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아! 억울하다.
진짜 모자라도 뭔가 많이 모자라 보였다고!
됐다.
억울하면 어쩔 건가?
내가 동태 눈깔이었던 건 사실인데.
그러고 보니 내가 계속 걔를 무시했었는데, 얘는 그런 나를 가지고 논 거였나?
모르겠다.
그렇게 나쁜 애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뭔 속셈이었지?
젠장!
다시 볼 일 없다.
신경 끄자.
"너무 탓하지 말게, 속리자. 나도 아까 보고 깜짝 놀라긴 했어. 그렇게 변용한 연주언을 누가 천하 2대 미녀라 생각하겠나? 태한이가 깜빡 속을 만했지."
"음, 뭐. 그래.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 그 얘기는 그만하지."
"그런데 왜 이제야 구하러 오신 거예요? 아무리 은밀한 곳에 있었다고 해도, 이건 너무 늦은 거 아니에요?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고요."
"죽긴 왜 죽어? 흑풍절명사 마노 대협과 만리상단 고수들이 지켜보고 있었는데."
"흑, 흑풍절명사요? 아까 만났던 그 검은 옷 입은 노고수요?"
"그래, 그가 다 지켜보고 있었다."
"언제부터요?"
"연주언이 기가 막힌 방법으로 가출을 했지만, 어디 만리상단의 손바닥을 벗어나는 게 그리 쉬운 일이겠느냐? 사흘 만에 찾았다고 한다. 너희가 동굴에 갇히고 이틀이 되던 날이었지."
"그럼 그때부터 우리가 거기에 인질로 잡혀 있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렇지."
"무림맹에서도요?"
"만리상단에서 곧바로 소식을 전해 왔다. 네가 포함되었다는 사실까지 알아서 나와 순화자가 직접 무림맹의 무력대를 이끌고 온 것이고."
"그런데 왜 이제야 구한 거예요?"
"만리상단주가 직접 우리를 찾아와 부탁했다."
"무슨 부탁을 했기에 넉 달이 넘게 우리를 그 위험한 곳에 그냥 방치한 건데요?"
"인명 피해가 없는 한, 시간을 좀 두고 지켜봐 달라고 하더구나."
"두 명이나 죽었어요."
"그건 흑풍절명사가 너희를 발견하기 전의 일이고. 그 이후에는 아무도 죽지 않지 않았느냐? 중간에 죽은 배신자 녀석은 죽어 마땅한 놈이었고. 만약 도적놈들이 무고한 인명을 없애려 했다면, 우리도 진즉에 나섰을 것이다."
"아니, 만리상단주는 도대체 왜 그런 부탁을 한 거래요?"
"똑똑하지만 아직 철부지인 딸이 고생을 좀 했으면 한다고 하더라."
"그걸 동의했어요? 연주언 철들게 하려고 35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 공포 속에 덜덜 떨며 고생한 거는요?"
"쯧쯧. 너 진짜 머리를 다쳤냐? 왜 생각이 그리 일차원적이냐?"
"제가 뭘요?"
"상대는 만리상단이야. 그것도 만리상단주가 무림맹에 정식으로 그런 일을 부탁하면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말을 꺼냈겠느냐?"
"그, 그럼… 보상?"
"그래, 내가 그 인질 중 한 명이었다면, 이제야 구하러 온 것을 탓하는 게 아니라, 너무 빨리 구하러 온 것을 욕할 정도로 엄청난 보상을 그들에게 해 줬다."
"얼마나요?"
"감금 1일당 금자 한 냥."
"허걱! 일당이… 금자 한 냥? 은자로 치면 100냥? 일당이?"
순화자와 속리자가 놀란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 젠장!
진짜 좀 더 갇혀 있었어야 하는데.
며칠만이라도 더 갇혀 있었어야 했어.
어라?
그런데 이거.
"전 받은 게 없는데요? 한 푼도 못 받았어요."
"개방에 이미 전달했다. 넉 달 하고 보름, 금자 135냥."
"그걸 왜 개방에 줘요? 인질로 잡혔던 건 전데."
"억울하면 너희 방주한테 가서 따져. 방주가 자기한테 달라고 해서 만리상단에서도 너네 방주한테 준 거니까."
아! 젠장.
비걸개가 삼류 도적들에게 인질로 잡혔다는 것도 쪽팔린데, 그걸 어떻게 따지나?
됐다.
내 전낭 안에는 엄청난 보석이 가득하다.
잊자, 잊어.
금자 135냥 따위는…….
은자로 치면, 13,500냥……. 빌어먹을 방주!
"처음에는 한 달 정도만 고생시키려고 했는데, 갑자기 연주언이 의술을 배우는 바람에 시간이 조금 더 지체된 거다. 뭐, 그게 석 달이 넘었지만 말이다. 너도 의술을 배웠다며?"
"네, 기초 정도예요."
"그 수준이 아닌데?"
이 노인네들, 내 경지를 알아보고 있다.
그냥 나를 보는 눈이 탐욕에 젖어 이글거린다.
이건 분명 나에게 뭔가를 시키려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흥! 웃기지들 마시라고.
당신들이 수인까지 찍은 각서가 내 품에 고스란히 있단 말이야.
당신들 수작에 더는 넘어가지 않아.
무엇보다 나는 방심하지 않는다.
"어떤가?"
"뭐가요?"
"탈혼독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나?"
"뭐, 좀 심각하긴 하더라고요. 제가 웬만한 독에 내성을 가지고 있는데, 탈혼독은 막지 못했어요."
"내성? 독에 내성이 있어?"
"그런 게 있어요. 너무 궁금해하지 마세요."
"예나 지금이나 너는 참 비밀도 많다."
"네, 많아요. 그리고 안 알려 줄 거니까, 물을 생각 마시고요."
"그건 됐고. 탈혼독 때문에 지금 천하가 난리다. 네가 당한 일과 비슷한 일들이 천하 각지에서 계속 발생하고 있어. 벌써 7,500명이 죽었다. 그중 2,500명은 자살이다. 탈혼독에 당해 평생 모았던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이,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지."
젠장!
정신 똑바로 차리자.
이 노인네들이 본격적으로 작전을 시작했다.
내 착한 마음을 자극해 이용하려는 거다.
응, 안 통해.
무림맹에 널리고 널린 게 고수인데, 왜 그걸 나한테 시키려고 해.
"사천당가에서 해독약 만들었다면서요? 그거 대량으로 풀어요. 그러면 지금처럼 큰 희생은 따르지 않을 거 아니에요."
"해독약이 완성되긴 했지. 그런데……."
뭐?
어쩌라고?
"해독약 한 알을 만드는 데에 쓰이는 약재의 값이 금자 스무 냥이고, 만드는 시간만 해도 한 달이 넘게 걸린다."
뭐야?
뭐 그딴 해독약이 다 있어?
무슨 영약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탈혼독은 대량 생산을 하는 것 같던데요?"
"맞아, 탈혼독은 싸고 빠르게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지. 반대로 해독약은 비싸고 만드는 데에 엄청난 시간과 돈이 필요해."
"그럼 어떻게 되는 건데요?"
"어떻게 되긴? 백성들이 계속 죽어 나가는 수밖에 없지. 자살한 이들 중에는 어린 자녀들을 품에 안은 채 함께 생을 마감한 일가족도 있었네. 불쌍하지. 불쌍해."
응, 안 해.
당신들이 해.
또 나를 자극한다.
하지만 절대 안 넘어간다.
왜 내가 하냐고!
당신들이 해.
"안타깝네요."
"그렇지?"
"네."
"자네가 조금만 힘을 보태 주면 그런 불쌍한 사람들이 죽는 걸 막을 수 있을 텐데."
"아! 저도 그러고 싶은데. 어쩌죠? 제가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서요. 무림맹에 고수 많잖아요. 두 어르신께서 직접 나서시면 더없이 좋을 테고요."
뻔뻔하게, 그렇게 정말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까지 지으며 말했다.
순화자와 속리자가 대놓고 드러내진 않지만, 미세하게 인상을 구기는 게 보였다.
큭큭큭.
어디 나를 또 부려 먹으려고.
이젠 안 통합니다.
돌아들 가세요.
웃음이 나왔다.
당황해 말문까지 막혔나 보다.
순화자와 속리자가 잠시 입을 굳게 닫고 서로 눈까지 마주친다.
응, 뭐든 해 보세요.
절대 안 넘어갑니다.
"걸이번, 아니 나태한 소협."
"갑자기 왜 그러세요? 소협이라고 부르기까지 하고?"
"자네 집안의 가훈 있지 않은가?"
"가, 가훈……."
젠장!
뭔가, 뭔가 틀어졌다.
"상취개 장로에게 들었네. 자네 집안의 가훈이 은혜를 입으면 갚으라는 것이라고. 맞나?"
안 돼!
가훈은 왜 들먹여!
상취개 이 주정뱅이 거지 같으니라고!
또 술 얻어 마시고 내 정보를 다 불었어?
젠장할!
"각서… 두 분이 직접 작성하고 수인까지 찍은 각서가 제게 있습니다."
"지금 각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네. 은혜와 보답에 관한 이야기 중 아닌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가 그럴수록 두 노인네의 얼굴에는 승자의 미소가 점차 짙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자네를 구했네."
"구해 주지 않으셨어도, 저 스스로 도둑놈들을 물리칠 수 있었어요."
"물리칠 수 있었지만, 결국은 우리가 자네를 구했지. 그건 변함없는 사실이네."
"그, 그게……."
"이보게, 태한이. 우리는 자네에게 강요하는 게 아니라네. 은혜를 입은 사람이 보답을 하는 건 그 사람의 자유야. 그리고 세상천지에 가훈을 다 지키며 사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나? 그러니 부담 갖지 말게."
"순화자의 말이 맞아. 부담가질 필요 없어. 뭐,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는 많은 이들이 탈혼독에 중독되어 재산을 빼앗기고 목숨을 잃고 있겠지."
이 노인네들 말이다.
작정을 하고 온 거다.
그리고 난, 젠장!
또 당해 버렸다.
"왜 나죠? 그게 이해가 안 돼요.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게 고수고, 무림맹에는 저보다 뛰어난 고수들이 차고 넘치잖아요. 그런데 왜 저여야만 하냐고요!"
억울한 마음에, 또 당했다는 울분에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하지만 두 노인네는 놀라지 않았다.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라도 알았다는 듯,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자네가 대상귀인패(大像貴人牌)의 주인이지 않은가?"
대상귀인패?
갑자기 여기서 대상귀인패가 왜 나와?
야수궁 야수왕의 여덟 번째 아들, 그 소만 한 늑대 열랑을 데리고 다니던 넉살 좋은 그 녀석이 준 신패 말이다.
"대상귀인패가 왜요?"
"탈혼독의 해독약을 싸게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네."
"그게 대상귀인패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이죠?"
"섬라곡국(暹羅斛國)에만 사는 붉은 코뿔소라는 동물이 있다네. 그 붉은 코뿔소의 뿔을 주먹만큼만 잘라 오면, 기존의 해독약보다 효과는 열 배나 좋으면서도, 탈혼독에 대한 면역력을 평생 가지고 갈 수 있는 해독약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다고 하네."
"속리자 말대로야. 사천당가에서 붉은 코뿔소의 뿔 한 개로 100만 개의 해독약을 제조할 수 있다고 장담했어. 그걸 무림맹과 구파일방, 오대세가 그리고 중소 방파의 고수들이 나누어 복용하게 된다고 생각해 보게. 감히 어떤 도둑놈들이 탈혼독으로 나쁜 짓을 꾸밀 생각을 할 수 있겠나?"
"맞아, 맞아. 자네가 섬라곡국에 가서 붉은 코뿔소의 뿔만 가지고 온다면, 지금도 어딘가에서 극심한 슬픔에 빠져 죽어 가는 고귀한 생명을 구할 수 있다네."
"자! 받으세요."
순화자와 속리자에게 대상귀인패를 건넸다.
순간 움찔하는 노인네들.
응, 반격이다.
"이거 드릴 테니 가지시라고요. 이거 들고 두 분이 직접 가세요. 그러면 되잖아요. 아니면 무림맹의 다른 고수를 보내시든가."
순간 움찔했지만, 이내 평정심을 빠르게 되찾는 두 노인네들이었다.
설마 이것까지 예상을 한 건가?
"자네 것이지 않나?"
"드린다고요. 자!"
난 대상귀인패를 순화자의 손에 직접 쥐여 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으며 말했다.
"야수왕의 아들이 직접 자네에게 준 신패일세. 이걸 내가 들고 가 본다고 치게.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나? 내가 자넬 죽이고 이 신패를 빼앗았다고 오해할 수 있지 않겠나? 나 하나 죽는 건 괜찮아. 하지만 붉은 코뿔소의 뿔을 구하지 못한다면, 계속해서 수많은 이들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걸세."
"제가 줬다고 하면……."
"사실 확인하는 데에만 1년이 걸릴 걸세. 섬라곡국은 대략 5,000리(2,000km)의 멀고 먼 곳에 있어. 알지 않나?"
"1년이요? 왔다 갔다 하는 데에만 1년이 걸린다고요?"
"그래, 1년."
"거길 저더러 다녀오란 말씀이세요?"
"어제도 각각 다섯 살 사내아이와 세 살 여아가 그 엄마와 함께 죽고 말았네. 탈혼독에 전 재산을 잃고 끔찍한 선택을 했지."
속리자가 순화자의 말을 이었다.
"은혜를 갚아라. 하아! 정말 자네의 부모님과 조상들은 멋진 가훈을 자네에게 물려주었군. 은혜… 은혜라……. 허허허."
젠장!
빌어먹을.
이건 처음부터 정해진 싸움이었어.
내가 질 수밖에 없는.
"다시는……."
"응?"
"다시는!"
"그래, 말하게."
"다시는 당신들 말에 따르지 않을 거예요."
내가 결연한 표정과 목소리로 경고를 하듯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두 노인네는 오히려 더없이 기뻐하는 미소를 지었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입니다. 다시는 저를 찾아오지도, 볼 생각도 하지 마세요."
"고맙네, 걸이번."
"자네 손에 수많은 이들의 목숨이 달렸네."
"약속하시라고요."
"물론이네. 우리는 절대 자네에게 어떠한 일도 시키거나 부탁하지 않을 걸세.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나도."
아!
섬라곡국.
5,000리?
젠장!
눈물만 나온다.
하지만……!
이 능구렁이 같은 노인네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다.
나에게는 윙슈트가 있다.
그것도 그냥 윙슈트가 아닌, 신형 윙슈트.
굳이 해야 한다면, 후딱 해치우고 빨리 돌아오자.
하늘을 훨훨 날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