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나 형! 정말 와 줬네! 하하하."
"일단 이 늑대 새끼 좀 떼어 봐. 자기 이빨 다 깨지는 줄도 모르고 또 내 엉덩이를 물고 있잖아."
"앗! 미안. 열랑! 그만. 그만해. 어허! 혼난다. 그만하라고. 아이고, 착하지."
열랑이 피를 철철 흘리며 물었던 내 엉덩이를 놓아 주었다.
그나저나 생각해 보면 다 반후인 이 녀석 때문에 내가 이 개고생을 하고 있는 건데.
한 대만 때릴까?
됐다.
지금 아쉬운 건 나다.
빨리 붉은 코뿔소의 뿔만 얻어서 가야겠다.
"나 형, 아버지랑 사람들이 모두 기다리고 있어. 나 형이 왔다는 소식에 다들 모여 있다고. 어서 가자."
"나를? 왜?"
"왜긴 왜야? 중원에서 온 귀한 손님인데."
"그래, 일단 가자. 인사는 드려야지."
그렇게 나는 야수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 * *
궁전의 대전.
실로 어마어마했다.
사람들도 내가 생각했던 이상으로 대단했고.
당연히 한 마리의 동물을 마치 자신의 일부인 것처럼 함께하고 있는데.
별의별 동물들이 다 있다.
반후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죄다 영물들이다.
심지어, 내 말을 알아듣는다.
내 말만이 아닌 사람과 자연스럽게 소통이 가능한 영물들이다.
놀라운 일이다.
간단한 예법까지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영물들이다.
그런데 열랑 저 개 새끼는 왜 사람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지?
그래도 왕자란 놈이 데리고 다니는 늑대가 말이다.
내 말만 못 알아듣는 척하는 건가?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야수궁의 대신들과 반후인의 형제들까지, 모두와 인사를 나눈 후 마지막으로 야수왕에게 인사를 하게 되었다.
화경의 고수다.
놀랍다.
이곳에도 화경의 고수가 있을 줄이야.
그는 자신의 기도를 숨기지 않았고, 기도를 드러내지 않았다고 하여도 느낌으로 알 수 있다.
이미 낭만개 아저씨와 무치개 이 장로를 겪어 보지 않았는가.
비슷한 느낌과 기운이 그에게서 흘러나오고 있다.
그냥 딱, 절대자의 그것이 야수왕 자체였다.
그리고 그의 왼쪽에 턱 하니 자리를 잡고 있는 호랑이.
크다.
그리고 광오하다.
한낱 짐승이 아무리 영물이라 하여도, 어찌 저런 오연한 자세로 나를 내려다볼 수 있나 싶을 정도다.
"혼자 온 것인가?"
"네, 폐하."
야수왕은 내 대답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미세하지만, 분명하게 여기저기서 안타까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무래도 무림맹에서 자신들을 도와줄 고수들을 보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죄송합니다. 기다리던 소식을 전해 드리지 못해서요."
"아니네. 후인이 저 녀석이 무림에서 몇 달 더 머물며 사귀었다는 친구 이야기를 하루에도 몇 번씩 하고 다녔다네. 얼마나 대단한 친구를 사귀었을까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보니 정말 반갑네."
"감사합니다, 폐하."
"혹시 우리가 도울 일이 있는가?"
"그게… 죄송합니다. 도움을 드린다는 소식을 드리지 못하고, 오히려 도움을 구하게 돼서요."
"허허. 됐다니까. 우리 일은 우리가 해결해야지. 그리고 충분히 할 수 있으니 아무 걱정 마시게. 그래서 무슨 일 때문에 그 먼 거리를 오게 된 것인가?"
나는 탈혼독과 붉은 코뿔소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야수왕은 물론 모두가 진지하게 그런 나의 긴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그렇게 내 이야기가 끝난 후.
그들은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현지의 언어로 심각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실은 나도 붉은 코뿔소를 못 본 지 수십 년이나 됐네. 대신들에게 물어보니 마찬가지라고 하더군."
"그럼… 그럼 붉은 코뿔소의 뿔을 구할 수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다행히 우리는 붉은 코뿔소를 비롯해 많은 동물의 멸종을 막기 위해 오랜 노력을 했네. 밀독궁과 힘을 다해 싸우는 이유도 그중 한 가지이고. 덕분에 포환지라는 숲에 붉은 코뿔소 수십 마리 살아 있다고 하는군."
"휴우, 다행이네요."
"그런데 문제가 조금 있네."
뭐지?
불안하다.
"문제라 하심은……?"
"지금 포환지는 밀독궁이 점령하고 있다네."
하아!
그렇지.
이렇게 쉽게 되면 내 인생이 아니지.
"제가… 함께 싸우길 원하시는 건가요?"
내 물음에 야수왕이 씨익 웃는다.
"중원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곳에서는 손님에게 함께 싸우러 가자는 말은 하지 않는다네. 나 소협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네."
"그럼 붉은 코뿔소의 뿔은……?"
"우연인지 우리는 포환지 탈환을 한 달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다네. 내일모레가 바로 그날이지. 그곳을 탈환하고, 붉은 코뿔소의 뿔도 넉넉히 가져다주겠네."
야수왕에 이어, 평소와 다르게 제법 진지한 얼굴로 바른 자세를 하고 있던 반후인이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나 형, 중원에서 내가 했던 말 기억해? 나 형하고 했던 약속."
기억났다.
녀석이 나와 헤어지며 마지막에 했던 말.
‘우리 야수궁에 열랑 같은 영물이 수백 마리는 더 있어. 나 형이 원하는 녀석이 있다면, 내가 어떻게 해서든 나 형이 가질 수 있게 해 볼게. 약속.’
그때는 그냥 흘려듣고 말았는데.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어. 내가 약속한 거잖아."
"그래도… 너무 위험하지 않아?"
이번엔 야수왕이 답했다.
"말하지 않았나? 한 달이나 준비한 작전이라고. 철저히 준비했다네. 나 소협은 아무 걱정할 필요 없다네. 후인아."
"네, 아버지."
"너는 이번 작전에 특수한 임무를 맡아야겠다."
"감사합니다."
"아직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아버지."
"그래, 붉은 코뿔소를 잘 아는 자들 몇과 또 큰 동물들을 포획하는 데에 뛰어난 사냥꾼을 다시 몇 명 붙여 줄 테니, 우리가 작전을 개시하면 너는 곧장 붉은 코뿔소를 잡기 위해 움직여라. 멸종 위기종이니 붉은 코뿔소가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네, 꼭 그리하겠습니다."
나는 야수궁의 대전에서 이들과 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이곳 현지 상황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었고, 이들은 내 신분이 비걸개라고 말을 하자 그에 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렇게 저녁 식사까지 이들과 함께 할 수 있었고.
식사를 모두 마친 후에야 자리를 파하게 되었다.
* * *
반후인이 직접 열랑과 함께 내 숙소로 안내해 주었고.
우리는 다시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정말? 밀독궁 놈들이 준 극독을 그냥 벌컥벌컥 마셨다고? 하하하! 하하하하! 와 살아 있는 게 기적이다. 하하하하!"
"야! 웃지 마. 그게 다 너 때문이잖아."
"앗! 미안. 그래도… 와! 심했다. 무림맹이나 개방에서 당연히 말해 줄 줄 알았는데."
"하긴, 그 늙은 노인네들이 대충이라도 귀띔을 해 주었다면, 내가 그 고생은 안 했지. 아오! 생각할수록 열받네."
"뭐, 살았으니 됐지. 같은 일에 또 당할 리도 없고."
"근데, 반 형."
"응, 나 형."
"이번 작전 정말 괜찮아?"
녀석이 씩 웃는다.
자신감에 찬 미소다.
"포환지는 멸종 위기종이 가득 서식하는 중요한 땅이야. 또 밀독궁, 태양궁과의 전쟁에서도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이고. 우리 야수궁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한 달 동안 고심에 고심에 고심해서 짠 작전이야. 이미 수십 명에 달하는 첩자들이 희생까지 해 가며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실패할 수 없는 작전을 세웠다는 말이구나?"
"응, 이번 작전이 아마 밀독궁, 태양궁과의 전쟁에서 큰 전환점이 될 거야."
"그래, 믿어. 오늘 뵌 야수왕께서는 정말 대단한 분이시더라. 설마 이곳에 화경의 고수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태양왕과 밀독왕도 화경의 고수야."
"그걸 어떻게 확신해?"
"아버지가 직접 몇 번이나 그들과 싸웠었어."
"아! 그렇구나."
"나 형이 의아해할 수도 있는데, 사실 태양궁의 극양신공도 무림에서 흘러들어 온 양공 계열의 무공이 발전한 것이고, 밀독궁의 독공도 이미 들어서 알잖아. 독곡의 독공에서 비롯한 무공이야."
"그럼 야수궁의 무공은? 반 형의 아버지인 야수왕과 또 네 형님들의 경지가 대단한 건 느끼겠는데, 확실히 무림에서 내가 만나 봤던 고수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어. 지금까지 내가 알던 무학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고 해야 할까?"
"정확히 봤어. 우리 야수궁의 무공은 중원의 무공과는 근본부터 달라. 체력을 단련하고, 동시에 심법을 통해 차근차근 단전에 내공을 쌓는 게 중원의 수련 방법이잖아?"
"그렇지."
"우리는 단전이 없어."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신기했고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대자연의 기운을 끌어다 쓰는 방법을 선택했고, 그게 수천 년 이어지고 발전해서 현재에 이른 거야."
"그거… 화경의 고수들이나 가능하다는 거 아니야?"
"그렇지, 중원에서는 그렇다고 했지. 하하."
"그게 가능해?"
"나 봐 봐. 단전 없잖아. 그래도 중원 무림에 가서 꿀리지 않았어. 물론 그 화산파의 이백운이니 무황성의 궁도산처럼 칠룡사봉 같은 미친 천재들한테는 살짝, 그랬지만. 하하."
"음……."
"단번에 이해하기는 힘들 거야. 나도 중원의 무학을 이해하는 데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렸으니까. 처음 중원 무림의 무공이 그렇다고 하는데, 왜 저렇게 무식한 방법을 쓰나 이해도 안 되고 답답하기도 하고. 하하하."
"네 입장에서는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처음부터 대자연의 기운을 쓸 수 있다니."
"오해하지 마. 말이 그런 거지. 화경의 고수처럼 그냥 마구잡이로 대자연의 기운을 끌어다 쓸 수 있었다면, 내가 이백운이나 궁도산 같은 녀석들에게 한 수 접어 줬겠어?"
"그럼?"
"한계란 게 있어. 이건 중원 무림의 무인들과 비슷해. 경지가 올라갈수록 끌어다 쓸 수 있는 대자연의 기운이 늘어나는 거야."
"아! 하수는 조금밖에 끌어다 쓸 수 없고, 고수일수록 많은 기운을 끌어다 쓴다?"
"정확해."
"그런데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나는 아직도 이해가 안 되네. 어떻게 처음부터 그런 시도를 할 수 있어?"
내가 이런 질문을 할 줄 알았다는 듯, 반후인이 또 씩 웃는다.
그러면서 동시에 옆에 앉아서 나를 향해 으르렁거리고 있는 열랑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답은 열랑에게 있다는 뜻으로 보였다.
"우린 태어날 때부터 한 마리의 동물과 짝이 돼."
"음, 그렇구나. 그런데 그게 왜?"
"어느 정도 크면, 짝이 된 동물과 함께 동굴 같은 곳에 갇혀서 적게는 며칠 길게는 1년 넘게 살아가게 돼.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런 일을 성인이 될 때까지 거의 매해 반복하지."
"아! 동물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게 그 이유였구나."
"그건 작은 성과에 불과해. 말했잖아. 우리는 대자연의 기운을 끌어다 쓴다고."
"그게……?"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이 녀석들과 정신적인 유대 관계를 유지하게 될 수 있고. 그때부터 이 녀석들을 통해 자연과 하나로 이어질 수 있어."
"물아일체(物我一體)?"
"비슷한 거지."
"신검합일(神劍合一)과 같은 맥락이잖아?"
"그 역시 비슷한 거고."
"대충 알 것 같으면서도 어렵다."
"동물을 하나의 생명으로 인정하고. 그다음은 그들을 존중하고. 다시 그들과 친구가 되고 가족이 되는 거야. 그러면 그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고, 그들 역시 내 마음을 알게 되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그들을 통해 대자연의 기운을 느끼게 되고, 대자연이 나에게 힘을 빌려주지."
"아! 더 어려워. 설명하지 마."
"맞아, 처음엔 어려울 수 있어. 하하하."
어쩌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은 문제일 수도 있다.
예습이 더 중요하냐, 복습이 더 중요하냐의 문제일 수도 있고.
우리는 차근차근 단전에 힘을 쌓아 가며 상승의 경지로 올라간다.
그렇게 많은 자연의 기운을 내공으로 전환해 고수가 되고, 다시 그 과정을 통해 대자연과 하나가 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그 과정이 우리와는 정반대다.
대자연과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한 후, 그다음부터 조금씩 대자연의 기운을 끌어다 쓰는 방식을… 아! 어려워.
모르겠다.
새외의 무공들이 원래 우리 중원 무림의 무공과는 근본부터 다르다는 말은 숱하게 들었지만, 정말 어렵네.
"나 형."
"어? 어. 아! 생각 좀 정리하려고 해도 어렵네."
"그게 아니라, 나… 사랑하는 여인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