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2차 마왕 세계 대전이 끝나고 보름이 지났다.
내가 무림으로 돌아갈 날도 석 달밖에 남지 않았다.
아! 그날 골디가 나를 잡아먹으려고 했던 거?
응, 드래곤들이 원래 장난이 심하다.
골디 녀석이 장난을 친 거였다.
뭐, 사실 나도 두렵거나 놀라지 않았다.
골디를 믿었기 때문이다.
음, 그나저나…….
동생이 한 명 생겼는데, 그게 드래곤 동생이군.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모르겠다.
그냥 내 동생이다.
드래곤 동생, 큭큭.
그렇게 보름 전 골디를 생각하며 혼자 피식 웃고 있을 때였다.
"형."
"어? 골디야? 여긴 어떻게 왔어?"
"내가 못 올 곳이야?"
"아니지. 하하. 잘 왔다. 그렇지 않아도 방금 네 생각 하고 있었는데."
"정말?"
"응."
"역시 나를 생각해 주는 건 우리 형밖에 없다니까. 그런 의미로 자, 이거 받아."
녀석이 무언가 엄청나게 거대한 걸 천에 감싸 가지고 오긴 했는데.
하얗고 길다.
피도 조금 묻어 있고.
"이게… 뭐야?"
"드래곤 본. 용 뼈. 형, 이거 필요했잖아."
"드래곤 본? 이걸 어떻게 네가……?"
녀석이 더없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오니푸네 있잖아. 형을 잡아먹으려던 그 무식한 레드 드래곤."
"어, 그게 왜?"
"녀석이 잠잘 때, 슬쩍 해 왔지."
"이거… 레드 드래곤의 뼈야?"
"응, 그리고 이건 덤."
"이건 또 뭐야?"
"비늘. 레드 드래곤의 비늘. 이걸로 갑옷… 음, 아니다. 무림에서 갑옷은 거의 안 입지?"
"그렇긴 한데."
"호신갑을 만들어. 형의 심장을 보호할 호신갑. 내가 형의 지식을 조금 습득했는데, 그곳에서 난다 긴다 하는 화경의 고수들도, 레드 드래곤의 비늘로 만든 호신갑은 부수지 못할 거야."
"아……."
"사실 레드 드래곤들이 좀 많이 무식하고 난폭해서 그렇지, 전투력만큼은 우리 드래곤 일족 중에서도 가장 강하거든. 그중에서도 오니푸네는 가장 강한 레드 드래곤 중 하나고. 형이 말한 그 나이트 언데드 있잖아."
"응."
"그런 녀석들은 오니푸네의 뼈로 만든 검이라면, 그냥 스쳐도 가루가 되어 버릴 거야."
"골디야… 너에게 이렇게 많은 걸 받아서 나는 어쩌지?"
골디가 또 장난기 가득하게 웃는다.
"형 때문에 지난 1,000년 중에 이번이 가장 재밌었고 감동이었어. 그리고 드래곤의 뼈는, 그냥 몇십 년 푹 자고 나면 다시 자라. 별 대단한 거 아니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하하하."
"그래도……."
"아, 형!"
"응, 골디야."
"인간과 엘프, 호르빗 등 아직 많은 종족이 살아 있어."
"멸종된 거 아니었어?"
"우리 드래곤 일족이 극소수만 남은 그들을 1,000년 동안 보호하고 있었어. 이제 마왕도 처리했겠다, 곧 그들을 이곳으로 돌려보낼 거야. 형이 아르네한테 전해 줘."
"다른 종족들이 돌아온다는 거?"
"아니. 그들이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힘과 숫자가 될 때까지, 드워프들이 잘 보호해 주라고. 이제 우리 드래곤들은 이 세상에 관여하지 않을 거야. 물론, 가끔 변신해서 유희는 나오겠지만 말이야."
"아! 알았어. 제대로 전할게. 뭐, 대충 전해도 네가 한 말이라고 하면, 알아서 제대로 하겠지만."
"그렇겠지. 하하."
보름 만에 골디와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술도 마시고, 고기도 같이 뜯고.
그렇게 내 동생 골디는 레드 드래곤의 드래곤 본과 비늘을 나에게 남겨 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이 녀석, 나와 함께 있는 내내 혼자 키득키득 웃는 게 말이다.
이번에 돌아올 인간과 엘프, 호르빗 등 종족 사이에 변신한 상태로 올 게 뻔하다.
유희를 위해.
어쩌면 드래곤들이 이들 종족의 멸종을 막은 것 또한, 유희를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혹시 모르니 아르네한테 그것까지 말해 줘야겠다.
실수하지 않게.
* * *
"드래곤 본과 비늘이라."
"아르네 폐하, 어려워요? 이걸 검과 호신갑으로 만드는 게요?"
"아니. 태한, 자네도 알지 않나? 우리 드워프의 기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문제는……."
"그럼 뭐가 문제인데요?"
아르네 국왕이 곤란한 얼굴을 짓는다.
옆에 있는 건힐드와 왕국의 대신들 역시 난감한 얼굴이었고.
"자네 요구 조건이 조금… 아주 조금 과한 면이 없지 않은데……. 꼭 그 조건이 완벽하게 충족되는 검이어야 하나?"
"제가 너무 과한 걸 요구했나요?"
나는 딱 하나의 요구를 했을 뿐이다.
여의금고봉(如意金箍棒).
흔히 여의봉이라고 하지.
왜, 그 오래전 원숭이들의 왕이었던 손오공이 쓰던 그 여의봉 말이다.
그걸 만들어 달라고 했다.
진짜 내가 너무 무리한 걸 요구했나?
필요해서 말했을 뿐이다.
나는 타구봉법도 써야 하고, 낙백구검도 써야 한다.
그래서 검이 봉으로, 다시 봉이 검으로 변신하게 해 달라고 했을 뿐이다.
분명 이들이 만든 무기 중, 비슷한 기능을 갖춘 무기들도 이미 존재하는 걸 똑똑히 보지 않았나.
그런데 그게 뭐가 과하다고 저런 얼굴들인지 모르겠다.
응, 안다.
과한 거.
그래도 필요했고, 혹시 드워프라면 가능할지 몰라 말한 거다.
됐다.
포기할 건 포기하자.
그렇게 내가 요구 사항을 철회하려고 할 때.
한 늙은 대신이 나서서 아르네에게 말했다.
"폐하, 가가발이라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나태한 님의 조건을 충족시킬 기술을 그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음, 그라면 가능하긴 하겠는데. 태한!"
"네, 폐하."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하네."
"네."
"건힐드, 함께 가요."
"저도요, 폐하?"
"네, 태한의 일이잖아요."
"알겠습니다. 태한을 위해서라면 무언들 못 하겠습니까?"
가가발?
도토리국 최고의 장인이라고 했다.
내 요구 조건을 모두 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드워프.
정말 그게 가능해?
그리고 아르네의 작전을 듣는데, 아!
이거 좀, 심상치 않다.
* * *
가가발의 집에 도착했다.
수도 몬토에서도 한참 떨어진 외딴곳에 홀로 사는 가가발.
그의 집으로 나와 아르네 그리고 건힐드가 들어갔는데.
이런!
드워프들 사이에서도 전설의 장인이라 불리는 가가발은 양손이 없었다.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고.
그런 내 표정을 늙은 드워프 가가발이 제대로 보았다.
"표정이 왜 그따위야? 손 없는 드워프 처음 봐? 인상을 제대로 구기네? 내 망치로 평생 웃게 만들어 줄까?"
아르네와 건힐드가 그런 나와 가가발을 번갈아 보며 씩 웃는다.
일부러 가가발이 양손이 없다는 걸 나에게 말해 주지 않은 거다.
젠장!
곧바로 건힐드가 나섰다.
"쯧쯧. 가가발 당신도 이젠 다 됐군. 하다 하다 인간에게까지 무시를 당하고."
아르네가 건힐드의 말을 이었다.
"소문에 가가발의 실력이 예전과 같지 않다고 하더니. 가가발, 정말이오?"
건힐드가 맞장구를 친다.
"그러게, 좋은 세월 다 갔지. 그리고 폐하, 요즘 젊은 장인들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하다고요. 가가발은 이제 안 돼요. 괜히 시간 낭비만 했습니다. 돌아가시죠."
"음, 그래야 하나? 가가발, 이젠 전설의 검 같은 건 못 만드오? 오랜만에 드래곤 본까지 구해 왔는데 말이오."
"끄응. 아르네 폐하… 지금 당신이 나를 농락하는 것입니까?"
"예끼! 이 사람. 폐하께 그 무슨 예의에 어긋나는 말과 태도인가?"
"건힐드, 당신은 닥쳐. 지금 폐하가 내 실력을 의심하잖아!"
그때였다.
아르네와 건힐드가 동시에 나를 향해 마구 눈짓을 줬다.
결국 내가 나섰다.
"에이, X팔! 손도 없는 시골 늙은이가 무슨 내 검을 만든다고. 가요, 폐하. 튼튼한 양손을 가지고 있는 장인에게 내 검을 맡길 겁니다."
"인간, 너!"
가가발이 눈에서 불까지 뿜어 댈 것처럼 나를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 내가 못 만드는 것은 없다."
아르네와 건힐드가 또 나에게 눈짓을 마구 준다.
"손도 없으면서 뭘로 만든다는 거요?"
"손이 없으면 발로 만들면 되지."
"미친! 됐수다."
"만든다, 내가."
"내가 원하는 검은, 보통의 검이 아니라고."
"분명 말했다. 세상에 내가 만들지 못하는 것은 없다고. 네가 원하는 그 어떤 검이라도 만들어 주겠다."
"정말이오? 괜히 드래곤 본 버리는 거 아니고?"
"나! 내가 바로! 가가발이다! 이 시대 최고의 장인, 가가발!"
결국, 드래곤 본과 드래곤 비늘을 가가발에게 맡기고 우리는 그곳을 나왔다.
덤으로 그랜드 세인트 스워드와 성녀의 검까지 맡겼다.
끝까지 의심을 지우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나오자마자 우리 셋은 마치 장난꾸러기가 된 것처럼 한참을 웃어야 했다.
곧바로 가가발의 집에서 화염이 치솟고, 천둥과 같은 망치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석 달이 되기도 전, 가가발이 만든 검이 완성되었다.
손이 아닌 발로 만든 검이다.
차원 이동 전에 중원에서 가지고 온 검과 비슷한 모양이다.
그리고 이걸 이렇게 하면.
쉬이이익!
바뀐다.
내가 타구봉법을 휘두를 가장 적합한 길이와 굵기의 봉으로 변한다.
다시.
쉬이이익, 척!
또 바뀐다.
요대(腰帶, 허리띠).
다시.
쉬이이이익!
퍼퍼퍼퍼퍼퍼퍼퍼퍽!
요대에서 다시 검으로 변한 이것이 다섯 개로 늘어남과 동시에 날아가 벽에 꽂힌다.
곧바로 내가 손을 뻗자.
쉬이익!
척!
벽에 꽂혔던 다섯 개의 검이 마치 줄로 당긴 것처럼 빠르게 돌아와 하나가 되어 내 손에 잡혔다.
와!
가가발!
미쳤다.
인간의 솜씨… 아니, 드워프의 솜씨가 아니다.
이건 거의 신급이라 할만하겠다.
그리고 그가 만든 호신갑까지.
두르자마자 내 몸과 하나가 되었다.
심지어 이 두 가지 기물을 손에 쥐고 몸에 착용함과 동시에 미지의 기운, 아마 레드 드래곤의 기운일 테다.
그것이 내 몸을 감싸며 휘몰아친다.
이건 진심 인간계의 물건이 아니다.
신과 인간의 그 중간계.
드래곤의 힘이 깃들었고, 다시 최고의 장인이라는 드워프의 한계를 벗어나 신의 영역에 근접한 가가발의 완성작이다.
무엇보다 이는, 내 동생인 드래곤 골디와 친구들인 드워프의 선물이다.
나는 이에 우룡검(友龍劍)과 우룡호신갑(友龍護身甲)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내 경지가 상승할수록, 우룡검과 우룡호신갑의 위력 또한 함께 상승하게 될 테다.
* * *
"음, 어디 보자. 우룡검과 우룡호신갑은 당연히 챙겼고."
도토리국에서의 마지막 날.
가짜 수염이 아니라, 정말 길게 길렀던 수염을 깨끗이 밀었다.
옷도 중원의 것으로 갈아입었다.
옷의 등 쪽에는 아르네 왕에게서 받은 신형 윙슈트가 장착되었다.
신형 윙슈트는 내가 등에 장착한 것 말고도 한 개를 더 챙겼다.
"그랜드 세인트 스워드와 성녀의 검도 잘 챙겼고. 천궁도 여기 있고……. 아! 천궁은 너무 크다. 이것까지 가지고 가면 정말 설명할 방법이 없겠다. 너무 아깝네. 뭐, 어쩔 수 없지. 천궁은 포기."
눈물을 머금고 천궁을 옆에 따로 두어야 했다.
"극소 기관연사궁의 침창도 넉넉하고."
암기로 쓸 기관연사궁은 두 개를 챙겼다.
이를 장전할 침창도 넉넉하다.
침이 다 떨어지면, 이건 중원에서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최고의 장인 드워프가 세공한 보석들도 전낭에 두둑하고.
"아! 그래도 너무 많네. 이거… 이거 녹림삼십육채에 팔아 버리면 정말 돈 엄청나게 받을 것 같은데. 에라이, 모르겠다. 하나만 챙기자."
드워프의 돌아오는 손도끼.
이게 여기선 흔한 무기일지 몰라도, 무림으로 간다면.
모르긴 몰라도 거의 최고의 도끼로 여겨지지 않을까 싶다.
작아서 몸에 휴대하기도 좋을뿐더러, 거의 현철을 때려 박았다 싶을 정도로 고강도의 도끼다.
무엇보다 어디로 던져도 수십 마리의 오크 목을 베고 부순 후, 내 손으로 돌아오는 신통방통한 도끼 아니겠는가.
난 녀석을 허리 뒤에 꽂아 챙겼다.
정말 가지고 가고 싶은 게 한도 끝도 없는데.
어쩔 수 없다.
낡은 검 한 자루 쥐고 있던 내가, 갑자기 이것저것 손에 많이 들고 있다면, 아무리 나라도 해명할 방법이 없으니 말이다.
이제 한 시진 정도 남았나?
곧 무림으로 돌아가게 될 테다.
이미 드워프들과 작별 인사는 제대로 했고.
돌아가자마자 나이트 언데드와 싸워야 하니, 마음의 준비.
가부좌를 틀고 마음을 다스려……. 어?
"와아아아아아아!"
"인간과 엘프들이 돌아왔다!"
"호르빗이야! 호르빗도 돌아왔어!"
서도토리촌.
내 집.
그 밖에서 드워프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아! 그것 역시 오늘이었지.
골디가 말했던 그것.
인간, 엘프, 호르빗 등의 이종족이 돌아오는 날.
나도 서둘러 챙긴 물건들을 몸에 지니고 밖으로 나갔다.
진짜다.
나 말고 인간이 또 있었어.
대략 100명이 조금 넘는 인간들.
와! 인간을 보는 게 이렇게 신기할 줄이야.
그리고, 어라?
드워프와 정말 비슷한 신장의 난쟁이들, 호르빗까지.
그리고 그 뒤로… 엘프다.
말로만 듣고 그림으로만 봤던 엘프.
인간과 매우 흡사한… 여자 엘프는 많이 예쁘구나.
이들이 돌아왔으니.
아마 이 세상은 수십 년이나 수백 년이 지나면, 1,000년 전 마왕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의 세상처럼 변하지 않을까 싶다.
그나저나 여자 엘프는 정말 많이 예쁘구나.
가서 말이라도 한 번 걸어 봐야겠……. 번쩍!
* * *
번쩍!
무림이다.
아! 여자 엘프한테 말 못 걸었는데, 하필 그때.
뭐, 일단 저 새끼부터 조져야겠다.
나이트 언데드.
내 머리를 박살 내기 위해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을 무섭게 휘두르는 놈.
그런데 보인다.
그리고 느껴진다.
이건 비단 내가 환골탈태를 해서만이 아니다.
골디와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히포네우스 녀석이 내가 부탁하지 않은 것까지 해 줬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 게 있어. 만약 무림으로 돌아가게 돼서 언데드를 다시 만나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알게 될 거야. 역시 실버 드래곤 녀석들은 착한 드래곤들이라니까 하하.’
눈으로만 보이는 게 아니라.
내 몸이 언데드의 사악한 기운을 감지하고 있다.
심지어…….
알겠다.
나이트 언데드 따위에게는 우룡검을 쓸 필요도 없겠다.
아니, 지금의 내 상태라면.
그랜드 세인트 스워드나, 성녀의 검 역시 필요 없다.
그냥!
나는 오른손을 뻗어 언데드의 3분의 2밖에 남지 않은 머리통을 손으로 쥐었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놈의 머리가 통으로 터져 나감과 동시에, 몸통이 힘을 잃고 땅바닥에 철퍼덕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고는 곧.
놈은 화르르!
가루로 화해 버렸다.
죽지 않던 언데드.
나는 놈을 그렇게 죽였다.