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춥다.
겨울이다.
동굴 밖으로 나왔을 때부터 겨울이었다.
그래서 스무 살이 됐다.
그런데 내가 스무 살 맞나?
소인국에서 1년, 또 칵뉴족의 땅에서, 구넬샤찌국, 도토리국에서도 각기 1년씩.
스물네 살인가?
됐다.
그냥 스무 살 하자.
"오! 역시 높군. 딱이야."
물어물어 인근에서 가장 높은 산이 있는 곳으로 왔다.
달리자.
난 산의 정상을 향해 있는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추운 날씨 때문에 또 잔뜩 내린 눈 때문에 미끄러웠지만, 그런 것들이 내 걸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내 소중한 시간이 아까운 것도 아까운 것이지만, 그것이 아니라도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탈혼독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을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붉은 코뿔소의 뿔을 구해 사천당가로 가야 한다.
아! 그나저나 산이 높기는 지랄맞게도 높구나.
물론 힘이 들거나 지치는 건 아니다.
나는 달릴수록 더 속도를 냈고.
힘은 차고도 넘치며, 근육은 강철과 같이 단단하다.
그저 지루할 뿐이다.
이럴 때는 외쳐 줘야지.
"우가쿠가! 붕가차차! 우가쿠가! 붕가차차!"
칵뉴족의 구호를 외치자, 더 신나게 산 정상으로 달릴 수 있었다.
그렇게 단숨에 도착.
드넓은 세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 멋지다.
사람들이 이래서 등산을 하는 거구나, 싶었다.
태양을 기준으로 방향을 점하고.
윙슈트 장착.
처처처처척!
캬아아!
신형이라 확실히 몸에 감기는 감촉도 다르군.
일단 바람에 몸을 맡기기 전, 계산부터 하자.
윙슈트를 전문으로 만드는 드워프의 말에 따르면, 기존 윙슈트의 최대 비행 거리는 76리(30km)였다.
하지만 신형 윙슈트는 최대 130리(50km)까지 비행이 가능하다고 했다.
거기에 더해, 내 내공이 보조가 되고 높은 산에 오를수록 더 먼 거리도 비행이 가능할 것이라 했다.
이곳에서 섬라곡국까지의 거리는 대략 5,000리(2,000km).
드워프트 세계만의 속도 계산법으로 최대 시속 200킬로미터로 날 수 있다고.
속도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명마라는 말들의 전력을 기준으로 최대 세 배가 넘는 속도로 날 수 있다.
구불구불 돌고 도는 게 아니라, 그냥 직선으로 날아가기에 더더욱 빠르다.
아!
사기군, 이건 사기가 맞다.
산에 오르고, 잠도 자고, 밥도 먹고, 이것저것 해도.
1년?
웃기는 소리다.
오가는 시간만 따져 늦어도 한 달이고, 빠르게 잡으면 열흘도 안 되어 주파할 수 있다.
와!
그냥 웃음만 나온다.
그냥 이대로 날아서 곧장 집으로 가고 싶지만.
섬라곡국으로 가야지.
낭만개 아저씨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뭐, 오늘도 설렁설렁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어디서 낮잠이나 자고 있겠지.
기다리세요, 낭만개 아저씨.
저, 이제 고수의 반열에 올랐다고요.
캬아!
생각만 해도 즐겁다.
상전벽해처럼 변해 버린 지금 내 모습을 보고 놀랄 아저씨의 표정이 말이다.
그걸 보기 위해서라도 빨리 다녀와야겠다.
하지만 곧바로 섬라곡국으로 갈 수는 없다.
가기 전에 들를 곳이 있다.
보석부터 해결해야 하지 않겠나.
다행히 만리상단의 본단과 귀보교상이 자리한 곳은 중경.
섬라곡국으로 가는 방향에서 아주 살짝 떨어진 곳이다.
그곳으로 먼저 가야 한다.
방향을 계산하고.
심호흡도 하고.
타타타타타타타탓!
있는 힘껏 달려!
나는 하늘을 날았다.
* * *
만리상단 귀보교상(貴寶交商).
중경은 한겨울인데도 날이 따뜻하다.
같은 중원인데 신기한 일이다.
만리상단의 본단과 꽤 떨어진 곳에 귀보교상이 존재했다.
도읍에서도 가장 번화한 곳에 자리한 귀보교상이다.
누가 귀한 보석을 처리하는 곳 아니랄까 봐, 경계도 엄청나게 삼엄하다.
도검은 기본이고 창과 활, 심지어 도토리국에서나 봤던 석궁을 들고 있는 무사들도 있다.
숨김이 없이 그냥 다 드러내 놓고 말이다.
여차하면 그냥 피떡을 만들어 놓겠다는 경고다.
한 명 한 명 그 경지도 대단한 자들이다.
만리상단은 상단임에도 정말 엄청난 고수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난 보석만 팔면 할 일 끝이다.
살짝 긴장이 되긴 했다.
경계 무사들 때문이 아니라, 이 보석의 가치가 얼마나 될까 하는 떨림 때문이다.
그렇게 설렘과 긴장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귀보교상으로 다가갔는데.
어라?
살벌한 무인이 아닌, 어여쁜 아가씨가 나를 맞이한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공자님?"
형식적인 인사나 미소가 아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친절함이 보인다.
역시, 비싼 데는 비싼 값을 하나 보다.
"보석을 팔러 왔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그녀의 뒤를 따라 귀보교상 안으로 향했다.
커다란 대청이 나왔고, 그곳으로부터 여러 개의 작은 방들이 이어졌다.
한 곳의 문이 살짝 열렸다가 닫혔는데, 그곳에는 그냥 대충 봐도 엄청나게 부자인 사람이 누군가와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마도 나처럼 보석을 팔거나 아니면 사려는 사람인 듯하다.
그리고 나는 작은 방 여러 개 중 한 곳으로 안내를 받아 들어갔다.
곧바로 중년의 사내가 와 나에게 인사를 건넸고.
간단한 말 몇 마디를 나눈 후, 나는 전낭 속에 있는 200개의 보석 중 한 개만을 꺼내 그에게 보여 주었다.
중년의 보석상은 내가 건넨 보석을 보고 또 보고, 계속 보고.
아니, 보석 하나 감정하는 데 평생을 보낼 기세다.
뭐야?
전문가 맞아?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식은땀까지 흘리기 시작하는 중년의 보석 감정가.
음, 뭐지?
그때 그가 한없이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공자님,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이 보석은 제가 감정할 수 없는 귀한 보석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저희 귀보교상의 상주가 직접 감정을 하고 정확한 값을 말씀드릴 것입니다."
결국 나는 작은 방을 나와 다른 곳으로 가야 했다.
어디로 가나 싶었는데, 3층이었고 방 위에는 귀빈실이라는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상당한 미녀들이 차와 다과를 내왔고.
곧바로 상주라는 중년의 사내가 귀빈실로 들어왔다.
그런데, 딱 봐도 대단한 고수다.
보석 감정사가 저런 무공은 왜 익힌 걸까?
정확한 경지를 파악하기 힘들 정도의 고수다.
그보다,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데 묘하게 범접하기 힘든 위엄까지 가지고 있다.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니군.
만리상단에 인재가 많다는 말은 귀가 따갑게 들었지만, 확실히 귀보교상의 상주는 대단한 인재라는 느낌을 받았다.
뭐, 그건 그거고.
난 보석만 팔면 되니까.
그렇게 형식적인 인사말을 주고받고, 간단한 대화까지 나눈 후.
다시 보석 감정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인간도 계속 보고, 또 보고.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드워프 중에서도 최고의 보석 세공 드워프가 만든 보석 아니겠는가.
그래도 좀 많이 지루한 시간이었는데.
"공자님."
"네."
"제가 평생 자부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
"천하에 모르는 보석이 없다고 자부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처음 보는 보석이군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사람을 더 불러 함께 보석을 감정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저는 제값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얼마든지 부르시지요."
"감사합니다."
곧이어 시비가 누군가를 부르러 갔고, 잠시 후 한 여인이 귀빈실로 들어왔는데.
음… 뭐지?
풍기는 분위기로만 봤을 때는 중년의 여인인데, 외관은 20대 초중반으로 보인다.
심지어 아름답다.
내가 아름답다고 표현한다는 것은, 그 미모가 구넬샤찌국의 부인들과 비교할 만한 수준이라는 뜻이고.
이는 다시 중원의 기준으로 봤을 때 천하에서 손에 꼽힐 정도의 미녀라는 뜻이다.
무슨 아줌마가 저렇게 예뻐?
신기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곳은 만리상단이 직영하는 귀보교상이다.
상주도 그렇고, 저 여인도 그렇고.
그래, 그냥 만리상단이니 이런 인재들이 있다고 치고 넘어가자.
나는 보석만 팔면 된다.
다시 간단한 인사말이 오가고.
이번엔 두 사람이 보석을 함께 감정하기 시작했다.
대략 한 식경이 지난 후에야 두 사람은 보석에서 눈을 떼고 나를 보았다.
아름다운 중년의 여인이 물었다.
"혹시 이런 보석이 더 있나요?"
난 고개를 끄덕인 후.
투투투투투투투.
전낭에 있던 보석을 모두 탁자 위에 쏟아 냈다.
사실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곳 아니면 이 보석을 처분할 곳도 없다.
연주언의 말도 있었고, 또 이곳이 만리상단이라 이렇게 대범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뭐지?
감숙의 금금상단 기억하는가?
감숙에서는 가장 큰 보석상이었고, 심지어 취급하는 대부분의 보석이 서역에서 들여오는 귀한 보석들이다.
하지만 그곳의 점주는 내가 가진 보석 중에서 가장 볼품없는 것 하나에도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놀라고 힘들어했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있는 두 사람.
200개의 보석을 탁자 위에 와르르 쏟아 냈는데, 놀라기는커녕 너무나 담담하기만 했다.
만리상단이라서 그런 건가?
아무리 만리상단이라도 그렇지, 이건 이 땅에서는 아예 볼 수 없는 보석들 아니겠는가?
조금이라도 반응이 있을 줄 알았는데.
설마, 보석의 값을 싸게 책정하려고 일부러 참고 있는 건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 때였다.
"저희가 감정한 값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떨렸다.
얼마를 부를지.
"네, 말씀해 주세요."
여전히 담담하지만, 보석 때문이 아니라 반가운 손님을 만나 기쁘다는 얼굴로.
또 한없이 상냥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여인이 말했다.
그래서 더 떨렸고.
결국 그녀가 보석의 값을…….
"보석 하나에 금자 1,000냥을 드리겠습니다. 총 200개니, 금자 20만 냥이겠고, 황금으로 따지면 2,000관(7,500kg)이 됩니다."
관(貫)?
냥이 아니라 관?
내가 뭘 잘못 들었나?
정신 바싹 차리자.
황금 2,000관이면 얼마지?
계산이 안 된다.
아니지.
저 여인이 다 말해 줬잖아.
금자 20만 냥이라고.
웃음이 나왔다.
웃을 상황도 아니고, 그런 자리도 아니고.
그래서 참으려고 했는데, 그냥 계속 웃음이 나왔다.
미친!
이건 들고 다니지도 못할 돈이잖아.
와!
와와와!
연주언, 고맙다!
팔다리 잘릴 거 막아 준 은혜가 아니라, 넌 그냥 내 평생의 은인이다.
연주언이 옆에 있었다면, 와락 끌어안고 뽀뽀 세례라도 해 줬을 만큼 흥분되고 기뻤다.
아니, 그런 정도로는 지금 내 감정의 100만 분의 1도 표현할 수 없다.
황금이 2,000관이다, 2,000관!
정신 차리자!
"금을… 어험, 황금을 들고 다닐 수는 없고. 전표로 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얼마짜리 전표로 드릴까요?"
"금자 100냥? 1,000냥? 1,000냥은 잔돈으로 바꾸기는 힘들겠지요?"
"뭐로 들고 다니셔도, 두툼한 책자를 몇 권씩 짊어지고 다니는 것보다 무거울 겁니다."
아! 이건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것저것 가지고 다니는 게 많은데.
그러자 상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희 만리상단의 신패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그것 하나만 있으면, 천하에 산재한 만리상단의 전장 어느 곳에서도 언제든 원하시는 만큼 돈을 가져다 쓰실 수 있습니다."
"원하는 만큼요?"
"네, 그렇습니다. 쓰신 돈은 저희가 알아서 예치한 돈에서 빼 드릴 것이고, 그 문제에 관해서는 철전 한 닢의 착오도 없을 터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좋다.
좋아.
너무 좋아서 체면이고 뭐고 그냥 팔짝 뛰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노래를 부르고 싶다.
"그런데……."
하지 마!
왜 갑자기 ‘그런데’가 나와!
안 돼!
지금 내 기분 최고란 말이야!
절대!
절대로 안 돼!
"뭐, 뭐죠?"
불안하다.
불안하면 안 되는데.
불안해.
하지만 상주는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의 말을 이었다.
"실례지만 몇 가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뭘요? 그냥 빨리 거래를 마치고 싶은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절차입니다."
"절차요? 보석 파는데 절차가 있어요?"
"물론입니다. 그저 금자 몇백 냥이나 몇천 냥 하는 정도의 보석이라면 모를까, 지금 공자께서 파시려는 보석은 무려 작은 도읍 하나를 통으로 살 수 있는 값어치의 보석 아니겠습니까?"
"그게 왜요?"
"저희 상단이 만들어지고 수백 년 동안 지금과 같은 엄청난 금액의 거래가 수없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정상적인 거래였지만, 간혹… 역모를 꾀하는 자들의 역모 자금을 위해 썼던 돈도 있었고, 마교나 사파에서 무림을 정복하기 위해 유통하려던 돈도 있었지요. 그때마다 저희 만리상단은 큰 위기를 겪어야 했습니다."
"음,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너무 부담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간단한 신상과 이것저것 사소한 질문을 몇 가지 드리는 게 전부니까요."
금자도 아닌 황금 2,000관이다.
무엇을 물은들 대답하지 못할까!
사내아이들이 이차성징이 오면 방문 꼭꼭 걸어 잠그고 몰래 하는 그거 있잖은가.
그래, 그걸 처음 한 게 언제였는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다.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나는 시원하게 말했고.
그렇게 보석을 팔기 위한 면접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면접, 음… 그러니까.
조금 이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