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표정이 왜 그래?"
연주언이다.
목소리와 말투 그리고 싸가지까지 연주언이 확실한데.
얘가 이렇게 예뻤나?
그렇지.
헌원공지와 헌원파지가 처형당한 후, 천하 2대 미녀 중 한 명이 됐지.
그래.
그때는 변용 때문에… 아! 변용을 어설프게 한 게 아니었다.
정말 너무 잘해서 완벽하게 속아 넘어간 거야.
진짜 천재였나?
아이씨! 헷갈리네.
얘, 분명 좀 모자란 거 맞는데.
"야! 너 정말 왜 그래? 놀란 얼굴에 말도 잘 못 하네? 너 설마… 나한테 반했냐?"
응, 얘 모자란 거 맞다.
과거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동굴에서 바위에 머리를 부딪히고 뇌 기능이 많이 떨어졌나 보다.
"야! 나태한. 말을 좀 해 봐."
"응, 됐어. 너한테 반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일 없을 거야."
"너……."
충격을 좀 받은 얼굴이네?
그래도 나한테는 은인인데, 내가 말을 너무 심하게 했나?
"너… 남자 좋아해?"
"미친! 야!"
"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참 나, 주위를 봐 봐."
"뭐?"
"우선 봐."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뭔 소린가 싶어서 주위를 봤는데.
음, 좀 그렇긴 하군.
그녀의 호위 무사들이 주위를 철통같이 경계하며, 상당한 기운까지 흘리고 있었다.
실로 한 명 한 명 대단한 고수들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그런 그들의 기세를 감당하는 것만으로 다리에 힘이 풀리고 식은땀을 비 오듯 쏟으며 덜덜 떨기 마련이다.
그런데 계속해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남자만이 아니라 여인들까지도.
모두 연주언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두려움을 이겨 내고 몰려드는 중이다.
"어때?"
"뭐?"
"내 얼굴 한 번 보겠다고 몰려드는 사람들."
"그게 뭐? 어쩌라고?"
"소문 못 들었어?"
"무슨 소문?"
"내가 천하 2대 미녀 중 한 명이라고."
"그, 그건……."
"그런 미녀를 앞에 두고, ‘너한테 반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일 없을 거야.’라고 말하는 게 정상이야? 충분히 여자가 아닌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일 거라고 의심하는 게 합리적인 거 아니냐고?"
얘가…….
얘가 언제부터 이렇게 논리적이었지?
아이씨!
짜증 나.
대꾸할 말이 없잖아.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응? 어딜 들어가?"
우리가 서 있는 자리.
그곳은 어느 다관(茶館) 앞이었고.
내가 고개를 돌리자, 다관에서 사람들이 싱글벙글 웃으며 몰려나오고 있었다.
손님들인 것 같은데, 하나 같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연주언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여 감사의 인사까지 하고 사라지는 것 아니겠는가?
그들의 손에는 은자가 가득 들려 있었다.
"무슨… 상황이야?"
"여기, 내가 방금 빌렸어."
"왜?"
"너랑 얘기하려고."
아! 돈 많다고 자랑하는 건가?
나도 많은데.
얘 앞에서는 돈 자랑하면 안 되겠지?
"내가 왜 너랑 저길 들어가?"
"말했잖아. 얘기 좀 하자고."
"그러니까 내가 왜 너랑 저기 들어가서 얘기를 하는데?"
"그럼 여기서 해? 사람들 계속 몰려드는데. 저러다 누구 하나 다치기라도 하면? 네가 치료비 줄 거야?"
"그게 뭔 소리야?"
"내 말이. 그러니까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고."
아이씨!
논리는 무슨 개뿔!
얘가 진짜 이상하다.
결국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다관 안으로 들어가야 했… 아! 뒤태가 예쁘군, 어험.
그렇게 텅 빈 다관 2층에 그녀와 자리를 잡았다.
향기로운 차도 나오고.
"나 바빠. 할 말 있으면 빨리 해."
괜히 얘만 보면 말이 이런 식으로 나온다.
나도 모르겠다.
왜 그러는지.
부자들에 대한 거지의 자격지심인가?
"어땠어?"
"야, 넌 뭘 물을 때 좀 문장을 이어서 말을 해. 앞뒤 다 자르고 어땠냐고 물으면 내가 무슨 말인 줄 알아?"
"내가 물을 게 하나밖에 없잖아."
"뭐, 보석은 잘 팔았다. 그건… 어험, 고맙게 생각한다. 은혜는 지난번에 동굴에서 도와줬던 것과 이번 것까지 두 개로, 나중에 꼭 갚을게."
"보석 말고."
얘가 뭔 소리지?
"보석 말고 뭐? 지금 보석 잘 팔았는지 물은 거 아니야?"
내가 의아해서 그렇게 물었더니, 얘가 표정이 괴이해진다.
뭔가 초조한 것 같기도 하고, 걱정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똥이 마렵나?
"똥 마려우면 측간 가서 싸고 와. 조금은 기다려 줄 수 있어."
인상을 더 구긴다.
많이 마렵나?
"얼른 다녀오라고. 그러다 싸겠다."
결국 인상을 와락 구기는 그녀.
짜증이 치밀어 나에게 버럭 소리를 지른다.
"우리 부모님! 부모님 만난 거 어땠냐고 물은 거잖아!"
"부, 부모님?"
머리를 쇠망치로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왜 네 부모님을… 아! 젠장.
"아까… 아까 그 귀보교상의 상주님과 감정하던 여인 분이……."
"너 정말 몰랐어? 너 진짜 비걸개 맞아? 아니,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어?"
아!
젠장!
빌어먹을!
하늘이시어!
연주언 말이 맞다.
내가 바보 멍청이였다.
바보 걸삼번이었더라도 충분히 눈치챘을 일이다.
다시 생각해 보니, 두 사람이 했던 질문들이 죄다… 아! 사위 면접 맞았네.
돈에 눈이 멀어.
황금 2,000관이 내 뇌를 잠식해 버린 결과다.
"됐어. 그렇게 자책하는 얼굴 하지 마. 거지가 그만한 돈을 벌게 됐는데, 눈이 돌아갈 수도 있지. 그래도 좀 놀랐다. 너라면 당연히 눈치채고, 적당히 대응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때!
뭔가 번뜩이는 게 떠올랐다.
"설마… 설마 네가 계획한 거였어?"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그러자 연주언이 내 시선을 피하며.
"미, 미안.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일이 어쩌다 보니."
얼굴까지 붉어지는 게… 설마?
"야! 너, 나 좋아해?"
"아니야, 그런 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지금도 얼굴이 홍시처럼 붉게 물들어서 내 눈도 못 쳐다보고 있잖아!
아! 안 되겠다.
서둘러 자리를 떠나야겠다.
얘가 아무리 예쁘고 돈이 많아도, 나랑은 안 어울린다.
마음이 동하지 않아.
날 좋아해 준 건 고맙게 생각하마.
하지만 난 가야겠다.
잘 살아라, 연주언.
그때, 그녀가 여전히 내 눈을 피하며 말했다.
아주 조심스럽게.
아주 부끄러운 듯.
"합격이래."
"뭐가?"
"너… 합격이라고."
"미친! 너, 진짜로 나 좋아했어?"
"아니라니까."
"몸은 왜 배배 꼬면서 말하는데?"
"오해야, 오해."
정신 똑바로 차리자.
이러다 진짜 만리상단 사위 되겠다.
"휴우, 어떻게 된 일이야?"
"그게… 진짜로 오해가 좀 있었어. 놀라게 했다면 미안해. 난 네가 잘 대처할 줄 알고 그랬던 거야."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데, 너희 부모님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면접까지 본 거냐고?"
"가출 때문에."
"가출?"
"응, 나 가출했다가 잡혔던 거잖아. 그래서 아버지가 많이 화가 났거든. 원래는 엄마가 도와주고 그랬는데, 이번엔 엄마까지 화가 잔뜩 나서. 아니, 가출 좀 했다고 석 달이나 외출 금지가 말이 돼?"
"설마……?"
"응, 외출 금지는 어떻게든 막아야겠다 싶었는데, 갑자기 네 생각이 나더라고. 그래서… 뭐, 그냥 네 이야기 좀 하고, 그랬더니 부모님이 꼬치꼬치 물으시더라고."
"귀보교상의 상주와 감정사는 원래 다른 사람이야?"
"그렇지. 그런데 네가 가진 보석 정도는 실제 우리 부모님이 직접 보고 결정하는 건 맞아."
"면접은?"
"그것도 원래 절차야. 물론 신분만 명확히 확인하는 걸로 끝이지만. 너한테는 많이 물어봤다며?"
"다 들었어?"
"응, 대화 내용까지는 모르고, 진행 상황은 실시간으로 다 나한테 보고됐어."
"그래서, 결과는… 합격이야?"
"아버지랑 어머니 둘 다 만점으로 합격점을 주셨네. 호호호."
"웃음이 나와?"
"어험. 쿨럭. 미안하다고 했잖아."
"그래서 어쩔 건데?"
"뭐가 어째?"
"너희 부모님은 나를 예비 사위로 생각하고 계시잖아. 어쩔 거냐고?"
"걱정 마. 나 어렸을 적부터 천재라고 불렸어. 나 굉장히 똑똑한 여자야."
엄마!
오늘은 진짜로 여자를 한 대 때릴지 몰라요.
눈 감고 계세요.
"인상 구기지 마. 나도 다 생각이 있어."
"그래서 무슨 생각이냐고?"
"뭐, 대충 상황 보다가 다른 남자 생겼다고 하면 되지."
"그걸… 믿으시겠어?"
"아니면, 또 가출하면 되지."
"너 누구한테 맞아 본 적 없지?"
"어머, 어떻게 알았어?"
주먹이… 주먹이 부들거린다.
"휴우, 됐다. 내가 다시 이곳에 올 일도 없고. 곤란한 일 생기지 않게 알아서 처리해."
"그런데 태한아."
"왜? 나 진짜로 가 봐야 해."
"내가……."
"……?"
"내가 너 좋아하면 안 돼?"
왜지?
좀 많이 모자라고, 싸가지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연주언인데.
나를 빤히 쳐다보며 저런 말을 하는데.
정말 아주 살짝, 정말 아주아주 미세하지만 심장이 두근거렸다.
"안 돼!"
"왜?"
"그냥!"
"왜 그냥?"
"난 너 안 좋아해!"
"다른 여자 생겼어?"
"뭔 개소리야? 그리고 무슨 말이 그래? 다른 여자라니?"
"아니, 그냥. 물어보는 거잖아."
"너, 나 진짜로 좋아하는 거야?"
"조금. 재밌어, 너랑 있으면."
"휴우, 철 좀 들어라. 나, 간다."
"어디 가는데? 같이 갈까?"
"따라오면……."
"따라가면?"
주먹이 부들부들.
참자, 참아.
상대는 만리상단의 금지옥엽이다.
"따라오지 마. 나 지금 임무 수행 중이야."
"오! 멋지다."
"휴우, 연주언."
"응? 왜? 마음이 바뀌었어? 나도 같이 가도 돼?"
"고마웠다. 내 팔다리가 잘릴 위기에 도와준 거. 그리고 보석을 팔 수 있게 도와준 것까지. 이건 진심이다. 정말 고마워."
"그러지 마. 나 지금 갑자기 슬퍼지려고 해."
"잘 살아. 행복하게. 은혜는 어떻게든 갚을게. 하지만 우리가 다시 만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럼 간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관을 빠져나왔다.
살벌한 고수들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지만, 아무도 나를 막지 않았다.
그보다…….
음, 뒤에서 뭐라고 한마디라도 할 줄 알았는데.
연주언에게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설마, 우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됐다.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도 촌각을 다투는 중차대한 임무다.
빨리 가자, 섬라곡국으로.
그런데 진짜로 우는 건 아니겠지?
* * *
타타타타탓!
있는 힘껏 달려, 하늘을 날았다.
공기의 저항이 너무 거세 호신강기를 둘러야 했다.
좋다.
하늘을 난다는 건 정말 매번 느끼는 거지만, 꿈을 꾸는 것 같은 희열 그 자체다.
그렇게 나는 총 열세 번, 닷새 만에 섬라곡국에 도착할 수 있었… 아!
여긴 어디지?
앞에도 밀림이고, 뒤에도 밀림이며, 양옆도 밀림이다.
번쩍 뛰어 높은 나무 꼭대기로 올라가 사방을 둘러봤는데.
응, 다 밀림이다.
잘못 왔나?
다시 움직이긴 해야 하는데,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무도 없을 것 같던 이곳에서 사람의 기운이 감지됐다.
심지어, 여럿이고 나에게 다가오고 있다.
휴우, 다행이다.
사람을 만났으니, 야수궁으로 가는 길도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반후인 말대로 대상귀인패를 보여 주면, 넙죽 절을 하고 친절하게 안내까지 해 줄까?
생각만 해도 절로 웃음이 났다.
그런데 왜들 저렇게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거지?
나를 중심으로 석 장까지 좁혀 왔다.
거의 동물을 사냥할 때 포위하는 것과 같은 형국이다.
이방인인 나의 낯선 모습에 경계를 하는 것 같다.
그럴 수 있다.
일단 경계부터 풀게 해 줘야겠다.
내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보여 줘야 한다.
나는 잘생긴 얼굴로 미소를 가득 짓고.
응, 내 기준으로 나는 잘생겼다.
아무튼 미소를 짓고.
"하하하! 안녕하세요! 저는 중원에서 온 나태한이라고 합니다. 야수궁 반후인의 친구입니다. 나쁜 사람 아니니 모습을 드러내셔도 됩니다. 하하. 하하. 하하하!"
좀 과장되게 웃었다.
하지만 통했다.
여전히 잔뜩 경계의 빛을 띠고 있지만, 또 손에는 칼과 창을 쥐고 있지만,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서른 명가량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런데, 음…….
보통 사람들은 아니다.
병사? 전사?
아무튼 꽤 오랜 전투를 치른 경험이 눈빛과 온몸에 묻어난다.
어쩌면 더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마일라꾸 꽈이지(누구냐, 넌)?"
엥?
뭐라는 거지?
"뭐라고 하시는 건가요? 혹시 중원 말을 할 줄 아시는 분은 안 계신가요?"
"호이 아이(누구냐고 물었다)!"
제법 무섭게 호통을 친다.
음, 차원 이동을 하면 행운석이 통역의 기능을 발휘해 주는데, 내가 사는 세상에서는 작동하지 않나 보다.
"호이 아이! 호이 아이(누구냐고 물었다)!"
창을 내게 바싹 들이밀며 위협을 하는 사람들.
일단 한 대 패고 말을 할까?
됐다.
나랑 친한 건 아니래도, 대충 친구라 부를 수 있는 반후인이다.
그의 아버지가 통치하는 나라의 백성들인데, 오해가 좀 있다고 냅다 패 버릴 수는 없지 않겠나.
좋게 좋게 가자.
무엇보다.
스으으윽.
나에게는 대상귀인패가 있지 않은가.
그걸 꺼내 보여 줬다.
그러자, 앞에 있는 두세 명이 조심스레 다가와 신패를 요리조리 살핀다.
뭐라 뭐라 자기들끼리 말을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하하하! 알아보셨군요. 이제 저를 야수궁으로 안내해 주십시오."
그러자 사람들도 웃는다.
오해가 완전히 풀린 모양이다.
나를 향해 겨누었던 창과 칼까지 거두는 그들이었다.
역시 진심은 통한다니까, 하하!
잘생긴 내 얼굴이 한몫한 게 틀림없고, 하하하.
"모이엡 뷘 떼 쿵띠엔 콰잇밧(야수궁에서 보낸 첩자다)."
"눙 또인뎃반 닷 눈녹(그런데 바보인가 본데)? 하하하."
"그래, 맞아. 나, 너네 야수궁 왕자 녀석 친구라니까요. 하하!"
"우옹, 우옹(마셔, 마셔)."
"어? 이거 마시라고요? 오! 목말랐는데, 잘됐다. 고마워요. 하하."
벌컥벌컥.
물이 아닌 시원한 음료다.
습하고 더운 날씨에 살짝 짜증이 치밀었는데, 이들이 건넨 음료를 벌컥벌컥 마시니, 기분이 상쾌… 젠장!
독이다.
그것도 천독불침인 내가 저항 한 번 할 사이도 없이 당해 버릴 수밖에 없는 극독.
혼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