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94화 (93/174)

94화

다섯 명의 스님들이 호법을 섰다.

다시 나머지 다섯 명의 숭불사 스님과 포달랍궁의 파스라 스님이 가부좌를 튼 내 주위를 감싸듯 그렇게 앉았다.

이내 그들의 장심(掌心)이 내 몸에 닿았고.

아!

확실히 불심으로 이루어 낸 내공은 뭔가 달라도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그러한 생각을 하자마자, 이내 엄청난 기의 소용돌이가 내 몸에서 휘몰아쳤고.

스님들의 내공과 밀독궁의 극독이 내 몸 안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실로 대단한 극독에 중독된 게 맞았다.

파스라의 경지만 하여도 엄청난데, 다른 다섯 명의 스님까지 그 힘을 합쳤음에도 쉬이 독을 몰아내지 못했다.

눈을 떠 그들을 볼 수는 없었지만, 분명 내 몸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운의 격돌을 통해 현재 그들이 얼마나 힘겹게 독과 싸우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됐다.

그들이 내 몸을 중독시킨 독과 싸워 준 덕분에.

내 단전이 열렸고, 나는 힘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쿠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기도를 모두 개방했고, 2갑자가 훌쩍 뛰어넘는 나의 내공들은 마치 거센 파도와 같이 순식간에 나의 모든 혈도를 뒤덮어 버렸다.

나를 중독시켰던 극독도, 또 이와 싸우려던 스님들의 기운까지.

일순간에 모두 내 몸 밖으로 몰아낼 수 있었다.

끝났다.

그들의 도움으로 순식간에 독을 모두 체외로 배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잠시간 더 눈을 감고 가부좌를 튼 상태로 운기조식을 했다.

처음 보는 이들 앞에서 운기조식한다는 게 매우 위험할 수 있으나, 이들은 믿을 수 있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식경이 흘러, 나는 눈을 떴다.

원래의 나로, 온전한 힘을 쓸 수 있는 나로 되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나를 도우려 했던 파스라를 비롯한 숭불사 스님들은 여전히 눈을 깊게 감고 운기조식 중이다.

땀까지 뻘뻘 흘리며 운기하는 모습이, 나 때문에 많은 기운을 쏟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그들에게 합장을 한 후, 조용히 호법을 서는 스님들 곁으로 가 그들과 함께 호법을 섰다.

* * *

한 시진이 지난 후 스님들이 가부좌를 풀었다.

모두 건강한 모습이어서 다행이었다.

문제는 이미 해가 거의 져 버린 시각이었고, 우리는 간단히 저녁 식사를 한 후 노숙을 해야 했다.

파스라 스님도 또 숭불사의 스님들도, 아직 이곳 밀림에 적응하지 못한 나를 위해 이것저것 많이도 챙겨 주었다.

참 고마운 사람들이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어험. 나 소협."

"네, 스님."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앞으로는 누가 주는 음식은 함부로 먹으면 안 됩니다. 밀독궁이 남만의 절반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인지라, 이는 매우 위험한 행동이에요."

"네, 제대로 깨달았습니다. 죽을 뻔했잖아요."

나와 파스라는 서로를 보며 웃어야 했다.

"스님, 혹시 이곳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있을까요?"

"오기 전에 소식을 못 들었나요? 개방이나 무림맹이었다면 당연히 이곳 상황에 대해 알고 있었을 텐데요. 얼마 전 야수왕이 무림맹에 도움을 요청하러 직접 갔다는 말도 들었고요."

젠장!

이 빌어먹을 노인네들.

순화자, 속리자 그리고 상취개 이 주정뱅이 거지까지!

일부러 나에게 말하지 않았던 거야.

알면 내가 안 갈지도 모르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 돌아가면 두고 봐라.

내, 다시는 그 노인네들을 상대하지 않을 것이다.

"사정이 좀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래서 이곳은 어떤 상황인가요?"

"300년 전까지만 해도 야수궁과 태양궁이 남만을 양분하여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작은 다툼은 계속 있었지만, 말 그대로 사소한 다툼이고 충돌이었죠. 그런데 그들이 이곳에 오고 나서 문제가 시작되었지요."

"그들이라뇨? 설마 무림인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파스라가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독곡(毒谷)의 고수들이었습니다. 300년 전 사천당가에서 독곡을 멸문시켰고, 그때 목숨을 부지한 몇몇의 고수들이 남월로 도망을 와 터를 잡고 살게 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남월은 매우 가난한 땅이고 문명에도 많이 뒤떨어졌었지요. 무공이란 건 말할 것도 없고요."

"……."

"야수궁과 태양궁에서는 그런 그들을 긍휼히 여겨 많은 지원도 해 주고, 보호도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독곡의 독공을 손에 얻은 후 이렇게 돌변해 버린 것이죠."

"전쟁을 일으켰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습니다. 굉장히 무서운 암계까지 써 가며 전쟁을 일으켰죠. 사람을 죽이고, 그걸 또 야수궁과 태양궁의 짓이라며 이간질을 했습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수십 년 동안 남월의 사람들은 그렇게 거대한 두 궁전을 이간질했고, 결국 야수궁과 태양궁은 큰 전쟁을 벌이게 됐습니다."

"그사이 남월 사람들은 몰래 힘을 키우고 있었겠군요."

"그렇죠, 맞습니다. 결국 야수궁과 태양궁은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전쟁으로 힘이 빠질 대로 빠졌고, 그때 남월에 밀독궁이 본격적으로 들어서며 두 궁전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썩어도 준치라고,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그게 실로 무서웠습니다. 말했듯 이곳 남만은 사방에 독초와 독충 그리고 독사가 넘쳐납니다. 독곡의 독공이 이곳으로 흘러들면서, 마치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이 되었다고 할 수 있었죠."

"아! 그렇네요. 그런데 이곳도 안전하지 않은가 봅니다? 이곳은 숭불사의 영역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네, 맞습니다. 원래 숭불사를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의 땅은 매우 넓고 거대했습니다. 야수궁과 태양궁 못지않았죠. 하지만 이곳은 부처님의 땅. 300년 전에는 야수궁과 태양궁에서도 그런 이곳 사람들의 불심을 존경해 평화롭게 살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니라는 말씀이시군요."

"독을 위해 밀독궁에서 공격해 왔고. 현재는 3분의 2가 그들의 영역이 되었습니다. 200년 전 숭불사 전체가 그들에게 넘어갈 위험에 처하자, 숭불사에서 저희 포달랍궁으로 도움을 요청했고, 그렇게 이백 년 전부터 포달랍궁에서는 저와 같은 무승(武僧)을 파견해 숭불사를 돕고 있는 상황입니다."

야수궁, 태양궁, 숭불사 그리고 밀독궁.

파스라 스님의 말에 의하면, 악의 근원은 명확하다.

밀독궁이다.

그런데 이해 가지 않는 게 있다.

"야수궁과 태양궁, 숭불사가 힘을 합쳐도 당해 낼 수 없을 정도로 밀독궁의 힘이 강한가요?"

파스라가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합친다면야 밀독궁을 충분히 당해 내고도 남을 겁니다. 다만……."

"……?"

"밀독궁에서 이간질하여 야수궁과 태양궁이 전쟁을 벌인 게 거의 300년에 가깝습니다. 자식과 부모, 형제와 친구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에게 죽임을 당했죠."

"원인은 알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숭불사에서 이를 중재하려고 여러 번 노력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숭불사는 저희 포달랍궁에서 돕는다고 하여도, 힘이 많이 부족합니다. 몰려드는 불자들을 지키는 일만도 벅찬 상황이지요."

"어렵네요. 이곳의 상황도."

"나무아미타불."

"아, 맞다. 야수왕이 무림맹에 간 건 저도 들어 알고 있는데, 그게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이제 알았네요. 무림맹에서 야수궁을 돕겠다고 했나요?"

"저도 어렴풋이 소문처럼만 야수왕이 무림맹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입니다.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는 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을 봤을 때, 좋은 소식은 앞으로도 듣는 게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파스라의 말이 맞는 듯하다.

중원 무림만 해도 할 일이 태산이다.

다른 나라의 일까지 도울 여력은 없다.

설사 도울 여력이 있다고 해도, 다른 나라의 일에 함부로 나서는 일은 결코 옳은 선택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들은 무림맹주는 분명한 의협이지만 신중한 사람이다.

아마 오랜 고민 끝에 야수왕의 부탁을 거절했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그날 파스라를 통해 이곳의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다음 날 우리는 숭불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식사와 함께 잠시 몸을 추스른 후, 그들에게 지도까지 한 장 받아 야수궁으로 떠나게 되었다.

숭불사 자체가 매우 높은 산의 정상에 위치해……. 타타타타탓!

단숨에 하늘을 날아 야수궁으로 향했다.

* * *

몇 번의 비행을 반복.

거의 800리(315km)가량을 날아간 끝에……. 젠장!

또 밀림이다.

사방이 밀림.

앞으로도 밀림.

뒤로도 밀림.

좌우도 밀림.

어쩌라고!

지도를 봐도, 죄다 똑같은 밀림인데 뭘 알겠나?

아! 진짜.

내가 다시는 여기에 오나 봐라.

뿌우우히이이이잉.

그때 아주 먼 거리, 정말 멀고 먼 곳에서 엄청난 짐승의 포효가 들려왔다.

일단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고, 냅다 그곳을 향해 달렸다.

가까이 가서는 분명한 기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은형술을 펼쳤고, 그렇게 그곳에 다가갔다.

그리고 내 눈앞에 펼쳐진……. 와아아아아!

집채만 한.

아니, 집보다 더 커다란 동물.

코가 사람보다 더 긴.

거대한 코끼리 수십 마리가 그곳에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엄청나게 크며 또 신비롭기까지 한 코끼리 위에 사람이 한 명씩 타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마치 한 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분주히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어쩌지?

모습을 드러낼까?

대상귀인패를 보여 주면?

설마 또 나를 공격하는 건 아니겠지?

사실 첫날은 방심이었다.

방심해서, 그 극독을 그냥 벌컥벌컥……. 아! 지금 생각해도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다.

코끼리가 매우 위협적이기는 했지만, 지금의 나를 어쩔 수는 없다.

그 위에 탄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고.

그래도 당한 게 있는지라 잠시 더 고민을 했고.

다른 방법이 없었다.

결국 나는 수풀을 헤치고 나아가 그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착한 미소를 지으며.

가까이서 보니 코끼리는 더 컸다.

그런 나를 보는 코끼리와 또 그 위에 탄 사람들도, 갑작스레 나타난 나를 보고 놀란 얼굴들이었다.

나는 지체할 것 없이 곧바로 대상귀인패를 그들에게 내밀었다.

한 사내가 코끼리에서 내려 조심스레 다가와 대상귀인패를 살폈고.

곧 뒤를 돌아 사람들에게 큰 목소리로 외쳤다.

"쿤 팬 캐 콩 초오 차이(왕자님의 손님이시다)!"

곧이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코끼리 위에 탄 사람들이 나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했고.

그들을 태우고 있는 수십 마리의 코끼리까지 한쪽 무릎을 꿇어 예를 갖추었다.

실로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 * *

아아아아아!

진짜 별의별 개고생을 다 한 끝에 야수궁에 도착했다.

수십 마리의 코끼리 떼와 함께, 선두에 선 가장 큰 코끼리 목에 올라타 이곳에 올 수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야수궁.

궁을 중심으로 끝도 없는 거대한 도읍이 펼쳐졌다.

놀라운 것은…….

사람이 반이고 동물들이 반이라는 것이다.

대충 봐도 한 사람당 한 마리의 동물을 마치 자신과 한 몸이라도 되는 것처럼 데리고 다녔다.

코끼리, 말, 소, 사슴, 독수리, 원숭이, 개, 늑대, 돼지, 작은 새, 알록달록한 새, 커다란 새, 뱀은 물론 악어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이게 현실 세계가 맞는지, 보는 내가 다 내 눈을 의심할 실로 신기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그렇게 도읍을 가로질러 야수궁에 가까워졌을 때였다.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기운보다 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멀리서 반후인이 열랑과 함께 나를 향해 미친 듯 달려오는 것이다.

아! 젠장.

중원에서는 아무런 감흥도 없던 녀석이었는데.

보자마자 울컥했다.

보고 싶었다, 반후인!

열랑, 네 녀석도 마찬가지였고.

나는 곧바로 코끼리 목에서 내려 반후인을 향해 달려갔고.

나와 녀석은 마치 수십 년 동안 헤어졌다가 다신 만난 절친한 친구처럼 그렇게 서로를 얼싸… 젠장!

으르렁.

열랑 이 미친 늑대 새끼가 또 나의 소중한 엉덩이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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