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내가 이기적인가?
난 나쁜 놈인가?
나를 위해 목숨을 건 반후인.
지금도 죽어 가고 있는 녀석을 보면서 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곳 야수궁의 의원들이 말했다.
반후인은 살아날 수 없다고.
얄팍한 의술이지만, 내가 직접 반후인의 상태를 보았다.
역시나다.
잘해야 한 달을 버틸 수 있을 뿐.
오늘 밤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하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다.
화타가 살아난다면 반후인을 살릴 수 있을까?
그건 모르겠다.
약선이라면?
역시 장담할 수 없다.
반후인은 죽는다.
기정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죽는 이유는, 나 때문이다.
나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죽는 것이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겠는가?
그를 위해 복수해야 하나?
그럼 탈혼독 때문에 지금도 죽어 가고 있는 중원의 무고한 백성들은?
날 이기적이고 나쁜 놈이라고 욕해도 좋다.
손가락질하고, 저주를 퍼부어라.
반후인에게는 나중에 저승에 가서 무릎을 꿇고 사과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붉은 코뿔소의 뿔을 얻어야 한다.
내일 아침 출발할 생각이다.
그렇게 결심했는데.
이를 악물고 그리하기로 했는데.
이 빌어먹을 늑대 새끼.
열랑이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내 곁에 다가왔다.
혼자 있고 싶어서 일부러 인적이 없는 곳에 나와 멍하게 반대편 산을 보고 있는데.
말라붙은 피가 온몸에 덕지덕지한 열랑 녀석이 말이다.
으르렁거리지도 않고.
내 엉덩이를 물지도 않고.
그냥 절뚝거리며 다가와 조용히 내 곁에 앉아 함께 맞은편 산을 바라본다.
힘이 빠져 축 처진 녀석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 * *
그들이 전쟁에서 패배한 이유를 간신히 물어 들을 수 있었다.
작전은 완벽했다고 한다.
작은 동물들이 정찰을 했고.
적들의 위치는 물론 수와 전력까지 완벽하게 파악했다.
또한 밀독궁의 적들이 불리한 지형으로 이동한 것까지 확인하였고, 은밀히 그들을 포위하였다고 했다.
공격만이 남았고, 야심한 밤을 기다렸다.
이제 그들을 치기만 하면, 말 그대로 300년간 이어졌던 이 지겨운 전쟁의 전환점을 맞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때.
밀독궁의 적들을 노리는 건 야수궁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같은 상황을 노리던 태양궁의 군대와 맞닥뜨린 것이다.
같은 적을 둔 야수궁과 태양궁.
합심하여 싸웠다면, 전환점이 아니라 그냥 밀독궁을 이 땅에서 지워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둘은.
힘을 합치는 대신.
서로 싸웠다.
300년 동안 이어져 온 서로에 대한 증오는 그들의 뼈와 영혼 깊숙한 곳에 스며들어 있었고.
이성은 그들을 뜯어말렸지만, 그들의 감정이 칼을 빼 들게 했다.
야수궁과 태양궁은 그렇게 적들을 코앞에 두고 전면전을 펼친 것이다.
야수왕과 태양왕이 서로를 죽이겠다며 목숨을 걸고 싸웠고.
야수궁과 태양궁의 전사들 역시 가족과 전우들의 원수를 갚겠다며 칼을 휘둘렀다.
결과는 며칠 전 내가 본 그 모습 그대로였다.
양패구상.
야수궁과 태양궁은 공동의 적인 밀독궁이 빤히 지켜보는 가운데, 전력의 절반 이상을 잃고 퇴군하여야 했다.
답답하고.
안타깝고.
화도 나고.
야수궁과 태양궁을 화해시키고 싶지만.
그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이번 일까지 생겨 버려, 이제는 아예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내가 해야 할 일은 또 달리 있고.
막 심장이 터질 것 같고 그랬지만, 나는 그 울분과 답답하고 미칠 것 같은 감정을 억눌러야 했다.
* * *
"자네가 간다는데, 내가 막을 수 없지.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게. 용맹한 전사를 몇 명 붙여 줄 수도 있으니."
40대 초반의 반송락.
반후인의 큰형이다.
야수왕의 상세가 심각해 현재 야수궁의 모든 일을 그가 맡고 있다.
그에게서 허락을 받기 위해 왔고, 그는 선뜻 허락하는 것을 넘어 도움까지 주려 했다.
하지만…….
나도 양심이란 게 있는 놈이다.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정말 괜찮겠나? 위험할 수 있네. 목숨이 걸린 일이야. 자네가 그러지 않았나? 지금도 중원에서는 무고한 백성들이 죽어 가고 있다고. 미안해하지 말고, 필요한 것 있으면 말하게."
"아닙니다. 정말 혼자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렇습니다."
"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자네의 무운을 빌… 그런데, 나 소협."
"네, 왕자님."
"열랑도 데리고 갈 건가?"
아! 열랑이 내 옆에 있다.
어제 절뚝거리며 나에게 온 후, 한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
"아니요."
"얘는 따라간다는데?"
"얘가… 그래요?"
"응."
"혼자 갈 겁니다. 열랑은 이곳에서 반후인을 지켜야죠."
"음, 열랑 고집이 만만치 않은데."
그때였다.
"큰형님! 태한이 형님!"
막내 반구삭이 다급히 대전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태한이 형, 정말이에요? 붉은 코뿔소의 뿔을 얻기 위해 혼자 간다는 말이?"
"응."
"위험한 거 알잖아요?"
"달리 방법이 없어. 내가 해야 할 일이야."
"형. 그러면… 청안을 타고 가세요."
"나에게 비투복(飛套服, 윙슈트) 있는 거 알잖아."
"붉은 코뿔소가 어디에 있는지 비투복이 찾아 주지는 못하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너무 미안해 차마 청안을 빌려달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자 그의 큰형 반송락이 말했다.
"청안을 타고 가시게. 청안이라면 금세 붉은 코뿔소를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래요, 형. 타고 가요. 청안하고도 얘기했어요. 청안이 허락한 일이에요."
한 달 보름 동안 청안과 교감을 하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청안은 아니었나 보다.
반구삭의 말에 거대한 청안이 한 걸음 성큼 다가와 나를 향해 고개를 연신 끄덕인다.
그렇게 결정되었다.
청안을 타고 떠나기로.
"깨갱. 낑낑. 깨개갱."
"안 돼! 태안이 형은 청안 타고 가기로 했잖아. 너도 다 들어 놓고 이렇게 떼를 쓰면 어떻게 해? 그만해, 열랑!"
열랑은 끝까지 나를 따라가려고 했다.
낑낑거리며 울부짖는 녀석을 보니 또 마음이 아팠다.
반구삭도 반송락도 그런 열랑의 모습에 눈시울을 붉혔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고, 두 사람이 열랑을 막는 사이 나는 청안의 등을 타고 하늘을 날았다.
* * *
"오! 저기다. 맞아. 저기가 포환지야. 듣던 것과 똑같아. 그런데 굉장히 넓네? 도와줘, 청안."
나는 청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표정도 읽을 수 없고, 청안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조금도 감을 잡을 수 없다.
하지만 청안은 내 말을 귀신같이 알아듣는다.
아니나 다를까.
청안은 끝도 없이 넓은 포환지를 계속 돌고 돌며, 붉은 코뿔소를 찾아 하늘을 날았다.
그렇게 한 시진을 넘게 포환지의 높은 하늘을 맴돌던 그때였다.
휘이잉.
청안이 짤막한 울음을 내뱉는가 싶더니, 엄청난 속도로 땅을 향해 하강하기 시작했다.
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청안이 붉은 코뿔소를 발견한 모양이다.
나는 내공을 끌어 올려 안력을 최대치로 끌어 올렸고.
찾았다!
수십 리 넘어 붉은 코뿔소가 있는 것이 내 시야에도 들어왔다.
붉은 코뿔소 주위를 빠르게 살폈다.
적들도 없다.
붉은 코뿔소 서른 마리가량만이 무리를 이루며 평화로이 풀을 뜯고 있다.
서둘러 붉은 코뿔소의 뿔만 얻어 돌아가야겠… 어?
쉬이이이이이이이이잉!
왜?
붉은 코뿔소가 있는 곳에 곧 도착할 것 같았는데, 청안이 갑작스레 방향을 바꾸었다.
"청안! 왜? 왜 방향을 바꾸는 건데?"
휘이이잉.
뭐라 울부짖는데,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왜지?
그리고 곧.
그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상황을 파악하였을 때에는, 이미 청안이 거대한 날갯짓으로 땅에 착지해 발톱과 부리로 그들을 덮치고 있었다.
나도 곧바로 대성검을 빼 들어 놈들을 보이는 족족 죽여 버렸다.
나와 청안이 가슴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분노를 표출하자, 서른이 넘는 적들은 순식간에 싸늘한 시체가 되어야 했다.
딱 한 사람.
아니, 여인.
그들에게 잡혀 있던 여인.
청안은 적들을 죽이기 위함이 아니라, 그녀를 구하기 위해 붉은 코뿔소를 포기하고 이곳에 착지한 것이다.
밧줄에 꽁꽁 묶여 있는 여인.
겁에 잔뜩 질려 울먹이고만 있다.
그런데 입고 있는 의복이 보통의 것이 아니다.
이곳 남만에서는 보기 힘든 화려한 복장인데.
고급의 하얀색 비단에, 금으로 수실을 놓은 반쪽의 태양 문양이 화려하게 그려져 있다.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며.
무엇보다.
스스로 빛을 발하고 있다.
설마?
"혹시 중원의 언어를 할 줄 아시나요?"
"네, 조금요."
여인은 겁에 잔뜩 질려 울먹였지만, 끝내 눈물은 흘리지 않고 있었다.
내가 중원 말로 말을 걸자, 조금은 놀란 얼굴로 그리 답했다.
"혹시… 태양궁의 보파 공주님이신가요?"
"저를… 아세요?"
혹시나 했는데.
그녀다.
반후인의 연인.
진짜 스스로 빛을 발하는 사람이 다 있구나.
"중원에서 온 나태한이라고 합니다. 반후인의 친구요."
"나태한… 대협. 반 왕자님에게 들었어요. 중원에서 정말 멋진 친구를 사귀었다고, 수십 번이나 말해 줬어요."
그녀가 결국 왈칵 눈물을 쏟았다.
안도의 눈물인 듯하다.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된 겁니까? 습격이라도 당한 건가요?"
그녀가 또 폭포수 같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반 왕자님이……. 흑흑. 반 왕자님이……. 흑흑흑. 다치셨다는 말을 들었어요. 저희 태양궁의 공격에… 크게 다치셨다는 말을 듣고……. 엉엉엉. 반 왕자님을 만나기 위해 몰래 야수궁을 빠져나왔다가……. 엉엉. 죄송해요. 엉엉엉."
아! 이 두 사람.
정말 많이 사랑하나 보다.
"일단 가시죠. 가까운 곳에 붉은 코뿔소 떼가 있습니다. 저는 붉은 코뿔소의 뿔을 구하기 위해서 중원에서 왔어요. 뿔만 빠르게 얻어 야수궁으로 모시겠습니다."
"감사… 감사해요. 흑흑흑."
"청안 등에 타시죠. 후인이의 동생 반구삭의 단짝입니다."
"알아요, 알다마다요. 흑흑."
청안은 나와 태양궁의 보파까지 태우고 하늘을 훨훨 날았다.
붉은 코뿔소가 있는 곳과는 몇 리가 떨어진 거리였지만, 청안이 날갯짓을 하자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었다.
* * *
적게는 수백 년에서 길게는 1,000년을 넘게 살 수 있는 영물 중의 영물이 바로 붉은 코뿔소라 하였다.
그 덩치도 어마어마하게 크지만, 매우 영리하며.
무엇보다 굉장한 괴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이곳에서 보통의 코뿔소들이 코끼리에게는 한 수 접어주는 게 현실인데, 붉은 코뿔소만은 예외라 하였다.
붉은 코뿔소 한 마리가, 열 마리가 넘는 코끼리 무리를 물리칠 수 있는 괴력을 가지고 있다고.
이들과 마주했을 때 피하는 게 상책이며,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게 중책이라 하였으며, 이도 저도 안 될 때는 무조건 도망을 가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붉은 코뿔소의 뿔이 필요했다.
"청안, 최대한 빠르게 날아서 녀석들에게 접근해 줘. 그리고 내가 뿔을 자르면 바로 나에게 가까이 날아와 줘. 곧바로 등에 올라탈 테니까. 할 수 있지?"
휘이이잉.
대답을 하는데, 뭔 말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청안을 믿는 수밖에.
"혹시라도 나한테 문제가 생기거나, 내가 네 등에 탈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공주님을 모시고 곧바로 야수궁으로 가. 나는 나 나름대로 방법을 찾아서 갈 테니까. 무슨 말인지 알지?"
휘이이잉.
음, 알았다는 소리겠지?
"그래, 가자! 공주님 꽉 잡으세요."
"네, 나 대협."
청안은 하늘을 몇 바퀴 더 돌았다.
그러면서도 붉은 코뿔소 무리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상황을 주시하며 틈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내, 청안이 급하강을 시도했다.
마치 땅으로 곤두박질이라도 칠 것처럼 무지막지한 속도였다.
나는 정신을 바싹 차리고, 땅으로부터 열 장 가까이 다가갔을 때.
펄쩍!
청안의 등에서 몸을 날려 붉은 코뿔소 사이로 뛰어들었다.
이미 청안이 급하강을 시도했을 때부터 이를 주시하고 있던 붉은 코뿔소들.
도망가지 않는다.
자신감이다.
그 어떤 적이 와도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
하지만 청안이 아닌 인간.
내가 모습을 보이자 놈들도 꽤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무리가 흐트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에게 많이 당한 경험이 그들을 그렇게 불안하게 만들었나 보다.
나는 땅에 착지하자마자 가장 가까이에 있는 녀석을 향해 몸을 날렸다.
단 한 방에 뿔을 베어야 한다.
타타타타타타탓!
산백신법으로 귀신과 같은 속도를 냈고.
다시 낙백보로 녀석이 내 방향을 예측하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대성검을 녀석의 세 척이나 되는 뿔을 자르려던 그때.
투투투투투투퉁.
투투투투투투퉁.
사방으로 흩어진 줄 알았던 붉은 코뿔소 무리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나에게 진격해 왔다.
아! X팔.
함정이다.
일부러 틈을 보이고 나를 몰아넣은 것이었다.
놀라고 당황할 틈이 없었다.
나는 빠르게 낙백보를 밟아, 나를 통으로 짓이겨 버릴 기세의 붉은 코뿔소들의 뿔을 피했다.
그냥 내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는데, 그것만으로 내 뇌가 흔들릴 정도로 엄청난 충격이 가해져 왔다.
하지만 이대로 도망갈 수만은 없었다.
뿔을 구해야 한다.
다시 방향을 틀어, 놈들의 가운데로 뛰어들었고.
검기까지 예리하게 주입한 대성검과 붉은 코뿔소의 뿔이 부딪혔는데.
콰아아아아아앙!
폭발이 일어났다.
검기로는 자를 수 없나 보다.
이에 코뿔소들은 더욱 성이 나, 나를 향해 돌격해 왔다.
피하고.
틈을 노리고.
쉽지 않다.
스치면 죽는다.
우룡호신갑이 내 심장을 보호하고 있지만, 심장만 보호한다.
최강의 외공도 붉은 코뿔소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저 뿔에 스치고, 저 발에 밟히면.
그냥 으깨진다.
내 몸의 어디고 다 그렇게 될 테다.
그래도 난 기필코 이 일을 해야 했… 아! 안 되겠다.
일단 후퇴.
너무 많다.
너무 강하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녀석들이 나를 향해 달려올 때마다 땅이 흔들리고 대기가 진동했다.
어마어마하다.
일단 뒤로 좀 빠졌다가 틈을 노려 다시 기회를 엿봐야 하겠… 어?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앙!
뭔가 수풀 사이에서 거대한 물체가 번쩍하고 튀어나왔는데.
아! 열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