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엄마가 쓰러지자 아들 녀석도 놀란 모양이다.
흠칫하였다.
하지만 이도 잠시.
"엄마가 나한테 해 준 게 뭐가 있다고! 그냥 내버려 둬! 난 내 삶을 살 거란 말이야!"
내가 나설 차례다.
그렇게 멋지게 등장하… 어?
나보다 세 명의 청년들이 먼저 나섰다.
"아주머니, 괜찮으세요? 일어나세요."
"이봐, 적당히 하지?"
무공은 익히지 않았으나, 덩치가 꽤 좋은 청년들이다.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무재를 지닌 아주머니의 아들… 큭큭큭.
아무튼 아들 녀석이 쫄았다.
엄마한테는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녀석이, 덩치가 좋은 청년 셋이 다가오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두 걸음이나 물러서는 게 아닌가.
"쯧쯧. 어떻게 저런 자식을 길렀대?"
"패륜이야, 패륜."
"하여간 요즘 젊은 애들은 왜 저렇게 싸가지가 없는지 몰라."
선상의 유람객들이 손가락질을 하며 그런 아들을 욕했고.
그러자 아들 녀석도 발끈했다.
질풍노도의 사춘기가 두려움을 이기게 한 것이다.
"X팔! 니들이 뭔데 나를 평가하는데?"
그러자 청년이 다시 나서 녀석의 어깨까지 밀치며 제지하려 했다.
"그만하라고."
"놔! 이 새끼들, 내가 누군지 알아? 나중에 고수만 되면 너희들 죄다 내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거야!"
"그래, 알았다. 네가 나중에 고수되면 그렇게 할 테니까, 지금은 좀 진정해라."
"놓으라고! 진짜 화나서 한 대 치면 너희 다 저세상 구경하게 될… 어?"
아들 녀석이 몸부림을 치며 팔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런데 분명 녀석의 몸부림에 아무도 맞지 않았는데.
쿵.
녀석을 말리던 한 청년이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다른 두 청년이 놀라고 또 화가 나.
"너 방금 내 친구한테 무슨 짓을… 어… 머리가……."
쿵.
또 쓰러졌고.
"뭐야? 방금 무슨 짓을……."
다른 친구까지 쓰러지고 말았다.
이에 아들과 엄마 그리고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도 모두 놀라… 어라?
쿵.
쿵.
콰당.
갑자기 선상의 사람들이 단체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뭔 상황인가 싶어 지켜보는데, 이제 몇 명 남지도 않았고.
빠르게 머리를 굴려 봤지만, 답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
나만 남았다.
아! 씨팔.
우선 나도 좀 쓰러져야겠다.
쿵.
기절한 척.
그렇게 실눈을 뜨고 선상을 지켜보는데.
모두가 쓰러진 그곳에 댓 명의 사내들이 조심스럽게 나타났다.
아! 젠장.
우아하게 풍류를 즐기는 공자 놀음이나 하며 집으로 가려 했는데, 이건 또 무슨 난리람?
일단 지켜보자.
다섯 사나이는 여전히 매우 조심스럽게 쓰러진 사람들을 일일이 살피며 선상을 이리저리 누비고 있다.
그러더니 한 사내가 나에게 다가왔고.
나는 떴던 실눈까지 조용히 감았다.
놈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새끼는 뭔데 이렇게 오래 버텼지?"
"통뼈인가 보지. 확실히 기절했나 잘 살펴봐."
툭, 툭.
놈이 발로 나를 찬다.
젠장.
그냥 냅다 패 버릴까?
아니다.
우선 조금만 더 지켜보자.
"곰이 겨울잠을 자는 것처럼 처잔다."
"그럼 얼른 시작하자고."
"와! 이게 진짜로 이렇게 통할 줄은 몰랐다. 이 새끼들 쓰러질 때까지 살 떨려 죽는 줄 알았다니까."
"감탄하고 있을 새 없어. 선장이며 선원이며 죄다 잠들었잖아. 배가 언제 어디에 부딪혀 좌초될지 몰라. 그 전에 챙길 수 있는 거 빨리 챙겨서 떠나자고."
"그래, 알았어. 다들 빨리 움직이자. 선실까지 샅샅이 뒤져."
음, 이 새끼들.
그냥 도둑들이다.
그런데 내가 더 화가 나는 건.
선장이나 선원들까지 잠이 들게 했고, 배가 좌초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배에 탄 사람들.
유람객만 대략 300명이고, 선원들까지 하면 350명에 달한다.
그 사람들이 죽거나 말거나?
하아!
도둑도 질이 많이 나쁜 도둑놈들이다.
아마 아까 먹은 점심에 미혼산(迷魂散, 수면제)을 탄 모양인데.
불쌍한 도둑놈들.
그깟 미혼산 따위로 환골탈태까지 한 나를 어쩔 수 있겠느냐?
이미 상황 파악은 됐고.
이제 정의의 협객이 나설 차례다.
스으으으윽.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깨어나 일어난 줄도 모르고, 한창 바쁘게 사람들의 품속을 뒤지는 도둑놈들이었다.
난 그런 놈들을 한심하게 보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동작 그만."
새끼들.
도둑놈들이 또 말은 잘 듣는다.
빠르게 손놀림을 보이던 녀석들이 동시에 얼음이 되었다.
그러더니 천천히, 또 놀란 눈을 떠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난 녀석들에게 씩 웃어 주며, 허리에 찬 대성검을 툭툭 쳐 보였다.
무림인.
고수.
응, 너희 다 엿됐어.
작은 동작이지만, 놈들이 현실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신호였다.
그런데…….
씨이이이이익.
어라?
놈들도 웃는다?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모양인… 어?"
"어째 조용히 넘어가나 싶었다. 그렇지, 무림인이 없을 수 없지. 큭큭."
"너희… 너희 내 몸에 무슨 짓을……."
젠장!
빌어먹을!
내공이… 단전에 있던 내공을 끌어 올리자마자 흐트러진다.
미혼산(迷魂散)에 더해 산공독(散功毒)까지 주입했던 것이다!
"큭큭큭. 왜? 영웅 놀이 더 해야지? 그만하게? 하하하!"
다섯 놈이 그렇게 당황한 나를 비웃으며 다가온다.
기도, 자세, 동작, 눈빛까지.
놈들도 그냥저냥 어설픈 도둑은 아니다.
다섯 놈 모두 한가락 하는 무인이다.
나는 현재 내공을 쓸 수 없… 응, 나는 최강의 내공을 익혔다.
씨이이이이익.
더 짙은 비웃음을 놈들에게 날렸다.
그러자 다시 움찔하며 걸음을 멈추는 도둑놈들.
"큭큭큭. 왜? 악당 놀이 더 해야지? 그만하게? 하하하!"
다시 놈들을 비웃어 주며, 이번에는 내가 놈들을 향해 다가갔… 어라?
몸이, 내 몸이.
말을 안 듣는다.
내공은 필요 없고, 최강의 외공이… 아!
근육들이 마치 신생아의 그것처럼 말을 안 듣는다.
이내 노곤함이 온몸에 퍼지고.
이건, 이건 분명!
아!
근이완산(筋緩迷散)이다.
도대체 독을 몇 개나 밥에 처넣은 거야?
아니, 이상하다.
아무리 미혼산이고 산공독이며 근이완산이라고 해도.
내 몸은 환골탈태를 한 몸이다.
거기에 더해 2갑자가 넘는 내공까지.
그런데 중독되었다.
그건, 아!
이 새끼들이 쓴 독이 그냥 보통의 그렇고 그런 독이 아니라는 건데.
진짜 무슨 독을 쓴 거지?
그때.
씨이이이이익.
악당 녀석들이 다시 비웃음을 날리며 다가온다.
연사침탁, 극소 기관연사궁을 날려야 한다.
연사침탁으로 놈들을 고슴도치로 만들어… 아! 팔이… 팔을 들 수가 없다.
근육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다.
서 있는 것조차 이제는 불가능하다.
"휴우. 이 새끼는 진짜 뭐 하는 새끼야? 깜짝 놀랐네. 왜? 영웅 놀이 그만하게? 뒈져라, 새끼야!"
퍽!
기절.
* * *
"태사대부패라고! 태사대부패!"
"그래서 뭘? 어쩌라고?"
"이 등신 새끼야! 태사부 태사의 권위를 증명하는 신패라니까! 일인지하 만인지상, 황제의 스승 태사 헌원문장 몰라?"
"아니, 그래서 뭘 어쩌자고? 죽이면 될 거 아니야."
"미친 새끼야! 태사대부패를 가지고 있는 놈을 죽여? 그러면 땅끝까지 도망가도 추적해서 우릴 죽일 거야. 금의위가 나설지도 모른다고."
"그럼 X팔! 이미 물은 엎질러졌는데, 뭐? 어쩌라고? 저 새끼한테 가서 무릎 꿇고 목숨만 살려 달라고 빌어? 그럴까? 그럼 저 새끼가 ‘네, 그럴게요.’ 이럴 거 같아?"
아!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런데 저 새끼들은 왜 싸우고 있지?
내 몸에서 발견한 태사대부패 때문에 그런 거 같은데.
여긴 어디지?
눈을 뜨는 것조차 힘들다.
머리는 깨질 것처럼 아프고.
일단, 좀 더 이대로 있자.
놈들이 뭐라고 떠드는지도 듣고.
"그만들 싸우고 이 전표 좀 봐. 금금상단의 전표야. 그것도 금자 550냥이라고. 이것만 있어도 우린 평생 떵떵거리며 살 수 있어."
"까막눈이야? 그 밑에 쓰인 글씨 안 보여? 금금상단 귀빈. 우리가 이 전표를 들고 금금상단으로 가는 그 순간, 그곳 호위들이 우리를 잡아서 관아로 넘길 거라고."
"보석도 있잖아. 너희 이런 보석 본 적 있어? 이것 하나만 챙겨도 역시나 평생 떵떵거리며 살 수 있어."
"하아! 답답한 놈아. 너나 나나 쟤나, 평생 도둑질에 강도질하며 살았지?"
"그게 뭐? 어쩌라고?"
"평생 남의 물건 훔치면서 이런 보석 본 적 있어?"
"그, 그게… 없기는 하지."
"이거 어디다 팔려고 가는 순간 그냥 표적이 되는 거야. 곧바로 황궁이고 무림맹이고 우리를 쫓기 시작할 거라고."
"암상에 팔면 되잖아!"
"미친놈아! 그냥 입에 칼을 물고 죽어라. 이 정도 보석이면, 나라도 상대를 죽이고 꿀꺽하겠다."
"휴우, 그럼 어쩌자는 말인데?"
"나도 몰라! X팔! 우리 다 엿된 거라고! 하필 태사의 사람이 그 배에 타고 있을 건 또 뭐야! 젠장할. 재수가 없으려니까."
음, 일단 바로 죽지는 않겠다.
아! 내공… 내공은 여전히 쓸 수 없고.
손가락도 까딱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정말 지독한 독을 썼군.
그때, 또 다른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끝났어?"
"뭐?"
"말싸움 끝났냐고."
"휴우, 무슨 방법이 있는 거야? 아까부터 손에 들고 있는 건 또 뭔데?"
"전화위복(轉禍爲福)."
"전화위복? 그게 뭔데? 비싼 거야?"
"끄응. 넌… 휴우, 됐다. 위기는 기회. 화가 곧 복이 되어 돌아온다는 뜻이다."
"뭔 소리야?"
"저 계집."
"그래, 말 잘했다. 저 어설픈 남장을 한 계집은 또 왜 데리고 왔는데? 태사부 놈 하나만으로도 이미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나 말고 누가 또 있나?
음… 바로 내 옆에 아직도 깊은 잠이 들어 있는 누군가 있는 게 느껴진다.
그런데 남장 여인이라고?
그것도 어설픈 남장?
뭐지?
"자! 봐 봐. 이게 뭔지. 저 계집의 소매에 있던 거야."
"이건… 만리… 금혈……. 허거거거거거거거걱! 만리금혈패(萬里金血牌)잖아!"
"맞아! 저 어설픈 남장을 한 계집이 만리상단의 혈육이라는 뜻이지."
"설마 만리상단 상단주의 딸?"
"쯧쯧. 너무 나가진 말자. 설마 천하 4대 미녀 중 한 명이자 만리상단주의 딸인 연주언이 호위 무사도 없이 혼자 나돌아 다닐까."
"그, 그렇겠지? 헌원공지와 헌원파지가 죽어서 이제는 천하 4대 미녀도 아닌 천하 2대 미녀인데. 그럼 저 계집은 누굴까?"
"뭐, 대충 조카나 친척 정도 되지 않겠어?"
"그래서 어쩌자는 말인데?"
"어쩌긴 어째? 한탕 제대로 해야지."
"위험하지 않을까? 만리상단이 만만한 곳이 아니잖아. 더군다나 태사부도 우릴 쫓을 텐데."
"그래서 전화위복이라는 거야. 귀한 인질이 하나도 아니고 둘이 있는 거잖아."
"어쩌자는 말인데?"
"잘 들어. 우리가 필요한 건 돈이야. 그렇지?"
"그렇지."
"천하에 가장 돈이 많은 곳이 어디야?"
"황궁과 만리상단."
"그렇지. 맞아. 우린 그 만리상단에서 돈을 뜯어낼 거야."
"저 두 사람을 인질로 삼아서?"
"아직 배에서 처자고 있는 350명도 있잖아. 물론 그것들은 들러리고. 핵심 인질은 저 두 연놈. 만리상단의 혈육 한 명만 있어도 이건 확실한 협상의 조건이 될 텐데. 생각해 봐. 태사부 사람까지 있어. 허튼짓했다가는 태사부 사람을 죽일 거라고 으름장을 놓으면 어떻게 되겠어?"
"아무래도 상인이니 관부에 잘 보여야 할 테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태사대부패를 들고 있는 태사부 사람이라면. 오호! 만리상단에서도 난리가 나겠는데?"
"맞아, 그거야. 우린 돈 받고, 저 두 연놈 넘기고. 그런 다음에 새외로 뜨면 되는 거야. 우리에게는 어마어마한 돈이겠지만, 만리상단에서는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액수일 테니까. 태사부와 척을 지는 위험은 감수하지 않을 거라고."
"맞아, 태사부 사람을 구한 다음에 그걸 태사부에 알려 은혜를 입게 한 뒤에, 그걸 빌미로 더 큰 이득을 챙기는 게 그들에게도 나은 선택이겠지."
"하하하! 내 말이 그거라니까. 상인들은 언제나 계산적이잖아. 저 계집이 얼마나 가까운 친척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는 저 멍청한 녀석, 태사대부패까지 들고 있는 귀한 인질이 있다고. 이번 인질 협상은 이미 9할 이상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어."
"그래도 위험하지 않을까? 우린 고작 다섯 명이잖아."
"어쩔 수 없지. 도움을 요청하는 수밖에."
"누구에게? 그럼 돈을 나눠야 하잖아."
"잊지 마. 상대는 만리상단이라고. 황금으로 산을 쌓아도 수백 개의 산을 쌓을 수 있는 만리상단."
"그, 그렇긴 하다."
"일단 움직이자. 인질은 많을수록 좋아. 배에서 자고 있는 사람들 모두 이곳으로 옮기자고."
"알았어! 수레부터 준비해야겠다."
"그래, 다들 움직여."
아!
이거 어째.
내가 주인공인데.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간다.
인질을 구하는 그런 역할을 해야 하는데, 인질 역할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