 벌이고 있다.
난 전력을 다해 허공에 뜬 상태로 대성검을 휘둘렀다.
엄청난 강기가 사방으로 뿜어져 화살의 비를 막았다.
하지만, 그 양이 너무 많았다.
푹!
푸푸푸푹!
끼아아아아앙!
청안이 다섯 발의 화살을 맞고 땅으로 추락하였다.
나도 곧바로 몸을 일직선으로 접어 땅으로 몸을 틀었다.
청안이 땅에 곤두박질치기 전, 녀석을 있는 힘껏 잡았고.
쿠우우우웅.
최대한 충격을 줄여 땅에 착지할 수 있었다.
"공주님!"
"전… 전 괜찮아요. 하지만 청안이……."
청안의 상태를 빠르게 살폈다.
다섯 발의 화살이 청안의 몸 곳곳에 꽂혔다.
즉사하지 않았고 날갯짓도 하며 움직일 수는 있다.
하지만 출혈이 심각하다.
혈도… 동물과 인간의 혈도는 다르다.
어떻게 지혈을 해야 하지?
빠르게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
하지만 도저히 모르겠다.
크아아아아아아앙! 크아아아아앙!
"으아아아아악!"
투투투투투투투퉁.
투투투투투투투퉁.
콰콰콰콰쾅!
퍼퍼퍼퍼퍼퍼펑!
쿠르르르르르릉.
가까운 곳에서 성난 열랑의 울부짖음이 들려온다.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음이 고스란히 내 귀로 전해진다.
열랑도 구해야 한다.
화살의 양을 봤을 때, 적들은 최소한 수백, 아니 수천 명이다.
청안도 구해야 하고.
빠르게!
어떻게 처치해야 하지?
휘르르르.
청안이 입을 열며 이상한 소리를 내는데.
젠장!
중독이다!
독화살이었어.
상황이 더 급박해졌다.
출혈뿐만 아니라 독이 퍼지는 것까지 막아야 한다.
그래야 청안을 살릴 수 있는데.
크아아아아아아앙!
열랑의 성난 울부짖음은 더욱 거세어지고.
화살을 뽑으면 출혈의 양은 더 많아져서 안 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열랑을 구하러 가세요. 청안은 제가 돌볼게요."
"하지만……."
보파 공주의 말에 내가 입을 여는 순간.
그녀의 손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엄청난 열기가 그녀의 손에서 솟구쳤다.
태양신공이다.
"상처는 남겠지만, 지혈을 하고 임시로 독을 막을 수 있어요. 저에게 맡기시고, 열랑을 구해 주세요. 반 왕자님의 단짝이잖아요."
난 그녀에게 고개를 힘주어 끄덕인 후 곧바로 몸을 날렸다.
다른 방법이 없다.
그녀를 믿는 수밖에.
전력을 다해 달렸다.
곧 내 눈앞에 지옥이 펼쳐졌다.
적들은 이곳에 붉은 코뿔소 무리가 있는 줄 몰랐던 모양이다.
우리를 향해 화살을 날렸고.
마침 열랑이 도주한 방향이 그쪽이었다.
아니다.
열랑은 이미 놈들의 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밀독궁 놈들.
그들을 죽이기 위해 뛰어들었고, 거기에 열랑을 쫓던 붉은 코뿔소 떼가 덩달아 가세해 난전이 펼쳐진 거다.
2,000명가량의 적들.
아마 태양궁의 공주를 잡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테고, 다시 이를 놓쳤다는 사실을 깨달아 2,000명에 달하는 병사들을 보낸 것일 테다.
"으아아아아악!"
"끄아아아악!"
투투투투투투퉁!
투투투투투투퉁!
콰콰콰콰콰쾅!
크아아앙! 으르르렁!
붉은 코뿔소 떼는 무자비했다.
독을 제조하기 위해 수백 년 동안 자신의 동족을 죽인 밀독궁 놈들에게 복수를 하는 듯했다.
열랑 역시 미친 듯 날뛰며 적들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절반가량의 밀독궁 놈들이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고깃덩어리가 되어 사방에 뿌려진 상태였다.
나도 곧바로 가세했다.
쉬이이이이이익!
몸을 날렸고.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적들이 밀집한 곳을 향해 검강을 아낌없이 날렸다.
"끄아아아악!"
"후퇴! 으아악!"
끔찍한 난전은 한 식경이나 이어졌다.
적들은 붉은 코뿔소 떼와 열랑에게 갇혀 도망도 갈 수 없었다.
나 역시 한 놈도 고이 보내 줄 마음이 없었다.
그렇게 나와 열랑 그리고 붉은 코뿔소 떼는 마지막 한 명의 숨통까지 기어이 끊어 놓은 후에야 거친 숨을 내뱉으며 움직임을 멈출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거… 아!
분위기가 싸하다.
적들이 모두 죽자.
붉은 코뿔소 떼가 한데 뭉쳐 나와 열랑을 노려본다.
어쩌지?
"저… 저기요. 혹시 제가 하는 말 알아들으세요?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코뿔소 형님들의 뿔이 꼭 필요했거든요."
푸르르릅!
선두에선 대장 붉은 코뿔소가 성난 콧김을 내뿜는다.
못 알아듣는 건가?
그냥 튈까?
청안과 보파 공주는 어쩌고?
아! 젠장.
"코뿔소 형님들.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은혜는 꼭 갚거든요."
푸르르릅!
"정말입니다, 코뿔소 형님들. 약속할게요. 이 뿔, 제가 가져가게 해 주신다면, 제가 기필코 코뿔소 형님들의 원수. 저 밀독궁 놈들 100명의 숨통을 끊어 복수해 드리겠습니다. 맹세합니다."
내 말에 미동도 하지 않는 코뿔소들.
여전히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나와 열랑을 어떻게 으깨 버릴지 노려보는 것 같다.
그런데 그때.
쿵.
쿵.
쿵.
붉은 코뿔소 무리 사이로 한 마리가 나섰다.
나에게 뿔의 절반이 잘린 그 코뿔소다.
그리고 녀석은, 선두에 있던 대장 코뿔소로 보이는 녀석의 목덜미를 자신의 머리로 퉁퉁 쳤다.
이내.
투르르르. 투르르르르릅!
대장 코뿔소가 거센 투레질을 하는가 싶더니.
붉은 코뿔소 무리를 이끌고 밀림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휴우. 죽을 뻔했네. 하아아아."
털썩.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열랑 이 녀석도 많이 쫄았나 보다.
아까의 그 성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맥이 쭉 빠져 바닥에 널브러졌는데, 얼마나 무서웠는지 동공까지 풀려 있었다.
그나저나 이 녀석도 많이 다쳤네.
온몸이 칼에 난도질당한 상처를 입어 피를 흘리고 있다.
중독됐을 텐데.
그때 수풀을 헤치며 무언가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보파 공주와… 어라?
청안이다.
"공주님, 괜찮으세요?"
"제가 물을 말이에요. 나 대협께서는 괜찮으세요?"
"네, 저는 괜찮습니다. 열랑이 다치긴 했는데, 상세를 좀 봐야 할 것 같아요. 칼에 베인 상처보다 독이 걱정이네요."
"열랑은 독에 면역이 있어요. 밀독궁의 최고수들이 뿌리는 독이 아니라면, 웬만한 독에는 중독되지 않아요. 야수궁의 대부분 영물이 그래요."
"청안은요?"
"청안도 응급처치는 했는데. 아직 성체가 아니어서 독을 완전히 억제하지는 못해요. 응급처치는 응급처치일 뿐, 빠르게 치료해야 해요."
"날 수 있나요?"
"우리를 태우지는 못할 거예요. 지금 상태가 안 좋아 태울 수도 없지만, 만약에 태운다고 하면 독이 금세 퍼져 죽게 될 거예요."
내가 청안에게 다가갔다.
"청안."
휘잉.
"혼자 갈 수 있어?"
휘잉. 휘이이잉.
녀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꼭 가야 해. 살아남아야 한다고. 약속할 수 있어?"
다시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휘이잉. 휭! 휭!
나는 팔을 쭉 뻗어 녀석의 목덜미를 몇 번이고 계속 쓰다듬어 주었다.
"그럼 이제 가! 우리도 최대한 빨리 야수궁으로 뒤따라갈 테니까. 먼저 가서 치료 잘하고 있어. 알았지?"
휘위이잉. 휘이이잉!
녀석이 고개를 숙여 내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비벼 댄다.
"그래! 어서 가, 청안! 고마웠어."
곧, 청안이 거대한 날개를 펼쳤다.
다섯 개의 화살이 몸에 꽂힌 상태라 녀석도 상당히 아팠을 것이다.
하지만 청안은 곧 엄청난 바람을 일으키며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그렇게 청안이 먼저 야수궁으로 떠났다.
"열랑 상태를 좀 살펴봐야겠습니다."
잠시 열랑의 상태를 살폈다.
확실히 영물은 영물이다.
또 보파 공주의 말이 맞는 듯했다.
세심하게 살폈지만, 상처 외에 중독 증상은 보이지 않았다.
"움직일 수 있겠어?"
보파 공주가 태양신공으로 열랑의 출혈을 멈춘 후 내가 물었다.
크르르르렁.
"뭔 소리야? 움직일 수 있겠냐고?"
크르르르렁.
"아!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업어 줘?"
당연히 불가능하다.
번쩍 들고 가야 하나?
녀석이 많이 불편할 텐데.
"괜찮다는 것 같은데요?"
"네? 보파 공주님께서는 열랑의 말을 알아들으세요?"
"아니요, 그런데 그냥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요. 안 그래, 열랑?"
보파 공주가 그리 묻자, 열랑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조금 전 청안이 내게 그랬듯, 보파 공주의 얼굴에 자신의 머리를 들이밀어 비벼 대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열랑이 크게 다치지 않아서.
"그럼 움직이자. 적들이 또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니까. 공주님도 괜찮죠?"
"나 대협."
"네, 공주님."
"죄송해요."
"네? 그게 무슨……?"
"저들이 이렇게 많은 병사를 보낸 건, 아마도 저 때문일 거예요. 저만 없었다면 나 대협이 이런 상황에 처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죄송해요."
"은혜예요."
"네?"
"반후인에게 또 야수궁에 큰 은혜를 입었어요. 이걸 어떻게 갚아야 하나 고민하고만 있었는데. 공주님을 안전하게 모시고 가면 반후인 녀석에게 받은 은혜는 대충 다 갚는 게 되잖아요. 그러니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받은 게 있어서 갚는 것이니까요."
그녀가 미안해하면서도 옅은 미소를 짓는다.
반후인 녀석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반할 만큼 아름다운 미소다.
"가죠. 미안하고 고맙고 뭐고, 그건 나중에 살아남은 후에 다시 이야기해요."
"네, 대협."
"가자, 열랑!"
으르렁.
우리는 곧바로 끔찍한 현장을 벗어나 야수궁이 있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 * *
야수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움직인 지 1각(15분)이나 됐을까?
밀림의 한가운데.
그곳에서 또 다른 사람.
중원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고작 세 명이었고, 죄다 머리며 수염이며 허연 노인네들이었다.
"태양궁의 계집이 사라졌다고 하더니, 여기에 있었군. 그런데 넌 뭐냐? 중원의 옷을 보니… 중원 사람이냐?"
"누구…신가요?"
"내가 먼저 물었다."
"나태한이라고 합니다. 중원에서 왔습니다."
"사문은?"
"개방의 방도입니다."
"거지새끼가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여기까지 왔냐?"
"그런 선배님들께서는……?"
"이미 눈치채지 않았어? 우리가 독곡의 후예라는 사실을. 그리고 네가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까지 말이야. 하하하하!"
고작 세 명?
고작 세 명이 아니라, 무려 세 명이다.
오직 독으로, 내가 감히 그 경지를 짐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독공의 고수가 무려 셋이나 되었다.
엿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