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아! 그 전에 한 가지만 저도 물어볼게요."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공자님."
"제가… 신분이 좀 특수해서요. 지금 나누는 대화의 비밀이 어디까지 보장되는지 궁금하네요."
중년의 상주가 특유의 멋지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이 자리에서 나누는 대화는 저희 세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만에 하나 이 자리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밖으로 유출된다면, 공자님께서 파시는 보석의 값과 동일한 금액을 보상하겠습니다. 약정서까지 작성해 드리겠습니다."
상주는 곧바로 약정서를 작성해 만리상단의 도장과 자신의 수인 그리고 여인의 수인까지 모두 찍어 나에게 주었다.
읽고 또 읽었지만, 확실한 약정서였다.
금액 역시 정확히 황금 2,000관이 기재되어 있었다.
만리상단이 괜히 만리상단이라 불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또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사실 내가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당연히 비걸개 신분 때문이다.
아무리 황금 2,000관이라지만, 이는 내 개인적인 일이다.
개인적인 일로 방에 피해를 줘서는 안 되기 때문에 신중을 기한 것이다.
뭐, 약정서까지 받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 뭐든 물어보시지요. 솔직하게 모든 걸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럼 우선 공자님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하하. 이름요. 나태한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이, 생일, 가족 관계.
고향, 사문, 직위, 1년에 돈을 얼마나 버는지.
거지지만 구걸을 하지 않는다는 말에, 보석을 볼 때도 꿈쩍하지 않던 두 사람이 미세하지만, 분명히 놀란 얼굴을 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은 누군가요? 절친한 친구라던가, 가족과 같은 사람이요. 슬픔과 기쁨을 모두 솔직히 나눌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나요?"
"네, 있어요. 낭만개라고요."
"낭만개라는 분에 대해 조금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나 공자님?"
"이건 진짜 비밀인데……. 하하."
상주와 여인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놀라지 마세요."
내 말에 궁금증이 더한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고.
"낭만개 아저씨가… 어쩌면 천하제일인일지도 몰라요."
음, 안 놀라네.
고개까지 갸우뚱한다.
신뢰하기 힘들다는 얼굴들이다.
추가 설명이 필요하겠군.
"아마 믿기 힘드실 거예요. 그런데 사실이에요. 하남 신양 황천이라는 시골의 분타주인데, 황천이 워낙 시골이다 보니 이결제자도 아닌 일결 매듭의 분타주예요. 그런데 그 양반이 말입니다, 대략 20년 전에 이미 화경의 벽을 깨고 초인의 경지에 들어섰습니다."
순간, 상주와 여인이 동시에 크게 놀라움을 표했다.
"개방에서도 방주님과 장로들을 비롯한 몇 명만이 아는 극비입니다."
"아! 네. 다시 말씀드리지만, 지금 나눈 대화는 절대 비밀이 유지될 것입니다."
"네, 그러셔야죠. 하하."
"그런데 나 공자님과 낭만개 대협은 정확히 어떤 관계입니까?"
"새아빠…는 아니고. 비슷해요. 낭만개 아저씨와 돌아가신 어머니가 서로 많이 의지하고 사이좋게 지내셨거든요. 그래서 아저씨도 저를 아들처럼 대해 줬고, 저도 어머니 돌아가신 후 유일하게 의지하는 게 아저씨고."
"아! 그렇군요."
놀라도 꽤 놀란 모양이다.
대화를 계속 이어 갔음에도 두 사람은 놀란 마음을 쉬이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보석 파는데 이런 것까지 알아야 해요?"
"많이 알면 알수록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저희도 안심하고 확실하게 값을 지불할 수 있으니까요."
"뭐, 그래요. 비밀만 확실히 지켜 준다면, 무엇이든 답하지 못하겠어요."
내 무공에 관해서도 물었다.
경지는 어떤지, 내공은 얼마만큼 보유하고 있는지도 물었고.
또 한 번, 두 사람은 조금 전 낭만개 아저씨의 이야기를 했을 때만큼이나 놀라야 했다.
"휴우, 나 공자님은 알면 알수록 놀라운 분이시군요. 근 10년 동안 오늘만큼 놀란 적이 있었을까 싶습니다."
"하하! 뭘 대단한 거라고요. 무림 어딘가에는 저보다 더 대단한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고요."
"아마 없을 겁니다. 제가 무림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어디 나 공자님 같은 분이 또 있을 수 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하하."
상주와 여인은 놀란 마음을 잠시 진정시킨 후에야 다시 질문을 이었다.
그리고 이번엔 여인의 차례였다.
"혹시 혼인은 했나요?"
음, 이건.
이 세상의 이야기만 해야 한다.
구넬샤찌국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아니요."
"연모하는 여인이 있다던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여인은요?"
"없어요."
"혹시 과거에 사랑을 했다가 낳은 아이는요?"
"없어요, 총각이 애가 어딨겠어요?"
"모독이세요?"
"어라? 그런 단어도 아세요? 모태 독신 말하는 거죠?"
"네, 요즘 많이들 쓰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가끔 그런 말들을 쓰곤 해요."
"아, 네. 그렇군요. 그게… 맞죠. 모태 독신. 여덟 살에 비걸개 후보생이 됐고, 작년에서야 정식 비걸개가 됐으니, 누군가와 사랑하고 그럴 시간 자체가 없었어요."
"그럼 혹시 혼인을 하면 자녀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아이는 제가 낳나요? 아이 낳는 것만큼은 절대적으로 아내의 말에 따라야겠지요."
내 대답에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이며 상념에 잠기는 여인.
곧바로 상주가 물었다.
"앞으로의 계획이나 꿈 같은 것은 있나요?"
"저, 그런데요."
"네, 나 공자님."
"보석을 좋은 값에 매입해 주신다고 하니, 물으시는 것에 대해 제가 답을 하긴 하는데. 좀 많이 이상하긴 하네요. 이게 보석을 파는 문답이 아니라, 마치… 뭐더라? 이게 꼭… 음, 그러니까… 뭐지? 뭐였더라? 그렇지, 맞다! 꼭 무슨 사위 면접 보는 것 같다는 기분이 계속 들어요."
움찔.
움찔?
그냥 한 말인데.
분명히 두 사람 다 순간 움찔하는 게 보였다.
뭐야?
왜 움찔하는데?
곧바로 상주가 나에게 사과했다.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사소한 것까지 많이 알면 알수록 저희도 안심하고 값을 치를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는데, 이미 충분히 들었으니 더는 공자님을 귀찮게 해 드리지 않겠습니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사과하실 필요는 없어요. 정말 큰돈인데, 상주님 말씀대로 이게 역모를 꾸미는 자들 손에 들어가면 큰일이잖아요. 저라도 꼬치꼬치 캐물었을 거예요. 잘하시는 겁니다. 충분히 이해하고요."
얼른 돈 달라는 소리다.
그때 여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을 해 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 답하지 않으셔도 금액은 지불해 드릴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궁금해서요. 워낙 대단한 공자님께서 앞으로 어떤 일을 하실지 궁금해서 못 참겠어요."
난 그녀를 향해 씩 웃으며 말했다.
"말 한 필 살까 고민 중이에요."
"말, 말이요?"
"네, 말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이 있는데, 그래도 계속 걸어 다닐 수는 없고. 하하. 돈도 많은데 말 한 마리 정도는 타고 다녀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때 상주가 나에게 말했다.
"중원 전역에 저희 만리상단의 상단과 표국이 수천 개가 넘습니다. 중간중간 이들이 쉬고 말을 바꿔 탈 수 있는 역참도 수천 개가 있고요. 저희가 드리는 신패만 가지고 있으면, 그 어느 곳에서든 원하는 말을 갈아타실 수 있습니다. 무료입니다."
"무, 무료요?"
"원하신다면 저희와 거래해 주신 보답으로, 최고의 명마를 한 마리 선물해 드리겠습니다."
"명마… 하아! 생각만 해도 좋네요."
"당장 말 한 필을 대령하라 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하하."
"저희도 이번 거래를 통해 엄청난 이득을 얻게 되었습니다. 또한 공자님과 계속하여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마음의 표현이라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두 분은 정말 좋으신 분들이시네요. 상인이라고 하면 계산적인 줄만 알았는데."
"어려서부터 가장 큰 장사는 사람의 마음을 사는 장사라 배웠습니다. 공자님께서 저희 만리상단을 좋게 봐 주신다면, 이번 거래는 황금 2,000관보다 훨씬 더 성공한 거래가 되었다는 뜻이겠지요."
분위기가 좋았다.
상주도, 아름다운 중년의 여인도 그리고 나도.
모두 진심에서 우러나와 기쁘게 웃을 수 있었다.
상인이 이렇게 좋은 사람인 줄 알았으면, 진즉에 좀 친해질 걸 그랬다.
나중에 우리 개방 거지들에게 객잔 같은 데보다 상단 같은 곳에 가서 구걸하라고 귀띔도 좀 해 줘야겠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많으니, 동냥도 많이 해 주지 않겠나.
"그런데 공자님, 말 말고요. 장례 계획 같은 거는 없어요?"
여인이 물었다.
그녀는 정말 나에 관해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다.
뭐, 미녀가 관심을 가져 준다는데 나쁠 건 없고.
"그런데 좀 창피해서… 하하."
"절대 비밀 엄수 아시잖아요. 제 목이라도 걸라면 걸게요. 너무 궁금해서 그래요. 공자님이 앞으로 어떤 목표를 가지고 무림을 활보하실지요."
결국, 부끄럽지만 여인의 간절함에 속마음을 말하고 말았다.
"천하제일인."
반응이, 음…….
웃을 줄 알았는데, 아니다.
경악한 얼굴을 하는 두 사람이었다.
심지어 상주는 목소리까지 떨렸다.
"진심… 진심입니까?"
두 사람의 반응이 나를 더 부끄럽게 만들었다.
어색해 머리까지 긁적이며.
"꿈은 클수록 좋다고 하잖아요. 진짜 천하제일인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최대한 낭만개 아저씨에게 근접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천하제일인이 되어 무얼 하고 싶으신 건데요?"
"우리 집 가훈이 ‘은혜를 갚아라’입니다.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들께 은혜를 갚고 싶어요. 열 배, 스무 배, 백 배로요."
여인이 감격한 얼굴로 혼잣말을 하듯 말했다.
"좋은 분이시네요. 나 공자님은요."
"웃으실 줄 알았는데, 진지하게 얘기를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거래는 대성공이었다.
난 그날, 만리귀룡패(萬里貴龍牌)를 손에 쥘 수 있었다.
* * *
귀보교상을 나왔다.
상주와 여인이 1층까지 나를 배웅해 주었다.
단순히 보석을 파는 거래가 아니었다.
좋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크하하하하!
만리귀룡패, 크하하하하하!
귀보교상에서 웃음을 참느라 죽는 줄 알았다.
와!
생각해 보라.
개방 역사상 나만큼 돈이 많은 거지가 있었겠는가?
고금을 통틀어 가장 부자인 거지가 바로 나다, 나!
그냥 숨만 쉬어도 웃음이 나왔다.
걷는 걸음은 마치 깃털 같아서, 절로 움직이는 것처럼 가벼웠다.
콧노래도 끊이지 않았고.
아! 섬라곡국이고 뭐고, 며칠만 돈을 미친 듯 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돈이 많으니 세상이 다 아름다워 보이는 건 또 뭘까?
웃음은 계속 나오고.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그런 나를 미친놈 보듯 봤지만, 그마저도 아름다웠다.
그런데 그때.
이 날아갈 듯 기쁜 내 기분을 잡치게 하는 일이 생겼다.
수많은 이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바쁘게 오가는 도읍의 대로.
그곳에 한 대의 마차와 수십 마리의 말들이 들어섰고, 그 무리로 인해 모두가 길 양옆으로 비켜서야 했기 때문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커다란 마차를 막아설 수는 없지 않겠는가.
문제는, 뭔 놈의 마차가 저리 화려한가 하는 거였다.
딱 봐도 엄청난 명마인 네 마리 백마가 끄는 마차였고.
마차 자체도 그냥 황금으로 도배를 했다.
심지어 마차를 호위하며 말을 탄 사람들.
고수다.
내가 그 경지를 파악하기 힘든 고수가 무려 스무 명이 넘는다.
뭐야?
황제의 딸이라도 납신 건가 싶을 정도로 화려한 행차다.
돈은 나도 많은데.
괜히 배알이 뒤틀렸다.
뭐 어쩌겠는가?
기분 잡치게 했다고 따질 수도 없고.
빨리 그 화려한 행차가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 어라?
마차가 멈추어 섰다.
그것도 바로 내 앞에서 멈췄다.
뭔가 싶어 의아해하고 있을 때.
황금으로 도배된 그 마차의 문이 열렸고.
응?
진짜 공주라도 탄 거였어?
하얀색 비단옷에 금으로 수실을 화려하게 수놓은 옷을 입은 여인이 그 마차에서 내렸다.
미녀다.
아니, 이곳 중경은 뭔 놈의 미녀가 이리도 많대?
조금 전 귀보교상에서 보석 감정을 하던 중년의 여인도 엄청난 미인이었는데.
지금 마차에서 내리는 젊은 여인 또한 만만치 않다.
미인국에 떨궈 놔도 꿀리지 않을 정도의 미녀고, 다시 중원에서 천하제일 미녀로 거론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미녀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마차의 행렬도 멈추었겠다, 나는 내 갈 길을 가려고… 엥?
저 여인은 왜 내 쪽으로 오지?
그것도 나를 빤히 쳐다보며 걸어온다.
그러더니, 내 앞에 멈추어 서기까지 했다.
난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맞다.
이 여인이 분명 나를 찾아온 거다.
어리둥절했다.
그래서 손가락 끝으로 나를 가리키며 표정으로 물었다.
사람 잘못 본 게 아니라, 나를 찾아온 게 맞냐고.
그러자 그녀가 하는 말이…….
"뭐? 왜 그래? 처음 본 사람처럼."
얘… 얘 말이다.
분명 처음 본 게 맞는데, 목소리와 말투가… 아!
연주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