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85화 (84/174)

85화

눈을 떴다.

거대한 동굴 안이다.

도적놈들은 어디서 났는지 수레 두 대로 여전히 혼절해 있는 사람들을 땀을 뻘뻘 흘리며 옮기고 있다.

어느새 200여 명이 동굴 안으로 옮겨졌고.

원래 놈들의 계획이, 배에서 한탕하고 이곳에 당분간 숨어 있을 생각이었나 보다.

그러다 나와 내 옆에 있는 남장 여인 때문에 계획이 변경된 것이고.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진정하고.

다시 내공을… 꿈쩍도 하지 않는다.

단전 밖을 벗어나자마자 내공이 흐트러져 사라진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길평의경 좀 공부해 둘걸.

후회해 봐야 이미 늦었다.

그런데 도대체 놈들은 무슨 독을 쓴 거지?

확실히 보통 독이 아니다.

미혼산에 산공독, 거기에 근이완산까지 섞인 독이다.

이게 말이 쉽지, 독을 세 개나 밥에 처넣었는데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심지어 신체만큼은 환골탈태한 나까지 어김없이 중독시켰다.

대단한 독을 하독했다는 말인데, 내가 독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듣도 보도 못한 독이다.

독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생각들 때문에 머리가 지끈 아프다.

"깼어요?"

옆에서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아까 도둑놈들이 말한 그 남장 여인… 아! 진짜 어설픈 변용이다.

그나저나 만리상단에서 자라서 그런지, 좋은 약을 많이도 먹었나 보다.

나야 환골탈태의 신체니 정신을 차릴 수 있었지만, 다른 유람선의 승객들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는데 이 여인이 먼저 깨어난 것을 보니 말이다.

"무슨 상황이죠?"

"독을 탄 듯합니다."

"누가요?"

"저기, 수레로 사람들을 옮기고 있는 자들요."

"누군데요?"

"도둑이요."

"도, 도둑이요? 도둑이 물건을 훔치면 끝이지, 사람들을 왜 이곳으로 옮기는 건데요?"

"인질을 잡아 만리상단에서 돈을 뜯어낸다고 합니다."

순간, 여인의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

그런데 이상한 건, 놀랐다는 반응은 분명한데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도 만리상단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인가?

뭐, 원래 대담한 여인일 가능성이 크다.

저렇게 어설픈 남장에 창피한 줄도 모르고 돌아다니니 말이다.

"그쪽은……?"

어쩌지?

신분을 밝혀야 하나?

잠깐 고민했지만.

"나태한이라고 합니다."

"저는 연주……."

어? 연주언?

만리상단주의 딸?

천하 2대 미녀?

설마?

"연주…강이라고 해요. 연주강이요."

뭐야?

일부러 이름을 남자처럼 말하네?

목소리도 변용하는 게 너무 어설픈데.

이건 또 어쩌지?

속아 주는 척해야 하나?

그나저나 진짜 아니겠지?

도둑놈들 말처럼 만리상단의 금지옥엽이 호위무사 한 명 없이 돌아다니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하지.

"깨어난 사람은 우리 둘이 전부예요?"

"그런 듯하네요."

"무인이세요?"

"네, 무공을 조금 익히긴 했습니다."

"사문은요?"

"그쪽부터 밝히시죠."

"만리상단 소속이에요. 아시고 말하신 거 아니에요? 저들이 저를 인질로 잡아 만리상단에서 돈을 뜯어내려고 한다는 거."

"대충 생각은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문이 어떻게 되는데요?"

상황이 상황이니 밝혀야 한다.

"개방 소속입니다."

그녀가 나를 잠시 살피는가 싶더니.

"비걸개세요?"

어라?

얘가 비걸개를 어떻게 알지?

확실히 만리상단의 정보력도 만만히 볼 수는 없는 게 맞다.

"네."

"여길 빠져나갈 방법은 생각해 보셨어요?"

고개를 가로저었다.

"같이 고민해 봐요. 저 악당들을 물리치고요."

의지가 좋다.

좋은 눈빛이다.

어떠한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이를 극복해 내려는… 철부지다.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휴우.

이 일은 나 혼자 방법을 찾아봐야겠… 어? 그 아줌마다.

"끄응. 끄으으응."

아줌마가 아닌 내 신음성이다.

아직 근육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바닥을 기다시피 해 아줌마에게로 다가갔다.

아줌마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다.

나는 아줌마와 또 다른 사람들의 상태를 살폈다.

그냥 다들 잠이 든 것 외에는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

* * *

빛이 들어오지 않는 동굴이다.

도둑놈들이 밝혀 놓은 횃불 몇 개가 전부다.

배 위에 있던 사람 중 300명 넘게 동굴로 옮겨졌고, 여전히 계속 옮기는 중이다.

그렇게 시간이 꽤 흘렀을 때 사람들이 한두 명 깨어나기 시작했다.

두려움에 우는 여인도 있었고, 누군가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누구야!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납치를 한 것이……."

쉬이이이익!

툭!

한 사내가 소리를 지르자, 땀을 뻘뻘 흘리며 수레로 사람을 옮기던 도둑놈 중 하나가 단칼에 그의 목을 베어 버렸다.

"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악!"

사람들은 두려움에 비명을 질러 댔고.

그 사내는 더 흉측한 얼굴로 그런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소리 내면 죽는다."

나직한 한 마디.

사방에서 터져 나오던 비명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질문은 받지 않는다. 소리를 내도 죽는다. 명을 거역해도 죽는다. 그냥 조용히 있어.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럼 살 수 있다. 그것 하나는 확실히 약속하마."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도둑놈은 그런 사람들을 한 차례 훑어본 후, 다시 빈 수레를 끌어 동굴 밖으로 나갔다.

이내 곧 동굴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때.

"공, 공자는 분명 그때……."

"깨어나셨어요?"

주먹밥을 준 그 아줌마다.

가출한 아들 찾으러 배에 탄 그 아줌마 말이다.

"여긴 어디고, 어떻게 된 거죠?"

"도둑놈들이 우리를 인질로 잡아 만리상단에서 돈을 뜯어내려고 하는 모양입니다."

"하아, 중독된 거군요."

"네, 점심에 먹은 밥에 놈들이 미혼산과 산공독 그리고 근이완산까지 탄 모양입니다."

그때였다.

아줌마가 갑자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가 싶더니 혼잣말을 내뱉는다.

"설, 설마……."

뭐야, 이 아줌마?

그냥 평범한 아줌마 아니었어?

분명 뭔가를 아는 얼굴인데?

"혹시 뭔가 짐작 가는 바라도 있으신가요?"

"그게… 확실하지 않아서. 엇! 우리 아들. 아들 녀석을 보지 못했나요?"

"저기요. 저기서 곱게 자고 있어요. 아까 제가 상태를 확인했는데, 다치거나 그런 것은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휴우. 감사합니다, 공자님."

"저… 아주머니. 방금 말씀하시려던 것… 혹시 어떤 일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줌마가 고민한다.

왜 고민을 하는 것일까?

"모르는 게 나을 수 있어요."

이쯤에서 밝혀야겠다.

전음을 보낼 수 없어 그녀에게 바싹 다가가 은밀히 말했다.

"무림인입니다. 비걸개라고 개방에서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는…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는 그렇지만, 나이에 비해 꽤 대단한 고수입니다. 독만 아니었다면, 저 도둑들 정도는 단번에 물리칠 수 있는 고수요."

살짝 놀란 눈의 아줌마.

그때였다.

"아주머니, 저도 고수예요. 그러니 말씀해 주세요."

어느새 곁에 다가와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연주강, 본명인가?

아무튼 연주강이 끼어들었다.

그런 우리 둘을 아줌마가 잠시 살펴보는가 싶더니.

"저는 감숙 경양에서 평리의각을 운영하는 이시초라는 사람입니다. 무인이 되겠다며 가출해 섬서로 가던 아들 녀석은 탁치행이라고 합니다."

"어머!"

아줌마의 말에 연주강이 놀랐나 보다.

자기도 모르게 보통의 여성들이 내뱉는 감탄성을 여자의 목소리로 내뱉었다.

이내 실수했다고 생각했는지, 어설픈 남성 기침 소리를 연이어 내며 말을 이었다.

"어험, 어험. 평리의각이면 꽤 유명한 의각 아닙니까? 저도 몇 번이나 그 이름을 들어 봤어요. 몇 대에 걸쳐 뛰어난 의술로 가난한 환자들을 치료해 준다고요."

"감사합니다."

아! 얘는 진짜 뭐야?

진짜 우리가 자기를 남자로 생각한다고 착각하는 건가?

됐다.

어디가 좀 모자란 애 같다.

얘는 신경 끄자.

음, 그러고 보니 이 아줌마와 배에서 만난 게 우연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네.

아들 녀석이 서극인지 남극인지 하는 사기꾼에게 속아서 갔던 방향이 서안으로 나와 같은 방향이었어.

그래서 같은 배에 탄 것이고.

배 위에서 아들과 다툴 때 가업 어쩌고 하더니, 그것은 의각을 운영하는 일이었나 보다.

그나저나 이 아줌마 진짜 그냥 보통 아줌마가 아니었네.

내가 나서서 물었다.

"독에 대해 아는 게 있으시군요?"

이시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얼마 전 무림맹에서 자문을 구한다며 한 가지 독에 관한 제조법을 보내왔습니다. 탈혼독(脫魂毒)이라는 것인데, 미혼산과 산공독 그리고 근이완산을 교묘하게 섞은 말도 안 되는 극독이었지요."

"설마……."

"그런 듯합니다. 저 도둑들이 쓴 독이 탈혼독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러한 세 가지 독을 섞게 되면, 아무리 상급의 독을 섞었다고 해도, 며칠을 굶은 돼지조차 먹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냄새와 맛 그리고 기운이 풍깁니다."

"350명에 달하는 사람 중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했어요."

"네, 그래서 탈혼독이 위험한 것이지요. 설마 이게 이렇게까지 퍼져 있을 줄은 몰랐는데."

"탈혼독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도대체 누가 탈혼독을 만들고 퍼뜨린 건가요?"

"천하에 이렇게 대단한 독을 만들 수 있는 곳이 몇 군데나 있겠습니까?"

"설마… 사천당가에서요?"

이시초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에서는 그리 말했습니다. 하지만 사천당가에서 일부러 퍼뜨린 것은 아니라 합니다. 늘 그렇듯 독에 관한 여러 연구를 시험 중이었고, 그중 탈혼독이 완성되었는데, 그 제조법이 유출되었다고 합니다. 설마설마했는데, 일개 도적들에게까지 그 제조법이 넘어갔을 줄은 몰랐네요. 어쩌면 천하 각지에서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는지도 모릅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심각하다.

하지만 내가 천하까지 걱정할 형편은 아니지 않겠나?

그거야 무림의 저 높으신 양반들이 알아서 처리하시겠고.

나는 우선 내 목숨부터 어떻게든 지키고 봐야 할 상황이다.

"혹시 해독약을 제조할 수 있나요?"

간절한 마음으로 물었다.

해독약만 복용하면, 저깟 도둑 다섯이 아니라 500이라도 문제없다.

하지만…….

이시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무림맹 사람을 만났을 당시만 해도, 사천당가에서조차 해독약이 없었습니다. 사천당가에서 해독약을 완성하게 되면, 곧바로 중원 전역의 의각에 그 제조법을 전달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아주머니… 아니, 이 의원님께서는 의원이시잖아요. 탈혼독의 제조법도 이미 알고 계시고요. 어떻게 안 될까요?"

이시초가 씁쓸한 얼굴을 했다.

"천하의 사천당가에서 만든 극독입니다. 그 해약을 만드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죠. 가능하다고 해도, 당장 약초며 침이며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맞다.

아무것도 없다.

젠장!

어떻게 하지?

이 상태로는 싸우기는커녕,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도 힘든데.

그때였다.

"휴우, 다 됐다. 이봐! 다들 집중!"

배에 탔던 승객과 선원 등을 모두 동굴로 옮긴 도둑들이 우리를 향해 외쳤다.

"자! 다들 이거 받아서 입에 넣어. 너부터."

탈혼독인 듯하다.

처음 그걸 받은 노인은 손을 덜덜 떨며 차마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지 못했다.

그러자…….

쉬이이이익.

툭.

칼이 번쩍였고, 곧바로 노인의 목이 동굴 바닥에 떨어졌다.

"왜 사람 말을 허투루 들어?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죽는다고 했잖아. 나도 사람 죽이기 싫어! 내 말만 들으라고. 그러면 다 살아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 진짜라니까! 내가 도둑이지 살인마인 줄 알아? 나 진짜 그냥 도둑이야. 돈만 받으면 너희 다 풀어 줄 거라고."

역시나 사람들은 두려움에 덜덜 떨며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둑은 만족한 얼굴을 했고.

"자! 네가 먼저 먹어."

중년의 여인은 사내가 건넨 환단을 받자마자 꿀꺽 삼켰다.

"먹었는지 보게 입 벌려 봐. 더 크게! 좋아, 다음."

350명 전원.

나까지 놈들이 건넨 환단을 먹고 다시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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