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약선(藥仙), 길평은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그래, 그러면 된다네. 만류귀종이라고 하나, 사실 무공과 의술만큼 일맥상통하는 분야도 그리 많지 않다네. 자네가 무림에 꿈을 두고 있다면, 이 책들이 분명 도움이 될 걸세.’
이 외에도 의술을 통해 화경을 넘어 신선이 되는 길까지 조언해 주었다.
내가 멍청해서 그 이야기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믿지 않고 있었다는 말이 더 사실에 가깝겠다.
하지만 위기가 닥쳤고, 억지로 의술을 익혀야 했으며, 이제 나는 이를 통해 고수의 반열에 오르게 됐다.
그리고 깨달았다.
동굴을 나가게 되면 『길평의경』을 손에서 놓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선 동굴부터 나가자.
"연소강."
"응."
"사람들 놀라지 않게 네가 이끌어."
"넌? 잘할 수 있는 거 맞아?"
"걱정하지 마. 지금 내 상태 최고니까."
"그래, 믿을게."
곧바로 연소강이 사람들을 모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기뻐하는 사람들도 있고,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고.
괜찮다.
곧, 모두가 자유의 몸이 될 테니까.
투투투툭.
힘을 주자 나를 얽매었던 팔목 두께의 밧줄이 종잇장 찢기듯 찢겨 풀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동굴 입구로 향했다.
커다란 바위로 입구를 가로막은 도둑놈들이다.
심호흡을 하고, 내공을 끌어 올렸다.
우우우우우웅.
작은 대기의 파동이 나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처럼 몰아쳤다.
기쁨과 두려움, 기대와 불신 등 온갖 생각에 술렁이던 인질 350여 명이 일순간 조용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때.
주먹을 불끈 쥐고, 정권 지르기!
콰아아아아아아앙!
쿠르르르르르르릉.
웬만한 대갓집의 대문만 하던 바위가 일순간 큰 폭발과 함께 터져 나갔다.
그리고 넉 달 보름 만에 보는 햇살… 어라?
채채채채챙!
퍼퍼펑!
"으아아아악!"
"살려 줘!"
"아아악!"
사방에 피의 비가 뿌려지고 있다.
500이 넘는 무인들이 50여 도적들을 완전히 포위한 상태로 일방적인 도륙을 하고 있는 중이다.
500명의 무인 중 싸우는 것은 열 명 남짓.
나머지는 그냥 자리만 지키고 서 있다.
열 명 남짓이지만, 실제 한 명만 싸워도 될 정도로 엄청난 고수들이다.
그리고 500명의 무인들 사이로 휘날리는 깃발……. 음.
무림맹과 만리상단의 깃발이다.
뭐야?
하필 이때 나타난 거야?
멋지게 활약 좀 하려고 했더니.
아니, 진즉 좀 나타나지.
빌어먹을 놈들.
뭐, 어쨌거나 순식간에 도적놈들은 제압당했다.
보아하니 일부러 항복할 틈도 주지 않고 도륙한 모양이다.
댓 놈만을 살려 뒀는데, 아무래도 이번 일을 취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와아아아아아!"
"무림맹이 우리를 살렸다!"
"만리상단에서 고수들을 보내 줬다!"
"자유다!"
"살았다! 와아아아!"
상황을 파악한 동굴 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뛰쳐나오며 환호성을 질러 댔다.
아!
내가 했어야 하는데.
아쉽군.
아쉬워.
그런데 그때였다.
"나 소협, 고생했네."
흑의를 입은 웬 노인이 어느새 내 곁에 다가와 그런 말을 건넸다.
문제는…….
이 노인네가 언제 내 곁에 왔는지, 언제부터 계속 내 옆에 있었는지 내가 감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엄청난 고수다.
누구지?
그때였다.
"흑풍 할배!"
연소강이 큰 목소리와 함께 쪼르르 달려와 흑의 노인의 품에 안겼다.
"아이고, 아가씨. 다치신 곳은 없……. 아니! 이마가 왜 이러세요? 저놈들이 그랬습니까? 내 당장 저놈들을……."
"아니야, 내가 넘어져서 그런 거야. 그런데 왜 이제야 온 거야?"
"죄송합니다, 아가씨. 저희도 최선을 다했건만, 다 제 탓입니다. 죄송해요."
"아니야, 이제라도 와 줘서 고마워. 흑풍 할배가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다고. 나 흑풍 할배 꿈까지 꿨어."
"어이쿠. 고생이 많으셨어요, 아가씨. 이젠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꼭 아가씨 곁에 붙어서 지켜 드릴 테니까요."
흑풍 할배?
저 노인네가 설마……?
"아가씨, 일단 이것부터 복용하세요."
"이게 뭔데?"
"탈혼독의 해독약입니다. 사천당가에서 해독약을 완성하였습니다."
"오! 다행이다. 다른 사람들 거는?"
"우선 급한 대로 한 알만 가지고 올 수 있었습니다. 사천당가에서 제조하는 대로, 다른 사람에게도 나눠 줄 것입니다. 사흘에서 열흘이 지나면, 해독약 없이도 자연 해독이 된다고 하니 크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가씨부터 우선 드세요."
"알았어. 고마워, 흑풍 할배."
연소강이 그냥 여자 목소리를 내고, 자연스레 여자처럼 행동한다.
해독약까지 복용하고.
"흑풍 할배, 태한이랑 인사했어?"
"네, 고생했다고 말하며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아가씨가 와서요."
"태한아, 인사해. 여긴 우리 흑풍 할배. 아! 이렇게 얘기하면 모르지? 흑풍절명사(黑風絶命師) 마노 대협."
흑풍… 절명사 마노.
젠장!
설마 했는데, 저런 거물이 왜 이곳에 온 거지?
개방의 정보, 그것도 아무 거지나 볼 수 있는 정보가 아닌 일부의 거지만이 볼 수 있는 일급 정보 중 하나.
내가 비걸개라 그 정보를 열람할 수 있었고.
만리상단에는 세 명의 초절정 고수가 존재하는데, 그중 최고수가 바로 흑풍절명사 마노다.
70세를 훌쩍 뛰어넘었고, 만리상단주의 직계 가족을 3대에 걸쳐 호위하고 있는 고수다.
정확한 그의 경지 파악이 어렵다고 하나, 초절정에서도 극상(極上)이라고 우리 개방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이미 화경의 경지에 한 발을 담근 어마어마한 고수라는 뜻이다.
어라?
그런데… 저 인간 분명 만리상단주의 직계 가족을 호위하는 사람인데, 진짜 여긴 왜?
설마 연소강이……?
"오! 걸이번! 잘 있었나?"
"나 소협! 우리가 왔네. 삼류 도둑 떼들에게 인질로 잡혔다며? 그래서 우리가 구해 주러 왔지. 하하하하!"
아, 젠장!
저 인간들은 또 왜 여기에 온 거야?
무림맹의 장로 순화자와 속리자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나에게 다가오고 있다.
* * *
"자! 자기 물건만 가지고 가셔야 합니다! 다른 사람 물건에 손을 대면 무림맹으로 끌려가 큰 고초를 겪게 될 겁니다. 거기 아줌마! 밀지 마세요. 순서를 지키시라고요!"
무림맹과 만리상단의 고수들이 사람들에게 도둑들이 빼앗은 물건들을 되돌려 주고 있다.
내 물건은 제일 먼저 받을 수 있었다.
연주강 덕분이다.
아! 그런데 쟤 정말 누구야?
설마… 연주강이 걔는 아니겠지?
모르겠다.
일단 내 보석과 물건들부터 확인해 봐야겠다.
보석을 세고 세고 다시 세고 또 세고 계속 세고.
맞다.
하나도 빠짐없다.
나머지 물건들도 모두 되찾았다.
길평의경과 전표, 우룡검과 대성검, 우룡호신갑, 비귀부(飛歸斧, 날아 돌아오는 손도끼), 연사침탁(극소 기관연사궁), 연사침탁의 침창, 태사대부패와 대부귀인패까지 다 있다.
윙슈트는 원래 내 등에 붙어 있고.
"휴우."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긴장으로 잔뜩 힘을 주고 있던 똥꼬가 사르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신기한 보석 있다며?"
연소강이다.
여전히 우스꽝스러운 변용을 한 상태로, 대놓고 여자 목소리를 낸다.
뭐, 이제 와서 그런 걸 따질 필요도, 또 내가 신경 쓸 필요도 없다.
"그건 어떻게 알았어?"
"그 물건 찾아서 돌려준 게 우리 만리상단 고수들이잖아. 내가 어떻게 몰라? 다 보고 받았는데."
"그래, 대단하다."
"너 그거 계속 가지고 다닐 거야?"
"왜? 너도 보석에 관심 있어?"
"보석 싫어하는 여자가 어딨냐?"
"너… 너 방금……."
순간 말문이 막혔다.
뻔뻔해도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가 있을까?
얘가 이제는 대놓고 스스로 여자라 한다.
"내가 여자인 거 아는 거 다 알고 있었어. 모르는 척하는 네가 귀여워서 그냥 계속 그랬던 거야."
"휴우, 됐다. 말을 말자."
"그래서 그거 계속 가지고 다닐 거냐고?"
"왜? 네가 상관할 일 아니잖아."
"그 정도 보석이면 작은 도읍 하나를 통으로 살 수 있어."
"미친!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믿거나 말거나 그건 네 자유야. 그런데 아무리 우리 만리상단에서 네가 가지고 있는 보석에 대해 비밀을 지키려고 해도, 이미 그 보석을 본 사람들이 너무 많아. 무림맹 무사들까지 우리가 관리할 수는 없고."
음, 생각해 보니 그렇네.
"위험해. 소문은 금방 퍼질 거고, 그 정도 가치의 보석을 위해서라면 죽을 걸 뻔히 알면서도 불나방처럼 달려들 사람들은 천하에 널리고 널렸어."
진짜 위험하다.
괜히 연소강에게 퉁명스럽게 대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어차피 이 보석들도 만리상단에서 처리할 생각이었는데.
"어험. 그게…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씩 웃는다.
돌변한 내 태도에 그녀가 그런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얘가 말은 안 하고 계속 나를 빤히 쳐다보며 웃기만 한다.
아! 젠장.
자세를 더 낮추라는, 그렇지 않으면 도와주지 않겠다는 무언의 협박이다.
어쩔 수 없다.
이 보석을 계속 들고 다니는 건, 연소강의 말마따나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그리고 지금 연소강은 내 보석들을 제값에, 또 안전하게 팔 수 있는 방법을 알기에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것일 테다.
어쩔 수 없지.
가장 볼품없는 보석 하나에 금자 550냥을 받았다.
전낭 안에는 200개에 달하는 보석이 더 있고.
고개가 아니라 무릎이라도 꿇어야 할 형편이다.
뭐, 물론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적당한 자세는 취해 줘야 저 멍청한 애가 입을 열 것 같으니.
"좀… 좀… 도와줘."
"뭐? 잘 안 들리는데?"
"도와달라고."
이젠 웃는 걸 넘어 입꼬리가 귀에 걸린 그녀다.
그렇게 좋나?
응, 오늘 헤어지면 다시는 안 만날 거야.
그러니 얼른 말이나 해.
"조건이 있어."
"조건?"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 더군다나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고, 작은 도읍을 통으로 살 수 있는 엄청난 거래를 돕는 건데. 당연히 조건은 걸어야지."
"휴우, 그래. 말해, 조건이 뭔데?"
"반말하게 해 줘."
얘가 미쳤나?
아니다.
원래 좀 모자랐지?
그래, 불쌍한 애라고 생각하자.
화내지 말고.
"너 계속 반말하고 있잖아."
"그럼 앞으로도 계속 반말해도 돼?"
엄마!
나, 진짜로 얘 한 대만 때릴게요.
"끄응. 그래. 계속… 계속 반말해도 돼."
오늘 보면 끝이다.
다시는 널 볼 일 없다.
"중경으로 가."
"중경? 거기는 만리상단 본단이 있는 곳이잖아."
"맞아, 그런데 본단으로 가는 게 아니라, 귀보교상(貴寶交商)이라는 곳이 있어. 본단에서 직접 운영하는 최고급 보석만 취급하는 전문 보석 상점이야. 안전은 두말할 나위가 없고. 철전 한 닢 속이지 않고, 정확히 값을 쳐줄 거야."
"믿어도 돼?"
"나는 못 믿어도, 만리상단은 믿을 수 있잖아?"
맞는 말이다.
좀 모자란 애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 걱정이 되지만, 만리상단이라면 신뢰할 수 있다.
"그럼 난 가 볼게. 이거 말해 주려고 일부러 널 만나러 온 거야. 빨리 가 봐야 해. 나 때문에 아빠가 화 많이 났대."
"그래, 잘 가. 고마웠어. 그리고 말했듯 은혜는 꼭 갚을게."
"쳇. 또 그 은혜 타령이네. 됐고, 무사히 그 보석들이나 팔아. 나 진짜 간다! 안녕!"
음, 진짜 갔다.
질척거리는 그런 부류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시원하게 행동하네.
아! 그러고 보니 진짜 이름을 안 물어봤다.
됐다.
어차피 다시 볼 일도 없는데.
서둘러 보석이나 팔러 가야겠다.
그전에… 에휴.
저 멀리서 아까부터 계속 순화자와 속리자가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다.
응, 감시하는 거다.
내가 어디로 내뺄까 봐.
저 두 노인네들부터 처리하고 중경으로 가야겠다.
아! 빨리 낭만개 아저씨를 만나야 하는데.
보석 빨리 팔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야지.
서두르자.
* * *
"네? 연주강이… 연주언이라고요? 만리상단의 금지옥엽 연주언?"
"그렇다니까. 어허! 이 친구 비걸개라서 눈치가 빠른 줄 알았는데, 넉 달 보름이나 함께 있으면서 그걸 눈치채지 못했나? 허허허."
"하지만… 하지만 연주언이라 생각하기에는 소문과 다르게……."
"변용한 걸 몰랐나?"
"알았지요. 알았는데… 그것보다 애가 너무 모자란 것 같아서……."
"모자라? 천재 중의 천재라 불리는 연주언이 모자라? 세 살에 천자문을 떼고, 일곱 살에 사서삼경을 독파했으며, 열 살에 집단 분업 농경이라는 획기적인 방법을 발명해 수확량을 세 배 이상 늘렸고, 뛰어난 상술로 거대 상단 다섯 개를 흡수해 흉년으로 굶어 죽어 가던 100만의 백성을 살린 연주언이 모자라? 자네 머리를 다쳤나?"
연주강이 연주언이었다니.
이제는 천하 2대 미녀이자, 가난한 백성을 긍휼히 여겨 선녀라 불리며, 천재 중의 천재라는… 젠장!
이게 말이 되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