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사랑? 누군데? 어느 집 규수를 고생시키려고 하는데?"
농담처럼 말했고, 반후인도 내 말에 웃었다.
그런데 뭐지?
슬픈 웃음이다.
이 녀석, 지금 진지하다.
"태양궁의 공주."
음.
아!
이건, 어떻게 해야 하지?
너무 당황해 뭐라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중원에서 돌아오자마자 태양궁과의 휴전과 동맹에 관한 협정이 시도됐어."
"그런데?"
"왕인 아버지와 왕자들 전부 그리고 주요 대신들까지 모두 협정에 관한 담판을 위해 태양궁과의 중간 지점에서 만났고. 그곳에서 7일간 협상을 이어 갔어."
"태양궁에서도 태양왕과 그 혈육들이 모두 나왔겠고, 그때 만난 거구나?"
반후인이 씁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이내 일부러 과장된 웃음까지 지으며 말했다.
"와아! 진짜 사람한테 빛이 난다는 걸 처음 알았어. 진짜야. 그녀가 그냥 가만히 서 있는데, 온몸에서 빛이 나더라."
"후광?"
"응! 아니, 후광 정도가 아니야. 진짜 빛이 뿌려졌다니까."
반후인 눈에만 그렇게 보였을 테다.
사랑에 빠지면 원래 그런 법이니까.
"다들 협상 때문에 눈에 불을 켜고 있을 때, 나와 그녀는 몰래 그런 그들의 눈을 피해 사랑을 나눴어."
"저… 반 형, 이건 좀 미안한데."
"응, 뭐든 말해, 나 형."
"어험. 그러니까……."
"……?"
"태양궁의 그 공주도 반 형을 좋아했어?"
"당연하지."
"음… 그래."
"뭐야? 표정이 왜 그래? 지금 내 말 못 믿는다는 거야?"
"그게 말이야. 어험, 그게 조금 믿기 힘든 것도 부정할 수는 없네?"
"와! 나 형! 내가 이곳에서는 엄청난 미남형이라고. 나 형이 몰라서 그래. 진짜라니까."
"그래, 알았어. 믿을게. 알았다고."
"진짠데."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우리의 시간은 정말 순식간에 지나갔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7일이 지나 있었고, 협상은 늘 그래 왔듯 흉흉한 분위기 속에 서로를 죽이겠다는 저주와 욕설 속에 결렬되었지. 우리도 헤어지게 됐고."
원수 가문의 여식과 사랑에 빠졌다.
음, 이거 좀 많이 슬픈 이야기이기는 하다.
항상 쾌활한 녀석이 저렇게 풀이 죽은 모습을 보니 안쓰럽기도 하고.
"나에게 처음으로 하는 이야기야?"
"아니, 동생 녀석도 알아. 동생 녀석만 알아. 이제는 나 형도 알게 됐고."
야수왕에게는 아홉 명의 아들이 있다.
반후인이 여덟 번째 아들이고, 그 밑으로 반구삭이라는 동생이 한 명 더 있다.
청안(靑眼)이라는 정말 엄청나게 거대한 독수리를 데리고 다니는 녀석이다.
"어떻게 할 생각인데?"
"그래서 나 형한테 묻는 거야.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우리 야수궁과 태양궁이 언제 다시 협상을 시도할지 몰라. 몇십 년 후가 될 수도 있고. 나 어쩌지? 이제 그녀 없이는 하루도 살기 힘든데."
"휴우,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에게는? 아버지에게 말해 보는 건 어때?"
"공과 사가 엄격한 분이셔. 아마 역모죄로 죽이지는 않으셔도, 감옥에 가두실 거야. 나를 현혹했다며 보파를 더 미워하게 될 거라고."
"그녀의 이름이 보파야?"
"응, 이름도 예쁘지? 꽃처럼 아름답다고 해서 이름도 보파야."
"그래, 예쁘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반후인은 간절했다.
보파라는 공주를 정말 많이도 사랑하나 보다.
하지만 나라고 무슨 방법이 있겠나?
"차근차근 생각해 보자. 무슨 방법이 있겠지."
"휴우, 미안. 괜히 나 형에게까지 걱정거리를 나누어 주었네."
"미안은 무슨. 도움이 못 되어 줘 내가 더 미안하지."
"그래도 고마워. 철도 없고 말도 안 통하고, 여차하면 아버지에게 이르겠다고 협박하는 동생한테 내 속을 다 털어놓을 수 없었는데. 나 형에게 말하니 속은 조금 후련하다."
"됐네, 그러면. 일단 내일모레 작전이나 생각해. 붉은 코뿔소의 뿔은 네가 아니더라도 내가 달리 구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위험하다 싶으면 물러서고."
"아니야, 약속했잖아. 어떻게 해서든 나 형이 원하는 걸 얻게 해 주겠다고."
"그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코뿔소 뿔에 부딪혀 X알이라도 으깨지면 어쩌려고? 보파 공주한테, 나 이제 고자요. 이럴 거야? 큭큭."
"아! 그렇네. 그건 아니지."
"그러니까 너무 무리하지는 마."
"알았어, 나 형. 혹시 실패해도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되니까. 어쨌거나 약속은 꼭 지킬 거야."
"그래. 고맙다."
* * *
이틀 후.
1,000마리가 넘는 코끼리가 사람들을 태워 야수궁을 떠났다.
코끼리 외에도 호랑이, 곰, 늑대, 표범 등 각종 맹수들과 또 많은 동물이 그들의 단짝인 사람들과 함께 전장을 향해 떠났다.
저 멀리 선두에 반후인과 열랑의 모습도 보였다.
나는 남은 사람들과 함께 그들의 승전을 기원해야만 했다.
함께 가야 했을까?
그들이 야수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했다.
하지만 이건 이들의 일이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
혹시라도 내가 죽는다면, 중원에서는 셀 수도 없는 많은 이들이 더 죽게 될 것이다.
힘든 결정이었다.
하지만 해야 했고.
나는 그렇게 이곳에 남았다.
부디, 부디 큰 희생 없이 돌아오기만을 속으로 간절하게 기도했다.
"고마워요. 기도해 줘서요."
내가 떠나는 야수궁의 사람들을 생각하며 눈을 감고 부처님, 천지신명님, 원시천조님, 하늘님 등등에게 기도를 할 때였다.
"어, 너는……?"
"네, 반구삭이요. 후인이 형 동생. 하하."
열세 살 소년이다.
그 옆에는 사람 한 명도 아니고 두셋은 충분히 등에 태우고 하늘을 날 정도로 커다란 독수리, 청안이 그림자처럼 붙어 있다.
아홉 왕자 중 유일하게 남은 왕자가 바로 그다.
전쟁에 참여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이기 때문인 것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후계의 혈육을 남긴 듯하다.
"중원 말이 유창하구나?"
"네, 어려서부터 배웠어요."
"기분이 좋아 보이네?"
"좋지요. 아버지와 형들 그리고 우리 야수궁의 위대한 전사들이 악독한 밀독궁 놈들을 쓸어 버리고 돌아올 테니까요."
"그렇지."
"형은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아니, 나도 같은 생각이야. 분명 야수왕께서 엄청난 승전보를 들고 위풍당당하게 돌아오실 거야."
"그렇죠? 하하하!"
우리가 몇 마디 대화와 함께 큰 웃음을 쏟아 내고 있을 때.
1만 명에 달하는 야수궁의 전사들과 그들의 단짝 동물들이 서서히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기분이 묘했다.
내가 이런데 아직 어린 반구삭은 어떻겠는가.
겉으로야 저렇게 웃고 있지만, 많이 걱정될 것이다.
기분 좀 풀어 주고 싶었다.
"혹시 청안을 타고 날 수도 있어?"
"물론이죠. 성인 두 명까지 태울 수 있어요."
"두 명이나?"
"네, 날씬한 여자는 셋까지도 가능해요. 아직 성체가 아니라서 그런데, 청안이 나중에 성체가 되면 어른 다섯 명까지 태울 수 있을 거래요."
"와! 엄청나다. 야수궁에는 청안 같은 독수리가 또 있어?"
"그럴 리가요. 청안은 우리 야수궁에서도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영물 중의 영물이에요. 사람을 태우고 날 수 있는 영물은 청안이 230년 만에 처음이고요."
"그렇구나. 그럼 혹시 너도 청안을 타고 비행한 적 있어?"
"여덟 살 때부터 계속요. 며칠 전에도 청안을 타고 포환지 일대를 정찰하고 왔어요. 가까이 접근하면 들키거나 요격당할 수 있어서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특이 사항이 없다는 정도는 확인하고 왔어요."
"대단하다."
"뭘요. 하하."
"구삭아."
"네, 형."
"우리 내기할래?"
"내기요?"
"응."
"무슨 내기요?"
"누가 더 빨리 날 수 있는지 내기."
"형도 청안 같은 독수리가 있어요? 중원에서는 보통 작은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게 전부라고 들었는데?"
"아니, 내가 날 수 있어."
"말, 말도 안 돼. 사람이 어떻게 날아요?"
"볼래?"
"네."
"가자."
"어디로요?"
"난 날기 위해 높은 산이 필요하거든."
"타요. 청안이 높은 산까지 태워 줄 거예요."
와!
독수리를 타고 하늘을 날았다.
훨훨 난다.
나와 반구삭을 태우고, 정말 훨훨.
내가 날아 보지 못한 높은 하늘 위까지 계속하여 날아올랐다.
그렇게 산 정상에 올라.
"야수궁까지 누가 먼저 도착하느냐다. 알았지?"
"좋아요!"
"시작!"
드워프의 신형 윙슈트와 영물 중의 영물이라는 청안의 비행 대결.
과연, 누가 더 빠를……?
허거거거거걱!
청안이 훨씬 빠르다.
최소한 1.5배의 속도까지 더 빨리 비행할 수 있는 청안이었다.
역시 영물은 영물인가 보다.
* * *
야수궁의 군대가 출정하고 5일이 지났다.
"정찰 안 나가도 돼?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청안은 너무 커요. 청안이 근처를 날면 적들의 경계심만 더 불러일으킨다고, 이번 작전을 수립한 어른들이 절대로 포환지 근처에는 오지 말라고 했어요."
"맞는 말이다."
"청안 아니라도 하늘을 나는 새는 많아요. 한시도 적들의 동태를 놓치지 않고 있을 거예요. 작은 새나 다람쥐, 두더지, 뱀, 뭐 이런 녀석들이 정찰하는 데에는 청안보다 훨씬 더 뛰어나요."
"그렇겠다. 야수궁은 정말 알면 알수록 신기하고, 대단하다."
"형, 오늘 수련은 여기까지 하죠? 형은 우리 야수궁이 신기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형이 가르쳐 주는 중원 무림의 무공이 더 신기하네요."
"벌써? 힘들어?"
"아니요, 닷새 동안 형이 무공 가르쳐 준 보답해 주려고요."
"보답?"
"네, 이리 와서 앉아 보세요. 재미난 이야기 해 줄게요."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렇게 분위기를 잡나 싶었다.
피식 웃으며 녀석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열세 살이지만, 닷새 동안 본 반구삭은 상당히 의젓한 녀석이었다.
"후인이 형한테 대충 들었다면서요?"
"뭘?"
"동물과의 교감과 우리 야수궁 무공의 개념에 대해서요."
"듣긴 들었는데, 너무 어렵더라고. 포기했지."
"하하. 제가 첫날 형한테 중원 무림의 무공 배울 때 느낌이네요."
"야. 그건 무공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그냥 기초적인 권각술이야."
"그래서 형은 우리 야수궁의 기초 무공 이론에 대해 이해하고 있어요?"
"그, 그건… 어험, 이 녀석이 어른을 가르치려고 하네. 허허."
"자! 잘 들어 보세요. 우리의 경지부터 알려 줄게요."
"경지? 중원 무림의 것과는 다르겠구나."
"그렇죠. 간단하게 설명하면, 동물들과 어느 정도 교감을 할 수 있냐에 따라 구분이 된다고 보면 쉬워요."
"오! 그래. 그렇게 이해하면 쉽겠네. 후인이보다 네가 낫다. 하하."
"그렇죠? 하하. 아무튼 초입은 자신의 단짝 동물과의 정신적 교감이에요. 간단한 감정을 서로 이해하고, 어려운 상황이나 기쁜 상황 등을 표정, 눈짓, 소리, 동작 등을 통해 파악하고 이해하는 단계죠."
"그게 초입?"
"네."
"그럼 중입은?"
"자신의 단짝 동물과 완벽한 대화가 가능해요. 저도 청안과 그런 단계에 들어섰고, 야수궁에서 전사라 불릴 만한 사람들은 물론 대부분이 자신의 단짝 동물들과 인간처럼 대화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구삭아."
"네, 형."
"후인이가 키우는 개. 아니, 늑대 있잖아. 열랑."
"열랑이 왜요?"
"열랑은 좀 모자란 동물이니? 대화는커녕, 자기 이빨이 깨져 피가 철철 흐르는데도 내 엉덩이를 계속 무네? 반복 학습이 안 돼. 동물 중에도 바보가 있어?"
"풉. 하하하하! 형이 좋아서 그러는 거예요. 정말이에요."
"아! 다른 건 다 믿어도, 그건 좀 믿기 힘들다."
"나중에 후인이 형이랑 열랑 돌아오면 한번 물어봐요."
"아니, 이미 해 봤어. 너랑 똑같은 소리를 하는데. 에휴. 열랑은 됐고. 그럼 상급의 단계는 뭐야?"
"자신의 단짝 동물이 아닌 모든 동물과 자유자재로 대화가 가능한 경지요. 아버지를 비롯한 야수궁의 최고 전사들이나 대신들 그리고 우리 야수궁의 일부 원로들이 이에 해당해요."
"오! 그렇구나. 그럼 각 경지마다 세부적인 단계가 또 있나 봐?"
"네, 하지만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어요. 그럼 더 복잡해지니까요."
"음, 그래. 여기까지만 알자."
"앗! 하나가 더 있긴 한데……."
"그게 뭔데?"
"사실 이건 그냥 전설로 내려오는 경지인데요."
"전설?"
"네."
"궁금한데?"
"모든 동물은 물론, 나무와 꽃, 풀, 넝쿨, 바위, 흙, 바람, 물, 심지어 대기와도 대화가 가능한 경지에요. 우리는 이를 달리 신경(神經)이라고도 불러요."
신의 경지라.
그냥 웃었다.
말 그대로 전설의 경지겠다 싶었다.
달리 말하면, 그냥 오랜 시간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며 과장에 과장이 겹쳐 만들어진 이야기일 테다.
"형! 오늘부터 제가 개인 수련하는 동안에 형은 청안이랑 교감을 나누는 연습을 해 봐요. 다른 동물도 아니고, 영물 중의 영물인 청안이라면 충분히 빠른 시간 안에 교감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거예요."
그날부터 나는 청안과 교감을.
반구삭은 무공 수련을.
시간은 그렇게 빠르게 흘러갔다.
* * *
야수궁 출정 한 달 보름.
드디어 출정했던 야수왕을 비롯한 사람들이 돌아왔다.
살아 돌아온 사람의 수가 절반… 음.
절반에 미치지 못했다.
살아 돌아온 사람들 역시 모두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야수궁 전체가 커다란 충격과 비통함에 빠지고 말았다.
야수왕 역시 큰 중상을 입어, 회군하자마자 의원들의 집중 치료를 받아야 했다.
무엇보다…….
반후인의 상태가 가장 심각했다.
야수궁으로 돌아오고 닷새가 다시 지났지만, 그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야수궁의 의원들이 밤낮으로 그를 치료하였지만, 수십 개의 상처는 아물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계속하여 검붉은 피와 고름을 쏟아 내고 있었다.
반후인이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부상을 입은 건.
붉은 코뿔소의 뿔을 얻기 위해, 모두가 퇴각하는 와중에도 마지막까지 홀로 적진에 남아 싸웠기 때문이라 하였다.
피를 철철 흘리며 피고름을 쏟아 내고 있는 녀석을 보니.
눈물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