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어, 어떻게…?"
죽지 않던 나이트 언데드를 죽이자, 곁에 있던 단문령이 기겁을 하고 말았다.
얼음이 되어 제대로 말조차 잇지 못하고, 그냥 놀란 얼굴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하지만 지금은 단문령에게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니다.
"살려… 으아악! 살려 줘!"
"도망가시오! 피하시오, 얼른! 으아악!"
우리 쪽을 향해 미친 듯 달려오는 사람들.
그리고 그 뒤를 쫓는 또 다른 언데드 세 마리.
난 꼼짝도 하지 않고, 우리 방향으로 달려오는 그들을 그대로 지켜보았다.
곧이어…….
"어서! 어서, 피하시오!"
"끄아아아아아악!"
피 칠갑을 하고 사색이 되어 내 곁을 미친 듯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그렇게 사람들을 보내고, 곧이어 세 마리 언데드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는 나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자 옆에서 들리는 떨리는 음성.
"저… 저놈들하고도 싸우려고?"
난 시선을 언데들에게 고정한 채, 그녀에게 한 자루의 검을 건넸다.
가가발을 통해 성스러운 기운을 고스란히 보전해 무림의 검 형태로 변형한 성녀의 검, 성녀검(聖女劍)이다.
"이, 이건……?"
"일단 받아. 이 검이면 놈들을 죽일 수 있어. 어서!"
떨리는 손으로 성녀검을 받는 그녀.
언데드 때문에 두려워 떠는 걸까?
아니면 내 말을 믿지 않기에 주춤하는 걸까?
상관없다.
그녀가 믿건 믿지 않건.
그때, 세 마리의 언데드가 내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주… 거… 라……. 크아아아앙!"
역시 나이트 언데드가 맞다.
자유롭진 않지만, 분명한 언어를 구사한다.
그 힘 역시 예상한 바 그대로고.
난 곧바로 그랜드 세인트 스워드.
역시 가가발을 통해 무림의 검처럼 변형하였고, 손잡이에 대성검(大聖劍)이란 글자까지 새겨 넣었다.
그것을 뽑아.
"죽는 건 네놈들이다! 돌아가라! 지옥으로."
쉬이이이이이익!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검법이고 뭐고, 힘이 흘러넘친다.
1갑자의 내공을 끌어 한 방에 휘둘렀다.
나이트 언데드들은 제깟 놈들의 힘으로 어찌저찌 피하고 막으려 했지만.
1갑자의 내공에 대성검의 성력, 거기에 환골탈태로 은은한 실버 드래곤의 기운까지 가한 검강이다.
쿠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폭발의 여운이 사라지고.
곧 드러나는 언데드들의 형체.
머리와 몸통, 팔다리 중 두세 군데가 통으로 터졌고.
경악한 얼굴과 더불어.
역시나 곧바로 화르르르르.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끝났다.
죽여도 죽여도 죽지 않아 미칠 듯 나를 괴롭히던 놈들을, 단 두 수에 모두 없애 버렸다.
내가 생각해도 무지막지하군.
살짝 거칠어진 숨을 고른 후.
천천히 옆을 돌아봤는데.
아!
얘 말이다.
단문령.
딱 예상한 그대로다.
턱은 빠져 땅바닥까지 내려와 있고.
눈은 튀어나올 것 같고.
양손은 왜 저렇게 가지런히 모아 구부리고 있는 걸까?
아무튼 영혼이 빠져나간 상태다.
뭐, 이런 상황은 이미 몇 번이나 겪어 보지 않았겠는가?
가만히 내버려 두면 곧 가출했던 영혼이 돌아올 것이다.
다시 몸을 돌려 뒤를 향했다.
조금 전 내 곁을 미친 듯 스쳐 지나갔던 사람들.
공동파의 도사들과 혼절에서 깨어난 이백운과 궁도산.
그리고 당우국, 서혜, 반후인, 복개, 말추까지.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두려움에 덜덜 떨면서도, 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얼굴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공동파의 2대 제자 20여 명과 우리 녀석들 일곱 명이다.
그런데 모습을 드러내고도 내 곁에 바싹 다가오지도 못하고.
뭔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단문령 만큼이나 많이들 놀란 것 같다.
그나저나 저러다 몇 명은 죽겠다.
"당 소협."
"앗! 네, 넵! 넵!"
미친놈.
언제나 무시하는 눈으로 나를 보던 녀석이, 대답을 세 번이나 한다.
그것도 기합이 바싹 들어서 말이다.
뭐, 이것도 이제 몇 번 겪으니 놀랍지도 않다.
"다친 분들 치료를 우선 해야 할 듯합니다."
"넵! 넵!"
저게 진짜 미쳤나.
대답은 차렷 자세로 우렁차게 하면서 꼼짝할 생각을 안 한다.
"응급처치요."
"넵!"
"하라고! 지금!"
"아, 네. 넵! 죄송합니다. 지금요. 넵!"
언성을 높이자 놈이 화들짝 놀라 움직였고.
그나마 몸 상태가 괜찮은 공동파의 제자 몇이 서둘러 그를 돕기 시작했다.
능청스럽던 반후인도 좀처럼 나에게 말을 걸지 못하며 눈치만 보다가 다친 이들을 돕기 시작했고.
복개와 말추도 마찬가지다.
대충 보니 불구는 되도 죽을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그나저나 화산파의 예매화 이백운과 무황성의 소철권 궁도산 말이다.
각기 검을 쓰는 오른팔과 또 권법이 절기인 두 주먹을 잃었다.
검선과 무존의 제자들이, 치명적인 불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뭐, 나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니, 미안할 건 없는데.
좀 안타깝긴 하다.
싸가지가 없는 녀석들이었어도, 뛰어난 인재임은 분명했는데 말이다.
뭐, 모르지.
검선과 무존이 그들을 위해 어떤 방법을 찾아 줄지도.
음, 근데 쟤는 왜 저런 얼굴로 나를 쳐다보지?
잘생긴 남자 처음 보나?
아미파의 서혜다.
숨어 있다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후 땅바닥에 그냥 철퍼덕 주저앉았다.
계속 멍한 얼굴로 많이 놀랐나 싶었는데, 가만 보니 계속 나만 쳐다보고 있다.
아침까지만 해도 나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던 그녀였는데.
반했나?
하여간 이놈의 인기란.
음, 그게 아니라 많이 놀란 것 같다.
아무리 칠룡사봉이니 어쩌니 하며 콧대가 하늘을 찌를 듯해도, 그녀 역시 나와 동갑 아니겠는가.
열아홉 살.
많이 놀랐을 테다.
도토리국으로 차원 이동 전에는 나 역시 자포자기했을 정도로 놀랐으니, 이해한다.
아무리 그렇다고, 그렇게 쳐다보면, 내가 좀 쑥스럽잖니.
무엇보다 빡빡머리는 사절이다.
아! 도토리국에 처음 갔을 때 수염 없는 내 모습을 드워프들이 저렇게 봤을까?
모르겠네.
"저기……."
내가 서혜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가출했던 영혼이 돌아왔는지 단문령이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음, 그러고 보니 얘도 문제야.
어떻게 감쪽같이 무공을 숨기고 있었지?
그것도 엄청난 마공이다.
단문령 역시 열아홉 살이다.
그런데 최소 절정의 고수다.
아!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얘가 이런 말을 했었다.
‘그러지 말고, 위험하면 네가 내 뒤에 숨어. 네가 진심으로 날 위해 주는 것 같아서, 이 누나가 한 번 인심 쓰는 거야. 어떠한 위험이 도래해도 너는 꼭 살려 줄게. 알았지? 기억해. 위험하면 누나 뒤에 숨는다.’
이어서 이런 말까지 했었다.
‘실은… 나 엄청난 고수야. 저기 이백운이나 궁도산보다 훨씬 강해.’
그래, 맞아.
그때 그랬어.
그랬는데, 내가 콧방귀를 뀌며 무시했었지.
아!
얘도 무슨 엄청난 장기공 같은 걸 익혔나 보다.
뭐, 마인들의 장기공이 지독한 마공을 숨기기 위해 중원 무림의 장기공보다 발전했다는 사실은 중원의 무림인들 대부분이 인정하는 사실이긴 하다.
그래도 많이 놀라긴 했다.
얘는 진짜 그런 무시무시한 마공을 어디서 얻어 익힌 거지?
우리 개방의 것은 아닌데.
그나저나 얘는 또 왜 요상한 눈으로 날 보는 거야?
얘도 날 좋아하나?
아! 진짜 이놈의 인기는 끝이 없구나, 하하하.
"이거……."
"응?"
"이 검 말이야."
"응."
"어디서 났어? 네가 지금 들고 있는 검도 그렇고."
"무슨 말이지?"
"분명 너는 다른 검을 들고 있었잖아. 낡고 볼품없는 검. 그런데 갑자기 한 자루도 아니고 두 자루의 다른 보검이 손에 들려 있잖아."
"뭔 소리야?"
"말 그대로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큭큭큭.
응, 난 비걸개다.
이런 상황을 대비했고, 어떻게 설명할지 충분히 준비했으며, 이미 실행 중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처음부터 있었어."
뻔뻔함이다.
"아니야! 내가 분명 봤어. 네가 들고 있었던 검은 하나였고, 이 검들이 아니었어."
"너 참 이상하다. 원래 두 자루였어. 너에게 준 것과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이거."
"아닌데?"
"뭐가 아니야. 아까 괴인이랑 싸우다가 머리를 다친 거 아니야?"
"어? 아닌데. 분명 다른 검이었는데?"
"야! 저기 당 소협한테 가서 진맥 좀 받아 봐. 괜히 걱정된다."
"아, 그런가? 원래 두 자루였나?"
"내가 무슨 사술을 쓰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한 자루가 두 자루 검이 되는 요술을 부려? 참나. 하하하. 살다 살다 별소리를 다 듣겠네."
"그, 그렇지?"
믿는다.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또 여전히 의심이 다 풀리지 않은 얼굴이지만, 믿을 수밖에 없다.
큭큭큭.
성공이다!
다시 뭘 묻기 전에.
"자! 이거나 받아."
그녀에게 극소 기관연사궁과 침창 몇 개 그리고 윙슈트를 내밀었다.
"이건 뭐야?"
"선물."
"선물?"
"응."
"갑자기?"
"아까 나 도망갈 시간 벌어 주려고 일부러 괴인과 싸운 거잖아. 아니야?"
"그, 그렇긴 한데……."
"우리 집 가훈이 ‘은혜를 입으면 갚아라’거든. 내 성격도 빚지고는 못 살고. 그래서 보답으로 주는 거야. 그 검까지 다해서. 그러니 이제 너에게 진 빚은 다 갚은 거다."
그녀는 내가 건넨 물건들을 가만히 보았다.
"받아."
결국 극소 기관연사궁과 윙슈트를 받고는 아무 말 없이 성녀검과 함께 이리저리 살핀다.
"성녀검이라고 쓰여 있네?"
"응, 성녀검이니까."
"대충 봐도 엄청난 보검인데?"
"맞아, 엄청난 보검."
"이걸 왜……?"
"말했잖아. 은혜를 입으면 갚아야 한다고. 그래서 주는 거야. 지금 내가 줄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고."
"이거 엄청 비쌀 것 같은데?"
"돈 주고 살 수 없는 거야. 뭐, 굳이 팔려면 부르는 게 값일 테고."
"돈… 그렇지. 부르는 게 값일 만큼 비쌀 것 같다."
"정말 팔게?"
그녀가 아주 짧게 고민하는가 싶더니.
"아니, 이번 일 마쳤으니 무림맹에서 약속한 돈을 줄 거야. 그거면 어디서 작은 가게 하나는 차릴 수 있어. 그러니 이 성녀검은 비상금으로 챙겨 둬야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하아!
참, 얘도 뇌 구조가 참 기발하게 생긴 모양이다.
"이건 뭐야? 되게 예쁘네?"
"연사침탁(連射針鐲)이라는 암기야."
"이게? 이렇게 예쁜 팔찌가 암기라고?"
"자, 손목에 차 봐. 나처럼."
"어? 어."
스르르르척.
"어멋! 저절로 감겨."
"착용감은 어때?"
"어! 찬 건지 안 찬 건지……. 와! 이건… 이건 정말 신기하다. 사람이 만든 물건이 아닌 것 같아. 아니, 이건 너무 예쁘고 착용감은 신비롭기까지 하고. 뭐야? 이게?"
"말했잖아. 연사침탁이라는 암기라고. 우모침을 50발까지 연사할 수 있어. 정확도까지 엄청나."
"50발? 그게 가능해?"
"거기 비투복(飛套服, 윙슈트)하고 연사침탁 사용 방법 함께 적어 놨으니까, 나중에 천천히 보고 사용해 봐."
"이건 비투복? 하늘을 나는 옷 같은 거야?"
"응, 하늘을 새처럼 나는 건 아니고. 높은 산에서 내려올 때 유용하게 쓸 수 있어. 나처럼 등에 이렇게 붙이고 다니면, 호신갑처럼 기본적인 적의 공격에 대비도 가능하고."
놀란 얼굴의 단문령.
아까만큼은 아니어도, 정말 놀라 토끼 눈을 떠 나를 본다.
사실 좀 과한 거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말이다.
그녀는 분명 이런 말도 했었다.
‘걱정 마. 나도 돈 때문에 목숨 걸 생각 없어. 무림맹에 목숨 바쳐 충성할 이유도 없고. 사실 개방도 마찬가지야. 나랑 거지가 어울려? 태어나니까 개방 방도였지만, 이번 임무 끝나면 곧바로 탈방할 거야. 아무튼 위험하다 싶으면 그냥 팍 도망갈 테니까, 너도 그런 줄 알아. 욕은 속으로 하고.’
그랬던 그녀가 나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나이트 언데드를 막은 것이다.
이건 실제 그녀가 나를 구했는가 구하지 않았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나를 살리려 했기에, 분명한 목숨의 빚이다.
과한 게 아니라 달리 생각하면 이조차 한참 부족하리라.
사실 이것들을 땀 뻘뻘 흘리며 직접 만든 것도 아니지 않나.
그냥 도토리국에서 가지고 온 게 전부다.
값은 엄청나지만, 들인 수고는 미비하다는 뜻이다.
한편으로 이것들을 낭만개 아저씨에게 줄까도 많이 고민했었다.
아! 그런데 말이다.
화경의 고수, 어쩌면 천하제일인일지 모를 낭만개 아저씨에게 암기가 웬 말이며 윙슈트는 또 어디에 쓰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그녀에게 준 거다.
어쨌거나 그녀에게 받은 은혜도 다 갚았다는 생각에, 속이 시원했다.
그런데 얘는 왜 계속 빤히 쳐다봐?
감동한 건 알겠는데, 부담스럽잖아.
그만 쳐다봐.
잘생긴 얼굴 닳겠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니면, 엄청나게 감동해서 막 감정이 주체가 안 되나? 하하하."
어색해서 농담 한마디를 해 봤는데.
얘가 꼼짝도 안 하고 계속 쳐다보기만 한다.
그러더니 입을 여는데, 한다는 말이.
"너……."
"응?"
"나 좋아해?"
미친!
갑자기 뭔 개똥 같은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