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스스윽.
탈혼독에 중독되어 자는 척하던 것을 멈추고 자리에서 스으윽 일어났다.
그러자 나를 단칼에 베어 버릴 것 같은 기세로 다가오던 놈들이 움찔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이제 끝낼 시간이다. 와라! 진정한 고수의 힘이 무엇인지 보여 주마!"
멋진 대사까지 한마디 덧붙이자, 이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놈들.
두목 녀석은 진짜로 겁을 먹었는지, 눈짓으로 졸개들에게 협공을 바라기까지 했다.
멍청한 녀석들.
"한심한 놈들. 오지 않으며 내가 간다! 야아아압!"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두목 녀석을 향해 있는 힘껏 달려… 쿠당탕탕.
아!
쪽팔려.
넘어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을 한 바퀴나 굴렀다.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졸음이 마구 쏟아졌다.
밥을 두둑이 먹고, 따스한 봄 햇살을 맞고 있는 그런 느낌이다.
"저… 저 새끼, 뭐야?"
"모르겠어요, 두목."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했다.
내가 아닌 다른 인질들 말이다.
몸 상태가 단번에 저들을 모두 제압할 정도까지는 되지 못했다.
만약 놈들이 다른 사람들을 인질로 잡아 나를 위협하면?
상황만 더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
싸워도 동굴 안이 아닌 밖에서 싸워야 하고, 놈들이 준비하기 전 내가 기습을 해야 한다.
그것이 더 안전한 계책이고, 인질들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상책(上策)이다.
그래서 일부러 끌어 올렸던 내공을 모두 회수하였고, 막아 놓았던 독의 기운을 전신으로 흩뿌린 것이다.
저놈들이 날 죽이면 어쩌지?
모르겠다.
일단 자자.
너무 졸리다.
* * *
아! 푹 잤다.
"깼어?"
연주강이다.
연주강이 잠에서 깬 나를 보며 뭐가 그리도 좋은지 싱글벙글 웃고 있다.
그런데 얘… 음, 누구한테 맞았나?
얼굴이 두 배가 됐다.
정확히 말하면, 이마를 쇠망치로 한 대 맞았는지 퉁퉁 부어 있다.
옷에 피까지 잔뜩 묻어 있는 게, 출혈량도 상당했나 보다.
"얼굴이 왜 그래? 쟤들이 때렸어? 아, 이건 뭐야?"
"저놈들이 널 묶었어. 점혈까지 했고."
기운을 슬쩍 움직여 봤는데.
확실히 마혈을 점혈당했다.
밧줄도 제대로 묶었고.
"형님! 제가 도와드릴게요."
탁치행이 도와줘서 겨우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네 이마는 왜 그렇고? 설마 저놈들이 널 때린 거야?"
내가 물었지만, 연주강은 대답 대신 계속 나를 보며 싱글벙글 웃고만 있다.
음, 머리를 많이 다쳤나 보다.
그렇지 않아도 모자란 애인데, 도적놈들이 머리를 때려 상태가 더 안 좋아진 모양이다.
어설픈 변용 때문에 우스꽝스럽기는 해도, 꽤 예쁜 얼굴이었는데.
참, 안타깝다.
살짝 바보가 진짜 바보가 됐으니 말이다.
그때 이시초가 나서서 내 물음에 대한 답을 해 주었다.
"나 소협이 혼절한 후, 저들이 나 소협을 끌고 가려고 했어요. 목숨은 살려 두되, 팔다리나 근맥 중 한 곳을 잘라 버린다고요."
난 급하게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내 팔다리를 살폈다.
"휴우, 다 붙어 있네요?"
"연 공자 덕분이에요."
"얘가요?"
고개를 돌려 연소강을 보니, 여전히 뭐가 그리도 좋은지 싱글벙글이다.
"네, 놈들이 나 소협을 끌고 가려고 할 때, 연 공자가 ‘멈춰!’라고 외친 후,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저기 저 바위요."
피가 흥건히 흘러 말라붙은 커다란 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저 바위에 쓰러지며 머리를 받아 버렸어요."
"얘, 얘가요?"
연소강은 계속 싱글벙글했으나, 이시초와 탁치행은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시초의 말을 아들 탁치행이 이었다.
"연 형님이 ‘이놈들아! 그 녀석 가만두지 않으면 나도 콱 죽어 버릴 거야!’ 피를 철철 흘리며 그렇게 말하니, 도둑놈들도 크게 당황하더라고요."
다시 이시초가 나섰다.
"결국 연 공자가 지혈도 하지 않은 채 피를 철철 흘리며 그들과 담판을 벌였고. 덕분에 나 소협의 사지가 멀쩡할뿐더러, 제가 나 소협에게 의술을 가르치는 것까지 허락을 받게 되었답니다."
고개를 다시 돌려 연소강을 봤다.
여전히 바보 같이 웃고만 있다.
부잣집에서 곱게 자란 좀 모자란 애인 줄만 알았는데, 얘가 그런 강단도 있었네?
좀 많이 놀라긴 했다.
"뭘 또 그렇게까지 놀란 얼굴을 해? 너도 우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데, 나도 이런 일 정도는 해 줘야지. 어떻게 보면 이 사달이 일어난 게 다 나 때문인데."
음, 그래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빚졌다. 내 팔다리 중 하나의 은혜를 네게 입었어. 은혜는 꼭 갚을게."
"쳇, 뭘 바라고 한 거 아니라니까. 그래서 뭘로 은혜 갚을 건데?"
얘가 말이다.
강단은 있을지 몰라도, 좀 모자란 건 맞나 보다.
어디서 슬쩍 친한 척 엉겨 붙으려고도 하고.
팔짱까지 끼려고?
툭.
밀치고.
"뭐든, 은혜는 반드시 갚는다. 그리고… 고맙다."
"별거 아니라니까. 헤헤."
"이 의원님, 그 배신자는 어떻게 됐나요?"
이시초에게 물었으나, 연소강이 조금 더 빨랐다.
"놈들과 담판 지으면서, 그놈까지 처리하는 걸 조건으로 내걸었지."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물고기 밥."
"아!"
연소강이 조금 달라 보였다.
배신자에 대한 처리도 확실하지 않은가.
저렇게 바보 같이 웃지만 않으면 꽤 괜찮은 녀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스꽝스러운 변용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걸까?
모르겠다.
지금 그런 걸 생각할 때도 아니다.
"나 소협, 내공을 한번 움직여 봐요."
이시초의 말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단전의 내공을 조금씩 끌어 올… 아!
"안 되네요. 마혈을 점혈당해서 꼼짝도 안 해요."
"괜찮아요. 탈혼독을 밀어낼 때와 비슷한 방법으로 하면 조금씩 극복해 나갈 수 있어요. 실제 무림에서 고수들이 그렇게 한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요."
맞다.
진짜 고수들은 점혈을 당해도 스스로 그 점혈을 해혈하기도 한다.
내공만큼은 내가 웬만한 고수들보다 월등히 뛰어나다.
응, 하지만 난 그런 거 못 한다.
아직은 말이다.
"가르쳐 주세요, 이 의원님."
"네, 함께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 봐요."
"넵!"
한번 걸었던 길이다.
이건 그저 복습의 시간일 뿐이다.
나는 빠르게 의술의 기초를 터득함과 동시에, 내 몸을 스스로 치유해 갔다.
* * *
한 달하고 며칠이 더 지났다.
이곳에 갇힌 지 벌써 넉 달 보름이 됐다는 뜻이다.
밖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기에 아직 아무런 소식도 없는 거지?
만리상단은 왜 가만히 있는 걸까?
설마 연주강이 만리상단에서 그렇게 신경 쓸 정도의 인물이 아니라서일까?
만약 그렇다고 해도, 이 정도 시간이면 이미 무림맹에서 움직였어야 한다.
무림맹이 아니라 하여도 개방에서 단독으로 나를 구하기 위한 무언가를 했을 터.
하지만…….
매일이 똑같다.
우리를 인질로 잡은 도적놈들의 표정과 분위기에서도 변화를 읽을 수 없다.
점점 짜증만 늘어 가는 놈들이다.
그건, 뭔가 일이 지지부진하게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뜻인데.
우리가 갇힌 이곳을 발견하지 못한 걸까?
아마 그 가능성이 가장 크겠다.
뭐, 됐다.
이젠 만리상단도, 무림맹도, 개방도, 관부도.
도우러 올 필요 없다.
더 이상 탈혼독이나 악당 두목의 점혈 같은 것들이 나를 어쩌지 못한다.
아니, 그 이상이다.
나는.
지금의 나는.
밧줄에 꽁꽁 묶인 상태로 가부좌를 틀고 깊게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그렇게 뜬 내 눈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아!
고수의 경지는 일류의 것과 또 다른 세상이다.
모든 것이 바뀌었고, 모든 것이 새롭다.
음, 그런데 조금 불안하다.
이유는 내가 한 단계 위의 경지로 올라서는 과정이 정상적인 방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내 낙백구검과 타구봉법은 무학에 기초하여 발전한 게 아닌, 실전을 통해 발전했다.
미인국에서 실버 로마노프, 아나스타샤, 나타샤 표도로바와 거의 1년 가까이 싸우며 발전한 것이다.
일류 무사의 반열에 오르게 된 계기야 도토리국에서 건힐드에게 받은 가르침 덕이었다고는 하지만, 그것 역시 무림의 정상적인 가르침과는 사뭇 다른 방식이었다.
역시나 실전 대련에 가까운 수련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고수의 반열에 올랐다.
이게 더 심각하다.
무공이 아닌 의술을 통해 고수의 반열에 오르게 됐다.
거기에 더해 실버 드래곤 히포네우스의 신체 치유와 작위적인 환골탈태가 바탕이 된 가운데 고수의 벽을 깨게 된 것이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더 좋은 건가?
아니면 나쁜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것인지조차 모르겠다.
"축하해요, 나 소협."
"보여요, 이 의원님?"
이시초가 나를 보며 미소를 지음과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이시초는 평범한 아줌마도 아니고, 그렇고 그런 의원도 아니다.
대단한 의원임이 분명하다.
무공을 한 자락도 익히지 않았지만, 고수의 경지에 들어선 내 상태를 단번에 보고 알아챈 것이다.
"대단하다. 축하해, 나태한."
곧이어 연주강도 내 상태를 알아보고 축하를 해 주었다.
"뭔데요? 엄마, 형님의 뭘 축하해 주는 건데요?"
탁치행만이 몰랐을 뿐이다.
그런 그에게 이시초가 간단히 설명을 해 준 후, 나를 향해 말했다.
"나 소협,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혹시……."
그녀가 매우 조심스럽다.
이미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전우와 같은 사이다.
이렇게 조심스러울 이유가 없고, 지금껏 그렇게 지내 왔다.
도대체 뭘 물으려고 저렇게 조심스럽지?
내가 더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혹시 환골탈태를 한 적이 있으신가요?"
역시, 이시초가 알아보는군.
그런데.
"풉. 푸하하하하! 이 의원님, 이건 나가도 너무 나간 거 아니에요? 하하하! 환골탈태라니요? 풉. 풉풉. 아! 배꼽 빠질 거 같아. 얘가요? 얘가 환골탈태요? 하하하."
연주강이다.
진짜 배꼽이 빠지려는지, 배를 잡고 바닥을 마구 구른다.
응, 신경 끄자.
좀 모자란 애다.
불쌍하게 생각하자.
- 알아보셨군요. 하지만 일반적인 환골탈태와는 조금 다릅니다. 기연이 있었고, 도움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비밀에 부쳐 주십시오.
이시초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미세하지만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넉 달 보름 동안 함께 있던 이시초다.
믿을 수 있다.
심지어 그녀는 나만 볼 수 있게 고개를 끄덕인 후에는 능청스러운 연기까지 했다.
"연 공자, 그렇게 비웃지 말아요. 정말 대단한 성과를 올려 저도 한번 과장을 보태 봤어요. 충분히 그만큼 축하할 성과라고요."
"아, 네. 호호호. 하여간 이 의원님은 의술도 뛰어나고, 농담도 잘하……. 풉. 푸하하하. 환골탈태. 큭큭. 어머, 죄송해요. 이 의원님 농담이 너무 재밌어서. 호호호."
환골탈태는 그렇게 멍청한 연주강 덕분에 슬쩍 넘어갈 수 있었다.
"나 소협."
"네, 이 의원님."
"나 소협은 현재 나 소협의 상태가 어떤지 정확히 알 수 있나요?"
"고수의 반열에 올랐다는 것은 확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다만……."
"다만 뭐죠?"
"이게 무공을 수련해 얻은 결과가 아니라, 조금은 혼란스럽습니다."
내 대답에 여전히 눈물을 찔끔 흘리며 웃고 있던 연주강의 웃음이 뚝 하고 그쳤다.
그녀도 꽤 궁금했던 모양이다.
더불어 이시초는 더욱 진지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말씀드렸다시피, 무공과 의술은 일맥상통하는 길입니다. 만류귀종까지 가지 않더라도, 그 이전에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 필연이기도 하고요."
"네, 저도 이제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의술로 한 단계 위의 무공 경지에 올라선 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음, 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에요."
"뭐가 더 있나요?"
"아마 몸으로는 느끼고 있지만, 나 소협 스스로 아직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드리는 말입니다."
"알려 주십시오."
"나 소협의 몸은 이제 혼자가 아니에요. 무인 나태한이 하나고, 의원 나태한이 또 한 명 있습니다."
"그게……?"
"오롯이 나태한 소협의 몸에 이상이 생겼을 때, 이를 스스로 치유하는 나태한 의원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이는 적의 공격에 본능과 내공이 저절로 움직여 호신강기를 펼치는 고수의 생리와 빗대어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아… 제가… 제가……."
말이 다 안 나왔다.
맞다.
느끼고 있었다.
머리로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그걸 이시초가 알려 줬고.
내 심장은 흥분으로 미친 듯 뛰기 시작했다.
"혹시… 만독불침도 가능한가요?"
잔뜩 기대해 물었다.
하지만 이시초는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그야말로 무림에서 말하는 화경과 같은 지고한 경지입니다. 아직은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도 충분히 천독불침은 가능할 겁니다. 현재 탈혼독이 나 소협을 조금도 괴롭히지 못하는 것처럼요."
천독…불침!
내가 천독불침이 됐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다.
"또한 나 공자의 의술이 늘면 늘수록 무공도 함께 늘게 될 것이고, 무공에 대한 깨달음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의술에 대한 이해 또한 상승의 경지를 밟게 될 것이에요."
의술을 익히면 무공이 늘고, 무공을 깨달으면 의술을 얻게 된다.
차원 이동이 아닌 무림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기연을 얻었다.
"이 의원님."
"네, 나 소협."
"이제 나가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지, 지금요?"
"네, 동굴 밖에 있는 애들은 제가 후딱 치우겠습니다."
"네, 네. 부탁해요, 나 소협."
이제 밖으로 나갈 시간이다.
이번엔 진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