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93화 (92/174)

93화

툭.

툭.

질질.

혼절한 나를 어디로 끌고 가나 보다.

들것에 실린 상태로, 울퉁불퉁한 바닥의 충격 때문에 깨어났다.

하지만 조심스럽다.

또 혼란스럽다.

왜지?

반후인이 대상귀인패를 보여 주면 분명 나를 환대해 줄 것이라고 했는데.

젠장!

일단 그건 나중에 알아봐야 하겠다.

이놈들부터 혼 좀 내 주고.

내공을…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근육… 움직이려고 시도를 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을 불로 태우는 것 같은 고통이 엄습해 온다.

무슨 독을 썼기에 이렇게 지독하지?

천독불침인 내가 뭘 하기도 전에 중독당했다.

극독 중에서도 상급의 극독이다.

아니, 이곳에 어찌 이런 독이 있는 걸까?

아! 어쩌지?

극소 기관연사궁으로 놈들을 처리할 수 있긴 한데, 아프다.

그런데 있나?

있다.

극소 기관연사궁은 물론, 다른 물건들까지 모두 내 몸에 있는 게 미세하게 느껴졌다.

대상귀인패만이 놈들의 손에 들려 있다.

그래, 극소 기관연사궁으로 놈들을 없애… 젠장!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데 진짜로 죽여 달라고 애원할 정도로 아프다.

일단 내 몸의 상태를 먼저 살펴야 했다.

온몸에 독이 완전히 퍼졌다.

스스로 치료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고, 치료한다고 해도 몇 달은 걸리지 않을까 싶을 극독에 완벽하게 당했다.

젠장할!

도대체 중원과 수천 리나 떨어진 이곳에 왜 이런 극독이 있는 거냐고!

"디엡 비엔 특 싸이(첩자가 깨어났다)."

한 놈의 외침.

이동이 멈추었다.

곧 놈들이 들것에서 나를 풀어 다시 커다란 나무에 꽁꽁 묶었다.

이내 불을 피우는가 싶더니.

불에 칼을 달군다.

이거, 뭔가 불안하다.

X팔!

고문하려는 거다.

왜?

도대체 왜?

내가 뭘 어쨌다고?

억울했다.

아니, X팔 황금 2,000관을 손에 쥔 부자가 됐는데, 그걸 한 번도 써 보지도 못하고 죽을 신세 아닌가.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진짜, 진짜로 너무 억울해 눈물이 다 났다.

마음 같아서는 엉엉 울고 싶었는데, 놈들은 그럴 틈도 주지 않았다.

벌겋게 달아오른 칼이 내 목에 드리웠다.

"묵 딕 세이(목적이 뭐냐)?"

뭔 소린지 알아야 뭘 하건 말건 할 텐데.

아! 신이시어.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묵 딕 세이! 노이 디(말해)! 노이 디!"

도대체 나는 왜 어딘지도 모르는 이곳에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가?

쟤는 왜 나한테 이러는 걸까?

그냥 눈물만 흘리며, 나는 그렇게 죽어 가야 했다.

행운석이 도와주지 않을까 싶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결국, 놈이 드리민 벌겋게 달아오른 칼이 내 목을 파고 들어오… 어?

콰콰콰콰콰쾅!

퍼퍼퍼퍼퍼펑!

퍼퍼퍼퍼퍼퍼펑!

고수들이 난입했다.

상당한 숫자의, 50명이 넘는 고수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나를 고문하려던 놈들을 마구잡이로 죽이기 시작했다.

뭐야?

뭔 상황이야?

일단 살긴 했는데, 불안하다.

난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로 그들의 싸움을 지켜봐야 했다.

그런데.

불안한 마음에서도 그들의 움직임을 보고 살폈는데.

아! 저건.

저건 분명 비걸개 시절 내가 글로 보았던 그런 종류의 무공이다.

무공!

맞다, 무공.

그것도 극양 계열의 무공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태양궁의 고수들이다.

태양궁?

내가 온 곳이 섬라곡국이 아니었나?

그래서 저들이 나를 잡아 고문하려던 것이었고?

새롭게 나타난 태양궁의 고수들은 순식간에 서른 명에 달하는 놈들을 도륙해 버렸다.

싸움이 끝나자 몸에 묻은 피를 툭툭 털고는.

이내 모두의 시선이 나무에 묶인 나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다가온다.

조심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자신의 무공에 대한 강한 자신감이리라.

실제 대단한 고수들임에 틀림없다.

물론, 몸만 정상이라면 내 상대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내 몸이 최악의 상태라는 것이고.

"쿤 쿠 아라이(넌 뭐야)?"

"중원 말, 중원 말을 할 줄 아는 사람 없어요?"

고개를 갸우뚱한다.

안타깝게도 내가 몇 번이고 외쳤음에도, 내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없었다.

분위기가 점점 흉흉해졌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나는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찾을 수 있었다.

죽어 있는 아까 그놈들 중 한 명의 손에 대상귀인패가 들려 있었다.

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다시 눈짓콧짓을 다 해 가며 그 대상귀인패를 가리켰다.

다행히 한 사람이 그런 내 뜻을 알아차리고, 죽은 자의 손에 들린 대상귀인패를 빼앗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곧바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함께 대상귀인패를 살폈고.

내 마음은 조마조마했다.

그리고…….

"사이랍(첩자다)."

살았나?

태양궁과 야수궁이 친한가?

웃을 상황은 아니었지만, 최대한 착하게 웃었고.

사람들도 그런 나를 향해 웃으며 다가온다.

휴우.

다행이다.

살았나 보다.

퍽!

혼절.

* * *

한 사내의 어깨에 축 늘어져 들린 상태로 이동 중이다.

혹시나 해서 내 몸을 살폈지만, 중독 상태가 더 심해졌다.

오늘을 버틸 수 있을까?

이 상태라면 아무라 잘 쳐줘도 닷새를 넘기기는 힘들 것 같다.

왜지?

나는 어쩌다 이런 꼴이 된 거지?

황금 2,000관은?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오기 전에 정말 돈이라도 펑펑 쓰고 오는 거였는데.

힘없이 축 늘어진 상태로, 그렇게 사내의 어깨에 들려 휘적거리며 어디론가 계속 가야만 했다.

태양궁으로 가는 걸까?

태양궁하고 야수궁하고 사이가 나빠서 날 이렇게 대하는 건가?

얘들도 고문하려나?

진짜 뭔가 제대로 되는 게… 어라?

걸음이 멈추었다.

쿵.

이내 나를 바닥에 던져 버리는 사내.

정말 간신히 눈을 뜨고 고개를 살짝 틀어 상황을 지켜보는데.

스님들이다.

오! 스님이야.

스님은 착하겠지?

쉰 명의 태양궁 사람들과 열한 명의 스님들.

대치?

대화?

분위기가 묘하다.

그런데 열한 명의 스님들 복장이 조금씩 다르다.

열 명의 스님들은 처음 보는 가사를 입고 있다.

아마 이곳 현지의 스님들인 듯하다.

하지만 정확히 한 스님이 입은 가사가, 내가 배웠던 스님들의 복장이다.

포달랍궁의 스님들이 저렇게 붉은 가사를 입는다고 했는데.

수천 리나 떨어진 포달랍궁의 스님이 왜 이곳에 있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도 그들은 치열하게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다투는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피력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그때.

태양궁의 고수가 스님에게 나의 대상귀인패를 보여 줬고.

이내 이를 확인한 붉은 가사를 입은 포달랍궁의 스님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다른 스님들 역시 나를 보는데.

그들의 눈에 애처로움과 안타까움이 가득하다.

나무아미타불!

부처님, 저 앞으로 정말 착하게 살게요.

좀 도와주세요.

하지만, 부처님은 내 간절한 소원을 듣지 못했나 보다.

퍼퍼퍼퍼펑!

채채채채챙!

챙챙챙!

쉰 명의 태양궁 고수들과 열한 명의 스님들이 갑자기 싸우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밀림의 땅바닥에 축 늘어져 있고.

불똥이 나에게 튀지 않기만을 바라고 바라고 또 바랐다.

아! 주인공이 뭐 이렇단 말인가?

비참해도 너무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슬퍼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내가 뭘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비걸개 아닌가.

싸움이 어떻게 되는지, 상황 판단을… 어라?

"윙 니! 윙 니(도망쳐)!"

스님들의 무공이 실로 어마어마하다.

특히 포달랍궁의 스님으로 추정되는 붉은 가사의 스님은 정말 엄청난 고수다.

최소 절정이며, 어쩌면 초절정의 고수가 아닐까 싶다.

태양궁의 고수들이 이렇다 할 힘도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순식간에 혼비백산하여 도주하였다.

그나마 스님들이 손에 사정을 둔 덕분에, 한 명도 죽지 않고 크게 다친 자 또한 없이 도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난…….

눈물이 났다.

안도의 눈물이다.

잠시 후, X신 같이 울고 있는 나를 향해 스님들이 다가왔고.

붉은 가사의 스님이 말했다.

"나무아미타불. 중원에서 오셨습니까?"

또 한 번 눈물을 와락 쏟았다.

정말 지옥 같은 하루였고.

중원 말이 미칠 듯 그리웠다.

"휴우, 일단 자리를 옮겨야겠습니다. 태양궁에서 사람들을 불러올지 모르니까요."

난 그렇게 한 스님의 등에 업혀 움직일 수 있었다.

* * *

"나무아미타불. 저는 포달랍궁에서 온 파스라라고 합니다."

안전한 곳으로 이동한 후, 그가 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무에 기대앉자, 그가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중원 말을 할 줄 아시네요?"

"중원의 스님들과 많은 교류를 한 덕분에 중원의 언어를 익힐 수 있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냥 감격 그 자체다.

말이 통한다는 게 이렇게 감사한 일인 줄, 정말 뼛속까지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음, 내가 실수를 했다.

파스라는 나를 보며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내 소개를 하기를 기다려 주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너무 감격하고 그래서요. 저는 중원에서 온 나태한이라고 합니다. 개방 소속의 비걸개입니다. 조금 특수한 임무를 맡는 개방의 방도요."

"그렇군요. 그런데 이 먼 곳까지 어쩐 일입니까? 현재 이곳 남만 전역의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아 위험한데요. 대상귀인패를 들고 온 것을 보니, 야수궁을 찾아오신 건가요?"

대상귀인패를 내게 돌려주는 파스라 스님.

손을 들 힘이 없었다.

그러자 그가 그걸 고이 내 앞섶에 넣어 주었다.

"중원에 탈혼독이라는 극독이 악인들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누구나 쉽게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극독으로, 하루에도 수십에서 수백 명씩 그 탈혼독 때문에 무고한 백성들이 죽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해독약을 구하기 위해 오게 됐는데. 여기… 여기 야수궁 땅 아니었나요?"

파스라가 여전히 그 특유의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답해 주었다.

"이곳은 숭불사의 영역입니다. 야수궁과는 거리가 꽤 멀지요."

"야수궁에… 야수궁에 빨리 가서 해독약을 구해야 하는데. 혹시 이곳에는 붉은 코뿔소가 살지 않나요?"

"붉은 코뿔소가 탈혼독의 해독약을 만드는 재료입니까?"

"네, 붉은 코뿔소의 뿔을 조금만 잘라 가면 돼요."

파스라가 고개를 끄덕인 후 다른 스님들과 대화를 나눈 후 돌아왔다.

다른 스님들은 확실히 이곳 숭불사의 스님들인 것 같았다.

중원 말을 전혀 하지 못했다.

아무튼 파스라는 돌아와 안타까운 얼굴로 내게 말했다.

"수백 년 전에는 이곳에도 붉은 코뿔소가 살았지만, 현재는 없다고 합니다. 야수궁의 땅에는 어쩌면 아직 살아 있는 붉은 코뿔소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네요."

"멸종… 뭐, 그런 건가요?"

"물어봤더니, 붉은 코뿔소의 뿔은 이곳에서도 오래전부터 귀한 약재로 쓰였다고 합니다. 반대로 극독의 주재료로도 쓰였다고 하더군요. 밀독궁(密毒宮)에서 이를 통해 독을 제조하기 위해 대량으로 살상한 것이 벌써 300년이 이어졌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멸종이나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밀독궁?

도대체 여긴 무슨 상황인 거야?

처음에 나를 중독시키고 고문하려고 했던 놈들이 밀독궁 놈들인가?

상황을 좀 알아야겠는데.

"끄응."

"중독이 심한 것 같네요. 제가 몸을 살펴도 되겠습니까?"

"부탁드립니다, 파스라 스님."

파스라는 내 몸을 매우 섬세하게 살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갈수록 어두워졌다.

"당장 치료를 해야겠습니다. 상태가 매우 위중합니다."

"가능한가요? 해독약이 있나요?"

고개를 가로젓는 파스라.

"그럼 어떻게?"

"숭불사는 300년 동안 밀독궁에 항거해 싸우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들의 독을 몰아내는 기의 운용에 특화된 무공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저와 몇몇 스님들이 도우면, 일단 위급한 상황은 벗어날 수 있을… 그런데, 나 소협."

"네, 스님."

"어떻게 중독이 된 건가요?"

"네? 그, 그게……."

"밀독궁의 독은 엄청난 극독입니다. 중원 무림에서 독으로 최고라 하는 사천당가의 극독에 비한다고 하여도 절대 아래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곳 남만의 독초와 독충, 독사들이 워낙 맹독을 품고 있기에, 독의 위력은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죠. 다만……."

"다만…?"

"다만 그들이 중독시키는 실력은 중원 무림에 비한다면 형편없기 그지없습니다. 정말 최악의 상황이 아니고서는 이렇게까지 중독되는 경우를 본 적이 없었는데. 그들이 내미는 독을 바보가 아니고서야 벌컥벌컥 들이마실 일도 없었을 테… 어험. 어험. 나무아미타불. 제가 실언을 했군요. 바로 치료에 들어가겠습니다."

젠장!

나, 바보 맞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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