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거지는 무릇.
아! 아니다.
다시.
부자는 무릇!
발은 땅을 딛지 않고, 손에는 물을 묻히지 않는 법.
그래서… 하하하하!
말을 한 마리 샀다.
이름하여 구토마(耈兎馬).
왜, 삼국지에 나오는 적토마(赤免馬) 있지 않은가.
붉은빛이 도는 털에 토끼처럼 빠른 속도를 자랑한다고 하여 이름이 적토마다.
그래서 내 첫 번째 애마는 구토마.
늙을 구(耈) 자에 토끼 토(兎) 자를 썼다.
너무 좋다.
나도 이제 말 타고 다닌다고!
푸하하하하!
"으랴! 으랴! 달려라, 구토마!"
응, 안 달린다.
터벅터벅.
아무리 위에서 난리를 쳐도, 내가 걷는 것보다 느리다.
구토마 아니겠는가.
늙은 말.
이 녀석이 많이 늙긴 했다.
돈도 많은데 왜 늙은 말을 샀냐고?
그게 다 사연이 있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먹을 줄 안다고.
돈이 아무리 많으면 뭐 하나?
쓸 줄 알아야지.
마시장에 갔는데, 진짜 눈이 돌아갈 정도로 멋진 말들이 많았다.
한참을 둘러본 후, 돈도 많겠다, 가장 멋진 말을 골라 그 값을 물었더니.
와!
장난해?
말 한 마리 가격이 금자 스무 냥이 넘었다.
한혈마라고 엄청난 명마라서 비싸다고는 했다.
그래도 뭔 놈의 사람이 타고 다니는 말이 금자 스무 냥이냐고?
감히 살 엄두를 못 냈다.
품에는 금자 500냥이 넘는 돈이 있었지만, 금자 스무 냥은 내가 평생 살며 썼던 돈의 수천 배가 넘는 돈이다.
못 썼다.
고민이고 뭐고, 곧바로 발을 돌렸다.
그렇게 한 시진 동안 마시장을 스무 바퀴 넘게 돌며, 말의 가격을 묻고 또 묻고.
결국 말 한 마리의 적정 값이 금자 다섯 냥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런데 금자 다섯 냥도 손이 떨리긴 마찬가지.
결국, 다시 한 시진을 고민한 끝에.
금자 세 냥을 주고 이 녀석을 살 수 있었다.
욕할 필요 없다.
돈 쓰는 법도 차근차근 배우면 된다.
달리지 못하고 천천히 걷는 말이면 어떤가?
난 그래도 이 녀석이 마음에 든다.
뭐니 뭐니 해도 나의 첫 애마 아닌가.
"달려라, 구토마! 으럇! 으럇!"
응, 계속 걷는다.
그것도 천천히.
와!
낭만개 아저씨가 지금 내 모습을 보면 얼마나 놀랄까?
멋지게 말 한 마리를 타고, 허리에는 대성검을 차고.
돈은 또 무지막지하게 많은 데다가.
무엇보다, 캬아아아!
환골탈태하지 않았나?
낭만개 아저씨는 대번에 환골탈태한 것을 알아볼 거다.
이번엔 기연이 어쩌고저쩌고, 또 어떤 표현을 쓰며 놀랄지 벌써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분타의 어린 거지 녀석들도 난리 날 게 분명하다.
거지 녀석들이 언제 말을 타 봤겠냐는 말이다.
구토마 데리고 가면, 한 번만 태워 달라고 생난리를 치겠지?
말 잘 듣는 녀석부터 태워 줘야지, 하하.
아! 그리고 대성검 말이다.
그랜드 세인트 스워드.
이건 낭만개 아저씨 줄 거다.
무슨 놈의 어쩌면 천하제일인이, 검은 고사하고 매일 깨진 동냥 그릇 하나 들고 길거리를 어슬렁거리냔 말이다.
낭만개 아저씨 정도면 분명 검 따위에 의존하지 않을 경지이기는 하겠지만, 보는 내가 쪽팔려서 그냥 둘 수 없다.
대성검은 아저씨 주려고 가지고 온 거다.
어린 거지 녀석들 배 터지게 밥도 사 줘야지.
그나저나 이 녀석들 천자문 몇 글자나 익혔으려나?
이름은 쓸 줄 알겠지?
녀석들 만날 생각에 벌써 기분이 좋다.
음, 문제는…….
내가 걸어서 가면 보름이면 도착할 거리인데, 우리 구토마 덕분에 두 달은 걸릴 것 같다는…….
쩝.
어쩌겠는가?
구토마 사정도 봐줘야지.
"으랴! 으랴! 달려라, 구토마!"
응, 쳐다도 안 본다.
터벅터벅.
그런데 그때.
오!
마을이다, 마을.
어서 마을로 가야겠다.
가서 마음껏 만끽할 테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그 시선을 말이다.
나도 이제 부자고, 뚜벅이가 아니라 말을 타고 다닌다고!
구토마와 함께 천하를 거닐며 모두에게 보여 줄 테다, 하하하하!
* * *
마을에 들어서자.
큭큭큭.
역시나!
사람들이 힐끔힐끔 나를 쳐다본다.
말을 타고 가는 내가 많이 부럽나 보다, 하하하.
그래, 구토마!
당당하게 걸어.
넌 늙어서 달리지 못하는 게 아니라, 품위를 지키기 위해 도도히 걷는 거야.
고개 들고, 하하하!
마을의 대로(大路), 사람들이 모두 길을 비켜 준다.
역시!
아무도 말을 탄 내 앞길을 막지 못한다.
캬아아!
너무 좋다.
구토마야, 구토마야.
우리 평생 함께하자고, 하하하… 어?
푸르르르릅.
구토마가 투레질과 함께 걸음을 멈추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본다.
얘가 왜 이러지?
"어험, 구토마야, 갈 길이 멀다. 어서 가자."
점잖게 타일렀지만, 이 녀석이 도대체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
왜지?
사람들이 더 쳐다본다.
길 한가운데 커다란 말을 타고 멈추어 섰으니, 많이 부러운… 응, 날 보며 수군거린다.
왜 길 막고 있냐는 소리들이다.
결국 나는 구토마의 등에서 내려 녀석의 상태를 살펴야 했……. 쿵.
뭐야?
내가 녀석의 등에서 내리자마자 구토마가 쓰러졌다.
"구토마! 정신 차려! 구토마!"
내가 녀석을 흔들며 큰 목소리로 외쳤지만, 녀석은 눈이 풀렸고 입으로 게거품까지 물기 시작했다.
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늙긴 늙었어도 건강했던 구토마인데 말이다.
그리고 고작 마을 하나를 아주 느린 속도로 걸어서 오지 않았나?
그런데 왜 쓰러지냐고?
"야! 구토마! 일어나 봐! 어서 일어나 보라고!"
"쯧쯧. 다 늙은 말을 곱게 보내 주진 못할망정 저렇게 학대를 하다니."
"그러게요, 아무리 말 못 하는 짐승이라도 저리하면 안 되지."
"어머,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어찌 저렇게 잔인할까요?"
"멀쩡하긴 뭐가 멀쩡하게 생겨? 딱 생긴 대로 하는구먼."
"듣겠어. 조용히들 해."
다 들린다고!
아! 어쩌지?
어디 동물 의원이라도 있나?
데리고 가면 살 수 있나?
어떻게 데리고 가지?
내가 번쩍 들고 가면 사람들이 놀랄 텐데.
내 신분도 발각될 위험이 있고.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있자니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어 나를 두고 수군거리고.
그보다 우리 구토마 어떻게 해?
내 사랑, 나의 애마, 나의 구토마!
그런데 그때였다.
"은자 스무 냥 드리겠소."
어느 산적같이 생긴 사내가 다가오더니 대뜸 한다는 말이 이거였다.
"뭔 소리예요?"
"그 말 말이오. 은자 스무 냥 드릴 테니 파시라고."
하아! 그렇지 않아도 돌겠는데, 이 산적 녀석이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구나.
"어차피 다시는 일어서지 못합니다, 그 말."
짜증이 치밀었다.
"당신이 뭔데 우리 구토마가 일어서지 못한다고 단정을 짓는 거야? 의원이라도 돼?"
"의원은 아니고 푸줏간을 운영합니다. 말고기 전문 푸줏간. 말고기만 30년을 다뤘소."
"푸… 푸줏간? 지금 우리 구토마를……?"
됐다.
무시하자.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런데.
"30년 동안 말고기를 다뤘고, 우리 아버지에 할아버지까지. 3대에 걸쳐 말고기만을 취급하고 있소. 딱 봐도 그쪽 말은 수명을 다한 지 오래요. 지금까지 산 것만 해도 기적… 어? 잠시만 나와 보시오."
산적 같은 놈이 뭔가를 발견한 듯 서둘러 쓰러진 구토마의 머리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하는 말이…….
"음… 이 말, 원래 공자의 것이 아니었소?"
"오늘 산 말인데……."
"쯧쯧. 사기를 당했구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요즘에도 이런 사기를 치는 인간들이 있네. 참나."
"아니 무슨 말씀이신지 설명을 좀 해 주세요."
"증력단이란 걸 먹인 거요. 죽기 직전의 말에게 순간이나마 멀쩡해 보이게 하는 싸구려 마약인데, 조금만 말에 대해 알아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속은 것이지."
"그럼… 그럼 우리 구토마는요? 가망이 없다는 말이에요?"
"쯧쯧. 그쪽 사정이 딱하니 내가 은자 두 냥 더 얹어 주리다. 사람 먹는 고기로도 못 쓰고, 저기 부잣집 양반들이 간혹 키우는 커다란 개나 맹수들 먹이로 줘야 하니, 나도 손해 보며 드리는 거요."
젠장!
젠장!
천하의 비걸개가 사기를 당하다니!
아!
이거 어디 쪽팔려서 누구한테 말도 못 하고.
"어머, 사기를 당했대."
"생긴 건 멀쩡한데 좀 모자라나 봐."
"아이고, 불쌍해서 어쩌나?"
결국 나는 구토마를 은자 스물두 냥에 넘겨야 했다.
사람들은 계속 나를 두고 수군거렸고, 쪽팔림에 은자를 받자마자 마을을 떠나 버렸다.
* * *
아! 나의 구토마.
나의 애마 구토마야.
내 아까운 금자 세 냥아.
걸을 힘이 안 났다.
마을을 한참이나 벗어나 한적한 산길의 아무도 없는 그곳에 그냥 털썩 주저앉았다.
"에휴."
계속 한숨만 내쉬었다.
이까짓 일에 이러고 있는 내가 더 한심하게 느껴져 한숨은 계속 이어졌다.
"휴우."
이게 참 신기한 일이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500여 냥의 금자보다, 사기당한 금자 세 냥이 더 귀하고 아까웠다.
심지어 전낭 안에는 아직도 드워프들이 세공한 보석들이 한가득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 금자 세 냥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비걸개가 사기를 당했다는 생각이 떠오를 때면 나도 모르게 온몸을 부르르 떨어야 했고.
돌아가서 그 사기꾼 놈들을 족칠까?
이미 떠났겠지?
에휴, 어쩌지?
"휴우."
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때, 인적 없는 산길로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중년의 그저 평범한 여인이 작은 봇짐을 들고 홀로 이 산길을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나를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저기… 말씀 좀 여쭐게요."
"네, 물어보세요."
기분이 기분인지라 말투가 퉁명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중년의 여인은 무언가 간절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혹시 하얀 무복에 검 한 자루를 어설프게 찬 열댓 살 정도의 사내아이를 보지 못하셨나요?"
"못 봤어요. 계속 저 혼자만 있었어요."
"아, 네. 고맙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인사를 하고는 곧 떠났다.
아니, 몇 걸음 가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는가 싶더니.
"저기… 혹시 실연당했어요?"
"네? 아닌데요?"
중년의 여인이 씩 웃는다.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뭐, 이런 걸 굳이 해명할 필요도 없고.
그냥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괜찮아요. 젊을 때는 실연도 당해 보고, 뜨겁게 사랑도 해 보고. 지금은 죽을 것만큼 힘들어도, 나중에는 그저 웃음으로 회상할 추억 정도밖에 되지 않을 거예요. 힘내세요. 이거 먹고요."
그녀가 나에게 무언가를 건넨다.
나뭇잎으로 싼 주먹밥이다.
"전 괜찮……."
꼬르륵.
젠장!
분위기 파악 못 하는 뱃가죽 같으니라고.
그러는 사이 아줌마는 벌써 저 멀리 가고 있다.
"가출한 아들 녀석을 찾으러 가 봐야 해요. 힘내요, 총각!"
음, 이것도 은혜를 입은 건데.
누군지 모르니 은혜를 갚을 길이 없다.
다짜고짜 쫓아가 어디에 사는 누구냐고 물으면 놀랄 테고.
됐다.
주먹밥 한 덩이의 은혜는 그냥 호의로 받아들이자.
몰랐는데 배가 꽤 고팠나 보다.
아니면 아줌마의 주먹밥 만드는 실력이 대단했는지도 모르고.
난 인적 없는 산길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허겁지겁 그 주먹밥을 해치웠다.
* * *
말?
푸하하하하!
여행은 뭐니 뭐니 해도 유람선이지!
호남의 동정호만큼은 유명하지 않아도, 감숙과 섬서를 잇는 위수는 중원 전체를 통틀어도 손에 꼽힐 정도로 커다란 강이다.
그곳의 포구에서 가장 커다랗고 제일 비싼 유람선에 올랐다.
유람선에 오르기 전 비싼 옷도 한 벌 새로 사 입고.
공자라 불리는 녀석들이 들고 다니는 부채도 한 개 샀다.
캬아!
조오오타!
강바람을 맞으며 아름다운 풍경도 구경하고.
이것이 진정한 부자의 여유와 낭만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때!
그때!
응, 아무것도 없다.
그냥 한 번 해 봤다.
출렁이는 강물과 시원한 바람.
선상을 오가며 한가로이 풍경을 즐기는 행복한 표정의 사람들.
그냥 모든 게 다 평화롭고, 음… 힐끔힐끔 나를 몰래 보는 젊은 처자들이 있긴 하군.
하여간 이놈의 인기란, 하하하!
"어머! 저 새끼 우리 쳐다보는데?"
"야! 말 걸면 어떻게 해?"
"못생겼어."
"쟤는 동경도 안 보나? 감히 저따위로 생겨서 우릴 노리는 거야?"
"야! 말 걸기 전에 빨리 다른 데로 가자."
"그래, 그래."
젠장!
내 얼굴 평가하기 전에, 너희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부터 좀 보라고.
아!
가서 따질 수도 없고.
구넬샤찌국의 부인들, 잘들 계시오?
강바람을 맞으며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있자니, 문득 그대들이 생각나는구려.
그런데 그때!
그때!
응, 이번엔 진짜다.
"이 녀석, 잡았다."
"아이씨! 엄마는 왜 여기까지 따라오고 그래?"
선상의 한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나뿐만 아니라 배 위 대부분이 소란이 일어난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중년의 여인과 열댓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 음, 어제 나한테 주먹밥을 줬던 그 아줌만데.
저 녀석이 가출했다던 그 녀석인가?
"당장 다음 포구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가는 배에 타."
"싫어! 싫다고! 난 무인이 될 거야! 서안으로 갈 거란 말이야!"
"무인은 무슨 무인이야? 무인이 아무나 되는 건 줄 알아?"
"엄마는 진짜 하나도 몰라! 서극 대협이 그랬다고. 내가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뛰어난 무재를 가지고 있다고! 제자로 받아 준다고 했단 말이야. 이게 얼마다 대단한 기연인지 알기는 해?"
"그래서 집에 있는 돈 없는 돈 죄다 들고 가출을 한 거야?"
"아이씨! 창피하게 진짜 왜 이래! 아무것도 모르면서!"
대충 무슨 상황인지… 음, 나만 아는 게 아니다.
모자의 다툼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사기당한 게 뻔한 아들 녀석을 비웃는 웃음들이었다.
아! 마시장에서 사기당한 거는 진짜 죽을 때까지 혼자만 알고 있어야겠다.
"내려. 당장 다음 포구에서 내려서 엄마랑 집으로 돌아가. 서극인지 북극인지 남극인지는 몰라도, 너는 가업을 이어야 해."
"엄마가 나한테 해 준 게 뭐가 있다고! 내버려 둬! 나는 내 뜻대로 살 거야!"
콰당.
녀석이 엄마를 밀쳤고, 아줌마가 선상 바닥에 쿵 소리까지 내며 쓰러지고 말았다.
음, 이 녀석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녀석은 혼 좀 나야겠다.
주먹밥 한 덩이의 은혜 때문이 아니다.
이건 인간의 기본 도리에 관한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